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 소수자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본다 ①
장애인은 대한민국의 시민인가
노동권과 자기결정권을 통해 본 장애차별주의와 시민권
김도현 金度賢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발행인. 저서로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장애학 함께 읽기』 등이 있음. phare7@naver.com
1. 장애차별을 이해하는 키워드: 인격, 시민권, 배제
예전에 제법 인기를 끌었던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중 「남자의 자격」이라는 것이 있었다. 실제 내용이 그 타이틀과 얼마나 상관성을 갖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자의 ‘자격’이란 곧 남자라는 집단 내에 포함될 수 있는 ‘조건’과 ‘능력’을 의미한다.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 중 하나는 어느 문화에서나 장애—정확히는 서구적 장애 개념에 대응하는 무엇—는 인격(personhood)이라는 개념, 즉 인간의 자격이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범주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케냐의 마사이족에게서 서구사회의 장애에 대응하는 범주로 ‘올마이마’1)가 언급되는 것, 그리고 투아레그족2)이 장애라는 개념에 대응하는 단어를 추함, 과도한 주근깨, 툭 튀어나온 배꼽, 축 처지거나 작은 엉덩이, 사생(私生) 등을 언급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 온전한 인간대접을 받기 위해서 어떤 능력과 자격을 지녀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반유목민족인 마사이족에게는 계절에 따라, 또는 급박한 환경의 변화에 따라 먼 거리를 신속하게 옮겨 다녀야 하는 이동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투아레그족 사회에서 한명의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혈족(공동체)을 이어가는 데 기여해야 하는데, 앞서 언급된 것들은 모두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거나 부계사회에서 혈족의 일원임을 확정하는 데 제약을 초래하는 특성인 것이다. 2)
이처럼 장애는 인격의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장애(dis-ability)라는 상태(condition)는 곧 인간의 능력(ability) 및 조건(condition)을 갖추지 못함을 말한다. 장애인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인간 이하의 존재, 즉 비인격체(non-person)로 간주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장애인의 비인격화가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하나의 대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이는 서구화된 세계에서는 적용되지 않을 것 같지만, 오히려 훨씬 정확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시민으로서 존재하는 세계, 즉 문명화된(civilized) 세계에서 장애인이란 정확히 시민권(citizenship)—시민의 자격 내지 신분—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전체 장애인의 40% 이상이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으며, 60% 이상이 노동으로부터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교육과 노동(근로)이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교육권과 노동권이라는 ‘권리’로부터의 배제만은 아닐 것이다. 즉 기본 의무로부터의 면제/배제와 더불어 그러한 의무를 전제로 하는 일련의 권리와 공동체로부터의 배제인 것이다. 그리하여 장애인들은 아직까지도 집회현장에서 ‘장애인도 인간이다!’ ‘장애인도 시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흔히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며, 인간은 ‘이성(理性)’적인 동물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곧 인간의 자격에 대한 규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일정한 연령이 되어서도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그리고 비이성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자는 인간/시민 대접을 받지 못한다. 현대사회의 시민권 자체가 노동하는 자를 근간으로 구축되어 왔을 뿐 아니라, 사회계약론적 전통에서 이성적 사고능력을 지니지 못한 자들은 ‘계약-권리-정의’의 주체에서 원천적으로 삭제되어왔다. 따라서 ‘불인정 노동자’로서의 장애인은, 그리고 갑-을이라는 계약관계의 장(場)에서조차 배제된 ‘을 이하의 인간’으로서의 인지장애인은 일종의 비(非)시민으로서 이 사회에 남게 된다. 이 글에서는 장애를 지닌 인간이 우리 사회의 (평등한) 시민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지를 성찰해보고자 한다.
2. 불인정 노동자로서의 장애인
장애인이라는 범주의 역사적 형성과 노동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정부에 이러저러한 요구안을 제시할 때, 활동가들은 보통 한국보다 장애 관련 정책이 잘되어 있다고 하는 외국의 사례를 함께 정리해서 첨부하곤 한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기가 조금은 애매한 영역이 있으니, 그게 바로 장애인의 노동권 문제다. 우리나라의 장애인권이나 장애인복지 관련 지표를 살펴보면 거의 모든 항목이 OECD 34개 회원국 중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지만,3) 2014년을 기준으로 36.6%에 불과한 장애인의 고용률만은 OECD 평균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는 ‘장애(인)’이라는 근대적 범주의 형성과정을 이해한다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형성기, 즉 본원적 축적기는 토지에서 쫓겨났지만 임노동관계에 편입되지 못했던 이른바 ‘부랑자’가 대량으로 양산된 시기였다. 느리고 자율적이며 유연한 형태의 노동에 익숙해 있던 많은 사람들은, 칼 맑스가 『자본』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별다른 도리가 없어서’ 그렇게 부랑자가 되었는데, 이들을 임노동관계로 포섭하기 위해 국가는 강제수용과 훈육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서구 사회복지의 역사에 등장하는 구빈원(救貧院, workhouse)은 사실 바로 이러한 강제노동과 결합된 수용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구빈원에서는 일정 시점부터 효과적인 훈육과 나태의 방지를 위해 수용자를 분류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핵심적인 목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간주된 사람들을 일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즉 일을 할 수 있는 몸(the able-bodied)을 선별하기 위해 일을 할 수 없는 몸(the disable-bodied)을 명확히 규정하고자 했고, 이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장애인’(disabled people)이라는 개념이 발명된다.4) 요컨대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에 생겨난 장애인이라는 범주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노동체제에서 배제당한 사람들, 즉 ‘불인정 노동자’(unrecognized worker) 집단을 가리켰던 개념인 것이다.5)
다른 한편 우리는 장애인 개념이 처음 형성되던 바로 그 국면 속에서 노동이 지닌 역사성을 읽어낼 수 있다. 즉 그들이 어느 시점에 노동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새롭게’ 규정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까지는 그처럼 인식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노동이 무엇이며 어떤 활동을 노동으로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결코 초역사적이거나 보편적인 게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이는 결코 순수하게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며, 경제적인 것만큼이나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 아니 근대 경제학의 명칭이 애초 정치경제학이었던 데서 드러나듯 언제나 ‘정치적인 동시에 경제적인’(political-economic) 문제라는 것이다.
워커홀릭 놈팡이라는 역설적 존재와 모순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논의를 풀어가보자. 주변의 동료들은 종종 필자를 보고 워커홀릭(workaholic)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내가 ‘노동’중독자라는 것인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맞을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틀린 얘기다. 노동의 가장 간결한 사전적 정의는 ‘몸(육체와 정신)을 움직여 일을 함’이지만, 사회적 의미에서의 노동이란 이것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어떠한 활동을 하되, 그것이 가치가 있어야 하고, 그러면 그에 따른 대가가 수반된다. 즉 가치가 있어서 대가가 제공되는 활동, ‘활동 → 가치 → 대가’라는 계열 내에 있는 활동이 노동인 것이다.6) 이것이 노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규범 내지는 통념(즉 이데올로기)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졸업 후 15년 동안 장애인운동을 하는 활동가로 살아왔던 필자는 늘 무언가 꼼지락거리고 애써가며 가치있는 일을 했던 것 같은데, 대개의 경우 대가를 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이나 국민연금공단에서도 내가 노동을 했다고 인정하는 기간이 36개월 정도에 불과하니, 나머지 기간에 나는 사회적으로 보자면 ‘놈팡이’로 지낸 셈이다.
이렇게 내가 ‘워커홀릭 놈팡이’라는 역설적인 존재가 된 이유는 노동에 대한 앞의 규범 내지는 통념에 언뜻 잘 드러나지 않는 어떤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한가지 문제를 같이 풀어보도록 하자. ① 밥 짓기 ② 보고서 쓰기 ③ 상담하기라는 세가지 활동이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노동일까 노동이 아닐까? 이 모두가 노동이라고 답할 수도 있고, 그중 일부만 노동이라고 답할 수 있으며, 또 모두가 노동이 아니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우리는 크게 봐서 이 셋 중 어느 하나의 경우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정답을 말할 수가 없다. 혹은 어떤 답변을 해도 오답이 되지는 않는다. 왜? 위의 각 활동이 노동인지 아닌지는 어느 개그맨의 오래된 유행어를 빌리자면 ‘그때그때 달라요’라서 그렇다. 시간이라는 변수를 고정해둘 경우, 동일한 활동이라면 동일하거나 엇비슷한 가치가 있을 것임에도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임의성과 모순을 해명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 우리 사회에서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활동 → 가치 → 대가’가 아니라 ‘활동 → 대가 → 가치’였다. 즉 우리는 어떤 활동에 가치가 있으면 그것에 대가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어떤 활동이 대가를 받고 있으면 그것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둘째, ‘활동 → 가치 → 대가’가 아니라 ‘활동 → 이윤 → 대가’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 즉 어떤 활동에 대가가 제공되도록 하는 매개항은 가치가 아니라 이윤창출에 대한 기여였다. 혹은 가치라는 것이 이윤이라고만 해석되어왔다. 왜?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살고 있고, 자본이 추구하는 것은 이윤이니까.
그러나 첫째 해명은 말이 아주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활동에 대한 대가를 무슨 기준으로 제공할지에 대한 답변이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둘째 해명은 많은 사례에 적용될 수는 있지만, 정치인의 정치활동이나 돌봄노동자의 돌봄활동 등 ‘이윤’으로 직접 설명되지 않는 사례 또한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화될 수 없고 따라서 이 역시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될 수 없다. 결국 노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규범은 ‘활동 → 가치 → 대가’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할 경우 여기서의 가치란 ‘다른 사회구성원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삶에 대한 기여’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대로라면 필자가 해왔던 활동도 공인된 노동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장애인의 활동 역시 설령 이윤창출의 과정에 효과적으로 투입될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사회구성원의 삶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도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하지 않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불일치, 혹은 실재와 현실의 괴리
워커홀릭 놈팡이라는 역설, 혹은 ‘활동 → 가치 → 대가’라는 규범에 존재하는 모순은 기본적으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사용가치(실재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유용하고 가치가 있는가)와 교환가치(시장에서 현실적으로 얼마의 돈을 받고 교환될 수 있는가)의 불일치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상당한 사용가치를 갖는 재화와 서비스라 하더라도 자본주의시장에서는 아무런 교환가치를 갖지 못할 수도 있으며, 별다른 사용가치를 갖지 않는 어떤 것이 매우 높은 교환가치를 실현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를 다른 모든 체제와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다름 아닌 인간의 노동력까지도 상품으로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력)도 충분한 가치를 갖지만(즉 사용가치의 존재) 그 가치가 인정되지 않아 대가가 지불되지 않고(즉 교환가치의 부정) 불인정 노동으로 격하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끄 라깡(Jacques Lacan)의 용어를 빌려와 설명하자면 이는 실재(the real)와 현실(reality), 혹은 본질과 현상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실재와 현실의 괴리란 축구경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실재적으로는 골이지만 현실에서는 골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 2010년 남아공월드컵의 독일과 잉글랜드 16강전에서 벌어진 일인데, 독일이 2대 1로 앞선 상황에서 잉글랜드의 한 선수가 찬 공이 크로스바 위쪽을 맞고 골대의 경계선 안쪽으로 떨어졌다가 튀어 올랐다. 독일 팀의 골키퍼는 재빨리 공을 잡아챈 뒤 그라운드로 날렸고 주심은 노골을 선언했다. 이런 경우 축구에서는 다른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가 그렇듯 심판의 판단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 흔히 동원되는 말로 오심도 경기의 일부인 것이다. 즉 잉글랜드의 선수가 찬 공은 실재적으로는 골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골이 아니었다.7) 축구경기에서 종종 벌어지는 이러한 현실은 사람들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면 계속 유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정세와 조건—예컨대 유럽 A나라와 아프리카 B나라의 월드컵 결승전이라는 중요한 경기였고, B나라에 대한 심판의 계속적인 편파판정이 있었으며, 이것이 국제축구연맹 측에 의한 압력으로 의심되는 상황—에서 관중 모두가 골에 대한 정의를 곧이곧대로 내세우며 심판의 오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현실이 부당하다고 대다수 축구팬들이 들고 일어선다면, 현실은 새롭게 재편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동이 ‘실재(본질)적으로는 노동이지만 현실(현상)에서는 노동이 아닌’ 채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시 노동에 대한 정의(定義/正義)를 근거로 한 인정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진다면 새롭게 재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 개념의 혁신과 공공시민노동
그렇다면 어떤 제도적 요구를 매개로 하여 (실재적으로는 노동인) 불인정 노동을 (현실에서도) 노동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인정투쟁을 펼쳐갈 수 있을까? 필자는 노동연계복지(workfare)라는 우파적인 맥락에서 이른바 ‘자활’을 위해 만들어진 ‘공공근로’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사회적 일자리’라는 정책을 좌파적으로 리뉴얼 해봤으면 싶다. ‘공공’이나 ‘사회적’이라는 말이 붙은 건 죄다 없애버리려 하는 요즘 추세에서 보자면, 이 정책들은 일단 개념적으로는 그렇게 나쁠 건 없다. ‘이윤과는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 일에 대해 공공이 대가를 제공하는 일자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괜찮은 일자리가 전혀 될 수 없는 이유는 크게 보면 두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러한 일을 통해 제공되는 대가가 사회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연명을 하기에도 어려운 수준이라는 것. 둘째, 그러한 공공적(사회적)인 일자리의 목록에 들어가는 활동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한다는 것.
그래서 필자는 이 두가지 지점을 확 바꿔서 ‘공공시민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행해봤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공공시민노동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다. 첫째, 노동은 헌법의 정신에 따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시민권, 즉 ‘권리’로 존재해야 하며(헌법 제32조 제1항), 교육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라는 것이다(헌법 제32조 제2항). 둘째, 어떤 것이 이처럼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예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처럼 민간(시장)의 영역에 방치되어서는 안되며, 공적인 개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공교육이 존재하지 않고 사교육만이 존재한다면, 혹은 ‘공교육+α’로서 사교육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α’로서 공교육이 자리매김된다면, 교육은 결코 권리도 될 수 없고 국가가 부과하는 의무도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동이 하나의 권리이자 의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아닌 공공의 영역에 존재하거나 최소한 공공의 영역에 의해 통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공시민노동 정책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원칙을 따른다. 첫째, 공공시민노동을 통해 제공되는 급여는 전체 상용노동자 평균임금의 50% ‘이상’(2014년을 기준으로 하자면 최저 약 165만원)에서 정해진다. 둘째, 공공시민노동으로 인정되는 활동은 국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제3섹터’라고 불리는 광범한 시민사회의 다양한 단위와 공공시민노동을 하려는 개인으로부터 신청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단위 및 개인이 신청한 일(자리)이 공공시민노동에 합당한지는 기초지방자치단체 단위로 꾸려지는 ‘공공시민노동위원회’에서 심의한다. 이러한 위원회에는 여성·성소수자·장애인·노인·이주민·청소년 등 소수자를 포함해서 지역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다양한 민간위원이 3분의 2 이상 참여하며, 그 심의기준은 ‘해당 개인이 지닌 현재적 조건 및 능력’에 비추어 ‘지역사회 구성원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삶에 기여’하는지가 될 것이다.8) 이러한 구상이 실현될 수 있다면, 중증장애인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성(또는 남성)의 가사활동도 새롭게 그 가치를 공인받을 수 있으며, 현재 만연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실업도 실질적인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노동하는 자’와 ‘노동하지 않는 자’라는 분할 자체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키고 해소함으로써, 시민권을 새로운 지평에서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3. 을 이하의 인간으로서의 장애인9)
갑-을 관계의 장에서 배제되는 인간, 인지장애인
언제부턴가 을(乙)이라는 말은 대중매체에서 자주 사용되면서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시사용어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을은 기본적으로 관계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즉 을이라는 정치적 주체는 언제나 갑(甲)이라는 또다른 정치적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그리고 이러한 갑-을 관계는 당연히 비대칭적이다. 을이 소수자, 못 가진 자, 약자, 그래서 횡포를 당하는 자라면, 갑은 다수자, 가진 자, 강자, 그래서 횡포를 가하는 자이다. 즉 을이 일종의 과소인간적 위상을 갖는다면, 갑은 과잉인간적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갑과 을이라는 용어를 가장 흔하게 접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계약서를 작성할 때이다. 다시 말해서 갑-을 관계는 시장체제인 자본주의사회에서 무엇보다 계약관계로서, 그리고 앞서 서술한 정치적 비대칭성을 감안한다면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투영된 부정의한 계약관계로서 발현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계약관계 자체에서 배제되는 ‘을 이하의 인간’이라는 형상을 또한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동시장에서의 을이라면, 불법체류자 신분인 이주노동자는 엄밀히 말해서 을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재하청 관계에서 흔히 표현되는 병(丙)이나 정(丁)인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근로계약서 자체가 작성되지 않는, 그래서 갑-을 관계라는 장에 포섭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을 이하의 인간인 것이다. 또한 과도한 임대료 인상이나 일방적인 계약 해지 등 건물주의 횡포에 눈물짓는 임차상인이 을이라면, 구청 단속반이나 용역들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쫓겨 다녀야 하는 생계형 노점상은 을에도 미달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집주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세입자가 을이라면, 청원경찰의 욕설과 발길질 앞에 몸을 일으켜 사라져줘야 하는 거리의 홈리스 역시 을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충분치 않은 존재다. 이러한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노점상, 홈리스는 일정한 맥락 내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불법으로 간주되기에, 어떤 법적 계약의 장 내에 자신의 존재를 자리매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을 이하의 인간이라는 형상은 그 누구보다도 우선 법적 의사능력과 행위능력이 부정될 수 있는 인간, 그리하여 인간이지만 도덕적·정치적·법률적으로 그들의 인격성이 부정되는 인간에게서 나타난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들로는 민법상 미성년자인 아동과 청소년이 있겠지만, 이러한 형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띠고 있는 것은 이성적 사고능력이 ‘정상적인’ 인간에 미치지 못한다고 간주되는 인지장애인—지적장애인 및 자폐성장애인 같은 발달장애인과 후기 치매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전체 장애인구의 7% 내외를 차지하는 발달장애인이 장애인시설 수용인원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은, 바로 이처럼 그들의 자기결정권이 임의적으로 부정되면서 ‘보호’의 대상으로서 격하되는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아야 한다.
‘잘못된 틀의 설정’과 ‘메타-정치적 대표불능’에 대하여
이러한 인지장애인의 시민권을 사고하는 데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이자 비판이론가인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문제설정이 꽤 유용하게 응용될 수 있다. 그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제적인 것으로서의 분배(redistribution)와 문화적인 것으로서의 인정(recognition)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동시에 어느 한쪽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보는 ‘분배-인정 이원론’을 제시한 정치철학자로, 분배 역시 인정의 한 표현이라 여기는 ‘인정 일원론’적 입장의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와 치열한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그 논쟁을 책으로 묶은 것이 그 유명한 『분배냐, 인정이냐?: 정치철학적 논쟁』(한국어판 김원식·문성훈 옮김, 사월의책 2014)이다. 그러나 2003년에 이 책이 출간된 이후 그녀는 분배 및 인정과 더불어 정치적인 것으로서 대표(대의/표현, representation)를 그 내용적 요소로 하는 삼차원적 정의론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고 정식화하게 된다. 프레이저가 이처럼 정치적인 것의 중요성을 점차 강조하면서 삼차원적 정의론으로 이행하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조건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잘못된 틀의 설정’(misframing)이라는 문제에 착목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는 잘못된 틀의 설정이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정의의 규범이 적용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일정한 정치공동체들로 분할·제한하는 것, 그로 인해 특정한 사람들을 어떤 문제의 관련 ‘당사자’의 자리에서 배제함과 동시에 대화와 논쟁에 참여할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그러한 정치적 공간을 근대적 영토국가라는 ‘베스트팔렌적 틀’(Westphalian frame)로 설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초국적인 부정의의 문제를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빈곤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현대사회의 정의론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 롤스(John Rawls)는 분배적 정의가 지구적이거나 국제적인 수준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국내 영역을 그러한 정의의 규범이 적용될 수 있는 배타적인 영역으로 설정한다.10) 그리고 이로 인해 개인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집합적 정치공동체로서의 빈곤층은 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부정의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발언권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프레이저에게 있어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부정의는 대표불능(대의부재/표현차단, misrepresentation)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녀는 이를 크게 두가지 수준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는 ‘일상-정치적 대표불능’이다. 이는 정치공동체 내부의 왜곡된 의사결정 규칙들이 이미 구성원으로 간주되고 있는 특정한 사람들로 하여금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없도록 만들 때 발생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앞서 설명한 잘못된 틀의 설정으로 발생하는 것인데, 이를 프레이저는 ‘메타-정치적 대표불능’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메타-정치적 대표불능을 가져오는 잘못된 틀의 설정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권리를 가질 권리’라고 불렀던 것—즉 일종의 메타-권리—을 상실한 경우와 유사하게 어떤 형태의 ‘정치적 죽음’을 발생시키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은 자선이나 박애, 그리고 ‘보호’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떠한 요구 자체를 제기할 가능성과 권리를 박탈당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의의 측면에서 볼 때 더이상 ‘인격체’가 아니게 된다.11) 요컨대 일상-정치적 대표불능이 정치적 발언권을 ‘인정’받지만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형태의 부정의라면, 메타-정치적 대표불능은 그러한 정치적 발언권 자체를 ‘부정’당하게 되는 형태의 부정의라고 하겠다.
이성주의적 틀의 설정에 의한 메타-정치적 대표불능
이러한 두 수준의 대표불능, 특히 메타-정치적 대표불능에 대한 분석은 장애인의 경우와 연관지어 충분히 숙고해볼 가치가 있다. 장애인도 지구화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의 사회구성원인 한, 당연히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문제에서 ‘베스트팔렌적 틀’에 의한 메타-정치적 대표불능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베스트팔렌적 틀’의 설정에서 비롯하는 메타-정치적 대표불능을 넘어 현대사회의 정의론이 기반을 두고 있는 ‘이성주의적 틀’(rationalist frame)의 설정에 의해 일어나는, 특정 유형의 장애인이 직면해 있는 또다른 형태의 메타-정치적 대표불능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한번 현대사회의 가장 유력한 정의론인 롤스의 이론을 참조해보자. 그는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다원주의사회에서 설득력을 지닌 정의론을 제시하기 위해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전통을 한층 일반적이면서도 추상화된 방식으로 활용한다. 그러한 롤스에게 계약의 참여자인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체로서의 시민이란 “일생 동안 정상적인 상태로 사회에 충분히 협력할 수” 있는 이들, 즉 “두가지 도덕적 능력(정의감에 대한 능력과 가치관에 대한 능력) 및 이성의 능력(판단, 사고, 그리고 이러한 능력들과 연결된 추론)”을 지닌 구성원으로로 제한된다.12) 따라서 그의 정의론에 의거할 경우 이러한 도덕적·이성적 능력을 갖추지 못해 사회에 충분히 협력할 수 없는 인지장애인은 사회계약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채 배제되며, 단지 계약 이후의 사후적 배려를 통해 포용되는 과정을 거쳐서만 사회의 도덕적 일원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인지장애인에 대한 이러한 배제는 계약론적 전통에 있는 다른 학자들에게서 마찬가지로 그리고 좀더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신홉스주의적 사회계약론에 입각한 도덕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 데이비드 고티에는 자신의 주저 『합의도덕론』에서 특별한 필요나 손상을 지닌 사람들은 계약론에 의해 근거지어지는 도덕적 관계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13) 또한 제프 맥머핸(Jeff McMahan)은 『살생의 윤리』(The Ethics of Killing) 등의 저서에서 인간이 아닌 동물들과 심각하게 손상된 인지를 지닌 이들의 도덕적 지위는 한곳으로 수렴되어야 한다고, 즉 ‘근본적인 인지적 제약’을 지닌 이들은 정당한 정의의 주체가 아니며, 그들은 인격체보다 더 낮은 수준의 불가침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14)
인권의 정치의 실천: 성년후견제도의 존재 자체를 정치적 의제로
정의의 주체 내지 당사자가 이렇듯 이성주의적 틀에 의해 제한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기본적이고도 상징적인 부정의의 상황이 바로 성년후견제도—이전의 금치산(禁治産)·한정치산(限定治産) 제도를 계승한—를 통해 인지장애인이 자신의 자기결정권 자체를 합법적으로 제한·부정당하고 이를 타인에게 위임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추상화된 이론의 차원에서 사회계약의 주체로 간주되지 못할뿐더러 실제로 민법상의 계약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프레이저가 이야기했던 바처럼 법적·정치적 측면에서 더이상 ‘인격체’가 아닌 존재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보호’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정치적 죽음’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점에서 정확히 메타-정치적 대표불능이라는 부정의를 경험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년후견제도가 인지장애인을 더 잘 보호하기 위해 어떤 개선이 필요한가라는 차원의 고민을 넘어, 성년후견제도의 존재 자체를 정의 및 민주주의와 관련된 하나의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미 2003년 제58회 유엔총회의 사무총장 보고서에서 “성년후견제도가 때때로 부적절하게 활용되어, 아무런 절차적 보호도 없이 발달장애 혹은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에게서 법적 능력을 박탈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15) 또한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장애인권리협약’의 이행 상황에 대한 한국의 1차 국가보고서를 심의한 후 2014년 10월에 제시한 ‘최종 견해’에서 “2013년 7월에 시행된 새로운 성년후견제가 ‘질병, 장애 또는 고령에 의한 정신적 제한으로 인해 일을 처리하는 데 영구적으로 무능한 상태라고 간주된 사람’의 재산과 개인적 사안에 관계된 결정을 후견인이 내릴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는 것을 우려한다”면서, “‘의사결정 대리’에서 당사자의 자율성과 의지, 그리고 선호를 존중하는 ‘의사결정 조력’으로 전환할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다.16) 물론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전환작업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정확히 “민주주의 자체에 대하여, 민주주의의 주체에 대하여, 정치공동체에 대하여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일인 동시에 “평등과 자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연대의 구성에 대해 실험”17)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지적 차이’라는 인간학적 차이에 의한 분할의 경계를 횡단하며 인권의 정치를 새롭게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1) 마사이어에서 ‘올마이마’(olmaima)는 짧은 다리를 지니고 있어 이동할 때 몸을 심하게 흔드는 큰 갈색의 도마뱀을 가리키며, 비유적으로 이동성에 제약을 지닌 존재를 지칭한다.
2) 사하라사막과 서아프리카의 건조지대에 걸쳐 유목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베르베르인의 한 종족.
3) 예컨대 2011년 한국의 GDP 대비 장애인복지지출 규모는 0.49%로 OECD 평균 2.19%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멕시코(0.06%)와 터키(0.28%)에 이어 뒤에서 셋째인 것으로 조사되었다(조윤화 외 『2015 장애통계연보』, 한국장애인개발원 2015, 280면).
4) Michael Oliver, The Politics of Disablement, St. Martin’s Press: New York 1990, 32~34면.
5) 졸저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메이데이 2007, 72면.
6) 졸저 『장애학 함께 읽기』, 그린비 2009, 235~36면.
7) 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자음과모음 2011, 28~29면.
8) 이러한 기준을 적용할 경우 현재 매우 심각한 정신장애를 지니고 있거나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의 생존활동 자체를 노동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노동이란 ‘해당 개인이 지닌 현재적 조건 및 능력’에 비추어 판단되며, 그/그녀의 생존(활동)은 그/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상당한 정신적·정서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9) 이 절은 졸고 「‘을(乙) 이하의 인간’과 민주주의: 프레이저의 정의론과 인지장애인」, 『웹진 민연』 2015년 6월호(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를 수정·축약한 것이다.
10) 존 롤스 『만민법』, 장동진·김기호·김만권 옮김, 아카넷 2009, 185~94면.
11) 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김원식 옮김, 그린비 2010, 42면.
12) John Rawls, Political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5, 18~19면 및 롤스 『정의론』, 202~12면을 참조하라.
13) David Gautier, Morals by Agreem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14) Eva Feder Kittay and Licia Carlson eds., Cognitive Disability and its Challenge to Moral Philosophy, Chichester: Wiley-Blackwell 2010, 18면.
15) 조한진 「성년후견제,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가」, 『함께웃는날』 2011년 겨울호, 전국장애인부모연대, 97면.
16) 「〔전문〕한국의 장애인권리협약 이행 상황에 대한 유엔의 최종 견해」, 『비마이너』 2014.10.8.
17)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웹진 민연』 2015년 5월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