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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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빈 

1979년 서울 출생. 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metamorphose79@hanmail.net

 

 

 

고양이 악보

 

 

사생대회

 

‘까맣게 타버린 나무만 있는 곳에서 무엇을 그리란 말인가’

 

같이 온 어린 벙어리들이 화구는 내버려둔 채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나무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나는 말없이 술래를 눈으로 좇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술래인지 알 수 없어진 아이들은 하나같이 서로가 서로를 피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달아나고 있었다

 

흰 구름 한입 가득 물고

낮게 엎드려 있는 애벌레들

 

얼핏 나무의 뼛조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꿈의 숲

  

기척 없이

머리를 흔들어 잠을 깨우고

꿈으로 돌아가고 있는 손이 있었다

넘나드는 손에 대한 얘기는

태어나기 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충분히 나는 깬 것 같은데

손이 보기엔 미흡했던 모양,

기약 없이 흔들기만 했다

 

평생 잠만 깨다 죽을 것 같아,

잡은 손을

까맣게 타버린 나무에 매달았다

 

손이 번식했다

 

혼자 흔들리는 이파리들을 가진,

이 숲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빨레뜨

 

물감이 없어

밤새 부엌에서 비누를 녹였다

 

물을 붓고

세상에서 가장 큰 구멍을 가진 단추를 뜯었다

한올씩 무지개를 풀어내

비눗방울을 날렸다

 

마치 어떤 부탁을 하듯이

흠뻑

하늘을 물들였다

 

큰 공기 덩어리가

자신을 흉내 낸

작은 공기 덩어리를 마구 헤집고 나서는

모르는 체했다

 

 

앞 또는 옆

 

도톰한 육구肉球를 할짝할짝

핥고 있는 고양이들의 앙상한 영혼이 있는 곳

 

그곳을 어지럽히는 일은

벗겨지지 않는 고양이 옷을 입은 고양이들의

고양이를 위한 투쟁

밤마다 좁은 창 같은 눈을 일제히 열어젖히면

고양이는 빛났다

 

그러나

고양이는 죽고 싶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한번도 태어나본 적이 없기에

 

선택했다

망설임 없이 비누거품을 삼키고

하늘 밖으로

우왕좌왕 날아올랐다

 

일곱 빛깔 고양이 방울,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 거품으로 가득 찬

조그만 육구(肉球)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유리알처럼 딱딱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 위에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던 나는

딱딱하게 굳어 떨어지는 방울들을 도화지에 옮기고 있었는데

한마리씩 옮길 때마다 소리가 났다

별거 없네, 별거 없어

 

 

*

 

빨강 고양이 ‘도’

           주황 고양이 ‘레’

                           노랑 고양이 ‘미’

                                        …

 

이런 식의 일곱 빛깔 고양이 모두 빼곡하게 뒹굴고 있는 도화지

끝없이 자라는 나무를 타는 고양이들의 몸부림,이라고

뒷면에 적고 있을 때

 

         누가 퓨즈를 끊었을까

 

도화지엔 온통 검은 음표뿐

 

 

 

생각의 도넛

 

 

행운목을 보며 우리는 왜

왠지 나무도 이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이름을 붙여준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다른 나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너의 것과 나의 것을 구분할 순 없었다

 

도넛을 먹으며 너는

도넛에겐 생각의 힘만으로 열 수 없는 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도넛이 닫혀있을 땐 문이 되고

열려있을 땐 구멍이 된다고 대답했다

눈을 감으며 너는

지금 도넛은 그저 덜커덕거리는 거냐고 물었다

생각의 힘만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수 없어서

달 대신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거대한 도넛과

완전한 도넛이 뜰 때마다 짖는 검둥개와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원시인간이 들고 있는 도넛을 상상하며

어둠을 주시했고

너 역시

너만의 어둠을 돌돌 감으며

이불 밖으로 다리 하나만을 내놓은 채

평소보다 많은 잠을 휘젓고 있었다

 

중심을 잃고

밤새 도넛에 시달린 우리

해 뜨기 전

무거운, 이 도넛의 세계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죽은 듯 잠을 자고 있는 접시 위의 도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