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심사평
사유의 패턴 자체가 시적일 수 있다는 해석에 의지한 비문법적인 시편들은, 이제 자신에게로 향하는 투명한 길을 찾는 노력을 기각시킨 채 태어나는 듯하다. 알다시피, 최근 10여년간 ‘새로움’에 대한 갈망과 찬사는 장르를 월경하여 시의 영토를 전역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 실험과 모험 들을 격려했던 ‘전제된 실패’란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래서 실패는 감각 시장에서 높은 상품가치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때 ‘실패’는 불가능한 저편에 닿고자 하는 시가 운명적으로 겪는 무한반복적 과정이거나 태어나는 순간 낡아갈 수밖에 없는 미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실험과 모험으로 명명한 언어를 재생산하며 마치 운명적 실패가 그 표적인 양 달려가는 것이야말로 무지에서 비롯된 모종의 강박일 수 있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 실험된 실험은 재연이고, 이미 모험된 모험은 추종이며, 가장 험난한 미지의 실험실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기본일 것이다. 좋은 시는 설령 언어의 표면만을 보여줄 때에도 독자로 하여금 그 심연을 비춰볼 수 있게끔 한다는 점에서, 일군의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언어를 단순히 기술적으로 습득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시장이 그 근원과 무관하게 욕망을 진열하는 것처럼, 새롭기 위해 새로움을 경연하는 것이야말로 치명적으로 낡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공현진, 김승훈, 김연자, 손유미, 오효진, 이민진, 이인, 정우신의 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환기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공현진의 시가 미묘한 긴장을 발산하면서도 왠지 공허한 것은 단순히 유행하는 기성의 그림자 때문만이 아니라, 장면을 완성하는 감각 이외에 그것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김승훈은 발랄한 상상력과 힘있는 문장이 있지만 정제되지 않은 부분들을 쉽게 노출하였고, 김연자의 시는 경험을 포착하는 시선의 의외성이 있지만 전언의 욕구가 표현의 묘미보다 앞섰다. 오효진의 경우 이상한 말을 전혀 이상하지 않게 구사하는 묘한 매력 위에 세공된 문장과 적절한 응집력이 보태지면 좋을 것이다. 이민진의 시는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어조가 인상적이지만 세계와 응전하기보다는 세계를 정의하는 데 그쳤다. 정우신의 낭만성은 그것을 추동하는 어떤 거절의 함의가 부족하여 감각적인 표현들이 오히려 미숙하게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이인과 손유미의 것이었다. 이인의 경우 사물을 천착하여 그 유비를 통해 시를 엮어가는 정통적 방법론이 돋보였다. 이를테면, 물이 지나간 천변을 두고 “끙끙 앓다가도 하루 지나면 거뜬하게 일어나는 아버지처럼 다음날이면 일어서서 바람의 무게를 재는 풀들”이라고 한 것처럼, 사물과 경험을 감각의 구체성으로 드러내는 집중력이 남달랐다. 그러나 예상 가능한 전개가 손쉬운 마무리로 연결됨으로써, 시의 의미가 언어를 뚫고 그 바깥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시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쉬웠다.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세계 뒤편을 두드리는 어떤 예감을 선사하는 것이 시의 중요한 위의라고 할 때, 심사자들은 그의 시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작지 않은 약점이 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였다.
손유미는 정통적인 유비에서 벗어나 극적인 대화체를 구사하지만 생경하고 감각적인 표현에 골목하기보다는, 개인사의 상처를 벌려 그 속에 숨은 관계의 통점을 여과 없이 끊어내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불편하지만 한순간 날카롭고 격렬하지만 빈틈이 적었으며, 퓨전과 키치를 연상시키되 그것을 간단히 넘어선 자리에서 생활과 조우한다. 가령, 가족 간의 갈등 가운데 무심하게 “칼이 어디 있더라”라는 말을 놓아두거나, “그거 알아?//엄마가 돌아왔어”라는 평이한 진술에서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힘이 있을뿐더러, “이십년 전 번개가 내 배로 옮겨붙던/그날을 기억해요”라는 표현처럼 상처의 근원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있다. 심사자들은 이 낯선 재능에서 쉽게 요해되지 않는 세계를 구축하는 힘을 읽었다.
어쩌면 미학에서 새로움이란 그 기법에 대한 논의에 앞서 변화된 사회구조와의 관계를 혁신하는 것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손유미의 재능은 목소리만 들리는 무대 뒤에서 커튼을 향해 뾰족한 상처를 찔러넣을 줄 안다는 데 있다. 독자들은 캄캄한 무대 앞에서 보이지 않는 고통의 표정을 끝없이 응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신인이 세계의 불투명성을 감지하고 감당하는 방법일 것이다. 물론 투고된 작품들만으로는 가족을 벗어난 그의 시선을 포착할 수 없었으며, 여러 시편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묶여져 만들어내는 파괴력에 비해 개별 작품들이 가진 단편성에 위태로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래는 신인의 몫일 뿐 그 설계에 관여하는 일은 온당치 않다고 여겼다. 망설임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심사자들은 흔쾌히 그의 오디오 관람 극장의 관객이 되기로 하였다.
| 신용목 안현미 이영광 |
시 | 수상소감
손유미
1991년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2013년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 수상.
과대망상증에 걸린 것인가. 정오의 햇빛 속 이것들은 모두 망상인가.
비겁하게 고개 돌리진 않겠다.
햇빛 속에는,
인천, 서울, 속의 나, 내가 살게,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마시던 맥주, 과장된 웃음과 만연한 경련, 혼자 귀가하던 그, 모두가 육교 같던 길, 추락과 충돌을 동시에 상상했던 플롯, 펼치지 않은 고전(古典)을 폐지로 팔지언정 중고(中古)론 내놓지 않겠다던 똥고집, 땡볕에 하드커버 책 몇권을 이고 동네 폐지 할머니 뒤를 따라다니던 하루, 땀, 냄새, 다시, 혼자로 돌아가던 방, 밤, 또 밤, 문득 간절해지는, 오늘은 꼭 락스물에 온몸을 닦아내겠다, 손발톱을 쥐어뜯어내서라도, 가능하다면 눈알을 뽑아내서라도 뽀득뽀득 닦아내겠다는 충동과
모든 불가능 앞에서의 낙심.
새벽, 오거리를 내달리면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부터, 터져 나오던 물음, 그때마다 내일을, 아침을, 월요일을, 1일을, 새해를, 다시 태어날 거야, 꼭꼭 씹은 다짐, 자궁으로 삼던 이불과 무너짐,이
있다.
이것은 환상인가.
환상 속의 꿈인가.
그래. 낭만적인 수상소감도 튤립 같은 축하도 모두 꿈이다.
앞으로 써내려가야 할 백지(白紙)는 천지고 곁에는 왕릉(王陵) 같은 책들이 순결하다.
그리고 독자(毒刺)로써, 어린 내가.
단 한발의 침(針)을 더 날카롭게, 더 예민하게, 더 아름답게,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그럼에도,
오늘부로 나는 나를 의심하는 만큼, 의심하지 않겠다.
귀한 자리를, 그래, 꿰차버렸으니까, 감사하게도, 난감하게도, 덜컥.
윤대녕, 하일지, 배삼식 선생님. 선생님들께 배웠기에 단 하나 자신있게 선포할 수 있는 것은, 난 허투루 배운 적 없다, 난 참 잘 배운 글쓴이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김사인 선생님. 맨 정신에 선생님과 대면할 수 없었던, 그 반주(飯酒)의 낮. 시, 앞에 선 흉물스런 알몸을 바라보는 눈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경주 선생님께도, 시와 첫 경험을 맺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최치언 선생님, 감사합니다.
갓 낳은 불안의 새끼를 키우는 친구들. 불면을 애완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난 초조하고 기쁘고 시샘하다가, 좋다. 이 밤, 어딘가 뜬눈이 있다고 생각하면 든든했으니. 모두의 이름을 적을 수 없을 만큼 난 얹혀산다.
어느날 잡지 말아야 했던, 그 손에게 이곳에서 악수를 청한다. 아름답게 화해할 수 있는 기회는 얻지 못했지만, 그래, 다시는 보지 말자.
아프다,를 아름답다,로 쓰자면 나의 가족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글을 쓰는 나,의 가족이 되기에 우리 가족은 너무 여리다. 착하다. 아름답다. 나의 모든 글자는 내 가족들 앞에서 투명해졌으면. 이 모든 페이지가 가장 아름답기 위해선 손종길, 손종길, 손종길…, 김은자, 김은자, 김은자…, 손의수, 손의수, 손의수…,로 가득 채우면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뜨거운 햇빛으로 말라가는 혀를, 깨물기 직전 붙잡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소설 | 심사평
올해 응모작의 수는 지난해보다 많이 늘었다. 529명의 응모자가 총 1083편을 투고하였다. 읽는 이들은 적은 데 반해 쓰는 이들은 꾸준히 늘어나는 이 기이한 현상은 고립된 문학현장을 연상시켜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 하지만 투고된 작품들의 수준을 확인하고 나니 한편으로는 이 높은 수준이 문학의 대중화를 이끌어올 동력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그만큼 정확하고 깔끔한 문장을 구사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었으며 상상력을 비롯하여 서사의 구성력이나 묘사력 또한 발군인 작품도 자주 눈에 띄었다.
본격적인 심사에 앞서 추려진 작품은 총 10편이었다. 유현수의 「아무도 테니스를 칠 줄 몰라」는 인물의 불안심리를 테니스장에서 발생하는 소리와 연동시켜 흥미롭게 표출한 작품이었다. 충동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의 형상은 살아 있었으나 그 인물이 그렇게 행동하고 판단할 만한 세계상의 토대는 구체적이고 분명하지가 않은 게 흠이었다. 같이 투고한 「노아」의 빤한 상상력도 아쉬웠다. 최정나의 「넝쿨」은 생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는 시선이 돋보였다. 불안감을 자극하는 상황과 장면을 연출하는 능력도 인정받을 만했다. 하지만 전반부의 긴장이 후반부까지 유지되지 못했다.
김멜라의 「아게아모 백이남의 윤리 원칙」은 본심 대상작 가운데 가장 발랄한 작품이었다. 성(性)을 다루는 방식이나 가족과 종교를 다루는 방식도 상당히 도발적이었다. 순간순간의 집중력이 돋보였으나 전체적인 서사의 얼개가 너무 산만하여 독자에게 묵직한 파괴력을 전하지 못하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원재운의 「대항해시대」는 상당히 안정된 서사적 구성력을 갖춘 데 반해 세부에 힘이 없었다. 손은지의 「행성의 입장에서 당신을」 역시 비슷한 약점을 보인 작품이다. 김유정의 「그러니까 말해봐」는 대화를 만드는 능력이 발군이었다. 서사의 출발점과 마무리 상황만 좀더 치밀하고 독특하게 그려낼 수 있다면 대화의 장인으로 문단에 등장할 가능성이 큰 응모자였다. 한보라의 「얀의 머리」는 일종의 SF 우화였다. 안정적인 구성력으로 독자를 끝까지 붙잡아두는 힘은 있었지만 너무 빤한 알레고리가 걸렸다.
정영수의 「레바논의 밤」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는 큰 이견이 없었다. 깔끔한 문장과 구성, 그리고 풍부한 맥락을 품은 알레고리의 지적인 활용능력 또한 매력적이었다. 평범한 인물의 의식 속에 살아 숨 쉬는 과대망상적 기미를 드러내면서 신에 대한 인간의 광신적 집착과 의존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은 단순히 지적 애호에 의한 소재적인 관심이라기보다 제목이 환기하듯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사태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 작가가 앞으로 어떤 현실을 문제 삼을지 기대가 되는 대목이다. 주인공 ‘나’와 ‘연희’라는 인물이 나누는 대화의 탄력성 또한 흥미로웠다. 이야기를 짓는 능력은 물론 말을 부리는 능력에도 신뢰가 갔다. 좋은 소설가를 만났다는 마음에 심사위원 모두가 기뻐하였다. 앞으로 당선자가 이 기쁨을 수많은 독자들에게 전하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 백지연 송종원 조해진 천운영 |
소설 | 수상소감
정영수
1983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전문사 과정 재학 중.
오래전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못 썼고, 대신 레바논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십년쯤 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베이루트의 사진을 신문에서 보았다. 그때 그 나라를 처음 알았고 아직까지 다른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어제 광화문 거리를 지나다가 이스라엘 공습 규탄 집회가 열린 것을 보았다. 전단지를 받아 들고 꼼꼼히 읽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반대하고 있었다.
모르는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두렵다. 모르는 일에 대해 쓰는 것이 두렵다. 그러나 어쩌면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게 문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가 없다. 애초에 내가 아름답지 않은 인간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럴듯한 문장을 만드는 재주도 없다. 그런 것들을 보고 감탄하는 것 정도는 적당히 할 수 있지만. 그냥 거짓말만 하지 않기로 했다. 거짓말이 아닌 소설이 어디 있겠느냐만 그래도 거짓말만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물론 최근의 일이고, 「레바논의 밤」에는 몇개쯤 들어 있다.
우체국에 갈 때마다 내가 안되면 누가 되겠느냐는 마음으로 원고를 부쳤다. 그러나 소식 없는 날을 몇번 보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분개하다가 조금씩 겸손해졌고, 또 겸손해지고, 겸손해지다가 끝내는 나 따위가 될 리가 있나 하는 마음이 되었을 때쯤 연락을 받았다. 더 겸손해지기 전에 소식을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은 내가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등단했기 때문에 곧 슬럼프를 겪을 거라 했다. 다른 친구는 내가 말하길 좋아해서 입을 잘못 놀려 망할 거라고 했다. 고맙다. 그런 악담들이 내게 힘을 준다.
다 내가 잘해서 나온 결과겠지만 그래도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다. 당선 소식을 전했더니 그럼 이제 좋은 데 취직할 수 있느냐고 물어준 어머니, 내가 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부담을 덜어주신 아버지, 그리 친하진 않지만 지금의 내가 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형에게 먼저 감사를 전한다. 문학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들, 그리고 늘 나와 함께 수다를 떨어준 친구들에게도. 사실을 말하면 선생님보다 친구들에게 더 많이 배웠다. 미숙한 작품에서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심사위원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글에만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서유경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평론 | 심사평
다양한 대상과 주제를 다룬 점은 여전했지만 지난해와 비교할 때 올 창비신인평론상 응모작에는 논의를 탄탄하게 구축한 글이 좀더 많아서 반가웠다. 전체적으로 비평의 젊은 시각이 당대문학의 어느 지점을 포착하고 있는가를 엿보는 좋은 계기였다.
투고된 스물두편의 원고 가운데 본심에 오른 것은 총 네편이었다. 이즈음의 시비평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겠는데, 시작품을 대상으로 한 원고들은 대체로 이런저런 텍스트를 다분히 편의적으로 취하여 자기주장을 투사하면서도 기본적으로 해설 이상의 비평적 논의에 미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문장들이 조금씩 어긋나고 단절되는 것 자체는 일면 ‘스타일’로 이해하더라도 종국에 그 어긋남과 단절이 유의미한 통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 사유의 충분함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시를 다룬 응모작으로 유일하게 본심에 오른 임동휘의 「원뢰(遠雷)의 부름: 문태준 시에 나타난 ‘밥’의 의미에 대하여」는 그런 부유(浮游)함에서 벗어나 비교적 단단한 문장과 분석력을 보여주는 글이다. ‘밥의 의미’라는 주제가 새로움을 끌어내기 힘든 만큼 처음부터 큰 부담을 안은 셈인데, 서론에서 스스로 표방한 대로 70~80년대의 민중문학이나 생태문학적 발상 둘 다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이고 참신한 논의를 펼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소설을 다룬 나머지 세편 중에서 이예헌의 「주체의 향방, 경계 위에 선 이방인들: 최근 소설에서 나타난 이방인의 형상화 양상을 중심으로」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편혜영 김중혁 김사과의 소설에 나타난 ‘이방인’ 형상화를 언제든 “이방인으로 호명될 수 있는 우리”의 주체화 문제와 연결시켜 읽고 있다. 논의를 끌어가는 힘도 있고 군데군데 통찰력이 발견되는 글이지만 역시 이방인과 주체라는 이제는 익숙한 구도가 갖는 예측 가능함을 넘어서지 못했다. 윤리성의 심화라는 구도로 초기작부터 『야만적인 앨리스씨』까지 황정은의 소설들을 두루 살펴본 김요섭의 「기억의 운명, 시선의 윤리, 대화의 연대: 황정은론」도 차분하고 일관된 전개를 보여주며 주목할 만한 논평도 담고 있다. 그러나 분석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보다 주어진 구도를 채우는 식이어서 단선적 나열이라는 인상을 떨치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은지의 「징후적 소설과 그 너머: 이기호의 『김 박사는 누구인가?』가 맴도는 것들」에도 이런저런 아쉬움은 없지 않았다. 서사의 ‘이기’와 ‘이타’ 혹은 안과 밖이라는 구분이 다소 과장이 아닌가 싶은 인상도 있었고 근대나 역사 같은 거대 개념과 연관된 발언들이 여과되지 않은 채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논의를 너무 벌리지 않으면서 몇몇 작품을 집중력있게 분석하고 성실하게 주장을 구축한 점, 무엇보다 자신이 읽는 작품에 충분히 몰입하면서도 비평적 거리를 유지한 점이 돋보였다. 소설이 징후적 글쓰기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판단이 결론에 가서야 제기되면서 본론의 작품 논의에 녹아들지 않은 것은 아쉬우나, 오늘날의 비평이 놓치기 쉬운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이를 심화해갈지 기대를 심어주는 글이다.
당선을 축하드리고 올해 창비신인평론상에 투고해주신 다른 응모자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비평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새삼 자문하게 되는 이즈음이니 만큼 예리한 정신으로 이 질문을 돌파하는 글 또한 더욱 많아지리라 기대한다.
| 한기욱 황정아 |
평론 | 수상소감
이은지
1986년생. 중앙대 독문과 석사과정 졸업.
어려서부터 나는 글 쓰는 데는 소질이 없었다. 초등학교 국어시간에 설명문을 쓰라는 문제에 시인 지망생이랍시고 비유로 칠갑한 글을 썼다가 웃음만 샀다. 중학생 때는 학교 게시판에 일부 학생들이 미워하는 선생님을 변호하는 글을 썼다가 외려 그 선생님께 불려 가 억울하게도 혼쭐이 났다. 고등학생 때는 단화만 허용하는 학칙에 반발해 운동화 착용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가 국어선생님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별일인가 싶지만, 내가 쓰고 싶어서 쓴 글에 따라붙는 오해와 반감이 당시에는 꽤 참담하고 치욕스러웠다. 글쓰기란, 쓰고 싶은 대로 잘 쓰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비평이라는 생경하고 어려운 길을 권유 받았을 때 예의 그 상처가 나를 망설이게 했다. 나를 향하는 손가락질보다 내가 쓴 글을 향하는 손가락질이 더 두려웠기에, 문학이라는 공론장에 문을 두드리는 것은 내 오랜 소망인 동시에 공포였다. 그럼에도 거기에 매료되어 연거푸 글을 쓴 연유는 비평이 갖는 존재론적 ‘당위’가 나를 위무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당위란 세헤라자데가 술탄의 침상에 들 때마다 그 곁을 함께 해준 동생 디나르자데와 같은 것이다. 매일 새벽 언니보다 일찍 깨어나 지난밤의 이야기를 상기하고 다음 이야기를 청하는 디나르자데가 없었다면 제아무리 세헤라자데라도 천일 밤을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평은 문학의 머리맡을 항시 지켜야 하는 상냥하고 강직한 누이가 아니겠는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닌 써야 마땅한 글을 쓰는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마음이 편안하다고 몸과 머리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전까지 취미 붙인 적 없던 평론집을 더듬더듬 그러모으고, 소일거리로 읽던 시와 소설을 이제는 사금 캐는 심정으로 읽고, 사금에 접붙일 논리를 찾아 눈 뜬 장님처럼 헤매는 일은 외롭고도 고단했다. 그러나 외롭고 고단해도 바지런을 떨다보면 어느덧 사금이 모여 잘게 빛나는 몇 안되는 순간들에, 홀로 싱거운 기쁨을 느끼며 꾸역꾸역 글을 썼다. 그 초라한 사금이 이제 밖으로 나와 빛을 보게 된다니 송구스럽고 떨린다.
초라한 사금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한기욱 황정아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작년 창비신인평론상 심사 때 제 글에 좋은 눈길을 보내주신 김종훈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심사평에 실렸던 두 문장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
비평의 초행길을 묵묵히 밀어주고 끌어주신 류신 선생님께는 감사의 마음을 죄 표현할 길이 없다. 언제나 선생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비평 이전에 학문의 길로 인도해주신 노영돈 선생님, 학문의 정치적 저항성을 실천해주신 김누리 선생님, 학문의 겸양과 미덕을 가르쳐주신 오성균 선생님께도 이 글을 빌어 감사드린다. 살갑지 못한 나를 여태 보듬어준 가족에게, 앞으로 나의 영원한 첫번째 독자가 되어줄 원석오빠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