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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문학, ‘닫힌 미래’와 싸우다
삶다움의 가능성을 믿는 시
최근의 시가 전망을 그리는 방식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눈먼 자들의 귀 열기」 「나는 거기에 있지 않다」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1. 확인되지 않는 삶?
제주시 탑동에 위치한 미술관 ‘아라리오 뮤지엄’에 입장한 관람객이라면 누구나 코오헤이 나와(名和晃平)의 ‘픽셀 디어’(PixCell Deer) 시리즈 중 하나인 「디어 패밀리」(Deer family, 2014, 혼합재료)를 만날 수 있다. 거리를 두고 선 관람객에게 이 작품은 유리구슬로 이루어진 다섯개의 사슴 조형물로 보인다. 조명 아래에 올곧은 자세로 선 다섯마리의 유리 사슴은, 2000년대 초반까지는 영화관으로 사용되었다가 그 주변 상권이 침체되자 한동안 방치되었던 공간을 개조하여 마련한 미술관의 허름한 벽면과는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반짝인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유리구슬이 실은 박제된 사슴을 뒤덮고 있는 렌즈에 불과하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순진한 유리 사슴 가족이 ‘박제가 되어버린’ 몸으로 미술관 내부에 일렬로 서 있을 때, 관람객은 그들 몸을 뒤덮은 화려한 유리구슬 장식으로 인해 그들의 끔찍한 운명을 감히 상상하지 못하고 그 곁을 지나쳐버리거나, 역으로 아름다운 장식에 이끌려 다가갔다가 표면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코오헤이 나와가 조각 연작의 타이틀로 내건 ‘픽셀’(PixCell)은 “디지털 영상에서 화상의 정밀도를 나타내는 픽셀(pixel)”과 “생물학적 세포를 일컫는 셀(cell)의 합성어”1)이다. 박제된 동물 본연의 무게, 냄새, 색을 이루는 ‘셀’은 그것을 뒤덮은 유리구슬로 인해 왜곡되고 굴절되면서 관람객에게 대상을 정확히 인식하는 일의 어려움을 전한다. 작가가 ‘픽셀’(pixel)이란 개념을 굳이 거론한 배면에는, 디지털 매체와 불가분한 시대의 특징 중 하나로 이른바 ‘진짜’ 현실을 가려내야만 하는 상황의 빈번한 발생과 그에 따라 존재보다 앞서는 인식의 규정력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그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유리구슬로 가려져 있다 한들, 박제된 사슴의 현실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슴 박제는 최근의 시를 다루는 비평의 태도를 재고할 단서를 제공한다. 가령, 엄연히 사슴이 ‘있는’ 정황에서 유리구슬 이면의 현실을 비어 있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는지, 어쩌면 그렇게 함으로써 이면의 현실을 ‘박제’로 방치해버리진 않았는지.
평론가 이광호(李光鎬)는 2010년 이후에 발표된 시편들이 “인식될 수 있는 저항과 비판의 논리”로 한정되지 않는 “비결정의 가능성의 영역”에서 상상력을 개화하므로, “체제 안에 소속되지 않는 시간”을 사는 “비성년”들의 “놀이”가 시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성년’이 아닌 자들이 선보이는 놀이의 순간은 “체제 안에 소속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시적인 언어로만 발설되는 미지의 언어”로 이루어지므로, 비평가가 다룬 작품들에서 삶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는 시적주체가 체제의 한가운데 개입해 들어가 능동적으로 구사했던 미학적 전략을 오히려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여기는 것에 가깝다.2)
어쩌면 시는 유리구슬을 둘러야만 겨우 설 수 있는 사슴과 같이, 삶을 쉽사리 ‘확인’할 수 없는 미학적인 형식을 다소 장착해야만 하는 장르인지도 모른다. 말의 자질에 예민하기에 어떤 유리구슬을 택할지 더욱 치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란 얘기다. 하지만 시를 통해 드러나는 ‘시적인 것’의 발견이란 결국 삶의 한가운데서 이뤄지기에 (시인이 시를 어떤 의도로 썼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시는 현실의 세목을 전할 말에 파장을 일으키면서 삶을 구성하는 역할을 짊어지기도 한다. 시에 붙여진 ‘확인되지 않는 삶’이란 표현에 유독 마음이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시에 드러나는 시적주체가 주로 무기력하고 왜소하다고 말하는 비평에서는 실제 ‘삶 이하의 삶’을 사는 이들, ‘삶다움’이 보장되지 않는 시스템에 묶여 내일을 내다볼 수 없다고 기정사실화된 이들이 다뤄져왔기 때문이다.3)
하지만 삶다움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의 안간힘은 왜 삶이 아닐까. 오히려 최근의 시는 ‘삶 이하의 삶’ ‘확인되지 않는 삶’을 다른 시선으로 조명하여 그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간곡하게 말하는 방식으로 입체적인 삶의 국면을 작품 안에 들인다. 단순히 현실이 새기는 고통에 압사당하는 주체가 자기연민을 안전하게 전시할 수 있는 폐쇄적인 장으로서가 아니라, 빠져나갈 탈출구가 없다고 강요된 시스템 내부에서 주어진 ‘지금—여기’를 감당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바로 그 자리에서 돌파구를 마련해가는 몸짓을 취하면서. 이는 2010년대 이후에 씌어진 시들이 이른바 ‘미래파 논쟁’에서 언급됐던 시편들과 같이 미학적인 전략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통해 삶을 증명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삶’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입체성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삶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장소 역시도 삶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 문학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비평은 좀더 사려깊은 시선으로 살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코오헤이 나와의 작품은 유리구슬을 미적 전략으로 삼아 박제된 사슴의 상황을 폭로함으로써 사슴이 놓인 미술관 전체 풍경을 다시 보게 만든다.4) 이때 유리구슬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질문하는 렌즈로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시에서 활용되는 미학적인 형식은 바깥에 대한 상상이 가로막힌 현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도록 이끌고 종국에는 가려졌던 삶의 다른 면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에게 새로운 길을 능동적으로 마련해가게 한다. 최근 시의 경우엔 시적주체가 보고 있는 바를 다시 봄으로써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방식(황인찬, 임솔아의 시)이나, 은유로 미처 전달되지 못하는 진실을 은유로 전달해야 하는 한계 상황 속에서 토대의 전환을 촉구하는 방식(정한아, 전문영의 시)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이는 이중의 구도를 형성해서 현실의 한계를 노출시키고, 바로 그로부터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전략을 최근의 시가 활용한다는 얘기도 된다. ‘확인되지 않는 삶’ 역시 삶으로 살피는 문학의 길 위의 숱한 웅얼거림을 단지 응석으로 넘겨짚지 않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이들 시가 타진하는 진동에 좀더 적극적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
2. 관조를 믿지 않는 시: 황인찬과 임솔아의 경우
‘스펙터클의 사회’(기 드보르)라는 개념을 꺼내지 않더라도, 지금을 ‘이미지가 우세한 시대’ 내지는 ‘시각문화의 지배가 만연한 시대’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스마트폰의 창을 통해 각자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말해서 현재 우리는 ‘관객’의 역할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채 산다. 특정한 대상과 거리를 두고 쉬운 품평과 단정(斷定)으로 이미지를 소비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의미다.
한편, 직접적으로 겪는 차원보다는 보는 차원으로서의 경험이 우세한 사회에서는 자신이 보는 것만큼 다른 이에게 ‘보이는’ 삶으로서의 자기전시가 정체성을 규명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한다. 지금은 ‘나는 무엇을 보는가’만큼 ‘나의 무엇이 보이는가’ 역시 중요해진 시대다. ‘나의 무엇이 보이는지’를 중시하기 시작한 ‘관객’은, 특정한 이미지가 재현되는 과정이란 곧 그것을 가시화하는 질서에 편입시키는 노력 속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인지하게 된다. 이 경우, 관객은 표면이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실상은 그것이 어떤 진실을 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판단을 가진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다른 감각을 일깨우면서 의식과 행동을 가다듬는 관객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관객 자신이 “‘보는 자’의 위치를 포기하고 행동하고 만들어야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관객의 자리가 이미 능동성과 수동성의 양분 구도를 허무는 장소라는 얘기다.5) 시각문화의 지배가 만연한 시대에 ‘관객’은 오히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게끔 형성된 상황을 신뢰하지 않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역동적으로 해낼 수 있다.
황인찬(黃仁燦)의 시는 관조하는 상황 자체를 다시 바라보는 프레임을 시 내부에 장착시킴으로써 어떤 상황을 ‘지켜보는 행위’가 마냥 무기력하다고 평가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공원을 헤매는 작은 다람쥐는 지난여름 묻어둔 도토리를 찾는다 거기에 기쁨은 없다 바글대는 잉어 떼에게 먹이를 던지면 흰색, 붉은색, 노란색, 검정색이 모두 첨벙거리며 뒤섞이고 그것은 일종의 장관을 이룬다
어두운 수풀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사랑한다 아이스크림을 쥔 아이가 넋 나간 얼굴로 그 옆을 걷는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알지 못하는 채로
때로 일이 잘 풀릴 때도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이 도우셨어,라고 말한다 갑자기 비가 내린다면 물가의 망초들이 자라겠지 망초들은 생각 없이 자란다 그것들은 꽃이 작고 많다 거의 사람만 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잘못되지는 않았다
잘못은 아니다
새들이 전선 위에 줄지어 앉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새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래도 새들은 이곳을 내려다보고 하늘은 점점 어둡다
그리고 폭우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내린다
아이가 집에 들어온 것은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일이다
성철아, 손부터 씻어라 비가 오기 전에 들어와서 참 다행이야 하느님이 도우신 거야
바깥의 것들이 물에 휩쓸려가는 동안, 엄마는 말한다
—「두희는 알고 있다」(『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전문
순전히 제목 때문에, 독자는 첫 구절부터 시의 화자를 ‘두희’로 상정할 가능성이 크다. 시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공원의 풍경을 모두 두희가 보는 상황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화자 두희의 눈에 이 공원은 누군가의 감정을 다른 이가 대신 설명할 수 없는 장소다. “작은 다람쥐”가 “지난여름 묻어둔 도토리”로부터 기쁨을 얻는다고 쓰거나 “아이스크림을 쥔 아이가 넋 나간 얼굴로” 걸을 때 느꼈을 모종의 심정을 그애의 입으로 전해듣기도 전에 화자가 앞질러 말한다면, 그것은 화자의 짐작이 그들의 언어인 척하고 전달되는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의 초반부에서 화자 두희는 독자에게 공원의 풍경을 전달하기 위해 자취 없이 작동하는 매개로 있다. 이때 화자는 자신이 프레임화한 세상을 관조하는 동시에 자신이 본 바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행여나 넘쳐흐를지 모르는 감정을 절제하는 거름망의 역할을 전담한다.
그러나 위 시에서 감정을 억제하는 방식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의 감정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장면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의 감정까지 소거해가는 그 세계는, 두희의 프레임으로 발화된 순간부터 외부의 시선이 끼어드는 것 같은 기이함이 잠복해 있다. 마치 손가락으로 만든 네모를 일상적인 풍경에 갖다대었을 때 네모 안이 더이상 평범하지 않게 여겨지듯, 액자 구성으로 처리된 세계의 내부는 어쩐지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것 같아서 찜찜함을 남긴다. 그때, “어떤 것도 잘못되지는 않았”고, 누구의 “잘못은 아니”라며 주어진 상황 자체를 수습하려는 발화(의도적으로 잘못의 책임을 논할 수 있는 주어가 가려진 채 “잘못은 아니다”라고 언술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자) 이후 이어지는 5연에서 “그러나” “그래도”와 같이 변화를 만드는 접속어가 연이어 등장하고, 두희의 액자는 본격적으로 요동친다. 아이의 이름을 엄마가 “성철”이라 부를 때, 그제야 독자는 지금껏 알고 있던 화자가 두희가 아니라 어쩌면 ‘성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철을 화자의 자리에 두고, 1연에서부터 상황을 반추해보자. 성철은 공원에 있었다. 그리고 두희는 성철이 무언가를 보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다’. 이때 독자는 성철의 발화(로 짐작되는 ‘나’의 발화) 위에 두희의 발화를 포개어 읽을 수 있다. 두희가 ‘알고 있는’ 바는 다시 이 시 전체를 추동하는 ‘쓰기주체’로서의 ‘나’의 목소리에 포개어져 독자에게 전달된다. 환언하면, 성철의 경험을 액자화하여 두희가 숨어서 보고 있고, 그를 다시 보는 ‘나’의 목소리가 시를 이룬 상황이다. 우리는 공원 풍경을 보던 성철에 대해 알고 있는 두희를 말하는 ‘나’의 언술로 형성된 시적 현장에 초대받았던 것이다.
쓰기주체 ‘나’는 성철이 보는 바를 두희가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최종적으로 쓰면서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기인식을 적극적으로 발생시킨다. 시의 마지막 구절이 이를 증명한다. “바깥의 것들이 물에 휩쓸려가는 동안, 엄마는 말한다”에서 쓰기주체 ‘나’는 자신이 무언가를 보는 행위만으로는 상황 자체가 완전히 바뀌지 않음을 상기시키고(쓰기주체 ‘나’는 “바깥”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가운데 두희가 알고 있는 바를 전해야 한다), 이를 통해 액자 구성으로 처리된 세계 내부 및 그 액자를 관조하는 액자 바깥의 안정성은 늘 위협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린다. 결과적으로 ‘나’는 우리 앞에 놓인 액자 속 세계를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행위자로 남는다. 황인찬의 시적주체를 일컬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일뿐”이라고 했던 이전의 평가6)를 승인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관객이라는 위치를 통상 ‘수동적’이라고 평가하면서 ‘보는’ 행위의 정치적 의미를 축소시키는 일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한다.7) 무언가를 ‘보는’ 행위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의지를 발현할 때 가능하다.8) 그렇게 해서 자신이 보고 있는 바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거두고, 눈앞에 놓인 이미지를 선정적으로 몰아가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형성하는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황인찬은 하나의 사실을 ‘객관’으로 합의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지 성찰하는 과정을 갖기 위해 관조를 관조하는 이중의 액자구성을 시에 형식화한다. 여기에는 주관적으로 파악된 현실이 다시 또다른 주관으로 파악되는 상황을 반복함으로써 객관적인 거리를 형성할수록 도리어 시적현장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의 부재가 드러나는 상황을 알리려는 시적주체의 분투가 담겨 있다. ‘조망 불가능 상태’에 빠진 지금의 현실이 잃어버린 것은 총체적 시선임을 그와 같은 시선의 부재로 실감하는 시적주체는, 지금의 상황이 어떤지를 심도있게 고민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그를 통해 ‘볼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함을 알린다. 현재의 소실점을 탐색하기 위해 원근법의 재구성을 요청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임솔아(林率兒)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의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바다를
액자에 건다.
바다에 가라앉는 나를 본 적이 있다.
팔다리가 부식되어
산호가 되어갔다.
허옇게 변한 사지가
산호들 사이에 갇혀 있었다.
노랗거나 파란 물고기들이 주변을 배회했다.
저기 열대어가 있어. 스킨다이버들이
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젖은 빵을 찢어 던졌다.
아름답다는 말을 산호 숲에 남겨두고
스킨다이버들은 뭍으로 돌아갔다.
나를 그곳에 둔 채 나도
꿈에서 빠져나왔다.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서만 살아본 나는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한다.
나를 여기에 둔 채 나는
저곳으로 다시 빠져나가서
중국집과 세탁소 사이에
임대문의 종이를 쳐다보고 서 있다.
텅 빈 상가 속에서 마리아가 혼자
퀼트 천을 짜고 있다.
이 액자를
다시 바다에 건다.
—「아름다움」(『21세기문학』 2015년 여름호) 전문
인용한 시에서 액자를 거는 ‘내’가 바라보는 것은 그림 속 ‘나’의 모습이다. 액자 속에서 “바다에 가라앉는 나”는 “산호들 사이에 갇혀 있”다. 그림 속 “스킨다이버들”이 뭍으로 돌아갈 동안에도 “사지”가 허옇게 변해가는 ‘나’는 내내 “산호들 사이에” 머무는데, 액자 속 그림은 움직이지 않으므로 ‘나’는 거기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액자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삶, 지금의 삶 외부로 떠날 수 없는 삶이 ‘나’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바다에 가라앉는 ‘나’는 어디까지나 그림 속 ‘나’이므로, 거기로부터 빠져나올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시적주체는 ‘나’가 포함된 바닷속을 액자 속 또는 꿈속으로 프레임화하여, 프레임 바깥에도 ‘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시에서 액자라는 프레임은 결국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삶에 구멍을 내기 위한 방식에 해당한다.
그러나 ‘나’는 프레임 바깥에 ‘내’가 있다 하더라도, 프레임 속에 있는 ‘나’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액자 바깥으로 빠져나왔다고 해도 기존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면, 바깥으로 빠져나간 상태 자체란 오히려 허구에 불과함을 ‘나’는 이미 알기 때문이다. 프레임 바깥의 ‘나’는 프레임 속 ‘나’를 구경하는 구경꾼의 자리를 포기하고, 오히려 프레임 속의 삶을 증언하는 위치에 서려 한다.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여기”라고 표기한 자리에 계속해서 ‘나’의 흔적을 둔 채로, 그와 연루되기 위해 애쓴다. 이때 “쳐다보고 서 있”는 행위는 ‘나’를 둘러싼 삶의 궤적 중에 ‘내’가 봐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선택하고 비교하고 해석함으로써 종국에는 삶을 구성하는 활동으로 견인된다. 요컨대 무언가를 보는 행위란 주어진 삶의 외부로 밀려난 이가 행하는 게 아니라 그 삶의 구성원이 행하는 실천임을 알리는 것이다. ‘나’는 액자를 거는 행위를 하는 ‘나’를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을 상상하는 일이 쉽지 않은 세계에서 할 수 있는 몫을 다듬어간다. 이는 주어진 현실이 이어지기 위한 재생산의 역할에 복무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을 운용하기 위한 재분배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황인찬과 임솔아는 관조를 관조함으로써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한정된 프레임이 놓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는 우리가 발디딘 세계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 세계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먼저 틀을 짜서 제시하고, 그 틀을 짠 주체를 부각시킴으로써 세계의 구성원인 주체의 역할을 분별해가는 방식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은유를 믿지 않는 시: 정한아, 전문영의 경우
지금의 사회를 일컬어 거듭해서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고 했거니와, 이 표현은 오늘날이 주어진 시스템 이외의 그 어떤 체제도 불가능함을 반복적으로 설파하는 이데올로기가 강화된 시대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른 곳으로의 이동, 다른 방식으로의 삶이 어렵다(고 강요된다). 주어진 역할에 ‘가만히 따르라’는 순응이 요구되고, 거기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통치방식이 우세하기에, 주체가 자발적으로 생산성을 발휘할수록 오히려 시스템의 지속에 복무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지기도 한다.9) 주어진 현실 내부에 대한 신뢰를 철회함으로써 현실 비판을 수행하는 것을 단순한 냉소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은, 이것이 외부로 이동하는 방식이 금기시된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비판 전략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짐작 때문이다.10)
이런 상황에서 시는 어떤가. 시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사물에 속하는 단어를 다른 사물에다 옮겨놓는” 언어현상의 ‘이동’(epiphora)으로 정의하는 ‘은유’가 지배적인 방편이기에,11) 이동의 형식이 금기시되거나 관습적으로만 진행될 때 생기를 잃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어의 이동을 통해 “대상과 경험을 익숙하지 않은 관점에서 기술하여 평범하고 익숙한 언어 사용을 뒤흔들면서” 익숙한 것을 낯섦으로 전환하는 시가 은유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언어의 이동을 통해서도 전환되지 못하는 사태가 있음을 시가 직시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은유를 믿지 않는 시’는 ‘은유’로도 채 드러나지 못하는 진실이 있음을 또다시 어쩔 수 없이 나름의 은유로 전달해야 하는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토대의 전반적인 전환을 촉구한다. 은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을 감당하면서도 은유가 베푸는 향응에 만족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시에 담는 셈이다. 이때 삶은 은유로도 도무지 가려지지 않는 ‘어떤 것’의 형태로 드러나 그것을 싣고 나르는 또다른 은유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그 자취가 포착된다.
정한아(鄭漢娥)는 은유를 통해 어떤 사태가 눈앞에서 생생해지는 상황은 오히려 허구일 수도 있음을 부각시킴으로써, 언어가 이동할수록 구체적인 상황이 역으로 추상화되는 현장을 시에 마련한다. 정한아의 시에서 시적주체는 눈앞의 것을 함부로 믿지 않는다.
도서관 뒤뜰엔 잊혀진 사상처럼
이끼가 드문드문 자라고 있다
사람들은 소태를
얼마나 오래 머금을 수 있는지
붓꽃과 익어가는 여주와 박꽃과 봉숭아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눈으로만 먹을 수 있는
빛깔들
맛을 보면 도망할 육식동물들을 위해
고통 없는 선을 위해
아름다운 착한 것이 있어야 할 텐데
어쩌나, 가물어 단
과일을 크게 베어 물면
소리 없이 가능한 한 멀리 내어 뱉는
씨앗 같은 문장부호들
왜, 죽음의 징후—꽃들은
절박할 때만 피나, 왜,
아름다운 채 삼키면 치명적인가, 왜,
도서관 뒤뜰엔 아직도 잊혀진 사상이,
웬 조그만 노인이, 우산이끼처럼 까라져
아직 파란 여주를 씹고 있나
—「폭염」(『시로 여는 세상』 2015년 가을호) 전문
위의 시에서 시적주체가 ‘믿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을 먼저 살핀다. 우선, 이름이 전하는 달콤한 느낌으로는 분명 맛있는 과육을 길러낼 것 같지만 실은 아예 먹을 수 없거나 먹을 수 있을 만큼 익지 않은 “붓꽃과 익어가는 여주와 박꽃과 복숭아”가 있다. 이때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은, 이것들을 먹을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눈으로만 먹”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우리로 하여금 입맛을 다시게끔 유혹하는 언어 그 자체이다. 그러나 언어는 물질에서 비껴난 상태로 이동하므로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상태는 없다.
두번째로는 “가물어 단” “과일”을 “베어 물” 때 언젠가는 잘 자라 제 몫을 해주리라 여기며 내뱉는 “씨앗”처럼, 문장 내에서의 몫이 있어 어떤 자리든 잘 심어두나 꼭 기존의 의미를 뒤집는 역할을 전담하지는 않는 “문장부호들”이 있다. 문장의 의미가 그 자리에서부터 끊어지거나 생성되지만(끝과 시작점을 형성하지만), 이들은 소리가 없고 특정한 형태로만 남겨지므로 문장이 ‘가문’ 상황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들이다. “씨앗”으로 은유되었지만, 문장부호들의 역할을 문장의 의미를 배태하는 가능성으로 여기기엔 끌어와야 할 조건들이 많으므로 이때의 은유는 이미 발생해버린 오류로 남는다.
세번째는 “도서관 뒤뜰”에서 “아직” 익지 않은 “파란 여주를 씹고 있”는 “웬 조그만 노인”의 이미지. 아무도 찾지 않는 “잊혀진 사상”이 도서관에서 겨우 발견되었을 때 “치명적”으로 드러나는 시대착오성이 완전히 익지 않은 여주의 쓴맛을 보는 ‘노인’으로 제시될 때, 미래를 내다볼 수 없어 과거를 소환하는 ‘도서관’이라는 장소의 닫힌 상태와 죽음에 가까워지면서도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하는 절박한 행위가 부딪히면서 은유의 불충분성이 표면화된다. 시에서 언어가 이동할수록, 도서관 뒤뜰에 있었던 시적주체의 구체적인 상황은 점점 추상화되어간다.
세가지 목록을 살피다보면 시에서 시적주체는 눈앞에 있는 것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시적주체가 말함으로써 만들어지는 형상을 믿지 못하는 듯 보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시에는 “이론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방식”12)으로서의 은유를 의심하는 태도가 그 저변에 있다.
쑤전 쏜택(Susan Sontag)은 은유가 사유의 핵심이라고 한들 은유 자체를 완전히 신뢰해선 안된다고, 은유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허구”이자 “필수적인 허구가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유를 하려면 은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새로운 은유 구축에 연루”되지만, 적어도 “물려받은 은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회의적이라야” 한다는 게 그 골자다.13) 정한아의 시적주체는 너무나 생생한 가상을 만들어내는 은유가 전하는 추체험에 대한 신뢰를 철회함으로써, 이동의 형식이 금기시된 세계에서 돌아봐야 할 현실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시적주체가 언어의 이동을 통해 인지적으로만 움직이려는 것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폭염’ 속에서 일종의 섬망(譫妄)에 빠져버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14) 전문영(全文英)의 시를 이어 읽는다.
왜 아직 아무도 답을 모를까 고담시 주민들이 왜 고담시를 떠나지 못하는지 의아해하며 공원의 벤치에 주저앉는다 마치 그것이 낙원의 조각인 것처럼 결코 나는 틀리지 않은 것처럼 엉덩이가 짓무르는데도 자꾸 어딘가에서 경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하염없이 앞과 그 앞 혹은 앞의 앞만 바라보다가
다들 상대팀과 싸우러 가느라 벤치를 비웠구나 그런 결론이 난다 그러니까 나만 여기 있지 우리 팀에 누가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거기서 각자 짓무르느라 늦나보다 납득하며 몇년 전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매일 저녁 마주치던 청년 하나를 겨우 떠올린다 늘 같은 자리의 벤치에 앉아 클라리넷을 연습하며 똑같은 곡을 똑같이 틀렸지 그러니까 그 사람도 아직 그 벤치를 떠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고담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담이 고담인 것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고담 시민이 오래전에 고담을 떠났지만 떠났다는 사실을 존중받지 못하는 고담 시민에게 어떻게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 할까 골몰하기로 한다 그러지 않고는 아까부터 저려오는 다리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어서 살짝 고개를 들어보면 전광판은 처음부터 부서져 있다
—「벤치에의 권유」(『황해문화』 2014년 여름호) 전문
시적주체는 지금 어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는 특정 공간 ‘고담시’를 떠올리는 중이다. 벤치에 앉은 채 생각에 잠긴 시적주체의 모습 그대로, 시는 주로 다른 어딘가로 이동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고담시에 대해 더 말하자. 만화 및 영화 「배트맨」 시리즈의 배경으로 사람들에게 친근한 ‘고담’은, 온갖 부정부패가 난무하며 늘상 파국적인 상황에 휩싸이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배트맨」의 이같은 배경은 구원자로서의 배트맨이 활약해야만 하는 조건을 제공한다). ‘소돔과 고모라’를 줄여서 고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소개가 있을 정도로, 고담은 범죄가 들끓는 곳이지만 시적주체의 착안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웬만해선 떠나지 않는다. “고담시 주민들”은 “왜 고담시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도시 외부로 떠나지 않는 주민들은 한편, 도시 내부에서는 생존을 위한 쟁투를 위해 잘도 이동한다. 그와 같은 도시의 혼잡한 생태를 떠올리면서, 생존경쟁에서 뒤처진 채 벤치에 앉은 자신을 돌아보다가 시적주체는 문득 “같은 자리의 벤치에 앉아 클라리넷을 연습하며 똑같은 곡을 똑같이 틀렸”던 청년을 떠올린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청년이 같은 자리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고담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는 고담 밖으로 이동할 수 없음을 알린다. 고담을 벗어나기 위해서 고담이라는 ‘지금—여기’를 제대로 쳐다보고 전환하지 않으면, 그 바깥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고담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자체에 대한 은유라고 말해도 되겠지만, 거기까지 말한다면, 이 시는 고담을 관습적인 은유로 활용하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시적주체는 “고담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담이 고담인 것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고담 시민”의 입장을 헤아린다. 우리가 사는 곳이 온갖 부정적인 모습으로 들끓는다는 의미에서 고담이라는 은유를 활용했던 바를 철회하고, 그럼에도 우리는 왜 우리 사는 곳을 떠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의미를 옮겨간다. 고담이란 말을 꺼냈을 때 연상할 수 있는 의미로는 채 드러나지 못할 지금 이곳의 진실을, 시적주체는 눈치챈 듯 보인다.
은유가 유사성을 기반으로 하여 언어의 이동을 꾀한 후 실제를 새롭게 기술하는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면 “하나의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어야 한다.15) 그러나 이야기 자체가 결핍된 상태라면 은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지금—여기의 이야기가 부재하는 상황을 돋보이게 만드는 편이 오히려 언어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한아와 전문영의 시는, 은유로 전달되지 않는 진실을 은유로 전달해야 하는 한계 속에서는 은유 자체가 목적일 수 없음을 분명히한다. 이를 두고 주어진 현실을 의심함으로써 다른 현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4. 삶다움의 가능성을 믿는 시
지금까지 최근 시의 시적주체가 처한 상황—다른 세상의 필요성을 요청하기 위해 지금 세상의 방식에 얼마간은 긴장된 적응을 하며 발화하는 상황—속에서 능동적으로 발휘되는 미학적인 전략이 시적주체의 정치성으로 수행되는 상황을 살폈다. 서두에 언급했던 「디어 패밀리」를 경유하여 말하자면, 생명을 강제로 박제당한 사슴이 처한 현실의 맥락이 유리구슬로 가시화되었듯이 최근 시의 시적주체는 저 자신의 ‘있음’을 현시하기 위해 관조와 은유를 의심의 구조로 전유하여 현실에 응전한다. 이는 바깥을 상정할 수 없도록 차단당한 세계에 사는 이들이 시를 제작하는 과정을 통해 삶의 실천을 도모하는 방식을 꾸린다는 의미에 가깝다.
황인찬과 임솔아의 시는 보는 행위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관조하는 상황을 다시 관조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직시함으로써, ‘나’의 존재는 주어진 지금과는 다른 각도로 위치할 수 있음을 알리고 다른 세계를 향해 열린 자세로 임할 수 있음을 보인다. 정한아와 전문영의 시는 시가 씌어지도록 추동하는 언어 형식으로서의 은유에 대한 의심의 상태를 다시 은유로 표현함으로써 은유가 활발하게 작동하지 않는 토대의 문제를 짚는다.
황인찬과 임솔아, 정한아와 전문영의 시에서 활용하는 ‘관조를 믿지 않는’ 또는 ‘은유를 믿지 않는’ 방식은, 시적주체가 주어진 상황을 전적으로 믿지 않음으로써 다른 상황으로의 전환을 노리는 태도를 취할 때 가능한 전략이다. 이때 시적주체가 믿는 바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전부는 아니라는 상태이므로, 이를 두고 부정성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 비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지닌 ‘믿지 않음’의 태도는 ‘불신’이 아닌 ‘의심’의 차원에 해당한다. 주체가 주어진 상황을 전부 파악했다고 확신하는 가운데 자신의 믿지 못하는 마음이 타당하다고 여기는 태도가 불신이라면, 의심은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이들의 의심은 지금—여기를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에 맞춰져 있다. 의심하는 주체는 주어진 조건을 살피는 과정에서 지금 상황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모색하기 위해 고민하고, 그를 통해 정해진 회로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탐구를 시작한다. 따라서 최근 시에서 나타나는 시적주체의 의심하는 전략은 현실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적응, 주체적인 ‘적응’에 값하는 적응”16)에 준한다. 주어진 ‘여기’를 떠나지 않는다는 결의는 지금 상황을 온전히 믿는 상태를 예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자리에서 다음을 모색하기 위해 실천을 도모하는 ‘자기 자신’의 존립에 믿음을 싣겠다는 의미이다. ‘전략’이라고 했거니와, 시 내부에 프레임을 짠 뒤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생각에 잠기는 시적주체와, 은유를 통해 성립한 상황이 역으로 은유의 불충분성을 드러내주는 방식을 취하는 시적주체를 통해 ‘의심하는 나’의 모습이 부각될수록 시에는 지금—여기의 문제에 대한 극복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
문학을 통해 발현되는 정치성이 “우리의 통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활동”이 계속해서 “재발명되는 행위”17)라 한다면, 최근 시는 ‘나’라는 주체의 존재증명을 위한 미학적인 전략을 구사하면서 발휘하는 정치성으로 지금의 현실을 다르게 구성한다. 소설가 김사과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그것의 실현에 나서는” 일일 것이다.18) 죽지 않고, 나를 살리기 위해 쓰는 일. 나를 살리기 위해선 나를 살게 하는 바탕 위에 내가 있음을 확인하는 일. 최근의 시는 그러한 일을 영민하게 행한다. 거기엔 삶다움을 갈구하는 삶이 있다. 삶다움의 가능성을 믿는 삶도 있다. 그리고 거기엔 기어코 삶답게 살고자 도약하려는 삶 역시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1) 아라리오 갤러리 「코헤이 나와 개인전」 보도자료(2012).
2) 이광호 「비성년 커넥션」, 『문학동네』 2013년 여름호 346~61면.
3) 이러한 논의에서 거론되는 주체들이란 주로 ‘잉여’ 같은 삶을 사는 젊은 세대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초등학교 시절부터 IMF 구제금융의 영향 아래서 살게 되었으며 그 이후의 지속적인 한국 경제의 하강국면에서” 제도 내 경제활동으로 포섭되지 못한 채 “최소한의 생존 필수조건조차 얻지 못하고” 사는 “1980년대 중후반생인 지금의 이십대”가 그들이다. 박상수는 2010년대 시에서 나타난 주체가 “하강하는 시대감각”을 반영하느라 “도저한 무기력과 무능감”에 휩싸인 채 “‘몰락하는 중간계급’의 자존심”을 보존하는 일에만 전전긍긍하느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왜소한 주체들”임을 주장한다(박상수 「기대가 사라져버린 세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 350~76면). 이는 2000년대 시의 특징과는 분리하여 2010년대 시를 논하려는 의도로 시적주체를 곧장 ‘시인’이라는 사회적 존재로, 더군다나 고정된 경제조건에 대응하느라 급급해하는 ‘계급적 주체’로만 국한하여 본 결과이다. 또한, 이같은 입장은 “이제 문제는 ‘경제’”라고 말하면서 미학의 정치에 관한 문제를 봉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들 시적주체가 정말 변화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채 기존의 시스템에 포섭되기 위해서 애쓰다가 자기연민에만 골몰한 모습을 보이는지는 확인해볼 일이다. 이같은 독법이야말로 시에서 현실을 단편적으로 제시하는 손쉬운 방식일 것이다.
4) 「디어 패밀리」는 후꾸시마 사태 이후인 2014년에 제작되었고, 한국에선 세월호사건이 일어났던 같은 해 미술관에 배치되었다. 박제된 사슴을 발견하고 작품의 제작시기를 함께 고려하면, 유리구슬은 반짝이는 오브제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을 바라볼 때 그 상황은 구성적으로 성립될 수밖에 없음을 알리는 장치로 기능한다.
5) 남수영 「스펙터클과 중력의 무대」, 『비평과 이론』 17권 2호(2012) 133면.
6) 박상수, 앞의 글 365면 참고.
7) 자끄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Le spectateur émancipé)에 대한 해석은 남수영, 앞의 글 123~46면과 김지영 「이미지와 주체」, 『코기토』 제72호(2012.8) 109~38면 참고.
8) 이는 보는 이가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점할 수 있는 특권적 위치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관객’은 “이성적인 관찰자의 특권 대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위치”에 있다. 김지영, 같은 글 129면.
9) 이에 관해서는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 등에서 이미 사회학적 관점으로 몇차례 언급된 바 있다.
10) 이는 의회정치 활동을 불신하는 이들의 태도를 쉽사리 ‘탈정치적’이라거나 ‘사회에 무관심한 방식’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1) “은유가 일깨우는 언어 표현의 생생함은 그것이 어떤 사태를 ‘눈앞으로 가져오기’ 때문에 가능하다”. “죽은 사물”조차 “생생한 것, 살아 있는 것으로” 자리를 옮기는 은유야말로 “사물들 간의 관계를 생기 넘치게 가시화”한다는 의미다(김애령 『은유의 도서관』, 그린비 2013, 11~24면). 서로 구별되는 양자가 있을 때 이들 간의 차이 사이에 놓이는 심층적인 유사성을 기반으로 ‘이동하는’ 은유는 그들의 관계를 가시화함으로써 이들을 엮는 “보편성이나 일반성”을 향해가는 사유를 기반으로 한다(김욱동 『은유와 환유』, 민음사 1999, 266면). 따라서 시를 형성하는 말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면 은유의 역할이 비대해질 수밖에 없다.
12) 수전 손택·조너선 콧 『수전 손택의 말』, 김선형 옮김, 마음산책 2015, 100면.
13) 같은 책 101~102면.
14) 정한아는 1990년대에 대학생활을 보내면서 1980년대의 문학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바에 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긴 바 있다. “누구나 1980년대가 시의 시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생생한 가상이었을지도. 어떤 세대가 한꺼번에 만들어낸 세계에 대한 공동 해석을, 현실이 아니라 텍스트의 형태로 자기를 학습시킨 나는, 아무도 그러라 하지 않았건만, 너무 생생하게 추경험해버린 나머지 일종의 섬망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한아 「천년 왕국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쓺_문학의 이름으로』, 2015년 창간호 187면.
15) 김애령, 앞의 책 186면.
16) 백낙청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 창비 2009, 180면.
17)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75면.
18) 김사과 『0 이하의 날들』, 창비 2016, 20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