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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기준영 奇俊英
1972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장편 『와일드 펀치』, 소설집 『연애소설』 등이 있음. ariel_1@naver.com
조이
윤재는 그 밤에 문정과 무슨 얘기를 나눠야 좋을지 몰라 걱정이 됐다. 자매끼리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한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도 모두 7년 만의 일이었다. 할 만한 말들을 메모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선, 조카들 선물을 고르느라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무난할 것 같았다. 지난여름 처음으로 자취방을 구했다는 사실 정도는 웃으면서 전할 만했고, 엄마와는 가끔씩 연락해 얼굴을 보고 지낸다는 말은 할 수도, 안할 수도 있었다. 어렸을 적 추억을 화제삼는 건 문정에게는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니 당일 분위기를 봐야 할 터였다. 아빠가 작년에 많이 아팠다는 얘기는 꺼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막막해졌다.
부모의 이혼 후에 윤재는 아빠를 따라가 살게 됐고, 문정은 애인과 함께 해남으로 떠난 뒤 가족들과 연을 끊었다. 윤재의 나이 열셋, 문정의 나이 스무살 때의 일이었다. 윤재는 문정이 아빠의 문자메시지에 어쩌다 한번씩 답을 보내왔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윤재가 알기로는 부녀가 주고받은 그 메시지들은 그리움이나 슬픔을 자아내는 감정의 교신 같은 게 아니었다. 아빠는 어색하게 다정한 인사를, 문정은 분명하게 건조한 대답을 보내며 관계의 한계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인데다,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삶은 각자의 자리에 따로 놓여 있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뒤였다.
윤재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자 이후 몇년에 걸쳐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노력들을 찾았다. 그중 하나는 문정을 어렸을 적 함께 지내다 헤어진 성숙한 친구의 자리에 두는 것이었다. 멀리 전학을 가서 볼 수 없게 된 연상의 친구. 마음의 먼 자리로 물러난 친구에게는 적어도 원망이나 큰 기대감 없이 소식을 선별해 전할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반에서 나랑 제일 친한 친구는 정이야. 지난주에 걔가 기르던 햄스터가 죽어서 같이 산책로에 묻었어. 정이가 가끔 햄스터 이름 토리 앞에 내 이름을 붙여서 윤재토리라고 불렀는데, 이제 그런 장난은 칠 수가 없게 됐어.’
이 정도가 개중에 어느정도는 마음을 담아본 경우였다. 답신으로는 문자 대신 이모티콘을 받았다. 우는 얼굴 하나와 하트 하나.
지난 7년간 문정이 윤재에게 제 소식을 전해준 경우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혼인신고를 했다, 시누이가 대장부다, 쌍둥이를 낳았다,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는 사실 정보들을 공지나 통보 식의 단문으로 보낸 거였다. 거기에 윤재가 나서서 ‘아!’나 ‘어!’ 이상의 반응으로 개입할 수 있는 구석은 없어 보였다. 사실 뭘 해야 할지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러니 2주 전의 통화는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는데, 문정은 윤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 자기가 지금 서울에 있다면서 처음으로 정확한 주소를 윤재에게 전해주었다.
“크리스마스엔 뭐 해? 서울엔 안 오니?”
윤재는 멍하니 서서 문정의 그 명랑한 목소리를 낯설게 ‘경험’했다. 어떻게 지냈는가를 묻지도 답하지도 않은 채, 마치 가능하면 그냥 들러나 가라는 식으로 말하는 그 목소리에는 대답을 기원하는 간절함이나 오해를 두려워하는 망설임 같은 게 없었다. 거기에 대고 크리스마스 따위가 특별했던 적 없지 않느냐고 되묻는 건 덜 자란 아이의 수틀린 반항밖에 되지 않을 듯했다. 윤재는 “갈게”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이전 통화는 3년 전쯤에 있었다. 그때 문정은 불쑥 새엄마가 잘해주느냐고 물었고, 윤재는 특별히 그러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다음 질문은 새엄마가 미인이냐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 말에 농담기가 섞여 있다는 걸 알아챌 만큼은 정신이 들었기에 윤재는 그렇다고 대꾸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새엄마는 친엄마보다는 객관적으로 보아 미인이었다. 아빠와 선을 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살림을 합친 경우로, 아빠한테 살가운 사람이었다. 누구나의 인생에 저마다 복이 하나씩은 있다는 걸 그런대로 긍정할 수 있게 돼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윤재는 줄곧 대전에서 살면서 십대를 보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는 가요 후렴구에 심취한 아빠를 뒀다. 그녀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나중에 곱씹지 않도록 올해 크리스마스를 되도록 잘 보내고 싶었다. 실수라도 저질러 나중에 그 회상 전체를 물리치려고 도리질치게 되면 어떡하나 근심스러웠다. 하지만 이 만남에 스스로 계획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낙담했고, 그래서 고민하던 밤의 한순간 실제보다 아주 작은 사람이 됐다. 스무살의 극장 매표원. 그외에는 자신을 문정에게 무어라고 소개할 수 있을지 감감했다.
윤재는 문정과 통화를 한 그 주에 바로 극장 운영자에게 양해를 구해 23일부터 5일간의 휴가를 얻어놓았다. 약속일인 크리스마스이브를 전후해 며칠간은 조용히 혼자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운영자는 난감하다면서도 윤재에게 굳이 사정을 따져 묻지는 않았다. 연중무휴에 현금거래를 원칙으로 하는 이 단관극장에서 윤재는 성실하고 꼼꼼한 직원이었다.
극장은 200석 규모의 상영관과 라운지로 구성된 공간으로 번화가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4층짜리 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라 사람들이 상영관까지 오르는 방법은 계단을 이용하는 것뿐이었고, 극장의 간판은 1층에 자리한 제화점 간판보다 작고 단순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외관과는 달리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라운지에 아기자기한 테이블과 소품들이 배치돼 있는 게 한눈에 들어왔고, 각종 영화 포스터와 리플릿을 전시하는 공간도 따로 마련돼 있어 관객들에게 ‘의외의 발견’을 했다는 기분을 안겨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흥행성 위주가 아닌 나름의 기준으로 상영작들을 안배했다. 우연히, 순전한 호기심 때문에 이곳에 들렀던 사람이더라도 언젠가는 열혈 관객이 되어 빗길이나 눈길을 뚫고 다시 찾아오거나, 새 프로그램을 알리는 극장의 메일링 서비스를 기다리는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윤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이 작은 세계의 한 귀퉁이에서 지난 9개월간 아무런 미래도 그리지 않으며 보냈다. 집에서 나와 방을 얻어 시작한 새 생활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한동안 다른 시름 없이, 단순한 습관을 이어붙인 나날을 살고 싶었다. 그럼에도 한해가 저물어갈 때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이달은 그녀에게도 다가올 날에 대한 질문처럼 남았다. 22일 마지막 상영작의 마지막 관객을 상영관 안으로 들여보내며, 그녀는 극장에 불이 난다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했다.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시뻘건 불길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극단적인 상상은 항상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다른 사람의 옷,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다른 사람은 엄마였다가, 문정이었다가, 약물중독으로 죽은 미국의 여가수가 됐다. 상영관 내에서는 그 여가수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상영 중이었다. 그녀는 상영관 안으로 조용히 발을 들여놓고 한동안 벽면에 기대서서 살아 있을 적에 젊고 생기 있던 그 가수의 말하는 모습,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도로 밖으로 나왔다.
“지금 입장 안되나요?”
뒤늦게 도착한 남녀 커플이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윤재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평소라면 친절한 목소리와 미안한 듯한 웃음을 지어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익숙한 동작과 표정을 상상의 불길이 모두 앗아간 듯했다. 그녀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돼요.”
그리고 그들을 스치듯 지나쳐 제자리로 돌아와 다음날 서울행에 챙겨갈 소지품 목록을 적어내리면서, 남녀 커플이 라운지를 서성이도록 한동안 그냥 두었다.
*
윤재는 약속일에 하루 앞선 23일 오후 세시경 대전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하루 여유있게 서울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리는 게 아무래도 마음 편할 듯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간밤에 떠올린 아이디어들이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답다는 확신에 차서 활력이 솟았다. 모든 게 흐트러짐 없이 진행되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침 일찍 그녀는 은행에 들러 현금을 넉넉히 뽑아 지갑에 채워넣었고, 지금은 운좋게 옆자리를 비워둔 채로 서울행 기차의 순방향, 창가 좌석에 앉아 조카들에게 줄 선물을 그러안고서 음미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쌍둥이의 선물로 장난감 기차와 털목도리를 골랐다. 기차를 타는 일과 목을 따뜻하게 하는 일을 동시에 떠올리는 건 다정한 연상 같아 제 선택에 스스로 흡족했다. 다섯살 남자 조카들의 이름은 동준과 경준이었다. 쌍둥이의 모습은 문정이 휴대폰으로 찍어 보낸 한장의 사진으로밖에는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마저도 갓난애일 때의 모습인데다 사진 속에서 두 아이는 모두 눈을 감은 채였다. 이제 다섯살이면 한창 말썽을 부리며 짓궂은 장난을 칠 나이일 것이다. 윤재는 자기에게 그 무렵의 기억이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화단에 핀 꽃을 호기심에 따먹어보았다가 토했던 때가 눈앞에 그려졌다. 희미한 기억이었지만, 그때 입속을 살피고 물을 떠다준 사람이 문정이었던 것 같았다. 문정은 화가 나 있었고, 그 화난 표정 뒤로 해가 눈부셨다. 어린 자신의 표정은 떠올릴 수 없었지만, 아마도 무안해서 눈물이 고인 눈을 하고 웃었으리라 짐작됐다. 손등으로 입을 닦았을 때 붉은 꽃물이 묻어났던 장면이 선명해졌고, 손등의 그 붉은 얼룩으로부터 다른 장면들이 딸려왔다. 엄마가 많이 아팠을 때 병상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던 자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를 낫게 해주신다면,이라고 시작되던 그 기도에 걸었던 맹세들은 엉뚱하리만큼 비장했다. 제가 벙어리가 되어 들판을 헤매고 다녀도 좋아요. 윤재는 그렇게 중얼거렸고, 문정은 그 말을 받아 뭐라고 더 제 말을 보탠 뒤에 ‘지옥불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맺었다. 엄마는 회복된 뒤 말수가 줄었고 종종 딴생각에 빠져 가스레인지나 다리미의 전원을 켜둔 걸 잊거나 별것 아닌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화를 냈다. 윤재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그 옆을 졸졸 쫓아다녔다. 문정은 밤마다 몰래 집밖으로 빠져나가 남자를 만났다. 자매는 점점 멀어져갔고, 집안은 늘 한바탕 회오리가 휩쓸고 간 것처럼 어수선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아아.”
윤재는 지난 시절로부터 고개를 들어 차창 밖으로 무심코 시선을 주었다가 깜짝 놀란 듯 짐을 챙겨들었다. 그녀는 통로 쪽으로 빠져나와 섰다.
윤재는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둔 서울역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바로 밖으로 나와 상가들을 돌아다니며 겨울 스웨터와 양말, 코트를 샀다. 까페에 앉아 샌드위치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을 때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밤에 집에 들르라는 것이었다. 할 말이 있다면서. 전화기 저편에서 새엄마가 소리쳤다.
“여보, 어서 와 이것 좀!”
아마 높거나 깊은 어딘가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끄집어내달라는 요구인 듯했다.
“정말이지 시간이 안돼요.”
윤재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아빠는 항상 마지막 인사를 너무 길게 했다. 그녀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쇼윈도에 비친 자기 모습이 낯설어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섰다. 헤어스타일을 바꾼다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대로 눈을 들어 미용실 간판을 찾았다. 그리고 비닐 쇼핑백을 양손에 그러쥐고서 밖으로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섰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이 헝클어지며 시야가 자꾸 가려졌지만 짐 때문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맞은편 미용실을 향해 나아갔다. 어느 상점에서인가 캐럴이 흘러나왔다. 코끝과 손가락이 모두 얼어붙는 듯했다. 노래와 찬바람이 볼과 귓가에서 뒤엉켰다. 미용실 출입구 가까이 다가서자 마침 쇼윈도를 통해 미용실 안에 있던 한 여자가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이 열린 틈을 타 재빠르게 한발을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미용사가 그 모양을 보고는 다가와 문을 활짝 열어주며 물었다.
“여기 처음이세요?”
윤재는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했다.
“네.”
미용사는 윤재의 외투와 짐을 받아 개인 물품보관함에 집어넣고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다르게요.”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시게요?”
“……”
“전체적으로 웨이브를 넣으면 좋을 거 같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미용사는 윤재를 소파로 안내하고는 과월호 잡지를 안겨주었다. 윤재는 여성잡지에 얼굴을 묻고 페이지를 뒤적이다 ‘당신은 어떤 유형?’이라는 심리테스트를 골똘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예, 아니요, 예, 예, 예. 그녀는 각 문항을 읽고 선택한 답에 딸린 화살표를 따라 다음의 문항이 들어 있는 사각형 속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화살표는 아래로, 아래로 이어지다가 페이지의 바닥에 닿았고, 마지막 화살표의 방향은 엉뚱한 결과와 맞물려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단순하고 악의가 없는 당신의 태도는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특유의 천진함 때문에 간혹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미용사를 따라 세면대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며 생각했다. 정식으로 전문가의 테스트를 받는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유형을 나누는 게 굳이 필요하다면 자기는 아마도 ‘늙은 보안관 유형’ 같은 게 어울릴지 모른다고.
‘단순하고 악의가 없는 보안관은 없어. 별의별 꼴을 다 보고 사는 게 늙은 보안관일 거야.’
미용사는 윤재의 머리칼에 거품을 내고, 더운물과 찬물로 번갈아 헹군 뒤 젖은 머리칼을 타월로 감쌌다. 윤재는 전신 거울 앞에 놓인 새빨간 의자 쪽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거기 가만히 앉은 채로 자기 자신의 방관자가 됐다. 거울 속의 여자애는 앳된 얼굴에서 약간 피곤하고 나른해 보이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화되어갔다.
*
“안녕하세요?”
윤재가 인사를 건네자, 왼팔에 깁스를 한 키 크고 마른 여자가 아파트 현관문을 반쯤 열고 서서 윤재를 내려다보았다. 문정의 시누이인 듯했다. 여자가 흐뭇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찾아오느라 고생 많았죠?”
“아뇨. 택시를 탔어요.”
“어서 들어와요.”
여자는 안쪽으로 두어 걸음 물러나며 윤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언니는 어디 있나요?”
“케이크랑 건전지를 사러 갔어요. 뭐 사러 나갈 때마다 애들 데리고 나가서 한바퀴 돌고 와요. 동네도 익힐 겸.”
“네.”
“마중을 못 나갔네요.”
“제가 필요없다고 한걸요.”
윤재는 사방을 빠르게 둘러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대장부라고, 언니가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래서 막연히 키가 크신 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맞네요.”
“우리 쪽은 다 커요. 친척들은 모두 서울에 살아요. 우린 여기로 온 지 삼주 됐어요.”
“네.”
윤재는 거실 한쪽에 절반쯤 만들다 만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것을 쳐다봤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트리 위에는 희고 반짝이는 가짜 눈이 뿌려져 있었다. 뚜껑이 열린 쿠키상자와 산타클로스의 빨간 모자, 장난감 공룡과 기차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기차는 윤재가 사온 것보다는 작은 사이즈였다.
“우리가 이전보다 상황이 괜찮아요. 문정이가 동생도 이 근처로 와서 가까이 지내면 좋겠다고 그러던데요.”
윤재는 자기 무릎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이 둘과 문정, 문정의 남편과 시누이가 지내는 공간은 예전에 가족이 같이 모여 살던 집과 그리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그보다는 아담했고, 서먹하게 따뜻했다. 여자가 말했다.
“많이 아팠어요.”
“아! 팔은 어쩌다 그러신 거예요?”
“아니, 나 말고 문정이요.”
처음 마주하는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 멀어진 이름은 마음을 놓이게도, 초조하게도 했다.
“그런 말 없었는데.”
“한참 전 일이에요.”
“네, 몰랐어요.”
“아프면 아프다고 내색을 해야 하는데, 그걸 엄살처럼 생각해서 쓰러질 때까지 참다 병을 더 키웠어요.”
윤재는 자주 드러누워 앓는 소리를 했던 엄마, 엄마가 누워 있던 병상과 병원 냄새, 눈물 어린 기도가 얼룩진 자리들을 떠올렸다. 발밑과 자기를 둘러싼 공기가 축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좋아해서, 또는 무언가를 싫어해서 나아간 곳이 새 지표가 된 듯했다. 지난 슬픔이 차가운 망또처럼 그녀 어깨를 감싸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쇼핑백을 만지작거리다가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휘저었다. 그리고 작은 복주머니를 끄집어냈다.
“제가 만들었어요. 보세요. 선물이에요.”
윤재는 복주머니 안에서 팔찌를 꺼냈다. 푸르고 흰 구슬들을 꿰어 만든 거였는데, 여자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망설이면서도 깁스를 한 여자의 오른팔에 끼워주었다.
“어이구야, 잘 만들었네요!”
여자가 웃었다. 여자는 자기 남동생, 그러니까 문정의 남편이 최근에 회계사무실에 취직했다고 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앞으로 자격증을 몇개 따놓으면 괜찮은 데로 옮길 수 있으리라고. 그리고 문정은 아이들이 좀더 크면 다시 공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모든 일은 자기의 지원이 있어서 가능할 것이고, 다들 아직 젊으니까 못할 게 없다고도.
“네.”
윤재는 머리 뒤쪽에서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들이 투덕거리는 소리와 그걸 바로잡는 문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미성의 성인 남자 목소리는 아마도 문정의 남편인 듯했다.
“어머, 윤재야!”
문정이 소리쳤다. 윤재는 홀린 사람처럼 맹한 얼굴로 스르륵 바닥에 목도리를 떨어뜨리며 일어섰다. 얼결에 그녀는 문정을 껴안았다.
“몰라보겠다, 정말.”
문정이 미소를 머금고, 그러나 눈으로는 놀라운 무언가를 탐색하듯 윤재의 모습을 훑으며 말했다. 문정의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다. 윤재는 자기 손을 맞잡은 문정의 손이 원래 이랬던가 싶게 두툼하게 느껴졌다. 쌍둥이가 윤재에게 다가와 질문을 퍼부었다. 누구예요? 왜 왔어요? 언제 가요? 이건 뭐예요? 누나, 누나, 누나. 아이들은 이모라는 호칭 대신 윤재를 누나라고 불러댔다. 아무도 그걸 정정해주려 하지 않았다. 묘하게도 그게 윤재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의 눈에 예쁘장하고 새로운 누나, 그건 그녀에게 어려운 역할이 아니었다.
“이리들 와봐.”
윤재는 쇼핑백에서 준비해온 선물들을 꺼냈다. 쌍둥이가 윤재의 목을 끌어안고 괴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윤재는 아이들의 목에 목도리를 하나씩 둘러주고 장난감 기차를 내주었다. 아이들은 리모컨으로 기차를 작동시키는 법을 익히느라 온통 거기 정신을 쏟았다. 윤재는 그제야 문정의 남편을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형부?”
윤재가 기억하기로는 아마도 문정의 남편은 지금 삼십대 초반일 것이었다. 그만한 나이의 남자가 친숙하게 느껴졌던 적은 윤재에게 없었다. 밥을 한번 사겠다고, 커피를 마시자고, 드라이브를 함께하면 좋겠다고 함부로 팔을 잡아끌던 남자들에 관한 인상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윤재는 자기에게 집적거리던 그 삼십대 남자들 모두의 친구가 이 눈앞의 사람, 형부인 듯했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종종 너무나 금세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걸 상기하고는 목소리 톤을 높였다.
“인상이 좋으시네요.”
사실 그는 동그스름한 얼굴형에 귀염성 있는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긴 했다. 문정이 쾌활하게 덧붙였다.
“그걸로 반은 먹고 들어가는걸. 어디서나 그걸로 반 이상은 해.”
문정은 명랑하게 웃었다. 윤재는 그 웃음소리가 왠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다랗게 느껴져서 이리저리로 시선을 돌려 아까 이미 훑어보았던 집 안의 물건들을 새롭게 다시 보는 시늉을 했다.
“음식 솜씨를 좀 보여줘야지.”
문정의 시누이가 문정을 채근하듯이 주방 쪽으로 몰고 갔다. 문정의 남편도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거실에서는 쌍둥이가 목도리를 풀어헤쳐 바닥에 던져놓고는 기차를 이리저리로 몰아갔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문정이 미리 준비되어 있던 요리들을 식탁 위로 날라 늘어놓았다. 모두 제 앞의 의자를 끌어내 식탁 앞에 둘러앉았다. 윤재는 음식들의 맛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떤 음식은 무르고, 또다른 음식은 사각사각 씹히고, 전체적으로 색깔이 알록달록한 밥상이었다.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태로 이것저것 젓가락질해서 입속에 넣었다. 쌍둥이가 장난감 기차를 가지고 거실 바닥을 뒹굴다가 가끔씩 식탁으로 와 밥을 한술씩 뜨고 또 거실로 달려갔다.
“웃을 때 둘이 눈이 좀 닮은 거 같은데?”
문정의 남편이 윤재와 문정이 어디가 닮고 또 어디는 전혀 닮지 않았는지, 문정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쌍둥이를 낳을 때 예정일보다 늦어져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늘어놓더니 쌍둥이가 갑자기 한밤에 열이 나서 자기가 문이 열린 약국을 찾아 캄캄한 밤길을 뛰어다니다 오토바이에 치였던 일을 생생히 묘사했다. 윤재와 문정은 그의 말 사이에서 두번 서로 눈을 마주쳤다. 문정의 시누이가 말을 이어받았다.
“낼 한번 봐봐요. 애들은 하루가 다르다니까. 한밤 자고 나면 다른 얼굴이 돼 있어. 어제는 아빠 얼굴이었다가, 오늘은 엄마 얼굴이었다가 하거든요. 내일은 또 모르지. 금세 내 허리까지 자랄걸. 아이쿠, 쟤 넘어졌네. 경준아, 이리로 와.”
“팔은 어쩌다 다치셨어요?”
윤재는 아까 듣지 못한 대답을 상기하고는 마침내 할 만한 질문을 찾아낸 듯해 입을 뗐으나, 대답이 정말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싸움이 좀 났거든요.”
“누난 성질을 좀 죽여야 돼.”
윤재를 빼고 모두가 왁자하게 웃었다. 쌍둥이마저 키득대며 웃었다. 윤재는 미간을 약간 찡그린 채로 입을 벌려 웃는 소리를 냈다. 집중할 수 없는 영화를 보면서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오줌이 마려운 걸 참으면서 마지막 수업을 듣던 교실에서의 한때, 수영장에서 처음으로 제 키를 넘는 물속에 몸을 들여넣고 허우적거렸을 때 이런 멍멍한 상태를 경험했던 것 같았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걸 막 깨달은 물속의 아이처럼 윤재는 순간 아득한 공포감이 밀려와 몸을 떨었지만 곧 허공에서 뭔가를 잡아챈 느낌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모든 게 좋아요, 너무나.”
그 말을 듣고는 문정이 잠깐 멈칫거렸다. 윤재는 휴대폰을 꺼내러 거실로 가서 가방을 뒤적였다. 문정이 소리쳤다.
“뭐 하니?”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려면 음악이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우리 오디오는 낡고 짐만 돼서 버렸어. 새로 사야 돼.”
“알았어. 잠깐, 잠깐만.”
윤재는 휴대폰으로 캐럴을 검색하고는 볼륨을 키웠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한데 부르는 그 밤, 어둠에 묻힌 밤에 관한 노래. 윤재는 크리스마스 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이 뒤엉키는 걸 느꼈다. 마치 무대 위에 비로드 커튼이 막 걷힌 것처럼, 그녀는 단상에 올라 자기 최대치를 뽑아내야만 하는 어느 쇼의 사회자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흥분감에 얼굴이 약간 상기됐다.
“영화관 매표소에서 일하는 중이에요. 전에는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했는데, 그거 빼곤 제일 오래 해본 일이에요. 9개월 됐어요. 아직 일이 지루하진 않아요. 극장에서 티켓을 자체 제작하거든요. 그거 모으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도 모아요. 가져왔어요. 왜냐면……”
윤재는 자기가 문정이 없던 자리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 소용돌이치는 순간들의 합이라고, 그로써 여기 초대되었다고 여겼으며, 그 생각을 믿었다. 아무런 신앙이 없는 채로. 자신이 이 집과 이 시간에 찾아든 의외의 축복이고 선물이라고. 그러니 모든 게 가능하다고.
*
“이건 옛날에 사랑했던 여자가 남자주인공의 옆집으로 이사오는 얘기예요. 둘이 창밖을 내다보며 각기 자기 남편과 부인 몰래 전화 다이얼을 돌려요. 옛날 영화니까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리는 거죠. 이렇게, 이렇게요.”
윤재가 책갈피 모양의 티켓을 꺼내 줄거리를 얘기하고 나면 그걸 건네받은 사람이 거기 구멍을 뚫어 크리스마스트리에 리본으로 묶어 매달았다. 영화 스틸들이 인쇄돼 있는 티켓들은 각각 다 색깔이 달랐다. 분홍색, 금색 반짝이, 코발트색과 하늘색, 회색과 자주색.
“이건 정육점 하는 중년 남자가 작은 새를 한마리 키우면서 벌어지는 일이에요. 새가 병이 들어서 동물병원에 갔다가 멋진 노신사를 만나거든요. 두 사람이 오래 대화하다보니 공통점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친구가 돼요. 기차여행을 약속하는데, 마지막은 바다에서 끝나요.”
티켓 일곱장을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고 나자 문정의 남편이 장식용 꼬마전구들을 가져와 크리스마스트리 위에 조심스레 얹고 집 안의 불을 껐다. 전구의 스위치를 밝히는 건 쌍둥이 몫이었다.
“와아!”
쌍둥이가 손뼉을 치며 깔깔거렸다. 문정이 케이크에 초를 꽂아 불을 밝혔고, 모두들 각자 소원을 빌었다.
“뭐 빌었어? 소원 뭐예요?”
윤재가 무형의 마이크를 잡고 그걸 건네는 시늉을 하면서 쌍둥이에게 묻자 쌍둥이가 우물쭈물 우왕좌왕했다. 그러다 그중에 좀더 키가 큰 아이가 소리쳤다.
“트랜스 붐붐!”
두 아이 모두가 제자리에서 양팔을 벌리고서 바람을 일으키며 돌고 돌다가 한 아이가 중심을 잃고 휘청하며 다른 아이 발을 밟는 바람에 둘 다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발을 밟히고 넘어졌던 아이가 놀라고 아팠는지 신경질을 부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문정의 시누이가 둘을 떼어놓고서 우는 아이를 달랬고, 문정이 거실의 불을 켜고 바닥에 늘어져 있던 장난감들을 정리했다.
“이렇다니까. 애들은 하루가 다른 게 아니라, 이렇게 시시때때 달라요. 알죠, 둘이도? 둘은 터울이 져서 투덕거릴 일이 없었겠다, 참.”
울던 아이가 제풀에 지쳐 눈물바람을 멈추고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다른 아이가 소파에 올라 팔짝팔짝 뛰면서 괜히 기합 소리를 지르다가는 돌연 시무룩해져서 바닥으로 내려와 저도 누웠다. 문정의 남편이 담요를 가져와 두 아이를 덮어주자 문정이 아이들이 잠들도록 거실의 불을 도로 껐다.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거리면서 아이들 얼굴에도 작은 빛들이 옮겨 다녔다.
문정의 시누이가 자기와 남동생은 네살 터울이라면서, 자랄 때 자기는 남자처럼 하고 다녀서 남들이 남매가 아니라 형제로 봤다는 얘기를 윤재에게 들려줬다.
“내 동생이 문정이하고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 설득한 사람이 나였잖아. 울 아버지는 혼자 살다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문정이하고 내 동생하고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인 걸 걱정했지 다른 건 눈감고 그냥 넘어간 분이야. 문정이 집안 사정 모르는 체하고 입을 싹 닫으셨어.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재산으로 서울에서 새 출발할 수 있었으니 마지막까지 복 주고 가신 거지 뭐야. 참, 사진 있는데 보여줄까?”
윤재는 그 말들을 흘려들으며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앉아 있었다. 문정의 시누이는 손으로 케이크를 집어먹으며 말하느라 성한 손가락과 입가에 생크림이 묻은 채였다. 윤재는 왜 그녀가 아직 친근해지지도 않았는데 반말을 시작한 것인지와, 또 왜 동생 내외에게 자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인 것처럼 강조하는지를 알 수 없어 이를 신경쓰느라 두통이 일었다. 문정이 윤재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피곤하지? 씻고 옷 갈아입어.”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옷을 챙겨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 씻고 나왔을 때 거실에 모여 있는 사람은 없었다. 크리스마스트리 홀로 빛났다. 문정이 맞은편 방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윤재에게 손짓을 했다. 윤재는 그 방으로 들어갔다.
“애들은?”
윤재가 묻자 문정이 대답했다.
“시누이가 데리고 잘 거야.”
“좋은 분인 거 같은데, 편하지는 않더라.”
“그냥 편하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니. 다 맞춰가는 거지.”
“그렇게 말하니까 언니는 편한 사람 같다.”
“좋아, 지금이.”
“나도…… 작년에 아빠 수술했었어. 심장이 안 좋아서.”
윤재는 꺼내지 못할 것 같았던 말을 제일 먼저 꺼내놓았다. 그러고는 왜일까, 자신에 대해서 생각했다. 문정이 잠깐 눈을 감고서 한숨을 옅게 내쉬고는 다시 눈을 떴다.
“엄마는 가끔 봐. 엄만 요새 되게 건강해. 댄스를 배우고 있대. 사람들이랑 떼로 줄 맞춰 추는 춤이래. 주에 두번. 옛날에 했던 안경사 일 다시 알아보고 있다고 했어. 지금은 마트에서 일하고.”
“그러니?”
“응.”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을 거야.”
“알아. 그래도 좋아. 좋지 않아?”
윤재는 그렇게 물어놓고 스스로가 동생이 아니라 언니인 것처럼 느껴져 웃음을 흘렸다.
“왜 웃니?”
“나 자취하는데, 언니 놀러 와도 재워줄 수가 없어. 둘이 누우면 좁아서 숨 막힐 거다.”
윤재와 문정은 킥킥 웃다가 눈이 마주치자 무언가 동시에 같은 것을 떠올린 듯 입을 틀어막고 컥컥 웃어대기 시작했다.
“언니 주려고 팔찌를 만들어왔는데, 언니 시누이한테 줘버렸어. 언니 건 나중에 만들어 보내줄게.”
“안 그래도 돼.”
“그 말 너무 서운하다.”
“오, 미안. 그래, 알았어. 기다릴게, 보내줘.”
윤재와 문정은 못 보고 지냈던 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대해 얘기하면서 가장 씩씩한 표정을 서로에게 보여주었다. 윤재에게 있어 그날은 비가 퍼붓는 어느 오후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교복을 입은 채로 수업 중에 그대로 교정 밖으로 나가 버스정류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버스 한대가 오면 그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다음 버스가 오면 또 그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리고 해가 저물 때 콜록거리며 집으로 들어갔고, 그 밤 내내 뒤척이며 울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 문정을 만나 함께 조그마해져서 초등학교 교실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는 깨어났다.
문정은 한달 동안 실어상태로 보냈던 여름 얘기를 했다. 세상이 물에 잠긴 것처럼 고요하게 느껴졌고, 자주 어지러웠고, 마음이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가 어느 아침 씻은 듯 괜찮아졌다. 문정은 그 말끝에 퀴즈를 내듯 덧붙였다.
“나, 집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게 하나 있어. 뭔지 맞혀봐.”
“몰라.”
윤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코더.”
“뭐라고?”
“리코더.”
“왜?”
“몰라.”
자매는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문정은 웃음 끝에 말했다. 혼자서 이불을 덮어쓰고 리코더를 불었던 밤이 있노라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만큼 내 거인 게 없더라고. 거의 아무것도 없었던 거지. 없는 채로 여기까지 왔어.”
밤이 깊어갈 무렵 윤재는 선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문정이 창가에 서 있는 걸 어렴풋이 알아보았고, 그 모양을 바라보다 다시 잠이 들었다.
새벽녘 윤재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사방은 고요했다. 문정은 윤재 옆 자리에 모로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윤재는 간밤에 문정이 서 있던 창가로 가 섰다. 어느새 눈이 내렸는지 창밖 풍경이 온통 새하얬다. 윤재는 잠옷 위에 문정의 외투를 걸쳐 입고 발소리를 죽여 조심조심 거실로 나섰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불이 나가 있었다. 누군가 전원을 꺼둔 모양이었다. 윤재는 미명 속에 홀로 서 있는 그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라보면서 마치 이 순간을 호명하는 제 목소리를 시험해보려는 사람처럼 ‘불 꺼진 크리스마스트리’라고 발음해보았다. 그러고는 신발을 신고서 밖으로 나왔다.
눈 쌓인 서울의 변두리 주택가 풍경은 특이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낯선 장소에서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데 감동을 느꼈다. 그녀는 그 풍경 앞에 잠시 우두커니 서서 ‘고맙다’고 읊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는 또 ‘고마워요’라고 인사했다. 순간 까마득히 잊고 있던 어린 날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깊은 겨울밤, 손님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몰래 빠져나온 자매는 아무것도 살 것이 없으면서도 멀리 있는 상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말없이 문정의 뒤를 따라 걷던 윤재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정이 따라 뛰었다. 둘은 눈을 맞으며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밤길을 달려나갔다. 그러다 문정이 갑자기 엉뚱하게 이렇게 소리쳤다.
“컷!”
자매는 마치 눈 내리는 밤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그 외침과 동시에 우뚝 멈춰 섰다. 세상의 시간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일시에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자매는 시선이 부딪치자 까르르 웃었다. 해묵은 그 겨울의 여운이 다시금 이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부서져버릴까봐 조마조마하며 때로 어두운 낮과 환한 밤을 견뎌온 듯도 했는데, 어젯밤에는 비로소 무언가를 조용히 묻어버린 듯했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은 마음에서도 떠나보낼 것이다. 뛰고, 멈추고, 울고, 웃다가, 만나질 때가 되면 다시 만날 것이다. 윤재는 옷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를 두팔을 벌려 기꺼이 받아들이며, 새벽의 눈길 위에 조용히 제 발자국을 남겨보았다. 내일은 전혀 다른 날이 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정답고도 차갑고, 냉엄하면서도 따스한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