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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신예시인 특집
이장근 李長根
1971년 경북 의성 출생. 2008년대구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chamgeul@hanmail.net
무조건 천원
거미의 언어로 말하겠다
공중부양을 기대하지 말 것
봉고차 배가 터지도록 물건을 싣고 온 그가
인도(人道)에 거미줄을 친다
허리를 동그랗게 말고 간격에 맞춰
촘촘히 물건들을 짠다
간격을 알리듯 ‘무조건 천원’이라는 글자를
물건 사이사이에 꽂아놓는다
무조건이라는 말처럼 무서운 말이 있겠는가
바람도 넘어뜨릴 수 없는 말
물방울을 별처럼 매단 은하계의 말
단속반이 폭풍처럼 다녀간 후에도
다음날 물방울 눈빛으로
거미줄을 짠 그가 아니었던가
천원은 조건이 아니다
허리 구부러진 깍쟁이 할머니도 깎아내릴 수 없는 금액
설마 하고 날아왔다가 어머나 하고 걸리고 마는
투명한 금액이다
세도 세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최소화된 거미줄의 간격으로
그가 걸음을 옮기고 있다
투명한 물건들 가운데 정점처럼
커다란 날개를 펼친 날벌레처럼
지상에 거미줄을 친 그의 언어로 말하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무조건 천원”
꿈을 꾸러 갑니다
자장자장 네 박자로 걸어갑니다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위층 남자가 코골이를 하고 있습니다
잠깐만요! 뒤에서 옆집 여자가 뛰어들어옵니다
젖은 파마머리에서 물방울이 튑니다
오늘도 북적거리는 정류장
저기, 싸파리 버스가 옵니다
버스 안은 삐까쏘 그림입니다
내 어깨에 여자의 가슴이 달립니다
남자의 날갯죽지에 내 팔 한짝을 달아줍니다
눈코입귀가 바쁘게 퍼즐을 맞춥니다
창밖에는 사자가 우글댑니다
여고생들이 우르르 뛰어내립니다
내리자마자 사자로 변합니다
곰 한마리가 출발하는 버스를 잡아탑니다
타자마자 사람으로 변합니다
옆으로 다가와 마늘 냄새 풍기며
커다란 엉덩이를 내 장딴지에 붙입니다
나는 더이상 내가 아닙니다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내방송이 나를 부릅니다
버스 문이 열립니다
훌쩍, 꿈을 꾸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