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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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시인 특집

 

민구 閔九

1983년 인천 출생.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azino@naver.com

 
 
 

동백

 

 

나는 항상 그를 본다 유년의 어느날

따귀 맞은 채 올려다본 교정 한가운데서

유유히 담을 넘던 사내의

멋진 신발을 기억한다

 

그는 내가 태어난 항구도시 벽면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상금이 적힌

수배전단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는 소문대로 민첩했다

제보를 받고 달려가면

무지개 연막을 치고 자갈이 무성한 강을

단숨에 건너 산 너머로 달아났다

 

증거랍시고

수면에 번진 발자국을 떠내거나

기절한 물방개를 흔들어 깨울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번번이 그를 놓치는 대신

작은 여인의 손에 수갑을 채웠고

밤마다 송진이 흘러내리는

구릿빛 책상도 하나 가졌다

나는 서랍 속 수사일지에

그녀의 사진을 끼워둔다

 

그녀가 산중턱 어느 절간에서

발아래 펼쳐둔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세던 사내와 잠시

놀아났다는 사실도 잊은 채

 

 

지붕 위에서

 

모함을 받은 뱀은 거처로 돌아가서 혀를 깨물었다 해전에서 패한 가오리와 악어는 후궁의 지갑과 가방으로 가공됐다 멀쩡한 이슬을 내온 풍뎅이는 기름 발라 태양국으로 유배됐고 새로운 화포를 고안해내지 못한 죄로 무당벌레는 여러 군데 낙인이 찍혔다 노역에 지친 달팽이는 바위를 지고 이를 눈감아준 여치는 두 다리가 꺾이었다 주머니고양이는 등에 업은 세자가 울어 정원의 개미를 핥았고 아미산 굴뚝의 잡초를 베던 사마귀는 간통으로 몰려 백일을 굶긴 배우자와 함께 감금됐다 시를 쓰던 가재는 서가의 모든 종이를 불태우고 손이 찢긴 채 바위 아래 깔렸다 거미는 두려웠다 벌써 그에게 빌려온 책이 얼마던가? 그는 죽은 왕에게 하사받은 명주로 책을 감아 문밖에 대기중인 잠자리에게 당부했다 그러나 왕은 예리했다 거미를 성 밖으로 추방시켜 해와 놀아난 달의 가죽을 벗기도록 하고 줄에 매인 잠자리는 천천히 식어갔다 나는 하루종일 불길이 치솟는 성을 바라보았다 새들은 떨어뜨린 문자를 줍느라 대숲을 샅샅이 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