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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소설에서 현실 만나기

 

극장적 세계와 탈정념 주체의 탄생

 

심진경 沈眞卿

문학평론가. 저서로 『떠도는 목소리들』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공역서로 『근대성의 젠더』가 있음. stariz87@naver.com

 

 

1. 사과와 오렌지, 또다른 현실

 

2000년대 소설에 대한 흔한 평가 중 하나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나 재현의 노력을 접고 자아의 폐쇄된 우주로 후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0년대 문학에서 현실은 개인의 실존적 불안이나 혼자만의 유희에 밀려 어떤 비극적 사태의 징후로만, 혹은 미묘한 진동이나 기미로만 포착됨으로써 정작 현실의 실재 그 자체는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문학 속 현실이 방 한칸으로 축소되더라도, 그리고 그 안에서 주체가 점점 빈곤하고 왜소해지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88만원세대’가 처한 숨막히는 고립과 폐쇄의 현실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실감나게 재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2000년대 문학이 어떤 측면에서 현실 재현의 위기를 겪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고통스러운 현실은 언제나 그 소설들에서 가시적, 비가시적으로 전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 소설들의 무중력과 탈현실의 포즈야말로 무력한 주체의 강렬한 현실의식이 빚은 결과일지도 모른다.1) 2000년대 문학에서 현실은 그렇게 소설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만 존재감을 발휘하는, 부재와 부정의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삭제함으로써 존재하게 하는 이 역설의 방법론이야말로 2000년대 문학이 현실을 가까스로 사유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 한국문학 속의 현실과 그 현실을 대면하는 주체의 태도는 그 직전 시대 문학 속의 그것에 견주어볼 때 미묘한 형질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관념으로 구성된 추상적 현실(김사과)이나 모든 것이 부서졌다가 재조립된 평행현실(parareality)로서의 ‘고모리’(황정은)를 그 사례로 들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이채로운 것은 박솔뫼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현실과 그 재현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시대 젊은 작가들의 세계감각을 짐작해볼 수 있는 하나의 흥미롭고도 특이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그것은 우선 물속처럼 고요하고 느리면서도 단순한 현실이다. 그 세계는 마치 몇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심플하다. 예컨대 그것은 호프집 아르바이터가 매일 깎아야 하는 사과와 오렌지로 이루어진 세계와 같다. 사과와 오렌지는 “가장 하기 싫고 별것도 아니고 웃기지도 않는 것들”(「차가운 혀」)이지만 그럼에도 그 하찮은 것들이야말로 박솔뫼 소설의 인물들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현실의 ‘기둥’이다. 부분대상으로 축소된 세계. 이에 더하여 “모든 것이 느리고 늘어져 있고 고여 있”는, “천천히 어디로도 가지 않고 여기에 있기만”(「해만」) 하는 곳. ‘집 근처’처럼 익숙하지만 아직 가본 적은 없는 곳. 늘 어딘가에 있는 곳. 그러나 낯선 곳.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결국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곳. 그럼에도 긴장과 갈등, 종결이 없는 곳. 재난과 재앙이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사소하고 일상적인 습관과 관계가 더 두드러진 곳. 그것이 박솔뫼 소설의 현실이다. 박솔뫼는 이렇듯 우리가 익히 아는 현실 공간을 소설에 그대로 끌어오되, 그곳을 사건이 부재하는 추상적인 공간으로 탈색함으로써 완전히 낯선 곳으로 만든다. 익숙하지만 낯선 그곳에서 무감각, 무반응, 무지각의 인물들은 세계와 희미하게 연결되고 또 단절된 채, 아무런 지향점이나 목적도 없이 천천히 유영한다.2)

박솔뫼 소설에 나타나는 이 덤덤하고 무미건조한 현실과 그 현실을 그대로 닮아 있는 주체의 모습은, 2000년대 문학이 지나간 자리에 어떤 주체, 어떤 문학이 등장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 글은 거기에서 출발해 박솔뫼 소설을 중심으로 이즈음 젊은 세대의 소설이 만들어가는 의미있는 징후의 일편을 포착하기 위한 시도다.3)

 

 

2. 약도, 지도가 아닌

 

이미 몇몇 평론가들이 지적했듯이,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공감할 만한 메타 이야기(혹은 큰 이야기)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전체의 큰 이야기는 다양한 이야기 중 하나로 혹은 ‘작은 이야기’로 유통된다.4) 여기서 핵심은 이야기의 규모 차이가 아니다. 오히려 시야의 각도 차이에 가깝다. 전체적 조망하에 그려지는 이야기가 ‘큰 이야기’라면 ‘작은 이야기’는 청사진이나 밑그림이 없어도 가능한, 자기 시야가 포착할 수 있는 범위에 한정되는 사사로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학은 2000년대를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어떤 방식으로든 ‘큰 이야기’를 의식하지도 참조하지도 않는 ‘작은 이야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큰 틀에서 보면 박솔뫼 소설도 그런 ‘작은 이야기’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작지 않은 차이와 변화가 있다. 지도와 약도만큼이나.

가령 2000년대 문학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은희경(殷熙耕)의 「지도중독」(2005)과 김중혁(金重赫)의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2005)에는 공통적으로 ‘지도’가 등장한다. 은희경의 소설에서 ‘지도’가 삶의 방향성을 상실한 주인공이 역설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지난 시절의 유물 정도로 해석된다면, 김중혁 소설에서 지도는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는 또다른 세계의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일견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 두개의 지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2000년대 문학이 재현하고자 하는 현실이 실재 현실의 지형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그려내는 문자 그대로의 지도(地圖)가 아니라 자신만의 상상적 방법론으로 새롭게 구성한 ‘상상지도’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러한 상상지도가 갖는 의미는 지구적 현실 전체를 조망할 필요가 없는, 좁은 내각(內角)만으로도 대응할 수 있는 주관적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대 문학의 ‘지도’는 현실적으로 맞닥뜨린 좌표상실의 고통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식이자 그렇게 해서 발견하게 된 상상적 현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박솔뫼의 소설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그 ‘지도’가 ‘약도(略)’로 대체된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는 이제 지도가 아닌 약도로 재현된다. 어떻게? 먼저 박솔뫼 소설 「해만」과 「해만의 지도」의 무대인 ‘해만’으로 들어가보자. 해만은 어떤 곳인가? 일단 해만은 김승옥(金承鈺)의 무진처럼 허구적으로 설정된 공간이다. 그러나 해만은 무진처럼 병리적이지도 2000년대 문학의 지도처럼 상상적이지도 않다. 해만은 오히려 어떠한 상상의 여지도 개입되기 어려운, 지극히 현실적인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소설에 따르면, 해만은 남쪽에서 배로 5시간 걸려야 도착하는 섬으로 편의점과 까페가 있지만 남쪽의 다른 어촌마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곳이다. 또 관광지이긴 하지만 볼거리가 없어서 유명하지도 않고, 섬이라고는 해도 그 사실조차 실감하기 어려운 마치 ‘집 근처’ 같은 곳이다. 그것은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어제 같을, 특별한 사건 없이 고만고만한 생각과 감정과 관계가 두서없이 흐릿하게 이어지는 우리의 일상적 현실과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해만은 상징화조차 불가능한, 서사 이전의 삶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해만에는 아무런 특별한 것이 없는 게 맞는 것 같”(「해만」, 『그럼 무얼 부르지』 82면)은데, 왜 ‘나’는 직장을 그만둔 뒤 해만으로 온 것일까. “뭔가를 보고 싶은 것도 푹 쉬고 싶은 것도 아니었”(75면)는데. 왜?

‘나’는 “그저 앞으로의 시간에서 변하는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75면) 확인하기 위해, 아무것도 깨닫지 않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기 위해 해만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가상공간으로 이동한다. 말 그대로 장소만 옮겼을 뿐, 변화는 없다. ‘나’가 해만에서 만난 사람들 또한 모두 주거지인 수도를 떠나 해만에서 지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이 왜 ‘수도’를 싫어하는지, 해만에서 지내는 일이 정말로 수도에서의 삶보다 만족스러운지는 알 수 없다. ‘술을 마시던 남자’가 해만에서 하는 일이라곤 그저 술을 마시는 일이며, 대학생은 늦게 일어나 라면을 먹거나 텔레비전을 보다 다시 잠이 들고, 또다시 일어나 텔레비전을 보며 웃다가 울다가 다시 잠드는 일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 일들은 굳이 해만이 아니어도 가능하지 않을까. 결국 ‘나’ 또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해만이어야 하는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에는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이곳에 있었고 다른 모두는 저편에 있었다. 결국 나는 이곳에 있기 위해, 모두를 저편으로 보내버리기 위해 해만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를 멀리 바라보기 위해 모든 것이 고여 있고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는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닌가. 그걸 알아채는 데 한달의 시간이 걸렸으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내가 덮어두고 지냈던 세계 쪽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달라진 것이라고 한다면 달라진 것일지도 모르겠지만.(92~93면)

 

해만은 ‘나’가 사람들과 ‘천천히’ 멀어지기 위해 선택한 공간이다. ‘나’가 해만에 있는 동안 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예전에 알던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해만에 오기 전에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해만에 와서는 ‘여주’라는 친구와 멀어진다. 결국 ‘나’는 “모두를 멀리 바라보기 위해” 해만에 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이곳에, 다른 모두는 저편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해만이 있다. 멀리 보이는 모든 것은 희미하다. 뚜렷했던 것은 희미해지고 복잡해 보였던 것은 단순해진다. 해만은 수도로 상징되는 중심성과 복잡성, 관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가 허구적으로 선택한 일종의 원시적(遠視的) 공간이다. 해만이 굳이 비현실적 상상 공간으로 설정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저 멀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해만이 남쪽에서 배를 타고 5시간이나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섬이어야 하는 것은 멀어졌다는 느낌, 딱 그만큼의 거리감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해만을 거친 ‘나’의 삶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만 멀어진 만큼 세계가 조금 더 희미해지고 단순해질 뿐이다. 이제 “그 모든 것은 전혀 구체적이지도 생생하지도 않”은, “손에 잡히지 않는 이야기”(101면)가 된다.

해만은 이제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 결과 「해만의 지도」에서 해만은 이윽고 ‘나’가 저편으로 보내버린 이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것은 모두 해만이 하나의 구체적인 장소라기보다 ‘나’가 현실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선택한 원근법적 소실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그리하여 ‘나’가 마주하는, 해만을 포함한 모든 세계는 그런 소실점에서 흐릿하게 지각되는 어떤 것이 된다. 그것은 “지도라기보다는 약도에 가까워 보였다.”(171면) 약도란 ‘간략하게 줄여 주요한 것만 대충 그린 지도’다. 「해만의 지도」에서 ‘나’는 해만에서 알게 된 우석과 함께 그들이 머물렀던 숙소를 중심으로 한 익숙한 장소들, 예컨대 시장과 슈퍼, 돔 형태의 교회, 인근의 작은 가게와 골목으로 이루어진 약도를 그린다. 그 약도에는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 그들의 일상적 경험이 별표 등으로 표시되기도 한다. 즉 세계는 자신의 경험치 안에서만 인지되고 재현된다. 그리고 그만큼 간략해지고 단순해진다. 박솔뫼 소설에서 세계가 원근법적 소실점에서 바라본 “손바닥 안”(182면)의 무엇으로 제한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와 ‘나’가 가까운 것도 아니다. 손바닥은 다만 멀어져서 작아진 세계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박솔뫼 소설의 인물들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언뜻 대단히 관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관조적 태도란 단순히 어떤 대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대상을 자기 마음에 비추어 보는 내면(성)의 작동과 결부된다. 그런데 박솔뫼 소설의 인물들은 바깥을 원거리에서 (보는 자기 자신조차 멀어지게 함으로써)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데서 그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세계는 멀고 단순해서 ‘나’와의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계는 ‘나’의 내적 정체성 형성을 위한 유용한 참조지점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가 단순히 세계의 관찰자나 관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나’는 “들여다보는 자”에 불과하지만 세계를 향한 모종의 관심을 완전히 거두어들이지도 않는다. ‘나’는 이 세계의 일부라는 자의식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가 ‘나’와 의미있는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그렇게 세계와 ‘나’는 단절된 것도 단절되지 않은 것도 아닌 채, 모호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하다. 마치 존재하지만 전혀 의식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커다란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오는 만큼 내가 가진 것들은 스르르 빠져나가 나는 천천히 사라져가고 가벼워졌다. (…) 해만에서 우리는 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그러다 말이 없고 흔들흔들거리고 떠나고 돌아가고 그리고 생각한다. 그처럼 해만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천천히 모든 것이 멀어지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나요? 사라진 곳에 대고 묻는다. 결국 텅 비어버린 자신이 강렬해질 뿐이지. 아, 정말 그렇지? 질문들도 빠져나간 텅 빈 곳에 대고 대답했다.(102~3면)

 

세계가 멀어지는 만큼 ‘나’ 또한 가벼워진다. 세계가 간략해지는 만큼 ‘나’ 또한 단순해진다. 이제 주체는 세계로부터 영향 받지 않음으로써만 영향 받는다. 세계는 부정과 부재의 참조지점으로서만 존재 가능해진다. 그러나 참조할 대상도, 모방할 타자의 욕망도 없는 자아란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나’를 둘러싼 세계는 ‘나’에게 아무런 정념도 욕망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있나? 박솔뫼 소설에서 ‘나’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즉 이 세계를 타인은 있지만 타자의 욕망이 부재하는 어떤 것으로 만듦으로써만 현실세계와 관계 맺는다. 우리는 이를 ‘해만답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해만다움을 통해 ‘나’와 세계 사이에 어떤 장애물이 설치된다. “모든 명확한 세계들이 내게서 장막을 치고 있었다.”(「그럼 무얼 부르지」 159면) 여기서 장막은 세계에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막이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박솔뫼 소설에서 세계는 그 장막으로 인해 하나의 극장이 된다는 사실이다. 세계의 ‘극장화(劇場化)’. 그렇다면 ‘나’는 극장이라는 세계 안에서 관객인가 배우인가?

 

 

3. 극장적 세계와 오퍼레이터들

 

박솔뫼 소설에서 약도는 일상을 미니멀하게 축소시켜 존재에 가해지는 위협을 최소화하려는 방어책의 하나다. 그러나 삶은 일상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비일상적이고 무자비한 사건들도 분명 우리의 삶을 구성한다. 박솔뫼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미디어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끔찍한 폭력적 사태들(19805월 광주부터 2011년 후꾸시마 원전사고까지)을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일상적 삶 주변에 배치함으로써 현실 구성의 단선화를 피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사적 사건들은 작가 나름의 극장적 상상력을 통해 전달된다. 약도가 일상적 현실을 단순화하고 원격화하기 위한 도구라면, 극장은 거꾸로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온갖 유형의 세계사적 현실을 근거리에서 목격하기 위해 마련된 무대다. 박솔뫼가 동시대 젊은 작가들에 비해 현실인식이 두드러지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錯視)’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극장화된 세계 안에서 인물들이 차지하는 위치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관객의 위치에 있지 않다. 당연히 그들은 배우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오퍼레이터(operator)다. 오퍼레이터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기계류의 조작에 종사하는 사람. 특히 전화 교환원, 무선 통신사, 컴퓨터 조작자 따위를 이른다.’ 「너무의 극장」은 극장적 세계에 대응하는 이 오퍼레이터들의 현실인식과 태도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너무의 극장」에는 조명과 음향을 담당하는 두명의 알바 오퍼레이터가 등장하는데, 그들의 일은 단순하다. 무대감독의 큐시트에 따라 ‘고작’ 음악을 세번 바꾸고 조명을 열네번 바꾸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전문가적 지식이 필요한 일도, 복잡한 기계 조작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분명 극장 안에 존재하지만 무대와 객석 어디에도 그들의 자리는 없다. 조정실이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효과음으로만 혹은 무대의 밝기 정도로만 자기 존재를 희미하게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관객이 무대를 정면으로 마주하거나 때로는 무대의 일부로 호출되기도 하는 것과는 달리, 오퍼레이터는 비가시적이다. 따라서 무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지켜볼 뿐 사태에 개입하지는 못한다. 설령 ‘몹시 너무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말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일들.

 

우리는 인간을 죽였고 남자와 여자를 늙은이와 아이를 죽였으며, 인간을 그리고 그들의 심장을 먹어치웠다. 우리는 그들이 눈멀 때까지 구타를 했고 사람들의 얼굴을 무참히 가격했다.(155면)

 

‘너무의 극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유혈사태는 그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면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맞고 죽이는 사람이 있으면 죽는 사람”(「그럼 무얼 부르지」 144면)도 있는 일련의 사태들, 예컨대 19805월 광주나 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 에스빠냐의 게르니까 폭격사건이나 칠레 삐노체뜨 학살사건, 혹은 타이베이 2·28 사건을 동시적으로 연상시킨다. 이 사건들은 분명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오퍼레이터들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된 ‘너무의 극장’에서 그것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고 죽이는 일’로 익명화, 추상화된다. 그렇게 볼 때 박솔뫼 소설에서 ‘극장’이란 “압도적 감각 부하를 걸어오는 (급박한) 현장”5)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 현장성이 소거된 보편적 추상화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를테면 역사와 사회를 이야기하면서 그것과 멀어지는 방식, 혹은 현실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말하지 않는 방식이다.

분명 박솔뫼 소설의 오퍼레이터들은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이 세계의 끔찍한 폭력적 사태가 자신의 삶을 육박해온다는 사실을, 그런 세계사적 사건 사고가 자신의 삶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사태의 “당사자는 아니며 또한 명확한 세계의 시민도”(「그럼 무얼 부르지」 159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러한 사건의 중심에 다가가거나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 세계라는 극장은 아무런 책임있는 배역도 할당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사회적 지위나 위상도 부여받지 못한 존재가 어떻게 이 세계의 사태에 개입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간절히 원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오퍼레이터는 이 부조리극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고작 오퍼레이터의 의지”(「너무의 극장」 164면)로 이 무시무시한 연극을 끝낼 수 있을까? 그저 지시받은 음향과 조명 일을, “자신이 끝낼 수 있는 것을 끝내는 수밖에”(164면).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남은 일은 조정실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정실 바깥은 극장 안인가, 밖인가? 「너무의 극장」에서 그들이 달려나간 곳이 어디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들은 “계속 빠르고도 빠르게 할 수 있는 가장 너무한 것을 향해. 동시에 가장 너무하지 않아서 너무 너무하지 않은 것을 향해. 달린다. 달려 나간다.”(166) 어떻게 ‘가장 너무한 것’과 ‘가장 너무하지 않은 것’을 향해, 즉 동시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가능한 걸까? 혹 오퍼레이터란 두 세계 모두와 관련된 존재는 아닐까?

‘너무’라는 모호하고 순진한 부사어를 통해서만 세계사적 사태를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현실감각은 오퍼레이터로서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다시 한번 오퍼레이터에 관해 정리해보자. 그들은 세계라는 극장 안에 존재하지만 거의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자 어떤 사태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목도하지만 그에 대해 어떤 의미있는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 존재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극장 밖의 존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안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바깥의 존재다. 그들에게 동시에 정반대의 세계를 향해 도주하는 이상한 모순이 가능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박솔뫼 소설의 극장은 세계사적 현실을 근거리에서 목격하기 위한 무대인 동시에, 그런 현실에 다가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극장이란 이 세계로부터 외면당한 존재가 어쩔 수 없이 세계와 대면했을 때, 그에 대응하기 위해 상상적으로 구성한 현실이다. 박솔뫼 소설에서 장막이 극장적 세계의 연장선상에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니다. 아니다. 다만 내 앞으로는 몇개의 장막이 쳐져 있고 나는 그 앞으로 직선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다는 이야기다. 나는 3년 정도의 시간은 하나로 볼 수 있으며 3년 전은 3년 후의 시선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나는 모든 시제를 지울 수 있으며 그렇게 볼 수 있는 시간들은 점점 늘어나지만 나의 시선은 김남주가 이야기한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에는 가닿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건 좀 신기할 수도 있지만 실은 당연한 이야기다. 확실한 이야기이다. 어떤 같은 밤들이 자꾸만 포개지는 나의 시간 속에서도 말이다. 몇번의 5월의 밤이 포개지는 나의 시간 속에서도 말이다.(「그럼 무얼 부르지」 167면)

 

이 장막은 그들이 “그 앞으로 직선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동시에, “어떤 같은 밤들이 자꾸만 포개지는 (나의) 시간 속”에 그들을 가둔다. 박솔뫼 소설의 인물들은 그렇게 현재라는 시간 속에 갇힌다. “3년 정도의 시간은 하나로 볼 수 있으며 3년 전은 3년 후의 시선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나는 모든 시제를 지울 수 있”다. 모든 시제를 지운다면 3년 전과 3년 후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과거와 미래는 모두 현재로 수렴된다. 3년 뒤에 일어날, 아니 일어난 부산 원전사고는 극장에서 상연되는 다큐멘터리로 지금 우리에게 전달된다(「겨울의 눈빛」). 3년 전에 일어난, 아니 일어날 일본 원전사고는 기념엽서 같은 것으로 박제화되어 영원히 현재화된다(「우리는 매일 오후에」). 그리하여 3년 전이나 3년 후나 세계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세계는 극장화되고, 시간은 현재화된다. 현재라는 시간에 갇힌 극장. 흥미로운 것은 ‘영원한 현재’라는 이 시간감각이 박솔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어떤 정체성과 모종의 연관관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 정체성이란 바로 ‘알바적’ 정체성이다.

 

 

4. 탈정념 주체의 탄생

 

예컨대 오퍼레이터의 정체성 말이다. 이들은 언뜻 대단히 전문적인 직업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르바이터에 불과하다. 「너무의 극장」에서 ‘나’와 남자는 공연 두시간 전에 급하게 불려와 무대감독의 큐시트대로 간단한 기기 조작을 하기만 한다. 물론 소설 어디에도 이들이 알바라는 표현은 없지만, 이들이 극장에 전속된 상근자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오퍼레이터란 비정규직근로자, 프리타, 혹은 아르바이터의 다른 명명방식인 것이다. ‘나’와 남자가 무대에서 벌어지는 경악할 만한 사건에 관해 알 수 없고 개입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이러한 극장 내 지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러나 박솔뫼 소설은 이러한 비정규직의 비애라든가 허무의식이라든가 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그저 단순한 일상을 반복적으로, 희미하게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해만」과 「해만의 지도」에서 ‘나’는 분명 직장을 다니지만 그러한 사실은 사실상 ‘나’라는 존재를 설명해주는 어떠한 규정력도 갖지 못한다. ‘나’에게는 직업적, 사회적 정체성이 소거된 것처럼 보인다. 다른 소설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박솔뫼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공적 영역에서 삶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으로 물러난 존재처럼 보인다. 그들은 ‘나만의 잠’ ‘나만의 일’ ‘나만의 청소’(「너무의 극장」 151면)에만 관심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소설 대부분은 그러한 ‘나만의 것’으로만 채워져 있다. 박솔뫼 소설에서 예상 외로 섹스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 존재에게서 공적인 삶의 내용(직업, 지위 등)을 박탈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사적인 일상과 자기의식 정도가 아닐까? 그럴 때 그나마 격렬한 감정의 교환과 소모가 일어나는 사건이란 고작 섹스 정도가 아닐까? 물론 박솔뫼 소설에서는 그조차도 지극히 습관화된 일상의 일부로 다뤄지고 있지만 말이다.

박솔뫼 소설 중에서 알바적 정체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소설은 「차가운 혀」다. 소설 속 ‘나’는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나’가 만나는 사람은 ‘누나’라고 부르는 여자친구와 바의 주인남자인 ‘사장’뿐이다. 그리고 ‘나’가 하는 일은 청소, 서빙, 안주, 설거지 같은, 바에서 아르바이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다. 그럴 때 ‘나’를 구성하는 현실이란 누나와 사장이거나 바에서 ‘나’가 하는 일뿐이다. 특히 사과와 오렌지를 깎는 일.

 

 그 모든 것을 사과와 오렌지 들을 깎으며 깨달았다. 나와 사과와 오렌지는 삼각형을 이룬다. 사람들에게는 기둥이 필요한데 내게는 그것이 사과와 오렌지인 것이다. (…) 이것이 없다면 저것을 가져와야 한다. 하나의 세계가 흔들리면 그 흔들리는 세계와 상관없이 자신을 지켜줄 또다른 세계가 있어야 했다. (…) 나는 서 있고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오렌지를 든다. 무엇을 들든 아름다운 삼각형이다. 하나가 빠지면 어느 순간 이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빈손이 될 수 없다.(「차가운 혀」, 『그럼 무얼 부르지』 10~11면)

 

소설 속 ‘나’는 사과와 오렌지로만 이루어진 앙상한 현실에 둘러싸인 존재다. 혹은 누나와 사장으로만 이루어지거나. 이 앙상한 세계에도 관계의 삼각형은 존재한다. 예컨대 ‘나-사과-오렌지’ 혹은 ‘나-누나-사장’. 이러한 삼각형에서 언뜻 연상되는 것은 지라르(René Girard)의 욕망의 삼각형이다. 대상을 직접 욕망하기보다 타자(중개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욕망의 간접화, 또 그에 의해 사후적으로 생산되는 대상에 대한 욕망. 지라르의 해명처럼 그것이 근대 주체의 욕망의 공식이라면, 작가는 자기 세대의 감각에 따라 이 욕망의 공식을 해체하고 그것의 새로운 버전을 창조한다. 무엇보다 박솔뫼 소설의 삼각형에서, 타인의 욕망에 의해 촉발되는 주체의 욕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가운 혀」에서 서술자에 의해 그려진 ‘나-누나-사장’의 삼각형을 보라. ‘나’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보다 사회적, 경제적, 계층적 지위가 높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장은 결코 ‘나’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누나가 부러워했던 그의 런던 체류 경험조차 ‘나’에게는 어떤 내적 동요, 예컨대 시기나 질투 혹은 좌절감 같은 감정도 불러일으키기 못한다. “나는 그 사실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본 것이 없으니 그리는 것도 없다. 아는 것이 없으니 무서운 것이 없다.”(36면) 「차가운 혀」에서 그려지고 있는 삼각형은 욕망의 운동과는 무관한, 차라리 “흔들리는 세계에서” ‘나’를 지켜줄 최소한의 삶의 조건에 불과하다. 그것마저 사라졌을 때 ‘나’에게 남겨진 것은 ‘빈손’과 “희고 끝없는 커다란 세계”(33면)뿐이다. “어떤 새로운 세계가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31면)

 

누나는 사과 같고 오렌지 같고 사슴 같고 토끼 같다. 누나는 내가 보는 것을 평생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장이 본 것을 보지 못해 우는 누나가 보는 것을 평생 보지 못할 것이다. 사장은, 사장도 같다. 이것으로 우리 셋은 똑같다. 우리는 누군가의 삼각형이 되지 못하지만 우리 셋은 같다. 이것으로 우리 셋은 똑같다.(37면)

 

‘나’의 욕망의 대상은 누구인가? 누나인가, 사장인가? 둘 다 아니다. 누나는 사과나 오렌지 혹은 사슴이나 토끼처럼 흔하거나 대체 가능한 대상에 불과하다. 사장은 ‘나’에게 앎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게다가 돈, 명예, 사회적 지위, 명성 같은 것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에게 욕망의 중개자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다. 그나마 “사과와 오렌지보다 강력하고 복잡”(14면)한 누나가 있지만, 그런 누나조차 결국 ‘나’에게는 사과나 오렌지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박솔뫼 소설 속의 삼각형을 ‘무욕망/탈정념의 삼각형’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갈등과 긴장이 없는 무정념의 관계이자, ‘나’의 무지에 기반한 경험론적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다. 알지 못하므로 욕망하지 않고, 욕망하지 않으니 갈등이 없다.

사정은 다른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6) 박솔뫼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특이하게도 포기나 좌절, 실패에 대한 감각이 없는데, 이는 타인과의 의미있는 관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7)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도, 해야 한다는 의지도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무런 사회적 관계도 맺지 못한 채 ‘자기만의 일’에 골몰하는 데 정말 만족하는 것일까? 답답한 현실이 개인에게 부과하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일까? 아무런 고통도 없는 것일까? 설령 고통이 있다고 할지라도 소설 속에서 그것은 무형태로 나타난다. 유의미한 참조지점으로서의 세계라는 거울이 없기 때문에, ‘나’는 자기가 겪는 현실적 고통조차 상징화, 의미화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정념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어쩌면 무정념의 주체란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위한 나름의 방어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금욕적인 태도와도 관련된다. 공적 사회 속에서 자신을 의미있는 존재로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는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증받지 못한다. 금욕은 그렇게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세대가 발견한 자기 정당화의 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 관습 대신 일상적 습관을 추구한다, 성실하게. 박솔뫼의 소설에서 습관과 반복이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끝(end)은 있어도 종결(closure)은 없다. 종결이란 세계에 대한 해석이자 어떤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그래서 종결은 어쩔 수 없이 자아의 통제에서 벗어난 객관적 영역의 문제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박솔뫼 소설의 인물들은 소설이 마칠 때까지 현재의 주관적 상태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입을 다문 채로 나는 그 모든 것을 반복할 것이며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라고 어디에서 잠을 자든 그렇게 속삭였다.”(「겨울의 눈빛」 152면)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영원히 변하는 것은 없으니 ‘나’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산책을 할 뿐이라는 것, 그 모두를 반복하는 것뿐이라는 박솔뫼 소설의 전언은 예언 없는 세대의 저주다. ‘영원한 현재’라는 시간감각이란 그렇게 세계의 변화 불가능성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아르바이터로서의 불안정한 삶이 지속될수록 그들의 청춘도 그렇게 유예된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 갇힌다. 그리하여 좌절도, 패배도, 실패도 유예된다. 그러니 분노나 불안도 없다.

이것이 박솔뫼의 소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이것이 젊은 세대의 문학 주체가 보여주는 현실감각이자 삶에 대한 방법론적 태도다. 박솔뫼 소설을 구성하는 극장적 세계와 탈정념적 주체는 그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지만 이즈음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틀’의 상상력, 운명론적 태도, 세계와의 대결은커녕 갈등도 없는, 차라리 세계 자체를 삭제해버리는 문학적 경향과 의미심장한 접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우리는 무엇을 더 얘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과거의 문학과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새로운 감수성의 배치인가, 아니면 현실에 억눌린 존재의 무반응을 가시화하는 것인가? 그에 대한 답변은 아직은 이른 것 같다. 박솔뫼의 소설은, 그리고 그와 세대를 같이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이제 막 자신을, 자기 문학적 세계를 증명해 보이기 시작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솔뫼의 소설이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자기 세대의 다른 작가들의 소설에 비해 그들 세대가 처한 상황에 이토록 자각적이고 예민하다는 것, 그리고 가능성이 차단된, 예언이 불가능한 세대의 현실감각과 세계인식을 나름의 방법론적 모색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박솔뫼는 2010년대 젊은 세대 소설의 특성을 예각화해 보여주는, 전형적이면서도 예외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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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영찬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비판적 단상」,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참조.

2) 김형중은 “정념에 지배당하는 화자”의 “정념의 배출”이라는 측면에서 박솔뫼 소설의 특징을 일반화하는데(김형중 「‘탈승화’ 혹은 원한의 글쓰기」, 『문학과사회』 2013년 봄호 377~81면), 실상은 정반대다. 박솔뫼 소설의 중심에 있는 것은 오히려 정념의 소거와 삭제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이 작가 특유의 현실인식과 세계감각에서 나오는 주체 태도다. 자세한 얘기는 뒤에서 상술한다.

3) 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박솔뫼 소설은 다음과 같다.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자음과모음 2014) 수록작과 「너무의 극장」(『문학과사회』 2011년 겨울호), 「우리는 매일 오후에」(『현대문학』 2012년 8월호), 「겨울의 눈빛」(『창작과비평』 2013 여름호). 이하 인용할 때는 작품 제목과 면수만 밝힌다.

4)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장이지 옮김, 현실문화 2012, 11면.

5) 김홍중 「탈존주의의 극장박솔뫼 소설의 문학사회학」, 『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 91면.

6) 관계의 파탄과 긴장의 종결 이후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게 된” 『을』의 젊은 여행자들을 보라. 박솔뫼 장편 『을』, 자음과모음 2010, 195면.

7) 김홍중은 박솔뫼의 소설에서 “무기력(포기, 좌절, 비관)에 대한 긍정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의 태도”를 포착하고 그것을 최후의 세대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고안해낸 하나의 사상”으로 보고 있는데(김홍중, 앞의 글 100면) 박솔뫼의 소설은 그 포기, 좌절, 비관을 ‘긍정’한다기보다 오히려 그에 ‘무감각’하다고 보는 편이 작품의 실상에 좀더 근접한 이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