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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나희덕 羅喜德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등이 있음. rhd66@hanmail.net
명랑한 파랑
한 개의 청바지는 열두 조각으로 만들어지지
또는 열다섯 조각 열일곱 조각
안팎이 다르게 직조된 청(靑)처럼
세계는 흑백의 명암을 선명하게 지니고 있어
질기고 질긴 그 세계는
일부러 찢어지거나 해지게 만드는 공정이 필요해
한 개의 청바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에 푸른 물이 들어야 하는지,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만든 청바지 속에 들어가보지 못했지
그들의 자리는 열두 조각 중 하나,
또는 열다섯 조각 중 하나, 열일곱 조각 중 하나,
명랑한 파랑을 위해
질기고 질긴 삶을 박고 있을 뿐
미싱 위에서 부표처럼 흔들리며 떠다니고 있을 뿐
푸른 혓바닥처럼 쌓여 있는 피륙들,
조각과 조각이 등을 대고 만나는 봉제선들,
주머니마다 발굽처럼 박히는 스티치들,
우연처럼 나 있는 흠집이나 구멍들,
공장 곳곳에서 돌아가는 검은 선풍기들, 검은 눈들,
방독면을 쓰고 염색약을 뿌리는 사람들,
적당한 탈색을 위한 작은 돌멩이들,
세탁기에서 나와 쭈글쭈글 말라가는 청바지들
다리미실을 지나 한점 주름 없어지는 세계
마침내 라벨을 달고 포장을 마친
명랑한 파랑
풀의 신경계
풀은 돋아난다
일구지 않은 흙이라면 어디든지
흙 위에 돋은 혓바늘처럼
흙의 피를 빨아들이는 솜뭉치처럼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흙과 물기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풀의 신경계는 뻗어간다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풀은 풀과 흔들리고 풀은 풀을 넘어 달리고 매달리고
풀은 물결기계처럼 돌아가기 시작한다
더이상 흔들릴 수 없을 때까지
풀의 신경섬유는 자주 뒤엉키지만
서로를 삼키지는 않는다
다른 몸도 자기 몸이었다는 듯 휘거나 휘감아들인다
가느다란 혀끝으로 다른 혀를 찾고 있다
풀 속에서는 풀을 볼 수 없고
다만 만질 수 있을 뿐
제 몸을 뜯어 달아나고 싶지만
뿌리박힌 대지를 끝내 벗어나지 못해
소용돌이치는 풀,
그 소용돌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고
나는 자꾸 말을 더듬고
매순간 다르게 발음되는 의성어들이 끓어오르고
풀은 너무 멀리 간다
더이상 서로를 만질 수 없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