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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현미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4

이주자들의 얼굴 바라보기

 

 

주윤정 周鈗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araby3@snu.ac.kr

 

 

165-촌평-우리는모두_fmt“한국을 좀더 민주적인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주자의 언어를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다. 경청의 수혜자는 이주자뿐 아니라 한국인이 될 것이다. (…) 집 떠난 자들이 이주하고 정주하고, 귀환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안전과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7) 소수자의 권리는 보편적인 문제로 인식되기 어렵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 혹은 우리의 문제라는 인식으로 확대되기 무척 어렵기 때문에 제도화된 권리로 실질화하기까지는 많은 난제가 있다.

거칠게 말하면,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은 ‘아는 이’들 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낯선 이’들 간의 사회적 관계로의 전환이다. 이는 인()과 예(禮)에 기반한 통치에서 법치로의 전환(훼이 샤오통 『중국 사회의 기본 구조』, 일조각 1995)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법치는 새로이 등장하는 낯선 얼굴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주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 다양한 유형의 낯선 소수자가 법의 지배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 이들을 타자로 배제하거나 위계화하지 않고 사회의 평등하고 존엄한 한 일원으로 어떻게 포섭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쉬운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각 소수자 집단은 집단별로, 그리고 집단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다. 이 책의 저자 김현미(金賢美)는 이런 난감한 상황에 대해 이주자 관리정책의 한계를 넘고, 축제성 다문화주의의 한계를 인식하는 가운데 글로벌 시민권 개념에 입각한 이주자의 사회통합 비전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주자는 종래에는 ‘다문화’라는 편리한 범주 속에 던져져 있었는데, 저자는 이들의 얼굴을 다면적이고도 풍부하고 밀도있게,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저자는 베트남 이주여성, 미등록 이주노동자, 조선족 동포,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 미얀마 난민, 이주 아동, 청소년 등 다양한 층위의 이주자들을 생생히 담기 위해 현지를 방문해 가족과 인터뷰를 하는 등 지속적인 라포(rapport, 인류학 현지조사에서 맺는 친밀관계)를 형성했다.

현지에 남아 있는 이주노동자의 가족은 한국에 관광 오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면 우리 아이들은 (이주노동자로) 안 나오겠죠. 다음에 한국에 오면 관광 삼아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거예요. (…) 저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옛날에 돌아다닌 자리들을 다 보여주고 싶고, 아빠가 어떻게 살았고 어디서 일했는지 다 얘기해주고 싶어요.”(77면) 이렇게 한국은 부재했던 아빠가 17년간 살고 일한 곳으로,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된다. 한편 이런 이주자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소비자로서 이들의 싼 임금에 의지해 만들어진 상품을 구매하고 쉽게 버린다. 우리 삶의 전 영역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노고와 비인간적 대우에 의존하며 영위”(93면)되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책은 조선족이 이주상황에서 겪는 차별과 멸시가 이주라는 절대조건의 문제라기보다는 이주국의 문화와 관련된 사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국에서는 조선족의 문화표지가 그 자체로 차별을 받거나 배제를 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일이 고되고 영어로 말하기도 힘들지만, 사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법과 질서를 동등하게 적용한다고 느낀다.” 이것은 “이 사회가 오랜 기간 구축해온 이주자 친화적인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 때문”(117~18면)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 태어난 이주자 아이들의 현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신분과 연동된 한국의 제반 시스템으로 인해 단순한 불편함의 정도를 넘어 의도하지 않은 배제의 효과”(176면)를 경험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와 외국인등록번호가 없는 아이들은 스쿨뱅킹을 이용할 수도 없고 학생교통카드를 만들 수도 없다. 저자는 “배제가 의도적이거나 고의적인 결과로 생겨나는 것만은 아니다. 국가의 거대한 법이나 제도뿐만 아니라, 미세한 생활영역의 많은 부분이 ‘국민’ 혹은 주류로 간주되는 사람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다. (…) 한국인은 이것이 어떻게 ‘배제적 권력’을 행사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178면)고 말하며, 이런 배제의 경험이 구조적 차별을 공고히하고, 평등과 소속감을 증진해야 할 학교가 오히려 차별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수년간의 충실한 현지조사, 인터뷰 등을 통해 저자는 이주자들의 다층적인 얼굴을 그려내고 그들의 삶의 질감을 생생히 살려낸다. 이처럼 살아 있는 풍부한 질감의 연구를 접하며, 평자는 한편 이주자들이 마주하는 한국인의 얼굴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저자는 대중문화에서 재현되는 한국과, 이들이 직접 만나는 한국인의 간극을 문제 삼는다. 한류를 통해 접하는 대중문화 속 “화려한 외모, 유머, 활력, 세련됨, 상냥함을 갖춘 한국인”은 실제로 많지 많고 “화난 얼굴로 욕을 하거나 잔소리를 늘어놓는 한국인과 현실 속에서 마주”한다.

이주자들이 한국에 와서 만나는 얼굴은 누구의 것일까? ‘화난 얼굴’의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결코 사회의 상층부에 위치한 이들이 아니라, 하층부에서 불안정 고용에 시달리는 이들일 것이다. 평자는 언젠가 서울역에서 김밥을 주문하고 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족 아주머니와 선임자인 한국인 직원이 좁은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선임자는 조선족 아주머니에게 왜 이렇게 일을 못하느냐고 온갖 짜증을 부리며 폭력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나는 그저 당황했다. 이런 일상적 폭력의 세계는 미디어에서 재현되지 않고 고학력 화이트칼라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불안정한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폭력의 일상일 것이다. 이는 이주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계급의 문제이다.

한국인의 화난 얼굴은 단순한 피곤과 짜증, 민족주의적 차별을 넘어서 일상화된 폭력의 결과이며, 경우에 따라 적대감과 계급화된 인종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한국사회가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지, 유럽처럼 인종주의 및 반이민주의가 정치세력화하는 정치의 퇴행이 발생할지 등의 문제와 연결될 것이다. 이주자에 대해 적대를 표현하는 이들의 얼굴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이주를 둘러싼 전지구적 생활세계가 총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주자 문제는 권리의 문제이며, 이것이 그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주자처럼 정치적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거나 그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권리는 국제인권규범이 형성된 이래 지속적인 문제였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국제인권규범의 출범에 대해 논의하면서, 정치적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이들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는지, 문제의 핵심이 “권리를 가질 수 없는 자들의 권리”는 아닌지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이는 최근 낸씨 프레이저(Nancy Fraser), 후유키 쿠라사와(Fuyuki Kurasawa) 등에 의해 전개되고 있는 전지구적 정의의 문제와 연결된다. 특히 쿠라사와는 전지구적 정의는 법적 규범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실천이 상향식 영향을 주어서 권리화할 때 실질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The Work of Global Justice: Human Rights as Practices, Cambridge Univ. Press 2009). 이주자의 권리 형성 역시, 탑다운(top-down)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주자운동이 갖고 있는 절실성이 상향식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실질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고민한다면, 국제인권규범의 법적 규범성만이 아닌, 아래로부터 사회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법적 실천의 생생한 사례에 대한 탐구와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