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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눈먼 자들의 귀 열기
세월호 이후, 작가들의 공동 작업에 대한 기록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 「이것을 누구에게 바칠까」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1. 쓸 수 있을까
“저는 글로 말하겠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삶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이들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엄숙한 표현의 하나로 꺼내던 이 말은 그러나 세월호 이후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모두가 사건은 목격했으나 진실엔 눈감아버린 이 시기를, 방향과 힘이 상실된 ‘쓰기’만으로 감당해낼 수 있을까.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쓸까. 내 경우, 세월호에 관해 무엇을 할지 묻는 말에 오로지 쓰기로 견뎌보겠다는 답을 들으면 괜히 야속하게 느껴지곤 했다. 마치 작가가 책상 앞에 앉아 내놓을 수 있는 결과에만 국한해서 말하겠다는 고집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쓰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평론가 김나영(金娜詠)이 “내가 모르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한편 내가 너무 말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둘 사이의 길항에 놓여 있었다”1)고 전한 고백에는 아무런 말도 제대로 해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절멸(shoah)의 상태에 놓인 현 시기 작가들의 초상이 담겨 있다. “망가진 문법더미 위”에서 “말의 무력” “말의 무의미”2)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쓰기’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계속 쓸 수 있을까.
감자탕 집에서
누군가의 어버이로 살아온 두 사람이
소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단순한 사고에 불과한 게 아니라고
한 남자가 말하지만
맞은편에는 유령이 앉아 있습니까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여자가
펄펄 끓는 감자탕을 들고 옵니다
그냥 사고였잖아요
세상에 그런 일들은, 그냥 사고잖아요
휴대용 버너를 켜고 깍두기가 든 접시를 내려놓으며
그녀는 어떤 시민입니다
사고가 사고 이상이 될 수 없는 어떤 세계가 있습니까
나도 선량한 시민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의 아이가 장래희망 칸에 적어넣은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쓸 수 있습니까
그건 음모론
맞은편에 앉은 자가 밀사의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그렇지요 설마하니
맞장구를 치던 여자가,
쟁반이 떨어져 가라앉습니다
죽은 아이들이 배 안에 가득한 것 같아요
갑자기 진통을 호소합니다
“다음 소식은 피해자 X들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방정식은 자꾸만 다른 방정식을 근이라고 우깁니다. 퇴보의 활주로를 향해 돌아간다고 합니다. 용인될 수 없는 램프 리턴입니다. 이 시체는 누구입니까? 토막 난 불안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 기껏 담아둔 희망에서는 물이 새는군요.”
다음 소식입니까
한 남자가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에 대하여
말하려는 순간에
—입 좀 그만 다물게
입 좀 그만 다물게 그 일이 무슨 일이었는지 우리 좀
알고 싶습니다
빈 소주병 안에서 누군가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맞은편에 앉은 자가 뚜껑을 닫자
병 속에는 에어포켓
여기는 어디 아니 얼마예요 얼마냐가 중요하지 중요한 건 이제 그게 아니라니까 민생을 살려야 한다니까,
손님들은 뉴스를 보고 있습니다 뉴스를 듣고 뉴스를
다음 소식은 물음표를 쓰면 잡혀갑니까
물음표 모양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한반도는 어떤 모양으로 생겼습니까
이 땅 위에서 도대체
무엇을 쓸 수 있습니까
무엇을 쓸 수 있습니까
—한지혜 「무엇을 쓸 수 있습니까」 전문(네번째 304낭독회 2014.12.27)
위의 시는 소통의 도구라 여겨왔던 말이 전달의 과정에서 의미가 굴절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탕을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의 말과 음식을 나르는 이의 말, 감자탕 집의 벽 한켠을 차지하며 마치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감시하듯 지나가는 뉴스의 말 등 이 공간의 모든 목소리는 방향을 잃고 서로를 비켜간다. 이를테면 “단순한 사고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말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거기에 대고 “그건 음모론”이라고 대꾸하는 순간, 말 속에 조금이라도 잠재되어 있으리라 기대되는 진실은 휘발되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엔 왁자지껄한 식당일 테지만 그곳에서 ‘대화’는 기실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말의 용도가 점점 줄어드는 이 현장의 구석에서는 한편, “세상에 그런 일들은, 그냥 사고였잖아요”라는 말이 “펄펄 끓는 감자탕”과 함께 밥상에 놓인다. “그렇지요 설마하니” 하는 맞장구에 매여 식당 안의 세계에 안착한 이 말은 “그 일”을 “사고”라고 여기는 순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단박에 “사고가 사고 이상이 될 수 없는 세계”의 “어떤 시민”으로 만든다.
이때 “선량한 시민”이 되고 싶은 시인의 목소리는 어느 편에 있나. 시인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단정하는 평서문과 “입 좀 그만 다물”라는 명령문이 둘러싼 ‘시민’의 세계로부터 추방된 의심의 말(“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과 손잡는다. 그러고는 가정의 말(“죽은 아이들이 배 안에 가득한 것 같아요”)과 의지의 말(“알고 싶습니다”), 물음의 말(“당신의 아이가 장래희망 칸에 적어넣은 것은 무엇입니까” “물음표를 쓰면 잡혀갑니까”)의 위치로 다가간다. 어쩌면 그 자리로 가는 한, 앞으로도 시인은 어딘가에 가두어진 물만 보면 ‘그 사건’을 떠올릴 터이고, 거기로부터 “누군가 외치고 있”는 소리를 듣기도 할 터이다.
물론 이 시를 말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불완전한 성미와, 오해에 기반을 두고 이해를 추동하려는 대화의 어리석은 본성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새롭게 읽히며 제 수명을 연장시키는 작품이 좋은 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그렇게 읽지 않는 이유는, 시인의 목소리가 모두의 말이 방향을 잃고 헤매는 상황 속에서 발견되기도 하거니와, 그 목소리마저 “무엇을 쓸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포함시키는 방식을 이 시가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현재 모든 이들의 말을 속박하고 있는 닻이 물음표 모양으로 한반도에 정박하고 있는 상황을 구현한다.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 자체를 구체적인 정황으로 삼아 인간의 말이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조건 속에서도 결코 도망가지 못하는 문학의 남루한 현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이후’의 방식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그 누구도 세월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을 살게 되었다. ‘사건’은 이전의 현실이 부서져 ‘이후’라는 조건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때, 그래서 습관적으로 삼아왔던 경계를 복받치듯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을 때 성립한다. 언어로부터 삶을 구성하는 인식의 틀을 제공받는 우리는 ‘세월호’라는 사건의 곁에서 망가졌으므로, ‘쓴다는 일’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하며 왜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요컨대 세월호 이후에 씌어지는 글들의 문제는 사건을 다루는 방식의 상투성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수사를 동원해서 쓴다 하더라도, 사건에 비할 때 문장이 “허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3)
작가들은 순식간에 상투와의 싸움이 아닌 ‘허접’과의 싸움 한복판에 던져졌다. 이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쓰기에 대한 무력감’의 반동으로, 정말 필요한 ‘사람의 말’이 무엇인지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압박이 작가들에게 급격히 침투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세월호’ 이후의 글쓰기는 슬픔에 광의적으로 접근했을 때 지워질 수도 있을 구체적인 얼굴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했고, 희생자 가족들이 거리에서, 팽목항에서 이어가고 있는 고투에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이때 재현의 문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난관으로 자리한다). 또한 사건을 음해하는 세력들의 난폭한 말들과 ‘지겹다’ ‘해서 무엇하느냐’는 식의 냉소에 정면으로 맞서,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두의 존엄 역시 더이상 훼손될 수 없도록 해야 했다. 이같은 고민은 그간 고정된 매체를 통해 전달되어온 쓰기 작업의 운신을 살펴 문학이 사회적 충격이나 통증과 맺어왔던 관계를 다시금 가다듬어야 한다는 요청으로 이어졌다. 환언하면 우리가 이전에 나누었던 말이 왜 동결(凍結) 상태가 되었는지를 살펴 기존의 ‘쓰기’ 방식을 내파(內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청, 단정(斷定)의 편에서 비껴난 가정(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의지(누구든 말해야 한다. 무어라도 해야겠다), 물음(무엇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의 말들이 길을 터서 ‘이후’의 말을 구상할 수 있도록 누군가와는 함께해야 한다는 요청이 작가들의 공동 행동을 부추겼던 것이다. “글로 말하겠다”는 표현에서 한정하고 있는 ‘쓰기 행위’의 원심력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이에 공감하는 작가들의 예술활동 중 한 사례로 ‘304낭독회’를 들 수 있다. ‘304’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리는 의미의 숫자로, 작가들은 낭독회가 304회를 채울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304낭독회는 2014년 9월 20일을 시작으로 매달 마지막 토요일, 낭독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준비한 글을 낭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4)
낭독회의 다짐이 이행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한 이들의 목소리가 잠기지 않도록, 공명하여 크게 울려나갈 수 있는 목소리들의 수 역시도 확장되어야 했다. 그같은 조건을 의식해서인지 304낭독회의 낭독자 섭외는 주로 직전에 낭독을 했던 사람이 친구에게 다음 회의 낭독을 권하는 식인데, 그 덕분에 자연스레 낭독자가 친구들에게 낭독회를 알리고 (낭독은 못하더라도) 참여를 권유하게 된다. 낭독을 권유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은 그간 방에만 고립되어 있던 자신이 이제껏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들이 서로 이음매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일견 부서지기 쉬어 보일 수 있는 ‘우정의 연쇄’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유연한 매개가 되어 “먼 시간까지 오래 읽고 쓰고, 행동하겠다”5)는 304낭독회의 결심을 실현 가능하게끔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소박하게만 보이는 ‘낭독회’라는 형식이 왜 오래도록 예술활동의 일환으로 모색되어왔는지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일찍이 낭독회는 문학을 통한 공동체성의 환기를 위한 장(場)으로 자주 활용돼왔다.
반세기 전인 1946년, 민족문학 단체였던 ‘조선문학가동맹’이 낭독회를 추진했던 이유는 “대중의 계몽화”와 “정치적 메시지의 전달”이었다.6) 시낭독 운동을 평가하며 김기림(金起林)은 “시인이 군중의 호흡과 표정과 움직임에서 새로운 시상은 물론이려니와 어떤 새로운 ‘리듬’, 새로운 역학을 그 시에 받아들일 수 있을 것”7)이라며 낭독이 실제 작품의 생산에 기여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표한 바 있다. 당시의 시낭독은 비록 뚜렷한 목표달성을 위한 수직적 운동에 해당했을지라도, 대중의 결집을 꾀하는 데 용이한 방식으로 혹은 참여한 시인들이 스스로를 대중의 한 사람이라 인식하게 되는 동기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이를 상기한다면, 조선문학가동맹은 낭독회의 효과를 정서적 감응이라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2009년 여름에 시작되었던 ‘작가선언69’ 이후의 여러 활동도 앞선 낭독회의 특징을 이어간다고 볼 수 있다.8) 단, 근래의 낭독회는 모든 참여자가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감응을 형성했으면 하는 의도로 작가와 시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일에 주력한다. 그러면서도 인쇄매체로 한정되어 있던 텍스트 너머로 ‘문학적’ 발화를 충동하여 예상치 못한 감각을 일깨우기 위한 노력도 놓치지 않는다. 304낭독회 역시 그 계보에 놓일 수 있을 것 같다. 눈으로 확인되는 강력한 기제(機制)가 없이도 서로를 신뢰하는 속에서 글을 읽고 듣는 행위를 이어가고 있는 304낭독회는 “눈먼 자들의 국가”9)에서 눈으로 보는 방식이 아닌 다른 감각기관의 열림을 유도하면서 ‘쓰기’ 활동을 추동하며 운영되고 있다.
3. 눈먼 자들의 귀 열기: 리듬의 정치성
낭독을 하는 행위자와 청자의 마주함 속에서 생성되는 우연적인 상황은 예측불허의 감응을 이루면서 낭독회 참여자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행동반응을 일으킨다. 다음은 2014년 11월 29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번째 304낭독회에서 발표되었던 글이다.
다시 아침이 왔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부신 것이 눈을 감게 합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지옥과 명징한 세계 속에서 나는 지속됩니다. 단단한 땅 위에 나는 서 있고 따뜻한 곳을 향해 발을 내디디며 달고 더운 음식을 먹고, 가끔 웃습니다. 그렁그렁한 눈이 나를 봅니다. 웃다가 멈춰진, 환하게 정지된 얼굴 속에서 마지막 달처럼 휘어진 둥근, 소년 소녀들. 소년이 소녀를 만나 작은 과자를 나누어 먹을 때, 과자 부스러기가 좁은 무릎에 소복소복 내려앉을 때, 덩치 큰 아이가 이불을 나누어 덮을 때, 구겨진 가방을 열어 뒤집을 때, 창밖의 물이 예쁘다고 느낄 때, 괴물이 만화 속에 있을 때, 노래할 때, 넘어질 때, 뛰어도 뛰어도 더 뛰고 싶을 때, 다 먹고 더 먹고 싶을 때, 친구의 등에 손과 마음을 얹을 때, 서로 속일 때, 창피해서 울어버릴 때, 좋아서 때리고 싶을 때, 스무살을 상상할 때, 마흔과 여든, 결혼과 여행을 준비할 때, 함께 먹을 음식의 간을 볼 때, 쏟아지는 물건들 속에서 서로를 껴안을 때, 무서울 때, 기다릴 때, 다음 계절이 오지 않을 때, 멈추지 않을 때, 누군가 최선을 다해 조용히 숨을 거둘 때, 달리는 차 안에서 나가는 문을 못 찾은 고양이가 썩어갈 때, 굽이 낮은 구두가 짝을 놓치고 서로 멀어질 때, 모든 것이 떠다닐 때, 사라질 때, 죽은 채 도착할 때, 그들의 엄마는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합니다. 작은 누나는 우는 아저씨처럼 주먹을 움켜쥡니다. 고장 난 장난감처럼 형이 뒤틀립니다. 젊은 청년들은 총탄과 폭격이 없는 전쟁터에서 자주 이별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습니다. 기별이 없는 동안 말법을 잃어버립니다. 짧거나 긴 신음, 쇠줄에 묶인 포로처럼 아 아 어 으 어 아 어 으 어 이토록 무용한 모국어 속에 젖은 눈과 바짝 마른 입이 왈칵 쏟아내는 울음은, 먼 타국의 돌멩이처럼 다만 모르는 풍경일 뿐입니까.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어쩌면 당신이고 당신은 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잘 모르고 당신도 나를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제 모르면 안되는 것들이 있고, 끝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사는 동안, 내가 늙어가는 동안, 선한 눈, 죽음을 미처 알지 못했던, 눈부신 장면 속에서 서로를 먹이고 재워주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눈이 나를 보고 있을 때 말입니다. 저 큰 빌딩이 당신 거고, 나의 집이 내 것인 동안, 이 모든 것이 자본의 것이고 당신과 내가 눈먼 노예처럼 등이 굽어 온몸이 땅으로 쏟아지는 동안, 나는 이 땅에서 나의 혼을 소유할 것이고, 썩어문드러질 것이고 나에게 질문할 것입니다. 더럽고 추악한 인간의 형상으로 이 도시, 이 거리에 서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할 일이고 이것은 나의 부모가 나에게 준 역할이며, 나의 부모는 이 땅에서 나를 낳아 살게 하였습니다.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닙니다. 나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미안하다는 말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먼저 해야 할 것들이 있고 아직 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는 기운 내어 오늘의 밥을 먹고 내일을 궁리할 것입니다. 가끔 미치거나 울거나 뚱뚱한 부자가 되어 편하게 살고 싶은 탐욕 속에 있을지라도 나는 이 명징한 참혹을 지속할 것입니다. 나의 애도는 씩씩한 것이고 일상의 노동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오라 사람이여. 울음보다 먼저 도착하라. 소년이 소녀를 만나, 작은 손이 더 작은 손을 쥐는 동안, 사람이 사람에게 말하라.
—장수진 「사람이 사람에게」 전문(세번째 304낭독회 2014.11.28)
시인은 낭독회에서 “아 아 어 으 어 아 어 으 어 이토록 무용한 모국어”를 마치 문자 옆에 괄호 속 지시문이라도 있는 듯, “아(한숨 쉬고) 아(조금 길게) 아(더 길게, 신음처럼) 아(더 길게, 비명처럼) 아(지친 듯이, 잦아들도록) 아(조심스럽게, 작은 소리로) 아(다시 좀더 길게) 아(고통스럽게, 오래도록) 다 말할 수 없는 이토록 무용한 모국어”로 낭독했다. 이때 문자는 엄연한 하나의 개념적 의미체계에서 밀려나는데, 시인의 호흡과 음성의 조율로 인해 청자들은 문자가 나르는 소리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시인 자신의 언어화할 수 없는 괴로움이 목소리에 실리면서, 그 소리가 그간 우리의 귀에 들리지 않았던, 진실과 함께 가라앉은 이들의 소리와 맞닿을 수도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나는 어쩌면 당신이고 당신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구절에 힘이 실리게 된다. 시인은 낭독을 통해 우연히 발휘되는 육체적 에너지로 (능동적으로 듣기를 행하는) 청자들과 만나고, 의미의 흔적이 사라져 “무용한” 문자들은 낭독의 현장에서 수행적(performative) 의미를 구성하게 된다. 이처럼 낭독의 수행성은 “행위자와 관람자의 실제 공(共)-현존을 통해 구성”10)된다. 시각적 원리에 기반한 ‘쓰기-읽기’(문자로 ‘보기’, 자율적인 개인의 집필과 묵독행위)가 불가능한 곳에서 열리는 304낭독회는 ‘읽기-듣기’(목소리를 ‘듣기’, 타율적인 개인의 발성과 청취)의 수행을 통해 이후 ‘쓰기-살기’의 가능태가 실질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언어를 통한 내면적인 ‘공-현존’을 잠재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낭독회 참여자들이 ‘여기’에 있는 몸으로 형성하고 있는 공-현존은 역으로 ‘없는 사람’을 부각시키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당신”은 여기에 없고, ‘우리’만 여기에 남아 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는 “당신”의 얼굴을 완벽히 재현하는 일에 끝내 실패할 것이다. 그저 “당신”이 사라지게 된 경위에 대해 생각하면서, 거기에 지속적인 질문과 충족되지 않는 대답을 온몸으로 던질 뿐. 또한 ‘우리’가 “사람”으로서 질문할 때, “당신”도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믿을 뿐. “당신”의 ‘몸’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곳에서 우리의 몸이 현현하는 상황을 통해 “당신”의 없음이 가시화되는 방식은 304낭독회가 안고 있는 공-현존의 딜레마이자 세월호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가 안고 가야 할 책무이다. 이를 장수진(張修珍)은 ‘나’의 살아 있음을 설명하는 서술과 부재하는 “당신”이 했을 행위에 대한 서술이 겹치도록 쓰고 있다. “명징한 세계”에서, ‘나’의 육체가 먹고, 웃고, 느끼는 행위를 표현하는 말은 “소년”과 “소녀” 들이 겪었을 일을 표현하기 위한 말과 다르지 않다. 주어가 별다르게 등장하지 않는 문장들이 이어지는 전반부에 “쏟아지는 물건들 속에서 서로를 껴안을 때, 무서울 때, 기다릴 때”로 짐작되는 장면이 예상치도 못한 사이에 밀려왔다가 가면서 독자는 “우리는 이제 모르면 안되는 것들이 있고, 끝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라는 구절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이다.
낭독회에서 읽히는 글은 때때로 낭송을 염두에 두고 씌어지는 까닭에 낭독에 적합한 리듬과 호흡을 가지고 있어서 “시집의 지면에 얌전히 기록되었을 때”는 정작 “시적 효과가 급격히 줄어들 것”11)이라는 염려를 낳는다. 그러나 이 지면을 빌어 위의 작품을 접하게 된 독자들은 거듭 인용한 구절들에 오래 눈이 머물 것이라 믿는다. “~할 때”의 반복이 나의 현존과 “당신”의 부재와 그를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의 삶을 연상시킬 뿐 아니라 그와 겹치는 이미지들을 유동적으로 강화시키거나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형성하는 중인 리듬 덕분이겠다. 장수진의 글은 낭독에만 적합한 리듬이 아닌,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운 내어 오늘의 밥을 먹고 내일을 궁리”해야 하는 이의 참혹한 몸이 이어가야 할 리듬을 구현하고 있다. 이때 리듬은 “하나의 음가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율동을 다원화하는 언어활동에의 참여”12)로 경험되는 것이다.
앙리 메쇼닉(Henri Meschonnic)은 ‘리듬’을 운율론에 갇힌 개념이나 ‘척도’로 계산 가능한 형식으로 사유하지 않고, 사람의 호흡 및 심장과 연계되는 몸의 움직임, 그와 더불어 짓는 표정,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떨림 등 광의적인 의미로서의 ‘삶의 박동’에 기반을 두고 설명한다.13) 그는 특히 리듬을 정형시구와 동일시하는 관점을 일컬어 “계절과 날의 순환, 인간의 육체적 주기성”14)만 고려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리듬은 ‘주기성’ ‘규칙성’을 특성으로 삼는 것이 아닌 “‘운동’ ‘흐름’ ‘예측 불가능한 무엇’에 토대를 둔” 개념이라고 제안한다.15) 이를 염두에 두면 우리가 처한 지금의 상황을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현재의 치안(police) 질서에서 필요로 하는 ‘리듬’은 정제된 균형을 삶에 도입하기 위한 ‘동일한 것의 규칙적인 회귀’, 즉 우리에게 혼돈을 안기는 ‘사건’의 의미를 미리 만들어진 도식을 준거 삼아 탈각시키도록 종용하는 방식에 해당한다. 이같은 리듬의 의미만 따른다면 우리는 ‘사건’이 초래한 혼돈을 잠재워야 ‘삶’이라고 용인돼온 때로 돌아갈 수 있고,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완수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망각함으로써 일상의 리듬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거북하게 느껴진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혼돈의 리듬을 살려냄으로써 치안 질서에 균열을 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앞의 시에서처럼 우리에게 떠밀려오는 “명징한 참혹”을 피하지 않고, 그를 지속시키는 삶을 살아냄으로써 가능하다. 이 시에 내재된 형식인 리듬이 낭독을 통해 읽는 이와 듣는 이의 몸으로 전화(轉化)될 때, 리듬의 정치성은 발현된다.16)
4. 느린 화살처럼, 쓸 것이다
낭독회에서 참여자들이 겪는 리듬의 경험은, 소리와 소리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싸움의 현장에서도 이뤄진다. 광화문 세월호농성장에서 진행했던 두번째, 세번째 304낭독회에서 참여자들은 그 일대에서 농성을 반대하는 보수우익 집단과 종교단체의 ‘소리’ 사이에서 낭독해야 했다. 또한 회를 거듭할수록, 해당 낭독회를 진행하는 때마다 들려오는 곳곳—이를테면 국가권력에 의해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있는 현장 혹은 파업, 농성 등을 통해 일상을 중단시키고 문제적인 상황 자체를 또다른 삶의 근육으로 이끌고 가게 된 곳—의 소식들에 어떻게 곁을 내어줄지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정은 낭독회라는 형식이 지나간 시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제의적인 성격에만 머물지 않도록 만든다. 여전히 시끄러운 현장성의 부각과 리듬의 수행을 통해 일시적으로 발휘되는 말들의 의미가 ‘세월호’의 시간성을 현재진행형으로 각인시키는 덕분이다. 기억은 우리가 말하는 속에서 고정적으로 보관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해지고 확장해가는 ‘현재’의 상태를 통해,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우리의 ‘여기’ 있는 몸을 통해 수행적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낭독회의 ‘현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산될 차이를 가지고 기억의 무늬를 만들어가리라는 의미에서 영원회귀적이다. 낭독회 마지막 순서에서 참여자들이 다 함께 읽는 “오늘은, 4월 16일입니다”라는 문장에서처럼 “현재와 미래에서부터 과거가 항구적으로 재개되는 반복”17)을 취하는 형태로 낭독회의 시간은 회귀할 것이다.
304낭독회는 사회적 고립과 망각에 맞서 싸우고 있는 희생자 가족들의 곁에서 20여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걸릴지라도 304회를 채우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낭독회를 시작한 작가들은 지금처럼 낭독회가 한달에 한번씩 집중적으로 열리는 방식을 꼭 고집할 필요가 없으니, 이 낭독회가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할 의지만 있다면 다른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렇게 되면 낭독회는 생각보다 일찍 304회를 채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 횟수를 채울 것인가에 조바심을 내는 사람은 없다. 기나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낭독회를 이어가리라 계획한 작가들의 ‘리듬’에는, 세월호사건이 아니었다면 족히 20년도 넘게 살았을 이들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낭독회가 각오하고 있는 시간성은 사건을 함께 살아내는 방식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시인 이원(李源)의 말처럼 “사랑하는 아이와 가족을 잃어 내내 고통받는 사람들처럼” “그 부모들처럼, 그 가족들처럼, 사회가 잊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 손쉬운 애도를 최후까지 지연시키는 일이 문학의 할 일”18)이다. 사건이 피해자들의 고립으로 마무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304낭독회에 참여한 이들은 사건의 통증이 우리 모두의 삶의 리듬으로 체화되기를 바란다. 관성적으로 살았던 몸을 무너뜨리고 그 한계를 조건 삼아 ‘쓰기-살기’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니체는 가장 고귀한 종류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 “우리 마음속에 겸손히 자리 잡은 후 결국 우리를 점령하여 우리의 눈을 눈물로, 우리 마음을 동경으로 채우면서 천천히 스며드는 아름다움”이라고 했다.19)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곁, 그 자리로 가서 오래도록 귀를 열고, 말을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씻겨가지 않도록 계속해서 쓰는 것. 문학은 느린 화살처럼 오래도록, 은밀한 걸음으로 갈 것이다. 이는 문학이 애초부터 해온 일이기도 하거니와 문학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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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나영은 2014년 12월 28일에 있었던 네번째 304낭독회 <없는 사람처럼>의 열번째 낭독자였고, 준비한 「손, 전화기」 낭독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런 발언을 했다. 304낭독회에 대해서는 이후의 설명 참조.
2)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18면.
3) 304낭독회를 위한 첫번째 회의 자리에서 시인 심보선(沈甫宣)은 ‘세월호’가 전하는 무게감이 너무나 크고 강렬하여 아무리 그에 대해 글로 세련되게 표현하려 노력한다 하더라도 결국엔 “허접스럽게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4) 첫번째 304낭독회는 작가와 작가의 친구 들이 세월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한줄로 표현한 문장 306개를 낭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낭독회’는 낭독을 하는 자가 무대에 서고, 듣는 자가 객석에 앉는 형태를 취하기에 십상인 데 반해, 첫번째 304낭독회는 작가와 작가의 친구들, 그리고 낭독이 진행되는 중에 농성장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참여하게 된 여러 시민이 구분 없이 둥글게 선 채 팸플릿에 정리된 306개의 문장을 하나씩 돌아가며 낭독했다. 그 과정에서 낭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자신이 쓴 문장을 다른 이가 낭독하거나 다른 이가 쓴 문장을 자신이 낭독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구분이 없어지는 이 경험은 이후 작가들의 낭독회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으로 자리 잡았다.
5) 304낭독회 책자 머리글의 일부.
6) 박민규 「조선문학가동맹 ‘詩部’의 시 대중화 운동과 시론」, 『한국시학연구』 제33호, 2012.4, 183~217면.
7) 김기림 「낭독시에 대하야」, 『신민일보』 1948.3.13. 같은 글 209면에서 재인용.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재의 문법에 맞추어 수정하였다.
8) 홍대입구역 부근 철거 예정 건물에 있던 식당 두리반에서 열린 ‘불킨 낭독회’, 작가와 시민들의 단어 하나, 문장 하나씩을 모은 후 이들이 함께 말을 배열하면서 시 한편을 완성했던 ‘희망버스’에서의 시 쓰기 활동, 그리고 그간 언론매체에 보도되지 않았지만 투쟁이 일상화된 공간에서 벌어진 여러 낭독회 등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고 한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을 문학적 활동으로 채우는 ‘문학의 아토포스’의 생성에 대한 논의는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58~80면 참조.
9) 소설가 박민규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으로의 ‘세월호’를 정의하면서, 국민으로 하여금 진실에 눈감도록 종용하는 국가를 문제화한다. 그가 진단한 대로 한국에 살고 있는 모두가 진실을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모두 ‘눈먼 자들의 국가’에 사는 셈이다. 『눈먼 자들의 국가』 47~65면.
10) 에리카 피셔-리히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문화학과 퍼포먼스』, 문화학연구회 옮김, 유로서적 2009, 21면.
11) 진은영, 앞의 책 177면.
12) 최현식 「한국 근대시와 리듬의 문제」, 『한국학연구』 제30집(2013) 411면.
13) 루시 부라사 『앙리 메쇼닉: 리듬의 시학을 위하여』, 조재룡 옮김, 인간사랑 2007 참조.
14) 같은 책 150면.
15) 리듬의 어원인 그리스어 ‘뤼트모스’(rhythmos)는 ‘어떤 강이 흐르는 모습(couler)’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플라톤 이후로는 이 말이 이탈을 허용하지 않는 규범적인 순환성, 즉 ‘측정이 가능한 형식적 단위’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앙리 메쇼닉은 언어학자 벤브니스트가 리듬의 어원을 수정하면서 “물결들의 다소간 규칙적인 운동”이라는 의미를 결부시킨 점에 주목한다. “플라톤에 의해서 그 의미가 제한되거나 고정되기 이전에 ‘물결의 존재’ 혹은 ‘흐르는 형태’를 지칭”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따라서 메쇼닉이 재해석한 뤼트모스는 “형상(figure)이자 만남(rencontre)이며, 질서(ordre)를 포괄하면서도 이 질서가 ‘변화하는 모습’”에 가깝고, 이러한 형태는 “고정된 형태와 전적으로 구분되는 ‘운동과 변화방식’ 자체”다. 같은 책 146~51면.
16) 리듬의 창출 방식에 대한 새로운 검토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리듬의 기운이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최근의 몇몇 작품들을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이후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17) 같은 책 179면.
18) 김여란 「고통의 목소리를 보여주는 ‘문학의 정치’ 필요」, 경향신문 2014.8.11.
19)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17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