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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금진 崔金眞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제1회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가 있음. simasian@hanmail.net
유에프오 생각하며 밤 줍기
추석날 새벽 꿈에 유에프오가 날아와 지구를 공격했다
며칠 전에 사둔 로또와 억지로 관련을 지으면서 산을 오른다
밤송이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제 세간살이를 다 보여준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밤 한알을 꺼내 와드득 깨문다
금세기 안에 지구도 이렇게 쪼개지면서 망하게 될까
밤을 줍느라 나무 그늘에 몸이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어머니는 더 가파른 기슭을 오른다
밤톨 같은 창문에 환하게 불을 넣고 아파트들이 저물어가고
추석날 하필 유에프오 꿈을 꾼 것은 신기한 일도 아닌데
누구나 망가진 기대와 희망을 갖는다
지구 최후의 날에는
외계인과 귀신들만 남아 한바탕 마지막 영토전쟁을 벌일까
어머니가 놓친 밤 한알이 비탈로 굴러간다
그걸 주우려고 어머니는 늙은 다람쥐처럼 쪼르르 미끄러진다
차라리 복권을 사는 게 이득이다
올 추석에도 고향에 못간 이들이 저녁 달 속에 앉아 신문을 읽는다
세상을 거꾸로 읽든 바로 읽든, 결론은 말세다
만약 유에프오가 저 뒷산 어딘가에 불시착한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그걸 탈취해서 지구를 떠날 것이다
밤송이를 신발로 콱 누르고 꼬챙이로 밤을 들쑤신다
어머니는 산그늘로 너무 깊이 들어가서
내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나는 꿈에서든 어디서든 언젠가 이런 장면을 본 듯하다
비가 온 뒤라서 사방은 우중충하고
금세기 안에 지구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어머니에게 말할까 말까
나는 밤을 줍는다, 로또볼처럼 생긴 알밤을 뽑아내면서
지갑 속에 아버지 사진처럼 고이 모셔놓은 복권을 생각한다
올해가 반도 안 남았는데
이상하다, 유에프오는 도대체 왜 오지 않는 걸까
빗살무늬토기를 생각하다
아무도 몰랐지만 철거민들은 빗살무늬토기를 빚고 있었다
붉은 페인트로 가위표가 칠해지는 하늘에
가파른 빗금을 그으며 내리는 유성들은 아름다웠고
임신한 여자들 뱃속엔 고대 부족들의 뾰족한 토기 파편이 자라고 있었다
단도로 몸에 빗금을 긋는 전사들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가장들의 담뱃불에선
알 수 없는 쾌감이 일기도 했다
‘전쟁’이라는 말에 붉은 끈들이 질끈 동여매져 있었고
누구도 함부로 그 말을 입 밖에 내진 못했으나
입을 다물수록 석유와 시너 냄새가 속에서 울컥 올라왔다
깨뜨리면 그대로 깨어지고 말 질그릇 같은 얼굴들이었다
동굴 같은 반지하 셋방에서 기어나와 골목을 돌다보면
사람도 개도 아닌 늙은이들이
두꺼운 털옷을 몇겹씩 껴입고
두려움에 가득찬 얼굴로 빚어지는 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간절히 깨져버리고 싶은 욕망을 견디며 삼한사온의 겨울이 가고 있었다
동네를 떠나는 사람조차 지나치게 용맹했다
탈탈 긁어서 꺼내 보여준 보상금은 탄화된 볍씨 몇개 같았다
몽둥이나 돌멩이 같은 가장 원시적인 도구들이 무기로 사용되어도
괜찮을까요, 구청과 경찰과 용역회사는 빙그레 웃었다
값도 안 나가는 골동품의 가치를 따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오직 부서지기 위해, 박살나기 위해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쓸모 없는 질그릇 몇개가 옹기종기 양지바른 곳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흙덩인지, 사람인지, 토우인지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고
처음 불을 던졌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 듯했다
유력한 한 정치가는
TV에 나와 헛기침을 하며 자꾸 손으로 입을 가렸다
불구덩이에 앉아 방화로 추정되는 불을 끝내 견뎌야 했던 사람들 몸엔
함부로 빗살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채찍자국이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가한 것이었든 신의 징벌이었든
그해 겨울이 가기도 전에
깨진 질그릇 조각들이 하늘에 가득 별로 떴고
그것을 만든 자가 비록 옹기장이였다 해도 옹기를 깨뜨리는 것은
분명, 월권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한 원시부족의 일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