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조선어의 행방, 디아스포라의 운명
전성태 全成太
소설가. 소설집 『매향』 『국경을 넘는 일』 『늑대』 『두번의 자화상』, 장편 『여자 이발사』, 산문집 『세상의 큰형들』이 있음. jstroot@hanmail.net
금희 錦姬
1979년 중국 길림성의 작은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연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다 2006년 장춘에 정착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07년 『연변문학』에서 주관하는 윤동주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저서로 중국에서 출간된 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과 한국에서 처음으로 펴낸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이 있다. 현재 장춘에 머무르며 한국과 중국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금희가 한국 독자에게 처음 인사한 작품은 2014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발표한 단편 「옥화」다. 조선족 신진작가의 소설이라는 면도 이채로웠지만, 탈북여성을 소재로 한 「옥화」는 마치 현장으로 직격하는 듯한 충격이 있었다.
「옥화」에는 한국 정주 이전의 경유지인 중국을 무대로 탈북여성의 신산한 삶이 조선족 언어의 질감으로 구체화되어 있다. 교회에서 2년간 인연을 맺어오던 탈북자 ‘여자’가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면서 홍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홍은 난처하다. 그녀의 형편에 적은 돈이 아니고, 더구나 탈북여성은 교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다. 교인들이 돕자고 알선한 일자리도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금방 그만두고, 도움을 당연시 여기는데다가 청하는 손길이 지나치게 당당하다. 한국행을 앞두고는 홍 자신뿐 아니라 여러 지인들에게 손을 벌려 ‘모금’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홍에게는 노총각 남동생과 살림을 차렸다가 홀연 사라진 탈북 처녀와의 아픈 인연이 있다. 그녀가 바로 ‘옥화’인데 옥화가 사라지면서 홍은 남동생과 친정어머니를 연이어 잃는 아픔을 겪었다. 선의에 대한 배신감이라고 할까, 쓰린 개인사가 중첩되며 홍은 갈등이 깊어진다.
이 뜨거운 소재는 그러나 관계에 대한 보편적 질문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타자에게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하고, 어떻게 하면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홍에게 한때 가족이었던 옥화나 지금 짐스러운 존재로 다가선 탈북여성은 모두 경제적 난민이다. 한국에 노동자로 몇년 이주했다가 돌아온 시형(媤兄)이 “에이, 못사는 게 죄지. 잘사는 나라에 살지 않는다고 대우가 이렇게 다르니……”(『세상에 없는 나의 집』 81면) 하는 푸념은 어쩌면 옥화나 여자의 육성으로 고스란히 돌려놓아도 무리 없다. 옥화의 행로이기도 한 ‘북한-조선족사회-남한’으로 이어지는 분단의 트라이앵글이 자본으로 재편되어 구조화된 점을 소설은 놓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런 구조를 내면화한 개인들을 끈질기게 탐색하는 데 공을 들이며 인간의 존재조건을 살핀다. 뻔뻔하게 도움을 요구하고 제대로 고맙다고 얘기하지 않는 탈북여성의 태도에서 인간으로서 자존심이 훼손당한 자의 상처를 읽어내며, 자식을 버리고 선의를 배반하며 사라져야 하는 그녀들에게서 디아스포라의 운명적 불안을 포착한다. 물론 그 불안의 정체는 ‘자기편이 아닌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이다. 그런 땅이라면 그들은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누구를 만나도 진실한 속내를 보여주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옥화」는 자존감이 훼손되고 불안에 질식한 탈북난민과 남북의 경계지대로 상징되는 조선족사회가 배경으로 조응하면서 상징성과 울림이 큰 소설이 되었다.
옥화는 그 동네에서 마지막으로 ‘떠나가버린’ 북녘 여자였다. 그 여자들 모두 옥화처럼 가야 하는 이유를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조국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그저 떠나가는 게 그들의 바람이었단 말인가. (…) 어쩌면 저런 불안감 때문에 그들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다시 불안하지 않을 곳으로……(83면)
「옥화」로 단번에 한국문단의 주목을 받은 금희는 단편 「봉인된 노래」(『실천문학』 2015년 봄호)를 발표하고, 그간 조선족 문예지에 발표한 소설 7편을 묶어 『세상에 없는 나의 집』(창비 2015)을 출간했다. 이 책은 금희의 두번째 소설집이다. 금희는 2013년에 출간한 『슈뢰딩거의 상자』(료녕민족출판사)라는 중단편소설집을 갖고 있다. 2007년 단편소설 「개불」로 『연변문학』의 윤동주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단편 「파란 리봉의 모자를 쓴 소녀」(2009)를 발표하며 조선족 청년작가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듬해에는 북경의 노신문학원 중청년고급연수반에 초청되어 작가수업을 하기도 했다.
소설집 출간 즈음, 그리고 문학행사 참가로 한국을 재방문한 금희를 두차례 만났고, 부족한 이야기는 그가 장춘으로 돌아간 뒤 이메일로 나눴다.
전성태 「옥화」는 언제 집필했으며, 어떻게 한국에서 발표하게 되었나?
금희 2013년 조선족 문예지의 청탁을 받고 썼는데, 탈북자 문제는 중국정부에서 금기시하는 소재다보니 게재가 쉽지 않았다. 문예지에서 퇴고(退稿) 놓는 일은 흔치 않아 안타까웠다. 이듬해 설 무렵에 다시 원고를 꺼내보니 묵히기 아쉬워서 한국 인터넷을 뒤졌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볼까 궁금하기도 했다. 마침 창비라는 출판사가 전문성도 있고 창간사를 보며 느낌도 통하고, 더욱이 거기엔 편집위원들의 이메일 주소가 있었다.(웃음) 그래서 무작정 투고하게 되었다.
전성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옥화」가 탈북자 문제를 다룬 소설로 읽히는 걸 경계했다. 관심이 소재에 집중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작가로서 복잡한 마음이 느껴진다. 애초에 이 작품을 조선족 문예지에 발표할 목적으로 썼으므로 작가에게는 여러 척력을 견디며 쓸 수밖에 없는 어떤 동인이 있었을 것 같다.
금희 이 소설은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전혀 새롭거나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전후, 북조선이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면서 많은 탈북자들이 내 고향마을(길림성 장춘지구)을 거쳐갔다. 아직 핏줄의식이 강한 조선족은 이들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리고 그들의 처지를 측은해했다. 그들과의 인연이 짧게는 반년에서 일년, 길게는 칠팔년까지 이어지며 가족관계를 맺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인류역사가 내내 되풀이하던 이야기들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고향사람들한테 「옥화」의 이야기들이 별로 낯설지 않은 것은 또다른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장이 다소 바뀌긴 했으나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다시 이어지게 된 ‘남조선’ 사람들과의 조우와 거기에서 파생한 여러 사연들이 있지 않겠나.
전성태 특수하고 센 소재라기보다 일상적으로 편재된 소재여서 손대기 힘들었다는 말처럼 들린다. 옥화와 여자의 운명성을 살펴가는 과정, 홍이 관계의 윤리성을 각성해가는 과정에 이 소설의 진면목이 있는 것 같다. 결국 그걸 밝히고자 했던 게 창작 동인이었나?
금희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나는 어떤 체제나 무슨 주의, 이념 같은 거대담론을 피해서 읽히기를 바랐다. 경제학자의 이론이 좌판 장사꾼한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거시세계와 양자세계에서 운행되는 법칙이 흔히 다르듯 말이다. 나는 미시의 인간 원자들한테 더 관심을 가진 편이라고 해두고 싶다. 섣부른 동정이 때론 비난보다 못할 수가 있듯이,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어떤 성급한 결말을 내릴 생각은 없다.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과정을 거쳐가고 있는 인간일 뿐이다. 사람이 사람한테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마땅히 주어야 하는 것은 ‘존중’뿐임을 새삼 깨닫는다.
전성태 그럼에도 이번 소설집에는 「옥화」뿐 아니라 「노마드」에서도 탈북자 이야기가 생생하다. 첫 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캐릭터다. 물론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찾기라는 주제의 연계와 심화는 두 소설집에서 여일하게 확인되지만, 일상적으로 산재한 풍경이 소설로 이행되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가?
금희 물론 나는 내 주위를 거쳐가는 탈북자들을 작가로서 심상하게 본 건 아니다. 북조선 여자들이 여기 와서 살고 있는데, 들리는 이야기가 맨 그들 이야기인데 도대체 이게 뭘까? 이 현상이 뭘까? 늘 마음이 쓰였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자라면서 한동안 할머니에게 맡겨지기도 했는데 누군가의 동정을 받고 도움을 받는 일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했다. 탈북자들을 보면서 그런 마음이 일었다. 이게 뭘까? 작가로서 뭔가 핵을 집어내야 작품이 될 텐데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천(四川)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 참혹한 재난으로 많은 고아들이 생겼는데 소수민족인 장족(藏族)이 피해가 컸다. 중국정부에서는 고아들을 입양하는 정책을 폈다. 장족은 핏줄의식이 강해서 친지들이 끌어안고 살려는 바람에 입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사회에서 그 아이들을 후원하자는 바람이 대대적으로 일었다. 전에 보기 힘든 운동이었다. 나는 거기서 중국의 경제성장을 실감했다. 먹고살 만해진 것이다. 참혹한 지진현장에 다녀온 일간지 기자 친구가 자기도 후원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도 머리가 뜨거워져서 후원할 만한 아이를 찾아달라고 했다. 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 인사나 연예인, 거부처럼 후원금액이 적힌 커다란 판자를 들고 흔들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돈은 정말 얼마 안돼. 이름 밝히지 않고 그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 죽 했으면 해” 하고 말했는데 친구가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덜렁 내려놓았다. “어쩜 니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는 거다. 내심 나는 참 고상해, 이름도 걸지 않고 댓가도 없이 이런 선행을 할 수 있어, 하고 우쭐한 마음도 갖고 있었는데 친구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니들은 고상하고 속이 편할지 모르겠지만 받는 사람이 느끼는 부담감은 생각해봤니? 차라리 그 사람과 통성명하고 나중에 갚을 기회는 줘야 하지 않니.” 친구의 말을 듣고 아, 이거다, 하는 깨달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탈북자 문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전성태 인터뷰를 보니 조선족 작가라는 이력과 탈북자 소재에 집중하는 한국의 반응을 감당해야 할 통과의례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옥화」를 비롯한 이번 소설집에는 조선족사회가 전면화되어 있기도 하다. 긍정적 모습이든 부정적 모습이든 조선족사회의 세목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소설을 국경 너머 외부에서 발표할 지면을 얻게 되면서 어떤 부담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경우 자연스레 어떤 ‘대표선수’로 다뤄지는 부담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금희 친한 친구에게 소설집을 선물했다. 문학을 하지 않는 친구인데 독후감을 물었더니 아주 불편하다고 했다. 이렇게 까발려지는 게 싫다는 반응이었다.
전성태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나?
금희 내가 없는 말 지어낸 건 아니잖아 하고 말았다. 어쨌든 친구는 기분이 썩 좋지 않다고 했다.
첫 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에 수록된 중편 「뻐스정류장에 핀 아이리스」에 이런 풍경묘사가 나온다.
검고 넓은 동북평원의 밭은, 조나 수수 또는 벼 같은 다른 여러 작물들보다 더우기 옥수수 품기를 좋아했으며, 옥수수를 심는 사람들은 그런 밭의 들쑥날쑥한 가장자리마다에 악착스레 삶터를 마련하고 있었다. 밭의 총애를 증명이나 하듯이 동네의 집집마다 반드시 하나 꼭 장만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햇빛 잘 드는 앞마당에 세워놓은 루자(옥수수건조대)였다. 겨우내 루자에 높이높이 쌓여 있었던 금황색의 메옥수수들은 지금 어느 상인의 창고 속에서 가루로 분쇄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나는 바닥 깊이 비여 있는 그 루자들을 보다가 문뜩 헐떡거리는 말의 땀냄새가 맡고 싶어졌다.(2면)
대지에 새겨진 뭇 삶의 내력을 더듬는 필치가 종래의 우리 문학에서 낯익은 풍경이지만, 금희의 조선어로 다시 만나니 반갑고 애틋했다. ‘련민’ ‘란리’와 같이 두음을 살려 쓰고 ‘느끼군 한다’는 표기법이라든가 ‘금방 타온 이불솜처럼’ ‘아이의 울음이 즘즉해지고’ 같은 표현을 만나면 아득하니 한숨이 나온다. 더 쓰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어감의 문장들로 짠 그녀의 또다른 경향의 모던한 소설들은 또 얼마나 묘하고 풋풋하던지! 금희에게는 한국어에 대한 그런 특권이 있다고 생각되었고, 부러웠다.
금희 이번에 소설집을 출간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조선족 작가라는 사실을 더 실감했다. 이 길 저 길 모색하는 조선족 작가들이 많지 않겠나. 한국 작가처럼 쓰려고 해도 안되고 중국 작가처럼 쓰려고 해도 안되어 고민이 많았다. 일단 나는 모어가 조선어이고 한국이 모어를 공동으로 쓰고 있으니까 한국에서 자양분을 얻을 수밖에 없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했다. 문학은 사회적·문화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거니까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게 있다. 그러면 이제 조선족 정체성을 밝히며 갈 수밖에 없는데,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조선족의 소설로 읽혀야 하는데 고민이 아주 많았다. 창비와 작업하면서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읽히게는 하겠다, 그렇지만 어떤 어휘나 표현은 바꾸지 않고 이후에도 금희표 소설로 가고자 한다고 뜻을 전했다. 창비에서는 지명은 한자음을 쓰고 인명은 중국어 발음 그대로 쓰는 내 방식이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연변, 북경, 청도, 상해…… 이렇게 쓴다. 북경을 베이징이라고 쓰면 그건 한국작가가 쓴 것이다. 조선족은 북경을 북경이라 부르지 베이징이라 부르지 않는다. 옌벤, 칭다오, 상하이…… 이렇게 쓰지 않는다. 근데 나는 인명은 닝(宁), 량즈(良子), 마로얼(马老二)…… 하고 중국어 발음 그대로 쓴다. 그걸 녕, 랑자, 마로이, 이렇게 표기하면 중국어와 한국어 양쪽을 다 아는 나로서는 무척 어색하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때시걱’(끼니) ‘남새’(푸성귀)와 같이 사라진 어휘들이 많다. 표기법도 우리는 애초에 평양의 표기법을 받아들였다. 나로서는 철자나 띄어쓰기 같은 건 얼마든지 물러설 수 있는데 이런 어휘에 있어서는 내 느낌 그대로 적는 걸 양보할 수가 없었다.
전성태 어쩌면 중국 작가의 번역소설을 내는 일보다 까다로운 작업이었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다.
조선족 인구가 180만이니 조선어는 중국에서 소수언어다. 그러니 중국에서 조선어로 창작하는 데는 남다른 자의식이 필요할 것이다. 첫 소설집에 수록된 「아리랑을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에 그 난경이 묘사되어 있다.
나의 류창한 모어는 다만 나와 같은 모어를 구사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편리한 것이였고, 이 나라 다수 사람들과 능통하게 교제할 수 있는 “푸퉁화” 실력에 대해서 나는 항상 자신이 없었다. 평범한 언어라는 “푸퉁화”, 다수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말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언어일 뿐인데 그 평범한 언어를 모어처럼 구사할 수 없어서 나는 그것을 사용할 때에 늘 기가 반쯤 죽어 있었다.(『슈뢰딩거의 상자』 162면)
금희 스스로 조선어로 창작하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밝히기도 했지만, 금희의 소설에서는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탐구가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다. 첫 소설집과 이번 소설집을 나란히 놓고 보면, 첫 소설집은 금희 문학세계의 근원과 바탕이 잘 드러나 있었다. 중편 「제비야 제비야」에서는 이번 소설집의 「봉인된 노래」와 같이 가족서사를 통해 조선족 3세로서의 정체성 탐구가 뼈저리고, 중편 「뻐스정류장에 핀 아이리스」에는 이농과 도시개발로 고향을 상실하고 해체되어가는 조선족사회의 풍경이 그려지는가 하면, 자본의 물결에 휩쓸려 노마드처럼 떠도는 도시인의 삶이 잘 그려진 「슈뢰딩거의 상자」와 같이 모더니즘적 기율로 창작된 일군의 단편들이 눈에 띈다.
조선족으로서 금희의 뿌리는 할아버지가 러시아 블라지보스또끄로 이주하면서부터다. 원적이 경상도였던 할아버지는 블라지보스또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장성해 소련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이후 심양의 조선 영사로 근무했다. 전쟁공로를 증명하는 김일성의 친서를 소지할 정도로 그는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좌천되면서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내리막길을 탄다. 대약진 기근까지 겹쳐서 그는 가족을 이끌고 길림성 장춘으로, 다른 소도시로, 나중에는 방우골(放牛沟, 지금의 장춘공항 부근)이라는 편벽한 시골까지 내려갔다. 대약진 시절과 문화대혁명 시절을 거치면서 조선족 지식인들은 대거 농촌으로 내려갔다.
금희는 1979년 길림성 구태시(九台市) 외곽 소령촌(小岭村)에서 태어났다. 길림사범 출신으로 소학교 교사로 하방(下放)을 한 어머니의 근무지였다. 금희가 태어난 이튿날 부모가 이혼을 해서 그녀의 기억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없다. 두돌 때 어머니가 구태시 신립촌(新立村)으로 발령을 받아서 오빠를 데리고 전근가고 그녀는 할머니에게 맡겨져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까지 자란다. 어린애가 너무 눈치를 봐서 어른들이 불편해했다. 엄마와 오빠를 다시 만났지만 가족 같지 않고 낯설었다. 엄마와 오빠는 질서정연하고 반듯하고 엄숙한 반면 그녀는 낭만적인 기질을 가진 아버지의 성격을 닮은 편이었다. 혼자 공상 놀이를 즐겼고, 일고여덟살 때부터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서 이렇게 사는가, 나중에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왜 나는 엄마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는가 하고 고민하는 아이였다.
그녀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신립촌은 조선족이 4백여호 모여 사는 장춘지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선족 마을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1993년 열다섯살이 되던 해에 연길제일사범학교로 진학했다. 1997년 신립 조선족 소학교로 발령이 나서 2년간 교사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천진으로 나가 한국회사 사무원으로 일했다. 2000년대 초반 그녀는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건너와 모텔 청소, 식당 써빙, 중국어 강사를 전전하며 3년간 한국 생활을 경험했다.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북경과 천진에서 관광 가이드, 중국어 강사로 일했다. 둘째아이를 임신하고 그녀는 장춘으로 돌아와 길림신문사 기자와 장춘사범학교 한국어 강사로 일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슬하의 두 남매를 등교시킨 뒤, 아니면 가족이 잠든 밤에 식탁에서 탁상등을 켜놓고 소설을 쓴다.
전성태 사범학교 시절에 문학보다 오히려 그림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 2006년부터 글쓰기를 했으니까 우리나이로 스물여덟인데, 습작기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금희 뭔가 예술적 활동을 한다면 문학보다는 소통에 장벽이 덜한 미술이 훨씬 자유롭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사범 시절 계속 글을 읽고 썼다. 시와 에세이였다. 그러고 나서 사범 졸업 후 십년 동안은 습작하지 않았고 독서도 놓았다. 기독교 성경을 몇번 탐독한 게 전부다. 발버둥처럼 문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다 한국에 체류할 무렵 너무 힘이 들어서 오히려 쓰고자 하는 열망이 일었다. 조선어로 창작된 내 소설로는 직접 교류를 할 수 없는 한족 문인들과의 거리감, 재중국 한인기업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을 관리할 때에 느꼈던 미묘한 이중의 이질감, 한국에 체류하면서 느낀 동족으로부터의 배척, 그리고 버스에서 정체성을 질문당하는 어린 아들의 혼란을 보고 있어야 하는 씁쓸함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런 일련의 문제들을 디딤돌 삼아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전성태 『ASIA』에 발표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중의 아바타 속에서」라는 산문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앞서 ‘너는 도대체 누구 편인가’ 하고 자주 자문했다는 얘기가 인상적으로 남는다. 조선족으로서 정체성이 상징으로 드러난 말 같았다.
금희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두 집합체에 모두 소속돼 있는 나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질문이 잇따르게 돼 있다. “축구경기를 하면 중국을 응원하는가, 한국(또는 북조선)을 응원하는가.” 다행히 평화시기라서 이 정도가 아니겠는가? ‘너는 도대체 누구 편인가’라는 질문에 한동안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전성태 그래서 답을 찾았나?
금희 결국 그 답은 상상 속의 내 비문(碑文) 속에서 찾았다. 나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확실히 ‘누구의 편’이며 ‘누구의 편’도 아닐 수는 없는 것이며, 그러나 죽는 순간 그냥 ‘나’로 돌아간다는 것이 내 답이었다. 국가와 민족, 또다른 신분은 내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입어야 할 육체, 아바타 같은 것이다. 조선어로 글을 쓰는 작가로서 나는 진정한 보편의 자유지에서 세계 여러곳의 문학과 만나기 위해서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과 자원만큼 최선을 다해 글을 써나가야 할 것이다. ‘민족’이니 ‘상처’니 하는 차원도 벗어나는 여행을 해야 할 것이다.
전성태 중국 최고 권위의 문학교육기관인 노신문학원 중청년고급연수반(13기)을 수료했다. 그곳에서 많은 당대 중국 작가들과 만나고 교류했을 텐데 그때의 경험은 어땠는가?
금희 노신문학원 고연반(高研班)은 초빙강사나 모집작가군의 수준이 전문적이고 높았다. 우리 반에 50여명의 작가들이 있었는데 성(省)에서 두명 꼴로 추천되어 온 이들이었다. 중국작가협회 직속으로 관리되고 4개월간의 수강비용이나 숙사비용, 각종 행사의 체험비용까지 모두 정부에서 감당한다. 당시 나는 아직 미미한 신인작가였으므로 꿈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가 싶기도 해서 고민 끝에 북경으로 갔다. 글쓰기에 대한 혼란과 고민이 많았던 시절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조선족 작가는 나 혼자였다. 나는 중국 작가들이 하는 얘기와 그들의 작품을 읽고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은 내 작품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지성의 싸움이라고 할까, 중국 작가들과 피 튀길 만큼 열띤 토론이 많이 벌어졌다. 그곳에서 나는 뾰족한 사람이었다. 중국문단을 잘 몰랐으므로 거기에 참여한 작가가 얼마나 유명한지 어떤 문학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따질 염도 없이 작품을 읽고 느낀 대로 신랄하게 비평했다. 중국문단도 권위주의가 심해서 내가 어떤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옆 동료들이 은근히 시원해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번은 기괴하고 판타지적 상상력으로 소설을 쓰는 유명작가의 작품을 품평했는데 동료들이 조심스러워하며 좋게만 얘기했다. 그 작가가 나에게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다고 비평을 청했다. 나는 소설적 기법이 아주 현란하지만 도대체 당신이 무얼 썼는지 모르겠다, 주제도 아직 당신이 정리하지 못한 문제를 쓰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그가 나의 비평이 맞는다고 했다. 어쩌면 거기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단아였다. 금희는 어디서 나온 작가냐? 하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청하는 동료들도 꽤 있었다.
전성태 당대 중국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자극도 많았을 텐데 어땠는가? 요즘 중국 작가들의 글쓰기 경향은 어떻고, 금희의 솔직한 판단은 어떤가?
금희 나는 동시대 중국 작가들로부터 자양분을 많이 받지 못했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많이 다르고 소설의 소재도 세계문학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중국이나 조선족 문단에서 ‘무엇을 쓰느냐’와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어왔다. 지금은 신사실주의문학이 대세이고 인민의 생활상을 많이 다루는데 당대 중국 작가들은 인간의 본연에 대한 질문의 핵심에서 벗어나 빙빙 겉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테면 작가들이 많이 쓰는 농촌과 농민공 이야기를 읽고, 그걸 쓰는 본연의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작가들은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하고 어쩌고 운운한다. 물론 중국에도 사회문제가 너무 많다. 기형적인 문제가 많다. 당연히 그런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겉만 빙빙 돌면서 인간에 대해 도달하지 못하면 문학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못살면 불행한 건가? 사회적 빈민층이면 불행한가? 그게 다인가? 그들도 웃고 울고 사기 친다. 작가가 쓰는 건 그저 현장을 재현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진실을 쓰는 게 작가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에 도달할 수 없고 얼마만큼 양파를 벗겨내야 하느냐가 작가의 일이다. 그 통찰력으로 삶과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떤 미사여구를 구사하고, 비참한 이야기를 쓰고, 무슨 세태와 인정을 쓰고, 가족이야기를, 역사를 쓰면 무엇하느냐. 자기 자신이나 제대로 썼는가? 이런 질문이 자연 따르게 되고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루쉰(魯迅), 라오서(老舍), 딩링(丁玲) 소설의 높은 진정성, 문학의 고뇌, 치열한 자기성찰을 당대 중국문학에서 느낄 수 없다. 위화(余華)처럼 문화대혁명을 소설화하는 작가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도 위화는 한번 만나보고 싶다.(웃음) 좋은 문학이란 다루는 주제에 대해 얼마나 깊게 들어갔는가, 그리고 그 주제를 어떻게 이 시대에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표현했는가, 아울러 이 시대의 흐름을 얼마나 정확히 꿰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문학의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끊임없는 실험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문학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거고, 반대로 선배작가들이 통찰했던 주제의 깊이에까지 들어가지 못했거나 더이상 진전이 없다면 혹은 주제 자체를 포기한 문학이라면 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지도 않을뿐더러 대중에게 존중받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노신문학원에 머무를 때가 한창 노신문학상 심사 시즌이었다. 노신문학상은 우수한 중단편소설을 뽑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녁이 되면 기숙사에 불이 꺼져 깜깜했다. 다들 어디 갔지 싶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유력한 평론가나 작가를 찾아서 밥 먹고 술 마시느라 난리가 난 거다. 나는 죽자고 동료작가들 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씁쓸했다.
전성태 첫 소설집의 표제작인 「슈뢰딩거의 상자」는 사뭇 실험적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평행우주, 다중세계를 상상력의 모티브로 삼고 있다. 젖먹이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대도시의 회사에 취업한 여자가 주인공이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보낼게.” 과거 남자가 가족을 두고 돈벌이에 나서던 시절 얘기가 역전된 듯한 설정이 꽤 현실적이다. 여자는 익명성의 대도시에서 그동안 자신을 가둬놓았던 어떤 마법에서 풀려난 듯한 자유를 느낀다. 서로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낯선 대도시가 점점 상관이 있는 세상이 되고 가족이 있는 곳이 점점 멀어진다. 주인공이 들여다보는 거울 속 제 모습에 대한 인식이 변해가는 게 인상적이다. 자의식처럼 냉소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하던 거울 속 여자가 점점 낯설어지고 또다른 하나의 삶을 살아가는 인격체라는 걸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거울 속 여자를 ‘그 여자’라고 칭하게 된다. 이런 환상적 기법으로 모더니스트의 면모를 보이는 작품들을 쓰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금희 「슈뢰딩거의 상자」는 노신문학원에서 지내며 구상한 작품이다. 인간들의 본질적인 면을 다루자면 모더니즘적인 방법도 중요한 방편이 된다는 게 당시 내 생각이었다. 중국에서 198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이 꽤 있었는데 거의 사라지고 잘 시도되지 않는 기법이었다. 중국 작가들과 이 구상을 나누었는데 다들 참신하다며 한번 써보라고 권했다. 여러번 퇴고하면서 공들여 쓴 작품이었다. 어쨌든 조선족문학에서는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로서는 가장 완성도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는 평을 들었다.
전성태 그런데 그런 작풍이 이번 소설집에서는 사라졌다.
금희 그런 방식으로 ‘쪼고’ 앉아 있으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 같았고, 더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뭐랄까, 이렇게 계속 쓰다보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웃음)
전성태 그러나 그런 작품들을 통과하면서 이번 소설집이 보여주는 좀더 고양된 일상성이라든가, 인물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힘이 길러진 것 같다. 일상적인 서사에 사회의 구조가 깔끔하게 얹히는 넉넉함도 이번 소설집에서 눈여겨볼 변모였다. 기왕 조선족문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묻겠다. 우리에게는 조선족 작가라면 『격정시대』를 쓰신 김학철(金學鐵, 1916~2001) 선생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만큼 조선족문학이 한국에 많이 소개돼 있지 않아서 금희의 출현을 더 반기는 것 같다. 김학철 세대로부터 금희까지 어떤 세대 구분이 가능한가?
금희 문단에서는 조금씩 다르게 구분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조선족문학은 대체로 일제강점기와 건국 이후로 나뉘며, 일제강점기는 다시 망명기(1910~19), 이주기(1919~31), 정착기(1931~45), 광복기(1945~49)로 구분하고, 건국 이후는 계몽기(1949~57), 암흑기(1957~76), 부흥기(1976~80년대 후반), 성숙기(90년대~현재)로 구분할 수 있겠다. 김학철, 김창걸 선생은 건국 이후 초창기의 대표적인 원로문인이다. 이후 문단이 반우파투쟁과 문혁을 겪으며 암흑기에 빠져든 탓에 리근전, 허홍식 같은 많은 작가들이 나타났다가 그 시기를 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다음 세대로는 70년대말~80년대초 문혁이 끝나고 부흥기에 접어들 무렵 당시 중년세대였던 림원춘, 정세봉, 리원길 등과 청년세대인 우광훈, 리혜선, 허련순 등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다. 이들 뒤로는 지금 오십대에 들어선 김혁 등 문인들이 있고, 그다음에 나와 같은 삼십대의 작가들이 한창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개혁개방 초기에 태어나 조선족 마을공동체의 해체와 이농의 삶을 경험한 세대다. 종전의 전통사실주의 기법과 전혀 다른 기법의 관념을 갖고 있는 세대다.
조선족문단은 원체 역량이 강하지 못한데다 문혁을 거치면서 너무 큰 타격을 입어서인지 1980년대 선봉문학(先鋒文學)이라 하여 중국문단의 그 거세찬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물결을 따라가지 못했다. 위화나 쑤퉁(蘇童)도 선봉문학의 대표작가였으나 이후 신사실주의로 전향했다. 그 시기도 나름 ‘조선족문단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새로운 작가들이 프로문학에서 탈피하여 인성과 문학의 본연을 묻는 좋은 작품들을 많이 생산했지만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는 도전해보지 못한 채 중국의 거대한 선풍소설 열기가 가라앉는 걸 보고 말았다. 그만큼 중국문단의 주류와도 한참 거리가 있었고 교류도 빈번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한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신진소설가들은 선배들의 사실주의문학보다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한다. 내가 등단을 하기 전 활동하던 리진화(李珍花)라는 작가가 있었는데 이미 비교적 성숙한 포스트모던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가 조선족문단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중국어로 창작하는 조선족 작가는 그룹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히 적다. 몇몇 특수한 사례를 빼고는 모두 조선어로 창작한다. 아마 이후에는 중국어로 창작하는 조선족 작가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전성태 금희의 소설 주제는 ‘정체성 찾기’이고 그 질문은 무척 고독한 시간에서 길러진 것 같다. 정체성에 대한 깊은 혼란과 질문을 가진 훌륭한 작가들의 경우처럼 금희 역시 고립무원의 깊은 골짜기에서 제 메아리를 들으며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금희의 목소리는 제 메아리를 넘어서 세계로 울림있게 당도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금희의 소설은 ‘떠도는 자의 운명’에 대한 노래라 명명하고 싶다. 나고 자란 자리에 앉아 있어도 고향을 잃은 자는 모두 디아스포라라는 게 금희의 전언이지 않는가? 떠도는 자들의 세계야말로 현대인의 운명이기도 하다. 조선족에게 다가올 운명은 어떨 것 같은가?
금희 조선족의 운명이라? 여기에 대해선 별로 낙관적이지 않다. 조선족의 운명은 남북의 운명에 달려 있다고 전제하고 이야기해보자면 중국 조선족이란 어차피 전쟁의 부산물, 사생아다. 농촌 마을을 위주로 영위되었던 조선족사회의 역량과 사명은 이미 마감되었다. 우리 아래 세대들은 과연 무슨 이유로 한국을 거절하고 조선을 거절하고 혹은 한족을 거절하고 조선족으로 남고 싶어할까? 조선족사회가 다른 공동체에 비해 보장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나?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이 5,60만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 조선족 인구의 삼분의 일이다. 이들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부모세대를 따라서 자녀들이 속속 한국으로 들어가 정착하는 걸 보면 한국에 점차 흡수되는 사람들이 늘 것 같다. 중국 내에서는 도시로 진출한 조선족 역시 상당한데 도시에는 조선족학교가 거의 없으니 이들 아래 세대부터는 중국 한족에게 동화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농촌 거주자가 조선족 인구의 삼분의 일을 유지하고 있다지만 거개가 노인들이니만큼 갈수록 인구는 줄 것이다. 만에 하나 한반도에 격변이 일어난다면 꽤 많은 조선족들이 그 혼란을 틈타 통일된 모국으로 이주해갈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고 해도 중국과 모국 사이에서 여전히 표류하는 일부의 조선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전성태 인터뷰에 허락된 시간이 다 되었다. 10년 후, 20년 후 작가로서 금희는 어떤 모습이 상상되는가?
금희 많은 나라의 독자와 작가와 교제하는 사람, 세상에 대해서 본인이 져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 이 세상을 그만두는 날에 대비해 인생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좀더 깨달아서 그것을 정리해 소설로 보여줄 수 있는 작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