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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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15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김지윤 金志允

1985년 전남 나주 출생. kjygosu@naver.com

 

 

 

만월주의보

 

 

담장 밑에 표정이 떨어져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입을 맞추고 바람을 불어넣으니 달입니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 구름도 집을 떠납니다

 

두 손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씻어도 닦이지 않는 표정이 있습니다

혀를 입술에 대보지만 나는 맛이 없습니다

나는 내 맛을 알고 싶습니다

 

입을 벌리고 달콤한 생각을 하며 달콤해지길 기다리는 것처럼

달을 보며 수박이라고 말하면 달에도 줄무늬가 생길까요

눈을 감고 손을 더듬거리며 이건 냉장고 이건 티브이 이건 의자

모서리에 등을 기대앉으면 불안도 나를 지탱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입을 맞춘 달이 언제 저곳까지 차올랐는지

봄이라고 말하는 동안 봄이 오고

지구의 모든 목련나무 꽃들이 달로 한데 모였습니다

높은 곳에서 나를 본다면 나는 어떤 표정으로 보일까요

내가 다시 지붕이나 마당, 골목에 내려앉습니다

 

 

 

물속의 사람들

 

 

네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던 날

너와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던 식탁이나

소란스러운 설거지가 만든 이 나간 유리그릇들이 떠올랐다

방 안 모든 것들이 저마다 자기 안에 숨을 채우고 살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집에 살았지만 다른 집에서 함께 살았구나

 

밥그릇에 꽂아놓은 수저가 그릇을 떠날 때

나는 음식이 묻지 않은 깨끗한 식탁을 생각했다

사후는 주말 식탁에 앉아 홀로 밥을 먹는 세계

너는 정갈한 그릇에 담긴 한 사람 몫의 음식 같았다

 

나는 매일 정수리를 하늘에 부딪치고

바다에 들어간 사람들은 저녁을 바다에 풀어놓는다

창문을 열면 집 안으로 물이 쏟아지고

불리지 않으면 닦이지 않는 것들이 많구나

수면을 향하는 물거품들이 탄산수 같다던 네 말처럼

마음껏 슬퍼한 기억은 청량감이 들기도 했다

 

 

 

정원사의 꿈

 

 

기르던 개를 화분에 묻었어

새싹이 흙을 뚫고 올라와

 

흙을 걷고 죽은 개의 냄새를 맡곤 해

물을 줄 때면 나는 젖은 개의 표정을 알 수 있어

수면제를 먹고 잠든 엄마의 속눈썹이나

손도끼 날에 비친 아빠의 얼굴

어린 강아지의 목을 양 팔로 끌어안으면

내 불안은 강아지의 불안으로 넘어가지

 

세상의 모든 정원사들이 모이는 만찬을 꿈꿨어

꽃과 나무들이 가득한 곳에 내가 서 있고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침묵해

손수레에 실려 나오는 은색 접시

내가 키운 꽃이 잎을 흔들며 짖고

내가 키운 꽃이 허리 굽혀 울부짖어

 

기른 날보다 오래 물을 주고 있어

화분 밑으로 새는 적토를 치우며

엄마는 잠든 지 오래

화분이 다 자라고 나면 함께 묻어드릴게요

그러니 죽지 말고 잠들어 계셔요

 

 

 

투명 고양이

 

 

나무 그늘에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눈을 감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고양이에게 없는 사람

나 눈 감고 생각하니 나무 밑엔 그림자만

 

나는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고

고양이는 기지개를 펴며 내 발끝에 닿는다

복숭아뼈에 얼굴을 비비는 고양이

발목이 지워지며 밤이 온다

 

검은 하늘에 투명한 고양이들이 모여 있다

 

고양이의 시간과 공간은

이곳과 달라서 고양이들은 추억이나 불안

이정표나 일방통행 등의 어떤 표기도 의존하지 않는다 꼬리를 세우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고양이의 도도한 걸음

 

나는 쓰지만 쓰는 건 실체가 없으므로

고양이가 방금 생긴 균열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빈 거실에 홀로 앉아 저녁을 먹는다고 쓰고

 

점심을 다 먹어치우지 않았다면

밤도 오지 않았을 텐데

골목을 걷는다

 

나는 내 고양이만 본다

 

 

 

오늘의 노동

 

 

버린 쪽지를 찾아 걷는 일

날려 보낸 종이비행기가 구름에 걸려 떨어지지 못하고

같은 계절 위로 다른 비가 끝도 없이 내려 운동화가 젖는 일

회색으로 변한 새 신발을 보며 우울해하는

 

내가 쓰고 버린 말들을 뱃속에 담는 일

폐지를 잔뜩 실은 채 홀로 높은 언덕을 걸어 오르다

덜컹, 날아간 종이보다 먼저 바닥에 주저앉는 일

 

몇년 전 연락이 끊긴 사람에게 계속 엽서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를 맴돌고

올려다본 하늘에 휘청, 하루가 통째로 흔들리는 일

 

잠에서 깨지 않는 엄마 곁에 누워 가슴을 만지고

취한 아버지 몰래 날카로운 것들의 끝을 부러뜨리고

한데 모아 입안에 털어 삼키는 일

남몰래 혀를 씹는 버릇 같은 일

 

배 나온 알몸을 거울에 오래 비춰보고

거울 속 어디에 나를 방치하면

내가 잠에서 깨어나 잇몸을 보이며 웃는 일

오늘이 오후로 접혀 버려지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