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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중편 특집

 

 

김엄지

1988년 서울 출생.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장편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 등이 있음. 동인 ‘무가치’에서 활동 중. thea18@naver.com

 

 

 

비오는 거리

 

 

1

 

비가 그치지 않아서 사람들은 화가 났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사람들은 무서웠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사람들은 슬펐다. 슬픈 사람들은 갑자기 기뻐지기도 했다.

800미터 거리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지면 신이 난 비명이 시작되었다. 여자, 남자, 어린아이, 비명은 비명으로 이어졌다.

비오는 거리는 주기적으로 정전되었다.

비오는 거리에 바닥분수는 불규칙하게 가동되었다.

어두움 속에서 비와 우박이 솟구쳤다.

비오는 거리에 공중전화 부스는 34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너한테 갈게. 너도 내가 보고 싶지?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 나도 바쁜 사람이고 미련은 없어. 이런 식으로 사람 무시하면 너 벌받아. 차라리 나한테 욕을 해. 나한테 화를 내. 남자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수화기를 붙잡고 화를 내달라고 요구했다. 너는 지금 나한테 우를 범하고 있는 거야. 우! 우! 남자는 고함쳤다.

비오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고함쳤다.

걸으면서, 멈춰 서서, 허공에, 길바닥에, 우산과 가로등, 죽어 있는 쥐나 새, 개, 수화기에, 한무리의 일행이 서로 한대씩 뺨을 때리면서 고함쳤다.

고함치면서 길 끝에서 길 끝으로 달렸다.

미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사람들은 주말이면 비오는 거리로 향했다.

어떤 연인은 비오는 거리로 나서기 전에 약속했다. 해서는 안될 말이면 거기 가서도 하지 마. 못 들은 척할 수 없을 것 같아. 비오는 거리에 갈 각오가 덜 되었나봐. 심약한 여자가 남자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남자는 약속을 지킬 수 없다. 누구든 비오는 거리에서는 남기지 않고 고백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리고 각오가 덜 된 여자는 비오는 거리에서 모두 용납할 수 있는 기분이 된다. 괜찮아. 다 괜찮아. 눈물 흘리면서, 눈물이 뜨겁다고 생각하면서,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용서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내가 아닌 것 같았어요. 술은 마시지 않았어요. 나는 나를 바라보고, 내가 하는 말을 들었어요. 유체이탈은 아니었고요. 내가 나보다 커진 느낌이었어요. 불편함은 없었어요. 여자는 말했다.

오류, 비오는 거리는 오류 자체입니다. 비오는 거리는 이제 하나의 세계가 되었고, 그곳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통제 불가능이 그 거리의 법이 되었습니다. 비행과 범죄가 빈번한 거리는 지역마다 존재합니다. 그러나 비오는 거리는 비라는 특수성으로 무장하였습니다. 지난달 벌어진 몇건의 사건으로 비오는 거리가 더이상 기상·환경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자명해졌습니다. 예상보다 더 오래 비오는 거리를 제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오는 거리에서 비롯되는 악의 문제, 그 대비책은 각자 강구해야 합니다. 각자 개인의 윤리를 구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비오는 거리에 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요. 설령 피치 못해 가게 되더라도 되도록 빨리 돌아오는 것이 좋겠죠. 무리지어 다니지 마십시오. 학계는 비오는 거리에서 비롯되는 사회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각자의 몫으로 돌렸다.

각자. 각자. 각자. 비오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각자 걸었다.

비오는 거리에서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다.

비오는 거리가 위험한 이유는 어두움과 짙은 안개 때문이었다. 800미터 거리에는 12대의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12대 모두 무용했다.

사람들은 넘어질 마음으로 핸드폰과 지갑 없이 비오는 거리로 향했다.

비오는 거리에 매일 비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열흘에 한번, 보름에 한번, 비가 그쳤다. 안개 속으로 햇볕이 들기도 했다. 안개와 안개 속으로 옅은 빛줄기가 내리고 고인 물웅덩이마다 무성한 풀이 비치기도 했다. 거리는 짙은 풀냄새로 가득했다.

부랑자, 토하고 쓰러진 남자, 자살하지 못한 남자가 밤새 거리에서 비를 맞았다.

 

 

2

 

사건이 나를 인도하기를, 사건을 기다리고, 벌어진 사건 뒤에서, 사건을 바라보며, 사건과 사건 사이에서 살 것이다. 나는 나를 사건들 속으로 내던질 것이다. 사건들 속에 나를 방치할 것이고 궁극에는 내가 사건이 될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간절히 먹고 싶은 것이 있기는 하다. 당장에 콩국수. 당장에 김치전. 먹고 싶으니 먹을 것이다.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렵지 않은 일을 망설이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높게 자란 풀 속에 누울 것이다. 옷을 다 벗고 누워도 상관없을 것이고 그러니 옷을 다 벗을 것이다. 얼마나 시원할지 기대가 된다. 진작부터 무어라도 기대하면서 살았어야 했다. 그 무엇이라도 일분일초. 보고 싶은 사람 당장에 김윤주. 눈물이 흐른다. 요즘은 이렇게 아무 기분 없이 눈물이 흐른다. 별안간 울어. 왜 아무 기분 없이 눈물이 흐르는지, 일단 시작되면 잘 멈추지를 않는다. 재앙은 아니다. 눈두덩이 짓무를 뿐이다. 재앙은 없다. 잠들기 전에 비오는 거리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AUSB에 ‘비오는 거리’가 포함된 파일은 총 67건이었다.

A의 노트는 22권이었고 모든 기록에 파란색 볼펜이 사용되었다.

A의 방은 2개였다. 작은방에서 그는 주로 생활했다.

A의 큰방에는 잡다한 집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A는 집기들 사이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A는 집기들 사이에서 1000피스 퍼즐을 맞추기도 했다.

A는 맞춘 퍼즐을 다시 흐트러트리기도 했다.

A는 통조림과 레토르트, 냉동식품을 먹으며 생활했다.

A는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A는 말수가 너무 적지도 너무 많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A는 탁구를 좋아했다.

A는 운동신경이 잘 발달되었다.

A는 야위었으나 건강했다.

A의 얼굴에는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근심이 있었다.

A의 걱정은 너무 덥다거나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A는 선천적으로 심장에 열이 많은 체질이었다.

A는 자기 심장을 걱정했다.

A의 걱정은 어김없이 공상으로 이어졌다.

A의 공상은 구체적이었다.

A는 희망적인 공상과 위험한 공상을 구분하지 못했다. 사실 그 둘은 같은 것이었다.

 

죽고싶다죽을수있을까매일죽고싶다왜매일죽고싶을까죽고싶은만큼죽고싶다여기서죽고싶다눈은감고죽고싶다못죽을거알면서아는데죽고싶다주저없이죽고싶다언제끝이날까관둘수있을까. 자문하는 것인가. 자위하는 것인가. 그만해야 한다. 단어가 곧 판단이 되지는 않는다. 판단해야 한다.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결심은 심장에 좋지 않다. 나는 끊임없이 내 심장에 좋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이다. 이제 숨쉬는 것도 결심 없이 되지 않는다. 숨을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해야 숨을 멈출 수 있는 것처럼 숨을 쉬겠다고 생각해야 숨이 쉬어진다. 내가 잠자는 동안 죽지 않는 이유는, 자는 동안에도 숨쉬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은 없다.

 

A는 간밤의 열대야와 높은 습도에 연일 잠을 설쳤다.

A는 잠들기 위해서 유리공예와 우주에 대한 동영상을 시청했다.

A는 두세시간 동안 동영상을 보았다.

A는 유리가 우주 같고 우주가 유리 같다고 생각했다.

A는 유리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지만, 그 둘이 아주 같거나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A는 평일에도 비오는 거리로 향했다.

A는 비오는 거리에서 우산 없이 걸었다. 걷다가 눕기도 했다.

A는 조금 더 편하게 눕기 위해서 비오는 거리에 구덩이를 팠다.

A는 비오는 거리에서 노인을 보기도 했다.

A는 노인을 보았다기보다 노인을 느꼈다.

 

노인이 내 앞에 있었고, 혹은 내 옆이나 뒤, 그러니까 노인과 나는 같은 안개 속에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세요. 위험합니다. 위험해요. 나는 몇번 노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노인이 나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노인을 향해 말했지만 허공을 향해 말했을 수도 있다. 그 노인은 선 채로 죽어버린 것인지 움직이질 않았다.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의 숨소리가 아니라면 바람이었을 텐데, 그렇게 얕고 낮고 사람 숨 같은 바람이 있을까. 사람의 것이되 늙은 것이었다. 노인들이 장기를 두는 저 공터. 저 벤치. 저 보도블록. 저들은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이 맞는가. 노인들은 한데 모여 깔려 죽은 새를 구경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그렇게 새를 깔아대는 것일까. 근래 내 주위에서 새가 자주 죽는다. 새가 꼭 내 주위에서만 죽는 것은 아닐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편의점 입구에서 죽은 새를 보았다. 그런 날이 4일 연속 이어졌다. 4일째는 기어이 밟았다. 나도 모르게 밟은 것이었다. 새는 땅바닥에 들러붙어 있어서 거의 땅바닥과 같은 상태였다. 경고거나 직접적인 경보라고 느껴졌지만 흥분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자야 한다. 잘 자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A의 결심과는 다르게 방에 들어와 눕자 눈물이 흘렀다.

 

내 뜻과 다른 나의 것, 나의 것이 아닌 나의 뜻, 나에게 없는 뜻이 내 밖으로 흐르고, 나는 짓무른 눈두덩을 찬물로 씻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수하는 것이다.

 

A는 비오는 거리에서 아이들을 보기도 했다.

A는 아이들을 보았다기보다 아이들을 느꼈다.

 

비오는 거리에서 아이들은 달린다. 달리다 넘어지면 아이들은 울지 않고 웃는다. 일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넘어진 그 모양 그대로 누워서 웃는다. 아이들 웃음소리는 높고 멀리 가고, 그래서 내가 비오는 거리 어디에서 땅을 파든 간에, 그 웃음소리가 아이들의 것이라면 들리게 마련이다. 너 그만 웃어라,라고 말한 적은 없고, 윤주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윤주가 웃으면 옥주가 웃고 윤주와 옥주의 엄마도 웃었다. 아마 나도 그들 주위 어딘가에서 웃었던 것 같다. 우리는 같이 찐 감자를 먹었다. 웃을 때 찐 감자 뜨거운 김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윤주 엄마의 이름은 이제 내 기억에 없다. 윤주 엄마의 성이 곽이었는지 노였는지, 곽과 노는 비슷하지도 않은데, 곽노자였거나 곽노희, 곽노순이었을 수 있겠지. 노곽자는 아닐 것 같다. 윤주 엄마의 이름을 짐작하는 일은 유쾌하다. 낄낄거리면서 웃고 있는데도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안과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안과보다 차라리 바다에 갈 것이다. 소금물은 짓무른 눈두덩에 좋을 것이다. 소금물에서 수영한다면 눈물이 멈출 것이다. 눈물 아니라면, 눈물 아닌 무엇이라도 멈출 것이다. 나는 무엇이라도 멈춰야 한다. 눈물보다 생각을 멈춰야 한다.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바다는 좋다. 그러나 바다는 멀다. 바다는 비오는 거리와 멀고, 나의 구덩이와 멀다. 비오는 거리에 나의 구덩이는 총 네개이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고, 사람들은 무방비하게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머지않아 바다와 비오는 거리 중에 선택해야 할 것이다. 둘 중에 한곳에서만 나는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살고는 있지만, 바다나 비오는 거리, 둘 중 한곳을 선택한다면 지금보다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해변에서는 구덩이를 파는 일이 소용없을 것이다. 밀물과 썰물이 내 하루 일과인 구덩이를 지울 것이다. 해변의 해무는 비오는 거리의 안개만큼 멋질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해가 뜨고 지고 분명하지 않은 달이 뜨고 지면 하루가 끝나는 것이다. 속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하지 않은 해는 어쩌면 분명한 달일 수 있고, 분명하지 않은 달로 보이는 것은 분명한 해일 수도 있다. 분명하건 분명하지 않건 그것은 하루이고, 나는 하루를 산 것이다.

 

 

3

 

비오는 거리에 비는 우박으로 바뀌기도 했다.

A는 우박을 받아먹기 위해 고개를 젖히고 입을 벌렸다.

A는 입안의 우박이 별사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달지 않아서 더 좋다. A는 생각했다.

나는 언제 별사탕을 먹었던가. A는 생각했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별사탕을 왜 먹었던가. A는 생각했다.

A는 입안의 우박을 투, 투 뱉었다.

A는 잠이 오기도 했다.

A는 잠이 오면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누워 눈을 감았다.

A는 옆으로 몸을 말아 누웠다.

옆으로 누운 A의 귀로 우박과 비가 떨어졌다.

비는 아주 옅게 내리기도 했다. 주위에 안개뿐이구나. A는 조금 잤다.

A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육교를 올랐다.

비오는 거리 위에 육교가 있었고, 육교는 다리와 이어졌다. 다리는 강을 가로질러 팔차선 도로를 형성하고 있었고, 팔차선 도로 옆에는 소음방지벽과 인도가 있었다. 다리의 난간 앞에 서면 작은 파편 같은 간판들, 교차된 또다른 다리와 다리 위의 차, 불규칙한 빛들과 빛을 반사하는 강이 내려다보였다.

사람들은 다리 위에서 비오는 거리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비오는 거리는 볼 만한 것이었다.

희미하고 아득하게, 야광우비를 입고 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주말이면 커다란 장비를 가진 사람들이 다리 위의 특정 구역에 몰렸다. 강을 향해, 비오는 거리를 향해, 빛을 향해, 장비들을 세워놓고, 초점을 맞추고, 초점을 흐리고, 커다란 우산 속에서 두세시간, 다섯시간, 밤을 새워 촬영했다.

A도 언젠가 비오는 거리를 촬영한 적이 있었다.

A는 안개 속에서 반복적인 움직임을 보았다.

유에프오인가. A는 반복의 정체를 추측해보았다.

유에프오는 아닐 것이다. 유에프오는 하늘에서 발견되기 마련이다. A27컷 찍었다.

A가 보았던 반복은 유에프오가 아니었고, 사람이었다. 야광우비를 입고 바닥분수에서 제자리 점프를 하는 사람이었다.

 

어제는 다리 위에서 떨어지려는 여자를 보았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나는 그 여자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 여자와 나는 바닥에 함께 쓰러져 바닥에 완전히 드러누웠다. 그 여자는 순식간에 내 위에 기어올라와 내 목을 졸랐다. 나도 그 여자 목을 조르고 싶었는데 조르지 않았다. 그 여자를 밀치지도 않았다. 나는 마냥 목 졸리고 있었다. 만약에 그 여자가 정말 그 강으로 뛰어들려는 계획이었다면, 죽고 싶은 사람을 살려놨으니 난 목이 졸려도 싸지. 남의 생사에 끼어드는 일은 월권이다. 내가 오만했다. 번뜩이는 그 여자 눈. 그 여자는 여자 같지 않았고, 사람 같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와 눈 마주치고 있기가 힘들어서 눈을 감았다. 그런 순간에도 생각은 가능했다. 나는 눈 감고 목 졸리면서, 이 여자는 강으로 떨어지려고 다리 위에 올라간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뒤에서 자기를 끌어안는 사람이 있거든 그게 누구든지 목을 조를 계획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목을 조르기 위해서 다리를 걷다가 난간 앞에 멈춰 서서 강을 바라보고 있었겠지.

 

 

4

 

경선은 A의 목을 조르기 전에,

우산 없이 비 맞으며 다리 위로 가기 전에,

난간을 붙잡고 서서 강을 내려다보며 아아, 아아, 울부짖기 전에,

경선은 분노와 관련된 강연에 참석했다.

경선은 이혼 후에 이런저런 강연에 참석했다.

경선은 이런저런 그런 강연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선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경선은 도움이 필요해서 무용학원, 미술학원, 요가학원을 동시에 등록하기도 했다.

경선은 도움이 필요해서 매일 술을 마시기도 했다.

경선은 앞에서 네번째 좌석에 앉아 있었다.

분노하는 마음을 접으세요. 기다란 장우산을 떠올려볼까요. 착, 하고 접히는 거예요.

창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경선은 아무것도 접을 수 없었다.

의지를 가져야 하는 일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는 버튼을 상상해야 합니다. 누르면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자동식 버튼이요. 버튼에 색을 입혀줘도 좋고요. 버튼을 누르는 감촉을 상상해도 좋습니다. 버튼에 대한 상상이 구체적일수록 분노 제어에는 효과가 좋습니다. 화가 치밀어오를 때, 우리는 화를 감지하고, 그때 마음의 버튼을 꽉 누르는 것입니다. 강연을 진행하는 여자는 허공에서 무언가 누르는 제스처를 취했다. 진행자는 중년이었고, 안경을 썼으며, 빨간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강연 참석자는 많지 않았다. 좌석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경선은 강연에 집중했지만, 가끔 창밖을 보기도 했다. 비가 요란하게 내렸기 때문이다.

타인을 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간단하죠. 물리적인 것은 언제나 간단합니다. 그에 반해 정신적인 것은 복잡합니다. 좀처럼 결정이 되지 않죠. 오래전에 결론이 났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사실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 실수가 꿈에서의 일인지, 현실에서의 일인지 분명하지 않은 날도 있지요. 남편, 아내의 존재는 어떤가요? 그네들이 살아 있음을 제외하고는 그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또 분명하지 않다는 것,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속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여자, 그 남자는 내가 겪은 사람이고 내가 선택한 사람임에도 말입니다. 막연해지는 것입니다. 막연함은 우리들 화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화가 날 때에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화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화를 바라봐야 합니다. 너 지금 화가 났구나, 자신을 보듬어야 합니다. 강연을 진행하는 여자는 무엇인가 끌어안는 제스처를 취했다.

화에 대한 태도 중 가장 좋지 않은 것은, 화를 참는 것입니다. 무작정 참는다고 될 일인가요? 참다보면 치밀어오는 새로운 화와 마주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왜 참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왜 참아야 하나, 하는 생각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마나한 생각입니다. 사실 참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참아야 할 이유를 생각하다보면 참지 않아도 될 이유가 더 많이 떠오르게 됩니다.

경선은 바로 앞좌석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강연이 끝나고 진행자는 참석자로부터 꽃다발을 받기도 했다.

강연장의 출구에는 비쩍 마른 남자가 ‘22세기 호흡’ 퍼포먼스 안내장을 나누어주고 있었고, 경선은 한장 받았다.

강연장을 완전히 빠져나온 경선은 낙지전문점이 길게 늘어선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습하고 뜨겁고 매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경선은 허기졌다. 분노보다 허기가 먼저라고, 경선은 생각했다.

허기를 인정해야 한다. 너 지금 허기지구나. 경선은 낙지전문점 유리에 나열된 메뉴를 읽었다.

 

낙지철판볶음

낙지전골

산낙지

낙지해물파전

낙지덮밥

낙지비빔밥

소주

맥주

막걸리

 

경선은 낙지덮밥이나 낙지비빔밥을 먹을까 고민했다.

소주 맥주 막걸리를 마실까 고민했다.

경선은 결정하지 못했다.

경선은 낙지보다는 가벼운 것을 먹고 싶었다.

경선은 샌드위치를 떠올렸다.

경선은 제과점으로 가려다 마트로 향했다. 경선은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고 싶었다.

오이를 많이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어야겠다고 경선은 생각했다.

경선은 도마에 오이와 사과, 양파, 토마토를 슬라이스로 써는 상상을 했다.

경선은 참치, 마요네즈, 콘을 볼에 넣고 섞는 상상을 했다.

삭삭 썰고, 슥슥 섞는 상상은 경선의 기분을 나아지게 했다.

경선은 자기 기분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게 뭐지, 경선은 자기가 하던 생각을 멈추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시 거슬러 생각해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경선은 집과 가까운 마트를 향해 걸었다.

경선은 샌들을 신고 있었고, 샌들 안은 이미 다 빗물이었다. 경선은 샌들 안에서 미끄러지는 발이 신경쓰였다. 한번 신경이 쓰이면 걷잡을 수 없이 곤두섰다.

정말 미치겠어. 경선은 중얼거리면서 걸었다.

경선은 마트로 들어서기 전부터 사람들과 부딪혔다.

경선은 마트 안에 들어서자마자 답답함을 느꼈다. 마트 안의 온도와 습도는 적절했으나 공기의 질은 좋지 않았다. 숨막히게 탁했다. 경선은 후, 후, 후, 세번, 숨을 내뱉었다. 마트 안의 천장은 높았고, 경선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아래 위, 좌, 우, 목을 돌리고 어깨를 돌렸다. 마트 안에서 사람들은 한데 모여 있거나, 줄을 서 있었다. 이 제품, 저 제품, 세일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렸다. 카트와 카트가 부딪혔다.

이게 뭐지, 경선은 마트 안을 난장판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주말에 사람들이 다 마트로 오는구나, 경선은 생각했다.

마트가 사라지면, 이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려나, 경선은 생각했다.

공중에 뜨려나, 공중에 떠라, 경선은 생각했다.

경선은 초록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걸었다.

경선은 오이, 토마토, 양파를 고르기 위해 채소 코너로 향했다.

경선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는 큰 체구였고 멀리에서부터 눈에 띄었다. 남자는 초록색 체크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경선과 그 남자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경선은 남자의 카트를 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경선은 남자의 카트 안에서 생고기와 부탄가스, 소시지를 보았다. 남자는 이쑤시개를 물고 있었고, 경선을 지나치며 트림을 했다.

경선은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경선은 뒤돌아봤고, 경선에게 트림을 한 남자는 유제품 코너를 향해 걷고 있었다.

경선은 아무것도 사지 않고 마트를 빠져나왔다.

경선은 왼쪽 귀, 왼쪽 뺨을 씻고 싶었다.

경선은 곧장 화장실로 가 차가운 물로 벅벅 닦았다.

개새끼. 경선은 트림을 한 남자를 개새끼라고 생각했다.

쓰레기 같은 새끼. 남자의 트림은 음식물 쓰레기를 떠오르게 했다.

경선은 자신이 배려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경선은 남자를 신고하고 싶기도 했는데, 신고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선은 뺨이 뜨거워질 때까지 문질러 닦았다.

 

 

5

 

경선은 다리 위에서, 빗속에서, A의 목을 조르기 전에 마트에 갔다.

경선은 A의 목을 조르기 전에 왼쪽 뺨을 닦았다.

경선은 A의 목을 조르기 전에 선배를 만났다.

경선과 그 선배는 한달에 두번은 만나는 사이였다.

경선의 선배는 여자였고, 경선보다 5살이 많았다.

선배는 경선에게 좋은 화장품, 좋은 남자, 좋은 병원을 추천해줬다.

경선과 경선의 선배는 함께 전시회를 다녀왔다. 불을 주제로 한 전시였다.

전시된 작품을 모두 보는 데 2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경선은 발바닥이 아팠다.

전시 좋았지? 정말 좋았어. 경선과 선배는 까페에 앉아서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들의 테이블에는 전시회장에서 받아온 불과 관련된 팸플릿이 펼쳐져 있었다.

이 시대는 불이 필요해. 뜨거운 것 말이야. 다 태울 수 있는 것. 경선의 선배가 말했다.

맞아 불이 필요해. 다 태우고 싶어. 경선은 선배의 말을 잘 따랐다.

사람마다 마음에 불꽃이 있잖아. 선배는 전시에 심취해 있었다.

맞아, 누구나 불꽃이 있지. 경선이 웃으며 말했다.

야, 나는 네 웃는 얼굴이 불편해. 애쓰지 마. 네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선배가 경선에게 말했다.

행복하지 않은 게 보여? 경선이 자기 뺨을 한손으로 매만지며 선배에게 물었다.

어. 선배가 대답했다.

기분 나쁜 거 아니지? 선배가 말했고,

기분 나쁘기는. 전혀. 전혀. 경선은 고개를 흔들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경선은 화장실로 갔다.

그렇게 티가 나나? 경선은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언니 마음의 불꽃은 무슨 색이야? 경선은 선배를 가끔 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 검정색. 선배는 자기 내부의 불꽃을 검정이라 말했다.

그건 재 아니야? 경선이 물었다.

저녁을 먹자. 그래, 저녁을 먹자.

경선과 경선의 선배는 해산물토마토스파게티와 두부샐러드로 메뉴를 결정했다.

요즘 해산물 믿을 게 못돼. 조심해야 해. 선배가 스파게티의 건더기를 뒤적거렸다.

응, 맞아. 요즘 믿고 먹을 게 없어. 경선이 말했다.

경선과 경선의 선배는 스파게티에 있는 조개와 오징어를 다 남겼다.

선배와 헤어진 뒤에, 둘 중에 누가 스파게티를 골랐는지, 경선은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선배, 조심히 들어가. 경선은 그렇게 인사했다.

이게 뭐지, 왜 비가 그치지 않지. 경선은 버스정류장에서 서서 비를 바라보았다.

비는 느리게 내렸다.

경선은 비를 바라보다가 걷고 싶어졌다.

경선은 걷기 시작했다.

경선은 느리게 내리는 비를 맞았고, 가방 속의 우산을 꺼내지 않았다.

경선은 비를 맞다가 비오는 거리를 떠올렸는데, 비오는 거리를 통과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비오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미친다지. 미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지. 미치지 못한 것이 유일한 저주인 것처럼. 괴물이 된다지. 물건을 잃어버리고, 아이를 잃어버리고, 기억을 잃어버리고, 여기저기 다친다지. 멍이 들고 찢어지고. 경선은 비와 어두움과 갑작스러운 부딪힘, 자해, 안개, 환각을 상상했다. 비오는 거리에 대한 경선의 생각은 다소 과장된 것이었다.

경선은 비오는 거리에 호기심과 위험을 느끼면서 걸었다.

경선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 걸었다.

내가 오늘 본 것들은 다 가짜였어. 경선은 걸으면서 전시회에 전시된 불을 떠올렸다.

다 가짜였어. 경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진짜는 뭔가. 경선은 생각해야 했다.

가짜와 진짜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기어이 걸음이 비오는 거리에 다다랐을 때 경선은 괴성을 들었다. 괴성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신이 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다 큰 남자의 놀란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깔깔 웃는 소리도 들렸다. 경선은 안개 속에서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경선은 가만히 서 있었다.

경선은 비오는 거리를 피해 육교를 올랐다.

경선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 위의 다리로 향했다.

경선은 걷다가 그만 걷고 싶어져서 택시를 타고 싶기도 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택시, 버스, 지하철, 행복, 진짜 불, 모두 경선으로부터 멀리에 있었다.

경선은 지쳐서 다리 난간에 멈춰 섰다.

경선은 강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고, 경선의 등 뒤로 덤프트럭이 난폭하게 지나갔다. 차들은 빗물에 젖은 도로를 빠르게 지났다.

달리는 차와 내리는 빗소리 속에 경선은 서 있었다. 강물에 비가 떨어지고, 빛이 부서지고 빛이 흩어졌다. 빛은 물결과 함께 흔들렸다.

경선이 강물과 빛에서 규칙을 찾고 있는 동안, 비는 거세어졌다.

경선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빗물이 떨어졌다. 경선은 이미 비를 다 맞았는데,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어 펼쳤다. 우산 위로 센 비가 떨어졌다. 곧 바람이 불어닥쳤다. 한순간 경선의 우산이 뒤집혔다.

경선은 얼마간 뒤집힌 우산의 손잡이를 꽉 붙잡고 서 있었다.

바람에 우산은 아무렇게나 휘어졌다.

경선은 강으로 우산을 내던졌다. 우산은 날렵하게 떨어지지 못했다. 이리저리 펄럭거리며 천천히 떨어졌다. 강물은 흘렀고, 우산은 쉽게 사라졌다. 다시 아까와 같은 빛이 강물에 어른거렸다.

화를 인정하세요. 너 지금 화가 났구나. 스스로를 보듬어주세요. 경선은 분노에 대한 강연이 떠올랐다.

너 지금 화가 났구나. 경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지금 화났다. 화났고, 또 무엇을 던질 수 있을까. 경선은 무언가 더 강으로 던지고 싶었다. 경선은 마땅히 던져도 될 물건이 있을지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으로 비가 다 들어갔다. 경선의 손가방은 잡다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샘플로 받은 작은 스킨과 로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경선은 떨어진 것들을 줍지 않았다. 계속해서 가방을 뒤적거렸다.

아아. 경선은 가방 속의 무엇이든 강으로 버릴 수 있었지만,

경선은 아무것도 강으로 던지지 않고, 아아, 아아, 입을 벌리고 울었다.

 

 

6

 

경선은 A의 목을 조르기 전에, 강으로 우산을 던졌다.

경선은 A의 목을 조르기 전에, 자기의 화를 보았다.

경선은 A의 목을 조르기 전에, B를 만났다.

경선과 B는 한때 함께 동료였다.

B는 경선과 동갑내기 남자였다.

B는 최근에 이혼했다.

경선은 B와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무도 날 배려하지 않아. 술에 취한 경선은 입을 벌리고 울었다.

맞은편에 쭈그려 앉은 B는 경선의 목젖을 보았다.

그렇게 울지 마. 그런 표정 짓지 마. B는 경선에게 말했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나는 욕심이 많지 않아. 엊그저께는 지하철에서 미친 여자가 내 블라우스 단추를 잡고 늘어졌어. 자기가 가진 옷이랑 똑같다면서 얼마 주고 샀냐고 다짜고짜 물었어. 설마 그 미친년이 가진 블라우스랑 가격이 똑같으면 어쩌나, 가슴 졸였어. 그래서 대답을 못했는데, 대답을 안한다고 나를 흘겨봤어. 네가 그렇게 잘났냐면서 내 옷을 잡고 흔들고 욕을 했어. 지하철 한 구간이 너무 길었어. 세상이 왜 이래. 나한테 정말 왜 그래. 아아. 너도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게 보이지? 경선이 B에게 물었다.

이제 행복해지면 되지. 행복해질 수 있어. B가 경선에게 말했다. B는 경선을 위로하고 싶었다.

너는 좋은 사람이야. 너 내 반지 껴볼래? 너 새끼손가락에는 들어갈 것 같아. 경선은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서 B에게 건넸다. B는 경선의 결혼반지를 새끼손가락으로 밀어넣었다. 겨우 들어갔다.

너 갖고 싶으면 가져도 돼. 경선이 B에게 말했다. 경선은 진심이었다. 경선은 석달 전에 이혼했고, 석달 전에, 그보다 더 오래전에 이미 뺐어야 할 반지였다. 경선의 반지는 백금이었다. 백금은 전남편의 취향이었다.

마음에 드니? 경선이 물었다.

B는 고개를 끄덕였고, B는 휘파람을 불었다.

경선과 B는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마셔도 계속해서 밤이었다. 계속해서 비였다.

경선과 B는 문득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우산은 없었다.

폭포처럼 쏟아진다. 폭포처럼 쏟아져. 경선과 B는 서로에게 소리치며 대화했다.

경선과 B는 빗속에서 새로운 행선지를 결정해야 했다.

우리 집에 갈래? 경선은 B에게 물었다.

좋아. 택시를 잡자. 경선과 B는 비틀거렸고,

비가 왜 그치지 않을까. 둘 중 누군가 말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더워. 둘 중 누군가 말했다.

너도 이혼했다며? 택시 안에서 경선이 B에게 물었다. B는 토할 것처럼 욱, 욱, 상체를 들썩거렸지만, 토하지는 않았다.

 

 

7

 

경선은 A의 목을 조르기 전에, B와 술을 마셨다.

경선은 B와 함께 집으로 갔다. 마시고, 마셔도 술이 모자랐다.

내가 술을 더 사올게. 취한 경선이 현관문 앞에 서서 B에게 말했다.

가지 마. B는 경선의 등에 대고 말했다. 경선은 취해서 B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가지 마. B는 취해서 현관문에 대고 말했다. 경선은 사라졌다.

경선은 넘어질 것처럼 걸었다.

경선은 넘어지기도 했다.

경선은 취한 와중에 비오는 거리로 가고 싶었다.

비오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미친다지. 미친다지. 물어뜯는다지. 불꽃도 있다지. 경선은 중얼거리면서 걸었다.

미쳐. 미쳐.

경선은 걷고 있었고, 그대로 40분을 더 걸으면 비오는 거리에 도착할 것이었다.

경선은 비오는 거리로 가지 않았다.

경선은 우산을 던졌던 그 다리, 그 자리로 가 난간을 붙잡았다.

경선은 난간에 기대어 비오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경선은 강을 내려다보고 아아, 아아, 소리쳤다.

다 가짜야 다 가짜. 경선은 취해서 자기가 하는 말을 의식하지 못했다.

경선은 소리 지른 기억을 잊었고, 난간에 매달려 휘청거린 기억을 잊었다.

경선은 A의 목을 조른 기억을 잊었다.

 

 

8

 

원숭이들은 자기 몸통보다 긴 꼬리를 말아올려 들고,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가는가. 아라베스끄 무늬라고 생각한 이 무늬는 원숭이들의 옆모습이다. 꼬리가 길다. 원숭이의 꼬리가 반원을 그리며 길게 말려 있다. 그 꼬리의 끝은 뒤따라오는 원숭이의 대가리 위에 있고, 다음 원숭이의 꼬리는 또 그다음 원숭이의 대가리로 이어져 있다. 원숭이의 전신은 분홍색이고, 원숭이들의 배경은 파란색이다. 나는 이것을 버려야 한다.

 

A는 경선의 손가방을 골똘히 관찰했다. A는 관찰력이 좋은 편이었다. A는 선천적으로 시력이 좋았으며, A는 자신의 유일한 장점을 뛰어난 시력이라 생각했다. A는 회전문에서 느끼는 공포의 원인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시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A는 손가방에 그려진 원숭이가 몇마리인지 세기 시작했다.

원숭이들의 행렬은 손가방의 끝에서 끝까지였다.

손가방에 그려진 원숭이는 총 84마리였다.

주술이 어울리는 가방이다.

A는 가방을 열었다.

경선의 가방에는 립스틱과 마스카라, 동전 세개, 열쇠, 고무로 된 머리끈, 카드 두장이 들어 있었다. A는 카드를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카드의 주인 이름은 없었고, 일련번호만 길게 있었다.

A는 립스틱 뚜껑을 열었다. 밝은 다홍색이었다.

다홍. A는 다홍,이라고 소리 내어 발음했다.

A는 최근에 다홍색을 본 기억이 없었다. 색을 입 밖으로 발음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너무 밝다. A는 립스틱의 다홍을 보다가 뜻밖에 눈물을 흘렸다. A는 눈두덩을 비비며 젠장, 젠장, 중얼거렸다. A는 찬물로 세수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A는 자신의 증세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장이 난 것이다. 어디가 고장 난 것인가, A는 안과만은 가고 싶지 않았다.

A는 창을 열었다. 변함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것은 달인가. 달이 맞는가. A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A의 얼굴에 비가 닿았다.

A는 달을 조금 더 크게 보고 싶었다.

달을 조금 더 크게 보기 위해서는 내가 달에 가까이 가거나, 달이 여기 떨어지거나. 개 같은 감각. A는 유일한 장점인 시력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A는 창을 닫았다.

A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A는 무릎을 접고 앉아 눈을 비볐다.

A는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 눈두덩에 비볐다. 눈두덩에서 금방 다시 열이 났다.

A는 윤주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시작했다. 윤주는 A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였다. A는 그렇게 생각했다. A는 윤주에 대한 생각을 할 때 겨우 편안해졌다. A는 노트를 펼치고 윤주에 대해 썼다. 눈물인지 진물인지 구분이 안되는 것을 뚝뚝 흘리면서 썼다.

 

보고 싶은 사람 당장에 김윤주. 너희 어머니는 나한테 참 잘해주셨는데, 윤주 너는 나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네가 나를 팍팍하게 대했던 것도 다 추억이구나. 고맙다. 윤주야. 윤주 네 동생 옥주, 옥주가 더 예뻤는데, 옥주는 팔, 다리, 발목이 가늘고, 희고, 복사뼈, 팔꿈치, 뺨이 자주 빨갛게 달아올랐었지. 옥주는 나를 잘 따랐고, 옥주는 나를 좋아했고, 이 모든 게 추억이지만 한편으로는 개 같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세상사 어딜 가나 개족보. 어쩌면 윤주 네 엄마도 나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좋아하지 않고서야 어째서 매달 반찬을 보내고. 참 재미있어. 새삼 돌이켜보면 사사건건 다 재미가 있다. 우리 다 같이 사는 동안 옥주랑은 서너번 했는데, 정작 윤주 너랑은 한번도 못했구나. 그게 마음에 걸려. 내가 좋아했던 건 윤주 너였는데, 우리 서로 좋아했던 건 사실이었는데. 지금 밖에 비가 오는 것처럼. 널 좋아하는 것과 너랑 자지 못한 것은 별개의 일이지. 성인남녀는 왜 반드시 그런 문제에 얽히게 되는 것일까. 막상 옥주랑 잔 건 내가 스무살 되기 전이었으니 성인남녀만의 문제는 아니겠구나. 혼란한 세상. 혼란하게 죽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어제 목이 졸렸는데 공포는 없었다. 머리를 잘못 다치면 공포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던데, 내가 그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내 얼굴은 예전만 못하다. 못한 정도가 아니라 윤주 너는 날 못 알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윤주 너를 알아볼 자신이 있다. 다섯번 다시 태어나도 나는 너를 알아볼 것이다. 너는 네 동생 옥주보다는 덜 하얗고, 옥주에게는 없는 주근깨가 얼굴에 자잘했었지. 너는 나를 아주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잊어도 좋아. 아니 나를 잊은 편이 확실히 더 좋겠다. 좀더 깜짝 놀랄 수 있도록. 만약에 윤주 네가 이 글을 본다면 너는 분명히 놀랄 것이다. 비오는 거리에 생긴 구덩이는 내가 파놓은 것이다. 같잖은 비밀이지만, 너한테는 말해주고 싶었다. 너는 내 비밀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호기심에 비오는 거리로 나오지는 마. 내가 파놓은 구덩이를 원인으로 네가 넘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윤주야. 나는 살면서 이 여자 저 여자, 자고 싶은 여자와는 정말 다 잤다.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알겠지? 윤주야. 우리 정말 다시 만나면 시시할 수도 있겠지. 네가 나를 괜히 흘겨보고, 너희 어머니가 내게 오이소박이니 마늘장아찌를 챙겨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옥주는 새벽마다 발간 얼굴로 내 방에 찾아들어오고. 지금이라도 네 이름을 여기 남길 수 있어서 기쁘다. 윤주야.

 

A의 윤주에 대한 기억은 왜곡된 것이었다. 윤주의 동생과 윤주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 역시 마찬가지였다. A는 자기가 왜곡된 것을 써 갈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A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윤주가 아니라, 목이 졸린 기억, 압박감, 원숭이가 줄지어 선 손가방과 창밖의 빗소리였다.

 

비가 그치지 않아.

비가 그치지 않아.

A는 눈을 비볐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A는 화가 났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A는 무서웠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A는 슬펐다.

A의 기분은 슬픔에서 더 전환되지 않았다.

A는 내일 약국에 갈 것이었다. 안과는 그다음이었다.

 

 

9

 

경선은 A의 목을 조른 뒤에 그 다리,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

경선은 A의 목을 조른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경선은 다리 위에 올라갔던 기억도 없었다. 손가방을 가지고 집 밖으로 나선 기억도 없었다. 비는 약하게 내렸고, 경선은 낮이 될 때까지 푹 잤다.

경선을 깨운 것은 행인이었다.

이 지경이라니. 행인은 경선을 흔들어 깨우며 그렇게 말했다. 경선은 그 소리를 들었다. 이 지경이라니. 거기에서부터 경선의 기억은 다시 시작되었다. 행인은 베이지색 양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경선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경선이 술을 마시고 다리에서 잠든 것은 이번이 다섯번째였다. 그중 세번은 이혼 후였다.

이 지경이라니. 경선은 행인이 했던 말에 공감했다.

경선은 잠들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선은 일단 걸었다.

나는 비오는 거리에 다녀온 것 같다. 경선은 자기가 밤새 어디에 있었을지 추측했다.

이상한 날들. 하늘에 해는 보이지 않았고, 경선은 계절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날들이다. 조금도 변하지 않고. 어제 흘린 것과 같은 땀이 흘러, 덥다. 왜 이리 더울까. 내리는 더운 비. 비. 비. 지겨워서 힘들다. 너 지금 힘들구나. 나는 나를 보듬어야겠지. 내가 나를 보듬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이 지경이라니. 병원에 가야 한다. 나는 치료받아야 한다. 경선은 고개를 흔들며 걸었다. 경선의 손톱 밑에 피가 맺혀 있었다.

경선은 현관문 앞에 다다르자 B가 떠올랐다. 경선은 B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던 것, B와 함께 술을 마셨던 것, B에게 호소했던 것, B에게 자기 결혼반지를 건네주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B는 휘파람을 불었었고, 좋은 소리였다.

어디 있니?

어디 있어?

B에게 문자 2통과 부재중 전화 4통이 걸려와 있었다.

경선은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섰다.

벽과 바닥은 짙은 파란색 타일이었고, 불은 켜지 않았다.

화장실의 작은 유리창이 비바람에 흔들렸다.

경선은 뜨거운 물을 틀었다가 다시 차가운 물을 틀었다. 찬물로 씻는 것이 나았다.

경선은 욕조에 앉아 찬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렸다. 욕조에 물이 가득 찼을 때, 경선은 물속으로 잠수했다.

경선은 씻고 나서 B와 술을 먹었던 자리를 치웠다. 치워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이혼 후에 경선은 남편과 분리되었고 남편의 집과 분리되었다. 남편과 살던 집보다 좁고 어두운 곳으로, 경선은 이사를 했다. 경선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다 가져왔다. 어둡고 좁은 경선의 집에는 살림살이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경선은 원숭이가 잔뜩 그려진 손가방을 찾기 위해 두시간 반 동안 방 안을 뒤졌다.

경선은 손가방은 찾지 못했고, ‘22세기 호흡’ 안내장을 찾아냈다.

안내장에는 전신 인체도와 확대된 두뇌가 그려져 있었다. ‘22세기 호흡’의 역사와 미래가 적혀 있었다. 대중을 향한 호흡 퍼포먼스가 펼쳐질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경선은 안내장을 반으로 접었다. 경선은 계속 접었다. 22세기 호흡은 종이배가 되었다.

 

어제 우리 많이 마셨나봐. 경선은 B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응, 우리 많이 마셨어. 어제는 미안했어. 너 괜찮니? B에게 답장이 왔고,

괜찮아. 경선은 괜찮다고 B에게 답했다.

B가 내게 미안한 것은 무엇일까, 경선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함께 22세기 호흡 퍼포먼스 공연장에 갈 약속을 정했다.

 

 

10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

 

공연장 사방의 벽에는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가 쓰여 있었다. 벽의 바탕은 흰색이었고, 새겨진 글은 파란색이었다. 벽의 아래로 갈수록 진한 파랑이 되었고, 바닥으로 이어졌다. 바닥의 글자는 검정에 가까운 파랑이었다.

객석과 무대는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

건장한 남자 셋이 글자가 적혀 있는 벽을 열고 등장했다.

남자들은 흰색 바지와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남자들은 건장했다.

두 남자는 삭발을 한 상태였고, 한 남자는 장발이었다.

 

호흡은 생존의 이유가 아닙니다.

 

남자 셋은 확성기를 사용했다.

 

관람객은 남자 셋을 가운데 두고 원형으로 둘러서 있었고, 바닥에 앉은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우리는 지금 속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권이 없습니다. 도덕적 직관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행동하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행위한다면, 무얼 더 의심해야 합니까? 나는 그래서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의 문화권을 지지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나의 문화권이기에,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지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한 남자가 우뚝 서서 말할 때, 두 남자는 움직였다.

두 남자는 제자리에서 점프했다.

두 남자는 공간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점프했다.

두 남자는 각자 다른 리듬으로 점프했고, 그것은 맥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두 남자는 쒸이, 쒸이, 소리를 냈다.

두 남자는 과장된 동작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두 남자는 한순간 숨을 멈추고 눈알만 굴렸다.

두 남자는 납작 엎드려서 길고 긴 주문을 외웠다. 바닥에 대고.

한 남자는 주문 속에서 확성기에 대고 말했다.

 

갱신되는 삶. 제대로 된 호흡을 해야 매일 갱신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방향성이 있습니까? 당신 주변의 무엇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경선과 B22세기 호흡의 끝을 다 보지 않고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저게 뭐지? B가 물었다.

더 나은 숨이래. 경선은 22세기 안내장을 펼쳐 보였다.

B는 다소 피곤했다.

경선 역시 피곤했다.

경선과 B는 가장 가까운 까페로 들어섰다.

까페의 내부에서는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팥빙수가 너무 달다는 이유로, 중년의 여자가 까페 주인에게 항의를 하고 있었다.

얼음을 더 달라고. 얼음을 주면 될 거 아니야.

저희는 팥빙수에 얼음 안 넣어요. 얼린 연유를 갈아 넣어요.

왜 이리 말이 많아. 그냥 얼음을 주라고.

생트집이세요. 팥빙수가 달지요. 달아야 팥빙수지요.

경선과 B는 까페의 2층으로 올라갔다. 자리를 잡고, 경선이 사라졌던 지난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네 반지가 빠지질 않아. B가 경선의 반지가 끼워진 손을 펼쳐 보였다. B의 새끼손가락은 벌겋게 부어 있었다. B는 몇번 반지를 빼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너 가지래도. 경선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걸 왜 가져. B는 난감하기도 했다.

경선과 B는 까페에 앉아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내 웃는 얼굴 어때? 경선이 B에게 물었다.

B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말해봐, 어때? 경선이 B에게 다시 물었고,

좋아 보여. B가 대답했다.

경선과 B는 술을 마실 때와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대화했다.

각자 이혼하기까지의 사정, 개봉한 영화, 그치지 않는 비, 비오는 거리, 주변의 동료와 선배, 외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내 주위에는 늘 외롭다는 사람이 많아. 사람이 어떻게 늘 외로울 수 있지? 경선이 말했다.

늘 외로울 수도 있지. B가 말했다.

늘 외로운 사람들은 자기가 외로운 줄 모를 텐데. 경선이 말했다.

넌 외롭니? B가 경선에게 물었다.

난 외롭다기보다 지겨워. 경선이 대답했다.

경선은 B와 헤어진 뒤에 마트로 갔고, 오이, 토마토, 양상추, 양파, 참치, 콘을 샀다.

경선은 샌드위치를 만드는 데 두시간이 걸렸다. 경선은 먹었고, 먹은 자리에서 곧바로 잠들었다.

 

 

11

 

알레르기 때문이에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A는 집으로 돌아와 처방받은 연고를 눈두덩에 발랐다. A는 처방받은 알약도 먹었다. 먹은 자리에서 곧바로 잠들었다.

A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A는 바다에 가 있었다. 5월 두번째 목요일 오전 열한시 맑은 날의 해변이었다. 모래는 밝았고, 파도는 없었다. A는 눈이 부셔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서 있을 수도 없었다. A는 바다로 들어갔다. 잠수했다. A는 물속에서 눈을 떠 밝고 부연 빛을 봤다. A는 끔뻑 끔뻑, 눈을 감았다 떴다. 차고 짜다. A는 바닷물이 차고 짜다고 느꼈다. A는 눈으로 맛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숨이 차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오래 잠수할 수 있단 말인가, 꿈속에서 그는 놀랍고 신기했다. A는 놀랍고 신기해서, 영영 물속에서 나가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A는 꿈속이었고 머지않아 잠에서 깨고 말았다.

A가 어렴풋이 잠에서 깨 눈을 떴을 때 꿈속에서의 밝음은 없었다. A는 눈을 다시 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눈을 크게 번쩍 떴을 때, 잠은 더 멀리 달아났고, 어두움은 더 분명해졌다. 방 안 어디에도, 창밖 어디에도 꿈과 같은 밝은 빛은 없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창밖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누군가 계속해서 유리그릇을 던지는 것 같았는데,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A는 누워서, 창문을 열어봐도 될지 고민했다. 잠들기 전에 바른 연고가 눈가에 끈적끈적하게 말라 있었다. A는 조금 문질렀다. 더 문지르고 싶었지만 A는 눈의 호전을 위해서 참았다. A는 눈가의 간지러움을 참느라 가슴이 답답했다. 숨쉬기가 편하지 않았다.

잠에서 깬 A는 눈가에 끈적임과 간지러움과 답답함과 치밀어오르는 무엇을 느꼈고, A는 노트를 펼치고 윤주에 대해서 갈겨 써내려갈 수 있었지만, 창을 열고 고개 내밀어 깨지는 소리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눈을 비벼 더 악화시킬 수 있었지만, 그냥 그 자리에 누워만 있었다.

사실 A는 어두움만큼이나 밝음을 갈구하고 있었고, A는 그것을 꿈으로 확인한 뒤였다.

A는 누워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비오는 거리로 매일 나가는가?

비오는 거리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그 여자 목을 조르지 않았는가?

나는 왜 그 여자를 밀치지도 않고 그대로 드러누워 목 졸리고 있었던가?

나는 혹시 즐겼던가?

나는 고통을 즐기는가? 불행을 즐기는가?

고통이 불행은 아니다. 불행이 고통은 아니다.

나는 정말 윤주를 좋아했던가?

 

A는 곧 역으로 자문했다.

 

나는 목이 졸리기 위해서 비오는 거리를 나섰던가? 다리를 올라갔던가?

 

그 여자 악력은 참을 만한 것이었고, 나는 목이 졸릴 때 즐거웠던가?

나는 불행을 위해서 윤주를 잊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애쓰는가?

 

A는 ‘애쓰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눈두덩이 짓무르도록, 흐르는 눈물을 제어하지 못할 만큼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A는 인정했다. 그래서 A는 누운 자리에서 더 잤다. 딱히 더 계획하고 결심할 수 없었다. 더 회상하거나 공상할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잠이었다.

 

 

12

 

사람이 혼기가 차면 자연스럽게 결혼하게 되듯이, 이혼기가 되면 이혼하는 것이다. 경선의 사촌은 그렇게 말했다. 경선의 사촌은 두번의 이혼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경선보다 여덟살 많았다.

나는 언니랑 달라. 다르다고. 아아. 경선은 입 벌리고 울었고.

애도 없는데 왜 이리 호들갑이니? 경선의 사촌에게는 아이 둘이 있었다.

집에 가서 밥 먹고 좀 자렴. 사촌은 경선에게 오이지를 챙겨주었다.

언니, 비 언제 그쳐? 경선이 사촌에게 물었고,

나도 몰라. 사촌은 경선에게 대답했다.

경선은 오이지를 밥과 먹지 않고 소주와 먹었다. 때로는 막걸리와 먹었고, 맥주는 안주 없이 마셨다.

경선은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고 자고 싶은 만큼 잤다.

경선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모두 만났다. 동료, 선배, 선배의 지인, 지인의 지인, 지인들의 무리. 주변인들과 식사와 술을 함께하고, 취하고 떠들었다. 전남편의 친구와 만나 전남편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기도 했다. 두명의 사촌, 한명의 동성친구, 친구의 친구들과 모여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 춤은 어디에서 배웠어? 주변인들은 경선에게 감탄했다.

너는 참 잘 논다. 파티걸이야. 경선은 그런 말을 듣기도 했다.

어, 나 잘 놀아. 그런데 행복하지는 않아. 너도 보이지? 경선이 웃으며 말했다.

경선은 선배에게 웃지 말라는 조언을 들은 이후, 행복하지 않음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경선이 선배의 말에 마음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경선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큰 불상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선은 왁자하게 놀고 난 다음 일주일, 혹은 열흘, 혼자 시간을 보냈다.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경선은 오전 열한시쯤 황태해장국 2인분을 배달시켜서 하루 동안 나누어 먹었다. 방 안은 온통 눅눅했고 환기가 잘되지 않았다.

경선은 집으로 주변인을 불러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니. 경선 앞에 앉은 사람들은 말했다. 그들은 우연히 같은 말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돼. 경선은 대답했다.

경선의 친구들은 유행처럼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임신하고 낳았다. 그래서 경선은 어린 아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경선은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아이의 입술 모양을 따라했다.

잔뜩 힘주고 오므리기를 좋아해. 흐물흐물하기도 하지. 어디를 보니? 어디를 보고 있는 거야?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구나. 아직 전생을 잊지 못했구나. 잊고 있는 중이구나. 경선은 허우적거리는 아이의 팔과 다리를 가만히 잡아보기도 했다. 힘이 좋구나. 장어야. 너는 뭘 그렇게 잃어버리고 있어? 뭘 잊고 싶어? 경선은 만나는 아이들에게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경선은 어린아이들을 물고기로 부르기를 좋아했다.

장어야, 너무 더워서 힘들지? 경선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어야, 얼른 커서 놀이공원에 가자. 경선은 모성애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아이를 낳을까? 경선은 아이의 엄마에게 묻기도 했다.

낳지 마. 경선의 친구 모두 경선에게 아이 낳지 말 것을 권했다. 그래, 내가 무슨. 경선도 정말 아이를 낳을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22세기 호흡 공연장에 갔었어? 아이의 엄마는 방바닥에서 22세기 호흡 안내장을 찾아냈다.

그중에 삭발한 남자, 나 걔 잘 알아. 이년 전에 만나던 애야. 아이의 엄마는 지난 연애를 추억하기 시작했다.

장어야, 저런 이야기는 듣지 마, 듣지 마. 경선은 잠든 아이의 귀를 두 손으로 막기도 했다.

아이는 두시간 동안 잘 잤고, 삭발한 남자는 사연이 많았다.

삭발한 남자는 22세기 호흡을 이끌고 있으며, 이년 전에는 가스배달을 했다. 가스배달을 하기 전에는 교회에서 간사로 있었다. 간사로 있기 전에는 교회 청년부에 있었으며, 어린이부를 지도했다. 삭발한 그 남자는 모태신앙이었으나 간사로 있던 어느날 믿음이 깨졌다. 믿음이 깨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한순간에 남자는 삭발을 했다.

사연 많은 사람 지긋지긋해. 경선은 그만 듣고 싶었다.

술 마실래? 경선은 물었고,

아니야. 난 집에 가야 해. 저녁도 차리고 빨래도 해야지. 저녁이 되기 전에 아이 엄마와 아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의 엄마는 우비를 입고 경선의 집을 떠났다.

조심해서 가. 경선은 현관문 앞에서 인사했다.

경선은 아침에 시켜두었던 황태해장국과 오이지, 소주를 냉장고에서 꺼내었다.

아이고 서늘해. 경선은 황태해장국을 떠먹으며 혼잣말을 했다.

이 지경이라니. 경선은 혼잣말할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 지경이라니.

경선은 차가운 국, 차가운 오이지, 차가운 소주를 순서대로 번갈아가며 먹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22세기 호흡 공연장에 삭발한 남자는 둘이었는데, 둘 중에 누구였을까.

둘 중에 누가 그렇게 사연이 많았을까.

사연 없는 사람이 진짜 외로운 사람이지. 더 서러운 사람이지. 안된 사람.

경선은 방 한구석에 접혀진 22세기 호흡 안내장을 펼치고, 그것을 읽고, 소주를 들이켜고, 차가워서 부르르 떨었다. 경선은 천천히 취했다.

 

 

13

 

지금 이 사회에서 자의와 타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휩쓸리기만 하는 삶에서의 호흡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동물성만이 강조된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생존만을 위한 호흡은 진정한 호흡이 아닙니다.

우리는 좀더 편안하게 호흡해야 합니다. 우리는 좀더 깊게 호흡해야 합니다. 우리는 좀더 자연스럽게 호흡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호흡을 제어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호흡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호흡을 통해서만이 인간다움의 의미를 탐색할 수 있습니다.

 

22세기 호흡은 22주에 걸쳐 수련합니다.

22주 과정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더 나은 숨을 쉬게 됩니다.

22주 과정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더 인간다워집니다.

22주 과정은 이론과 실습을 병행합니다.

 

1주 자유발언

 

2주 중심으로부터 확장된 몸 상상하기

3주 중심으로부터 축소된 몸 상상하기

4주 발가락 단련

5주 종말기관 루피니소체와 파치니소체 알기

6주 외부감각 차단과 내부감각 단련

7주 뒷목 늘리기

8주 어깨 열기

9주 날개뼈 위치 알기

10주 머리뼈, 목뼈, 척추의 관계 알기

11주 자유발언

12주 갈비뼈와 가슴뼈에 대하여

14주 우리 몸의 원과 구 찾기

15주 우리 몸의 곡선과 직선 찾기

16주 균형 잡기

17주 힘 빼기 훈련 (1) 눈썹, 눈꺼풀, 인중, 입안

18주 힘 빼기 훈련 (2) 무릎

19주 물구나무 서기

20주 호흡 (1) 들숨 날숨 멈추기

21주 호흡 (2) 느린 순환 빠른 순환

22주 자유발언

 

22세기 호흡은 비영리단체입니다.

22세기 호흡은 사이비단체가 아닙니다.

 

<22세기 호흡>

 

 

14

 

사이비가 아니라 맹세하는 자들은 사이비이기 마련이다. 사이비가 아니라 선언하는 자들의 지향은 무엇인가? 그들은 그저 사이비 아님을 드러내고자 할 뿐이다. 같을 사. 어조사 이. 아닐 비. 실제와 전혀 다른 것, 실제가 전혀 아닌 것. 그러나 세상에 실제와 같은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세상 누가 실제를 본 적이나 있는가? 그러니까 세상 누구나 다 사이비이다. 모든 판단은 사이비이다. 사이비이다 인정하는 것도 사이비이다. 가슴이 답답한 것도 사이비이다. 심장의 온도를 확신하는 것도 사이비이다. 심장은 지금 내 확신보다 차가울 수 있고 어쩌면 실제인 심장은 멈춰 있을 수도 있다. 사이비만이 실제일 수도 있고, 이 말은 사이비일 것이다. 나는 이제 윤주가 사이비라는 것을 안다. 윤주는 사이비이다. 옥주는 사이비이다. 윤주와 옥주의 엄마는 사이비이고, 감자를 먹은 기억도 사이비이다. 더 많은 것들이 사이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계속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능력은 이렇게 습득되는 것이다.

 

A는 능력에 대해서 생각했다.

A3주 전 22세기 호흡 안내장을 주웠다.

안내장은 공원 길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납작하게 새가 죽어있었다. 죽은 새의 주변에는 온통 노인이었다. 약한 비가 내리는 가운데 노인들은 무리지어 서 있었다. A는 길바닥에서 길바닥 같은 새를 밟았고, 허리 숙여 안내장을 주웠다.

A는 생각날 때마다 종이를 펼치고 읽었다.

종말기관, 종말기관, 종말기관. A는 반복했다.

종말과 기관 두 단어 모두 A의 흥미를 유발했다.

루피니소체와 파치니소체는 유리와 우주 같은 것인가. A는 생각했다.

영원히 볼 수 없는 것, 언제까지나 경계인 것에 대해서 A는 생각했다.

나는 선택하지만 선택에 의미는 없다. 더위와 비가 교차될 뿐이다. A는 생각했다.

22주는 몇개월인가. A는 계산해야 했다. 계산은 얼른 되지 않았다.

육개월이 채 되지 않는군. A는 정확하지 않게 셈을 마무리하는 버릇이 있었다.

육개월을 살 자신도 없다. A는 생각했다. 그러나 A는 육개월은 물론이고 육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죽지 않을 것이었다. A는 긴 수명을 타고난 운명이었다. A는 언젠가 점성술을 믿었던 적이 있었고, 심취했었다. A는 처녀자리였다. A는 아침에 태어났다. A는 오래 살 수 있으리라는 은근한 기대로 살고 있었다.

A는 자기가 가진 기대를 외면했다.

A는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외면했다.

A5일째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A는 작은방과 큰방을 오가며 생활했다.

A는 즉석카레와 식빵을 먹었다.

A는 통조림 참치와 치즈를 먹었다.

A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만 자기도 했다.

비오는 거리의 내 구덩이는 지금쯤 빗물에 쓸려온 흙에 메워졌을까. A는 생각했다.

A는 비오는 거리로 나가지 않는 대신, 다리 위에서 주워온 손가방의 패턴, 원숭이들의 행렬에 골몰했다. 원숭이의 분홍이 예쁘다고, A는 생각했다. 바탕의 파랑과 대비되어 눈이 부신 분홍이었다.

예쁨은 사이비가 아니다.

그 여자는 예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가방은 실제이고, 그 여자는 실제가 아니다.

A는 정리했고, 그 결론이 마음에 들었다.

A는 자기 목을 졸랐던 그 여자 이목구비는 다 잊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A는 그 여자의 이목구비를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A는 여자의 눈만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가슴팍 위에 올라탄 그 여자는 언제 사라졌을까. 사이비이다. 사이비가 아닐 수 없다고, A는 생각했다.

A는 목이 졸린 그날 자기 옆에 남은 손가방을 주워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A의 눈두덩과 눈물은 연고와 알약으로 나아지고 있었다.

A는 직접적인 연고와 알약의 효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A는 맑은 바다에서 잠수를 했던 꿈 덕분이라고 믿었다.

A는 점성술과 더불어 꿈을 믿었다. 꿈속에서 해결한 것이라고, A는 생각했다.

A는 더 많은 해결을 원했다. 막연한 기대였다.

당장에 심장을 해결해야 한다. A는 가슴속이 매일 뜨거웠다.

A22세기 호흡에 참가할 것이었다. 더 나은 숨이란 무엇인지, A는 알고 싶었다.

 

 

15

 

1주 자유발언

 

모인 인원은 열한명이었다. 그중에 삭발한 두 남자와 장발의 한 남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원으로 앉아 있었다. 무작위로 섞인 것이었다. 그들 머리 위에 조명이 있었고 조명은 갈색으로 충분히 어두웠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공간은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발언의 순서는 장발 남자부터였다.

 

막무가내로 열려 있습니다. 자유롭게 시작하세요.

눈을 감아도 계속 보이는 잔상이 있어요. 지우고 싶어요.

제가 만만한지 왜 저만 원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자주 제 내장을 느껴요. 식도, 위의 시작, 위 복부의 내부, 아래 복부의 내부, 골반 안의 것들, 등에 가까운 장기, 그런 것들이 다 느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움직이고, 소리 내고, 어떨 때 그것들은 주장을 하는 것 같아요.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정말 허리가 너무 아파요.

128억이 제 목표이고, 현재 4800만원 달성했는데 완급조절이 쉽지 않습니다.

배려받지 못하고 있어요.

파트너가 성병에 걸렸어요.

사직서를 냈는데 거부당했습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심장에 열이 많습니다.

 

발언은 다음 발언, 또 그다음 발언으로 넘어갔다. 열한명의 목소리는 3시간 40분 동안 이어졌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말에 열중했다. 사람들은 열정적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용이 없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발언하지 않았다. 할 말이 남은 단 한명이 끝까지 발언했다. 앉은 사람 중 둘은 울음을 터트렸다. 둘은 취한 사람처럼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까지 끝난 후에, 한 사람씩 순차적으로 지하공간을 떠났다.

A는 총 28번 발언했다.

A는 신체적 고민에 대해서 발언했다.

A에게 궁극적인 고민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A는 울지 않았다.

A는 울음을 참았다.

A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오는 거리에 들렀지만, 그가 파놓은 구덩이에 눕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A는 잠자리에 누워 사람들의 발언 내용을 곱씹었다.

A는 윤주에 대한 생각 없이 푹 잤다.

 

 

16

 

경선은 자신이 어떤 지경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어떻게 나아졌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국면이라 할 수 있는 극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경선은 근래에 안심하며 살았다.

경선은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경선은 가스레인지를 사용하는 요리를 종종 했고, 밥을 지었다. 설거지해야 할 그릇은 사흘 이상 방치하지 않았다. 방 안에 가득히 쌓아놓은 짐 중 일부, 옷과 가방을 버리기도 했다.

경선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수채화와 유화를 동시에 그렸다.

경선의 집을 찾아오는 주변인들 역시 경선이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좀 괜찮지?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한달만 심란한 거 참으면 그다음부턴 속 편해. 이제 너도 네 인생 살아. 알겠지? 경선의 사촌은 말했다.

사촌은 직접 만든 토마토잼과 무화과잼을 경선에게 건넸다.

빵에 발라 먹어. 사촌이 말했고, 경선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제과점을 떠올렸다.

어떤 게 무화과고 어떤 게 토마토지? 경선은 두개의 유리병을 받아들고 사촌에게 물었다.

조금 더 진한 색이 토마토야. 사촌이 유리병 뚜껑을 열어 보였다.

경선은 찍어 먹었고, 토마토였고,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습한데 어떻게 잼을 만들었어? 경선은 한번 더 찍어 먹었다.

세일을 해서 욕심에 많이 사두었는데 토마토가 너무 익었고, 무화과도 곧 썩을 것 같았다, 다 버릴 수는 없었다, 아이들 키우다보면 이것저것 다 아끼게 된다, 아이들이 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옷이며 장난감, 방바닥에 잼을 다 묻혀놔서 뒤처리가 번거롭지만, 번거로울 거 모르고 아이 낳은 것 아니니 괜찮다, 아이와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 않은 만큼 보람도 있다, 너도 나중에 아이 낳으면 알게 될 거다, 낳을 생각이면 빨리 낳아놓는 게 좋은데, 그런데 아무래도 너는 애 낳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촌이 경선에게 말했다.

그래, 알았어. 안 낳아. 마땅한 남자도 없는걸. 경선은 번거롭지 않게, 편안하게 잼을 먹기 위해서라도 아이는 낳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식빵 사러 가자.

경선은 빨간 샌들을, 사촌은 검은색 장화를 신었다.

경선과 사촌은 빵을 사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섰다.

제과점까지는 15분 걸어야 했다.

비가 정말 끈질기지. 경선이 비를 보며 말했다.

메가 가뭄 때문이야. 사촌이 말했다.

메가 가뭄은 또 뭐야. 경선이 사촌에게 물었고,

있어. 가뭄인데, 메가야. 사촌이 대답했다.

사촌은 가뭄과 비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정체된 대기와 강력한 태풍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바다의 물을 들어올릴 만큼의 큰 바람과 빙하기에 대해서 말했다.

너 비오는 거리에는 나가지 마. 너같이 심약한 사람은 홀린다더라. 사촌은 어제 오후 여섯시쯤 텔레비전을 틀었고, 한 여자의 인터뷰를 보았다고 말했다.

자기보다 자기가 커지는 기분이었다더라. 술은 먹지 않았는데, 자기가 하는 말을 듣고 자기를 자기가 봤대. 뭐가 어떻게 커졌다는 건지, 무슨 헛소리인지. 사촌은 혀를 찼다.

나는 가보고 싶기도 해. 어쩌면 나 술 마시고 이미 갔는지도 몰라. 경선이 사촌에게 말했다.

술 끊어. 지금처럼 매일같이 술 먹으면 곧 죽어. 죽지 않으면 뇌가 녹을 거야. 이미 좀 녹았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반드시 비오는 거리에서 미치고 말걸. 그러고 보니 너 지금도 조금 미친 것도 같다. 사촌이 경선에게 말했다.

미치기는 내가 뭘 미쳐. 경선은 웃었다.

경선은 제과점에서 호밀식빵을 샀다.

경선의 사촌은 아이들에게 줄 우유식빵과 크로켓과 도넛을 샀다.

경선과 사촌은 제과점 앞에서 헤어졌다.

잼 잘 먹을게. 경선이 사촌에게 인사했고,

정신 차려라. 사촌이 경선에게 인사했다.

미치기는 조금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경선은 그날 밤 생각했다.

경선은 방에서 거실로 걸었다.

냉장고에는 소주와 호밀식빵과 잼과 오이지와 황태해장국이 있었다.

경선은 호밀식빵에 잼을 발라 소주와 먹었다.

경선은 텔레비전을 틀고 채널을 바꾸었다. 비오는 거리를 주제로 한 TV프로그램은 방영되지 않았다.

경선은 리모컨을 쥐고 잠들었다.

 

 

17

 

22세기 호흡 과정 2주차에 모인 사람은 아홉명이었다.

모인 사람 중 여섯은 매트 위에 누웠다.

삭발한 두 남자와 장발의 한 남자는 누운 사람들의 곁에 앉아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들은 몸의 중심과 확장되는 감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저중에 누가 가스배달을 했을까, 저중에 누가 간사였고, 저중에 누가 동거를 했을까, 경선은 누워서 생각했다.

매트에 누운 여섯은 눈을 감고 있었다.

조명은 없었고 촛불이 매트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있었다. 공간은 아주 어두웠다.

세명의 남자는 번갈아가며 이야기했다.

팔의 시작은 어디인가요? 팔의 시작은 어깨가 아닙니다. 팔의 시작은 쇄골이고 날개뼈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쇄골과 날개뼈에서부터 팔입니다. 쇄골의 가장 깊은 곳, 날개뼈의 가장 깊은 곳을 상상해보세요. 겹쳐진 점이어도 좋고 비어 있어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매트에 누운 경선은 설명을 듣다가 잠들어버렸다.

매트에 누운 A는 확장이란 무엇인지 잘 와닿지 않아서 두 눈을 끔뻑거렸다. A는 고개를 돌렸다. 비상구의 초록이 눈에 들어왔다. A는 매트와 매트 사이에서 흔들리는 촛불을 느꼈다.

비상구 너머 불, 비상구 너머 절벽. 초록 바탕에 그려진 흰색 인간은 비스듬히 탈출한다. 다급해 보이지는 않는다. 저 흰색인간은 달리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인다. 흐트러지고 싶지 않은가? 탈출하면서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는가? 흰색인간은 탈출이 아니라 숨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인 것도 같다. 그러니까 저 표시가 가리키는 곳은 비상구가 아닐 수도 있다. A는 비상구에 대해서 생각했다. 눈을 끔뻑거리면서.

 

 

18

 

두달 만에 만난 B는 야위어 있었다.

너 말랐다. 경선이 B에게 말했다.

마음은 전보다 편해. B가 경선에게 말했다.

그럼 다행이야. 다행이야. 경선과 B는 어김없이 서로 위로했다.

B와 경선은 한마디씩 했다.

이혼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반드시 단명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대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더 긴 결혼생활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단 일주일도 늦출 수 없는 선택이었다.

B와 경선은 이혼의 이로운 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경선과 B는 까페의 2층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까페의 2층, 구석에서는 언제나처럼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가씬지 아줌만지 모르겠지만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재미있어? 우리 싸우는 게 재미있어? 지금 심각한 거 안 보여? 우리가 아줌마 재밌으라고 이렇게 열 뻗친 줄 알아? 어?

한 남자가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알 수 없는 여자에게 고함을 쳤다.

창피하게 왜 이래. 나가.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 나가자고. 고함치는 남자의 일행이 남자의 오른팔을 잡아끌었다.

아니 지금 열받잖아. 사람이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눈을 피해주지는 못할망정 재미삼아 실실 웃어가며 쳐다봐? 계속 빤히? 아줌마가 말해봐. 지금 내가 열이 받겠어, 안 받겠어? 고함치는 남자는 계속 고함쳤다.

가자. 가. 남자는 팔을 잡아끌려 나갔다.

사람들이 다 미쳐가. 경선이 까페 테이블에 턱을 괴고 말했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그래. B가 말했다.

비랑 무슨 상관이야. 경선이 피식 웃었다.

꼭 비가 아니더라도 날씨가 그래. 사람을 지배해. B의 의견은 진지했다.

그래. 그렇구나. 경선은 대강 대답했다.

너 요즘 외롭니? B가 경선에게 물었고,

어, 외로워. 경선이 대답했다. 경선은 외롭다고 말한 다음 소리 내서 웃었다.

경선은 이유 없이 웃은 것이었고, 경선이 웃자 B가 따라 웃었다.

이제 반지가 잘 빠져. B는 경선의 백금반지를 돌려주었다.

세상에. 난 이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어. 경선은 자기 결혼반지를 보고 놀랐다.

경선은 반지를 여러 각도로 돌려 보았다.

이렇게 예쁜 반지였다니. 경선은 반지가 새삼스러웠다.

네 결혼반지는 어떻게 했어? 경선이 B에게 물었다.

집에 있지. 서랍에 넣어뒀어. B가 대답했다.

보관해두고 있어? 우리 같이 반지 팔러 갈래? 경선이 B에게 물었다.

얼마 받지도 못할 거야. B가 말했고,

얼마 받지 못해도, 경선은 팔고 싶었다.

경선은 조만간 반지를 팔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경선은 반지를 판 뒤에, 일식집으로 가고 싶었다.

여자 소개시켜줄까? 경선이 B에게 물었다.

아니. B는 마다했다.

22세기 호흡 다시 가볼래? 난 요즘 매주 나가. 경선이 B에게 제안했다.

아니. 나랑은 안 맞아. B는 마다했다.

에어컨을 주문했는데 오늘부터 바람이 시원해지는 것 같네. B는 어젯밤 에어컨을 주문했다고 했다.

앞으로 얼마간은 더울 거야. 당분간 에어컨은 필요할 거야. 제습기 대신 써도 되겠지. 비도 그치지 않을 테니. 가을에 냉방병도 나쁘지 않아. 경선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했다.

가을에 냉방병이라. B는 고개를 내저었다.

맥주를 마실까? 맥주를 마시자.

 

 

19

 

B와 경선은 캔맥주와 치즈를 들고 걸었다. 경선과 B는 우산 하나를 나누어 썼다.

경선과 B2차, 3차, 4차, 옮겨가며 맥주를 마셨고,

비오는 거리에 가자. 바닥분수가 멋져. 취한 B가 말했다.

우리 지금 너무 취했는데. 취한 경선이 말했다.

거기 다 취한 사람들이야. B가 말했다.

너 비오는 거리 믿어? 경선이 B에게 물었다.

비오는 거리에 대한 미신과 음모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비오는 거리에 대한 미신과 음모 중 일부는 사실이었다.

경선과 B는 각자 믿고 있는 것을 이야기했다.

비오는 거리에 대해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안개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44바퀴 제자리돌기에 성공하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속설을, B는 이미 실행했다고 말했다.

균형감각이 좋구나. 어떻게 44바퀴를 넘어지지 않을 수 있어. 경선은 B를 칭찬했다.

고마워. B는 칭찬을 듣자 기분이 좋았다.

어디를 가고 싶어서 44바퀴나 돌았어? 경선이 B에게 물었다.

어디든 가고 싶었지. 그래서 기껏 지금 여기야. B가 대답했다.

나도 돌고 싶다. 나도 돌아봐야겠어. 경선이 말했다.

 

 

20

 

11주 자유발언

 

11주에 모인 인원은 삭발한 남자와 장발인 남자를 포함해 총 7명이었고, 그들은 어두운 조명 아래 원으로 둘러앉았다.

 

자유롭게 발언하세요.

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착각하는 건지 착각하는 척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참 얄팍합니다.

절교하자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답장하지 않았습니다. 답장할 가치가 없으니까요.

저는 아직 심장의 열이 내리지 않습니다.

저기로 가 앉으세요.

엊그제 발신자 번호 표시금지 전화가 왔는데 전남편 같아요.

축하드려요. 요즘 축하할 일이 많네요.

 

11주가 지나자 발언은 대화가 되기도 했다.

태어나 처음 봤던 바다는 어떠했습니까? 기억에 있습니까?

저는 기억나지 않네요. 바다 자체가 희미합니다.

제 첫 바다는 밤바다였어요. 움직이는 물은 처음이어서 무서웠어요.

수영하고 싶네요.

밤 수영 좋죠.

밤 수영 위험합니다. 죽을 뻔했습니다.

A는 바다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않았다.

 

아직 여름인가요?

아직 여름이지요.

여름은 끝났어요. 진작.

끝이 어디 있습니까? 아직 비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맥주 마시러 나갈래요? 경선은 22세기 호흡에 모인 사람들과 파티를 벌이고 싶기도 했다. 경선은 그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다. 경선은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낸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고, 이제 놀고 싶기도 했다.

저는 컨디션이 별로입니다. A는 알코올을 즐기지 않았다.

A22세기 호흡에 5번 참가했다.

A22세기 호흡 과정 1주, 2주, 5주, 9주, 11주에 참가했다.

A는 같은 바닥에 앉아 있는 경선을 알아보지 못했다. A는 목이 졸릴 때 경선의 얼굴을 외면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는 경선을 반쯤 알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 내부의 의지로 인해 경선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경선은 11주 모두 성실히 참석했다. 경선은 잃어버린 손가방에 대해 아쉬움과 미련이 있었지만 A의 목을 조른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경선 또한 A를 알아보지 못했다. 경선의 뇌는 아직 녹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녹을 것이었다.

11주의 발언은 네시간 동안 이어졌다.

A는 발언할 내용이 많지 않아서 잠자코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A는 자주 고개 돌려 비상구를 바라보았고, 접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기도 했다. A는 빗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빗소리가 맞는지 아닌지 A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공간은 지하였고 창문은 없었다. A는 밖에서 무언가 부서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꾸 깨지고 있다고, A는 생각했다. 누가 유리그릇을 던지는가? A는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발언하고 싶어졌다.

 

지금 밖에 유리가 깨지고 있나요? 비가 거세진 건가요? 아무래도 빗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비가 그치지 않습니다. 충돌. 충돌.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몇번의 충돌을 목격했습니다. 횡단보도에서 차들이 충돌했고요. 그중에 한대는 도망쳤습니다. 새들이 낮게 날다가 서로 부딪혔습니다. 둘 중 한마리가 죽었거나 두마리 다 죽었을 것입니다. 두마리 다 바닥으로 떨어졌고 비가 그치지 않으니까요. 어제 새벽에 벽에서 액자가 떨어졌는데, 집에 그런 액자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저는 그 액자에 무슨 사진이 있을지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액자를 벽에 다시 걸 수 없었습니다. 똑바로 세워놓지도 못했습니다. 가슴이 계속 답답합니다. A의 발언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A의 발언은 A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오늘 횡단보도에서 새를 또 밟을 뻔했는데, 밟지는 않았습니다. 그 횡단보도에서 유난히 새가 서로 부딪힙니다. 새가 싫고 무섭습니다. 전생에 저는 벌레였을 것이고 새에게 눈알을 쪼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 생에 심장이 말라 죽을 것이고, 가능하다면 죽고 싶지만, 또 가능하다면 죽고 싶지 않습니다. 죽느냐, 죽지 않느냐, 어떤 것이 간절한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진짜 위협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고,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생각인데, 생각이 멈춰지지 않습니다.

 

A는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발언도 쉽게 멈출 수 없었다.

 

제 주변의 모든 것이 계산이고 물질입니다. 잠들기 전에 조급증이 가장 심해집니다. 2초 동안 숨을 내뱉고, 2초 동안 들이쉬자, 결심해도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쉬운 것은 없습니다. 저는 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고쳐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해하던 버릇을 고쳤고 강박적으로 퍼즐을 맞추던 습관도 고쳤습니다. 아무 때나 흐르던 눈물도 고쳤습니다. 짓물렀던 눈두덩도 이제 다 나았고요. 비오는 거리로 나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고,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 거리는 그저 비가 오는 거리이고, 저는 비를 맞을 뿐이지만, 의심스러운 모든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비오는 거리에 가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다시 혼란 속이고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A는 기어이 자기 머리털을 양손으로 잡아 뜯기 시작했다.

 

둥글게 앉은 사람들이 A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경선은 A가 흥미로워서 기뻤다.

저런 미친놈. 경선은 A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경선은 어두운 조명 아래 A의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이다. 후유증이 심하면 미칠 수도 있다. 경선은 생각했다.

차에 치였거나 기관지염을 심하게 앓았을 것이라고, 경선은 A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짐작했다. 심장이 아니라 폐의 문제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것일 수 있고, 어쩌면 저 남자는 가슴뼈의 구조가 기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아니라면 자폐 상태일 수 있겠다고, 경선은 A를 진단했다. 그러나 경선은 차에 치이는 것과 기관지염과 뼈, 그리고 자폐의 정확한 인과관계까지는 생각해낼 수 없었다.

차에 치인 적 있어요? 차에 치여서 갈비뼈나 가슴뼈가 부러진 적 있어요? 경선은 묻고 싶었다.

경선이 묻고 싶은 와중에도 A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A는 격양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일면 성실했다.

경선은 A의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연약한 목소리를 어디에서 들었던가. 경선은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활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익숙함은 신비로운 것이다. 경선은 생각했다.

 

 

21

 

A는 둥글게 모여 앉은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A는 생각이 많지만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A는 말하는 중에 울 것 같았다.

A는 울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말을 멈췄다.

괜찮아요. 저도 그런 적 있어요. 그럴 수 있어요. 둘러앉은 사람 중 누군가 A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요. A의 어깨를 두드렸다.

A는 고개 들어 올려다보았다.

고맙습니다. A는 인사한 뒤에 지하공간을 빠져나왔다.

A는 걸었다.

A는 강 위의 다리를 건너 비오는 거리로 향했다.

A는 비오는 거리를 꿈이나 점성술만큼 믿었다.

A는 비오는 거리의 안개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A는 비오는 거리 아무 길바닥에 누웠다.

천둥번개가 연쇄적이었고 비바람이 거세었다. 입간판이 옆으로 쓰러지고, 정전되었다. 바닥분수가 솟구쳤고 거리에 비명과 웃음소리가 난무했다.

A는 누워 번개의 빛줄기를 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A는 여섯번 번개를 세었다.

A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A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A는 비 맞으며 오래 누워 있었다.

 

 

22

 

비오는 거리에 설치된 CCTV12대였다. 12대 모두 무용했고, 폐기하기로 결정되었다. 머지않아 비오는 거리에는 고감도 CCTV가 설치될 것이었다.

이제 안개와 어두움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고감도 CCTV의 몇 사례가 기사화되었다.

비오는 거리에 대한 소식은 열흘에 한번꼴로 TV에 방영됐다.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이야기, 신비한 체험담, 주의사항 같은 것들이 방송되었다. 과장된 광고에 비오는 거리가 차용되기도 했다.

비오는 거리에서 중대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비오는 거리를 주제로 정치인 둘, 사회학과 교수, 기상학과 교수, 통계학과 교수가 모여 두시간 동안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토론 끝에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루한 말들이 오가는 그 시간에도 비오는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오는 거리에만 비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전국에 연일 비가 그치지 않았다.

경선은 무릎을 질질 끌며 TV 앞으로 기어갔다. 경선은 전원을 껐다. 꺼진 브라운관에 경선의 얼굴이 비쳤다.

아이고, 암담해. 브라운관에 비친 자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경선은 고감도 CCTV가 설치되기 전에 비오는 거리에 가고 싶었다.

경선은 고감도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갈 거야. 갈 거야. 경선은 안주 없이 소주를 마셨다. 차고 달았다.

경선은 잠깐 사이에 한병을 다 비웠다.

경선은 소주를 비운 그 자리, 그 방바닥에 누웠다.

경선은 방바닥에서 개미 두마리를 발견했다.

바쁜가. 경선은 개미가 바쁜지 어떤지 생각해보았다.

어디서 왔을까. 아아, 잼. 잼 때문에 없던 개미가 생겨난 것이라고, 경선은 생각했다.

잼이 개미를 태어나게 할 리는 없다. 경선은 생각했다.

잼은 번거로워. 경선은 물티슈로 잼과 개미를 닦으려다가 빈 잔을 개미 두마리 위에 뒤집었다. 잔 속에 갇힌 개미 두마리는 각자 뱅글뱅글 돌았다.

경선은 잠들었다.

경선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경선의 방 안은 밤인지 낮인지 구분되지 않는 어두움이었다. 활짝 열린 창으로 거센 비바람이 그대로 들이닥쳤다. 경선의 방, 사방의 벽에 개미 그림자가 크게 드리워져 있었다. 경선은 개미를 찾아 방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방바닥에 개미는 없었다. 벽에 개미 그림자만 커다랗게 있었다. 그림자가 검고 검어서 경선은 겁이 났다. 경선은 벽지를 뜯기 시작했다. 필사적이었고, 사방이 모두 시멘트벽이 되었을 때, 잠에서 깨었다.

잠에서 깬 경선은 한숨을 쉬었다.

창밖은 새벽이었다.

엎어진 소주잔은 투명했다.

엎어진 소주잔 속에 개미 두마리는 없었다.

이게 뭐지. 경선은 꿈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뭐지. 오랜만에 자기 기분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했다.

경선에게는 비오는 거리로 가야겠다는 기분만이 있었다.

경선은 기분의 방향대로 가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선은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뒤에 흰색 민소매티와 청반바지를 입었다.

화장실 유리창이 흔들렸고, 캄캄했다.

경선은 지폐 몇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경선은 가진 것 중에 가장 가벼운 샌들을 신었다.

경선은 모두가 그러하듯 핸드폰과 지갑은 챙기지 않았다.

경선은 야광우비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23

 

비오는 거리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경선의 시뮬레이션은 순차적이었다.

집에서 나온다. 사거리로 향하는 길을 10분 걷는다. 사거리에서 길을 건넌다. 길을 건너면 바로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를 타고 열여덟 정거장을 지난다. 버스에서 내린다. 육교가 나온다. 육교를 올라 걷는다. 육교를 내려간다. 안개가 시작되면 거기서부터 비오는 거리이다.

경선은 비오는 거리로 가기 위해 새벽길을 걸었다. 아직 캄캄한 새벽이었다.

버스는 운행을 막 시작했을 것이다. 아마 첫차를 타게 될 것이라고, 경선은 생각했다.

경선은 걸었고, 사거리 신호등 앞에 다다랐을 때 신호는 빨간불이었다.

횡단보도의 건너편에 경선이 타야 할 버스가 멈춰 서 있었다. 타야 할 버스를 보자 경선은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자 건너편의 버스는 출발했다.

경선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경선은 12분 후에 다음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 여럿이 버스에 함께 탔다. 교복을 입지 않은 중년 여럿도 버스를 탔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경선은 버스 안에서 서 있어야 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끊임없이 떠들고 웃었다. 웃음소리는 가볍고 산뜻했다.

요즘 애들, 새벽부터 잘 웃네. 경선은 생각했다.

경선은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정거장을 지나칠수록 승객은 늘었다.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탑승하는 승객만이 있었다. 버스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고, 경선은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경선은 열한 정거장을 지나치는 동안 여고생들과 여고생 아닌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서 있었다. 버스는 아무렇게나 덜컹거렸다. 경선은 이리저리 휘청거렸고, 속이 메스꺼웠다. 경선의 입안에 쓰고 신 침이 모였다. 뱉고 싶었다. 감기가 오고 있거나, 멀미이거나, 어제 마신 소주의 영향일 것이었다.

경선은 선 채로 입안에 모인 침을 뱉었다. 경선이 침을 뱉자 버스가 멈췄고, 멈춘 그 정거장에서 승객의 절반이 내렸다. 경선은 빈자리에 앉았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사람의 온기로 의자가 미적지근했다. 경선은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 유리창이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렸다. 검게 어둡던 창밖이 잿빛으로 밝고 있었다. 버스 안의 에어컨은 최대로 가동되었고, 경선은 흘렸던 땀이 말라 한기를 느꼈다.

창밖의 풍경은 비와 가로등과 도로였다. 도로의 가로등이 순서대로 꺼졌다. 경선은 버스가 점점 느리게 움직인다고 느꼈다. 경선은 느리고 깊게 숨쉬었다. 경선은 곧 잠들었다.

경선은 두시간 동안 잤다.

경선은 꿈꾸지 않았다.

경선이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날은 조금 더 밝아 있었지만 여전히 해는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 밖은 회색이었다. 힘없는 빗줄기가 그어졌다. 창밖의 풍경은 규칙적으로 일그러졌다.

버스는 한번 순환하여 두시간 전 경선이 탔던 그 자리에 다시 멈췄다.

이게 뭐지, 경선은 생각해야 했다.

 

 

24

 

A는 비오는 거리에 새로운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그의 도구는 3단 접이식 삽이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캠핑용이었으며, 접혔을 때 크기는 가로 18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였다. 캠핑을 함께 떠나자는 여자에게 선물받은 삽이었다.

A는 삽을 선물로 받았을 때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했다.

A는 삽을 선물한 여자와 캠핑을 떠나지 않고 헤어졌다.

A는 삽을 비닐가방에 넣어 이동했다.

 

나는 이제 좀 알 것 같다. 내가 사는 방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나에 대한 내용 없이 나를 밀어붙이고 있다. 끝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닐 것이다. 먼 훗날에 나는 나에 대해 조금 알거나 아주 모르게 될 것이다. 내가 사는 동안에 우연은 없을 것이다. 내가 먹고 자고 숨쉬는 모든 순간이 물질이고 계산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선택은 의미가 없다. 나는 나를 사건으로 내던질 수 없다. 내 선택에 의미가 없기 때문에 나는 사건이 되지 못한다. 나는 땅을 팔 뿐이다. 비 맞고 누울 뿐이다. 비오는 거리에 파인 구덩이 중에 우연이 있을까. 나 말고도 누군가도 땅을 파고 있을 것이다. 셋, 넷 되는 일행이 땅을 파고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각자 나름일 것이다. 묻기 위해서, 덮기 위해서 삽을 사용하겠지. 나는 눕기 위해서 땅을 판다. 사실 내가 눕기 위한다는 것도 변명이다. 나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 땅을 파는 것이다. 땅을 팔 때에는 땅을 판다는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도 변명일 수 있다. 나는 땅을 파기 위해서 땅을 파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사실에 가장 가깝다. 하지만 이것도 완전한 사실은 아니다. 완전한 사실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약한 변명과 강한 변명이 반복될 뿐이다. 비오는 거리의 시작과 끝은 비와 안개이다. 사람들은 서로 가끔 알아볼 수 있고 대부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들이 서 있고, 누워 있고 점프하고 달린다. 사람들은 울거나 웃는다. 어두움과 안개를 사이에 두고 팔벌려뛰기를 한다.

 

 

25

 

경선은 버스에서 내려 까페로 갔다.

경선은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선배를 부르고 선배를 기다렸다.

선배는 경선의 연락을 받고 두시간 후 까페에 도착했다.

너 피곤해 보인다. 선배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제 소주를 마시고 잤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했어. 새벽에 깼어. 버스도 탔어. 버스가 만원이었는데, 버스가 다시 집 앞 정류장에 멈췄어. 경선은 다소 두서가 없었다.

무슨 꿈을 꿨는데? 선배는 물었다.

꿈에 개미가 나왔어. 개미는 보이지 않고 개미 그림자만 벽에 보였어. 개미를 죽이고 싶었는데 죽일 수가 없었어. 그림자가 크고 무시무시했어. 보기 싫어서 벽지만 열심히 뜯었어. 잠들기 전에 방바닥에서 개미를 봤어. 그래서 꿈에 개미가 나왔나봐. 경선은 고개를 흔들었다.

술을 작작 마셔. 선배가 말했다.

어. 작작 마셔야겠어. 경선이 말했다.

밥 먹자. 밥 먹으면 좀 나아질 거야.

선배와 경선은 밥을 먹기로 했다.

선배와 경선은 쌀국수 가게로 향했다.

경선은 걷는 동안 어지럽기도 했다. 식은땀이 흘렀고 숨이 가쁘기도 했다. 경선은 문득 자기 갈비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선배. 경선은 걷던 와중에 선배의 한쪽 팔을 잡아 멈춰 세웠다.

선배와 경선은 각각 다른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선배 여기 좀 봐. 경선은 선배 앞에서 한 팔을 들고 옆구리를 보였다.

선배 나 뼈가 휜 것 같아? 경선이 선배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선배가 말했다.

경선은 쌀국수 가게에 도착할 때까지 자기 갈비뼈에 대해서 생각하며 걸었다.

선배는 볶음면을, 경선은 국물이 있는 면을 주문했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아. 경선이 말했다.

뭐가? 선배가 경선에게 물었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한 것 같아. 경선이 말했다.

선배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고, 그녀들이 주문한 것들이 테이블에 올랐다.

경선과 선배는 먹기 시작했다.

선배, 비오는 거리에 가봤어? 경선이 선배에게 물었다.

비오는 거리? 폐쇄되지 않았어? 선배가 경선에게 되물었다.

폐쇄된 건 아니야. 이제 고감도 CCTV가 설치될 거래. 경선이 말했다.

그렇구나. 선배가 말했다. 선배는 비오는 거리에 관심이 없었다.

선배, 이거 다 먹고 나랑 비오는 거리에 갈래? 경선이 선배에게 제안했다.

아니. 선배는 거절했다.

경선아. 너 정신 차려. 네가 지금 비오는 거리 이야기할 때니? 비오는 거리는 십대 아이들이 노는 곳이야. 지나가는 세간의 가십이야. 너는 비오는 거리에 관심 가질 필요도 없고, 관심 가져서도 안돼. 너 같은 사람이 진짜 있기는 하구나. 비오는 거리에 가자는 말 너한테 지금 처음 들었어. 다른 사람한테 비오는 거리 같이 가자고 하지 마.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도 나뿐일 테고. 선배가 볶음면을 씹으며 경선에게 말했다.

알겠어. 경선이 선배에게 대답했다.

 

 

26

 

경선은 혼자 걸었다.

경선은 혼자 다리 위를 걸었다.

경선은 여름과 가을을 실감했다.

경선은 걷다가 숨이 찼다.

숨이 찬 이유는 무엇일까. 경선은 생각했다.

경선은 자기 옆구리를 만지며 걸었다. 뼈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경선은 난간 앞에 섰다.

경선은 강과 강에 어른거리는 빛을 내려다보았다.

경선은 흐르는 것과 흩어지는 것을 구분했다.

왜 비가 그치지 않을까.

비가 그치지 않아서 경선은 화가 났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경선은 무서웠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경선은 슬펐다.

경선은 비와 안개를 실감했지만 비와 안개를 구분하지 못했다.

저기 비가 있다.

저기 안개가 있다.

저기 미친놈이 있다.

경선은 A를 발견했다.

 

 

27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경선이 A에게 물었다.

A는 대답하지 않고 난간을 잡고 서서 강을 내려다보았다.

군대 갔다 왔어요? 경선이 물었다.

아니요. A는 한참 후에 대답했다.

면제된 거예요? 경선이 물었다.

아니요. A가 대답했다.

차에 치인 적 있어요? 경선이 물었다.

아니요. A가 대답했다.

기관지염 앓았나요?

아니요. A가 대답했다.

주의력 결핍이에요?

아니요. A가 대답했다.

그럼 뭐가 결핍됐어요?

A는 자기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다.

글쎄요. A는 글쎄요,라고 대답했다.

비타민D 결핍일 수 있어요. 저도 좀 그런 것 같아요. 해를 보지 않고 생활한 지 너무 오래됐어요. 경선이 말했다.

 

 

28

 

해는 보이지 않았다.

A는 고개 들어 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다.

하늘에 구름이 무겁고 힘겹게 이동했다.

구름이 움직이고 있나요? A가 경선에게 물었다.

네. 움직이고 있어요. 경선이 대답했다.

경선은 투명한 우산을 쓰고 있었다.

A는 연두색 반투명 우비를 입고 있었다.

경선과 A2미터 떨어져 서 있었다.

경선과 A는 난간에 두 손을 얹고 서서 강의 흐름을 내려다보았다.

경선과 A는 강에 대해서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A에게는 3단 접이식 삽이 있었고, 경선에게는 세장의 지폐가 있었다.

경선과 A는 핸드폰과 지갑이 없었고 안경을 쓰지 않았다.

경선과 A는 둘 다 시력이 뛰어났고, 시계가 없었다.

더 어두워지지 않고, 더 밝아지지 않아. 경선이 혼잣말했다.

경선은 지금 오후 일곱시쯤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A는 지금 오후 네시쯤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그렇게 말랐어요? 경선이 A에게 물었다.

원래 이렇게 말랐다. A는 속으로 말했다.

A는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태어났다. A의 엄마와, A의 이웃들은 붉은 낫으로 탯줄을 잘라야 아이가 무탈하게 자란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A는 무탈하기 위해 녹슨 낫으로 탯줄이 잘렸다. A는 태어나자마자 파상풍에 걸렸고, 태어나 백일이 되기 전에 죽을 고비를 네번 넘겼다. A는 네번 죽음에 직면했던 것, 그 고비들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는 자기의 과민함, 마른 체형, 심장의 열을 붉은 낫의 탓으로 돌렸다. A는 이런 이야기들을 옆에 서 있는 경선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난간을 붙잡고 서서 붉은 낫의 이미지를 떠올릴 뿐이었다.

밥은 먹었어요? 매끼마다 잘 먹어야 살도 붙어요. 경선이 말했다.

네. A가 대답했다.

왜 저 거리에만 저렇게 안개가 짙은지 알고 있어요? 경선이 난간 너머로 팔을 뻗어 비오는 거리를 가리켰다.

A는 대답하지 않았고, 경선은 백색안개의 원인에 대해서, 안개와 구름의 차이점에 대해서, 안개와 지면, 구름과 대기의 관계에 대해서 오래 이야기 했다. A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29

 

비오는 거리는 강과 가까웠다.

비오는 거리는 곧게 뻗어 유지되는 길이었다.

빗줄기는 약했고,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안개는 초록빛이었다.

비오는 거리 어딘가에는 주인 없는 차가 버려져 있었고, 차 안에 풀이 자라 있었다.

이건 꽤 비싼 차예요. 경선이 깨진 차창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말했다.

머리 빼세요. 위험해요. A가 경선의 뒤에서 말했다.

네. 이건 정말 비싼 차예요. 경선이 같은 말을 또 했다.

생각보다 쾌적하네요. 경선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비오는 거리에 다소 실망하기도 했다.

원래 이렇게 고요한가요? 경선이 A에게 물었다.

이것보다 더 고요할 수도 있어요. A가 경선에게 말했다.

A는 경선을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로 데려갔다.

경선은 그 얕은 구덩이에 누웠다.

정말 편안해요. 경선은 옆으로 누워 다리를 말아 안았고, 머리는 구덩이의 밖, 땅 위에 내놓았다.

A는 경선의 머리통 언저리에서 서성였다.

경선은 구덩이 속에서 온몸이 젖었다.

왜 사람들이 죽는지 알겠어요. 이러려고 죽는 건가봐요. 이렇게 편하고 싶어서. 경선이 키득거렸다.

가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여름인가봐요. 하나도 춥지 않아요. 경선은 말했다. 말하는 도중에 입안으로 빗물이 다 들어갔다.

여기서 잠들면 어떡하죠? 경선이 A에게 물었다.

잠들면 좋죠. A가 대답했다.

이름이 뭐예요? 경선이 구덩이 속에서 눈감은 채 누워 A에게 물었고,

A는 자기 이름을 알려주었다.

좋은 이름이네요. 뜻이 뭐예요? 경선은 물었다.

날카로운 지혜라는 뜻입니다. A가 대답했다.

 

 

30

 

비오는 거리에 가로등이 켜졌을 때, 경선과 A는 걷고 있었다.

경선과 A는 다섯번 거리를 왕복했다.

경선과 A는 천천히 걸었다.

경선과 A는 걷지 않는 것처럼 걸었고, 가끔은 아예 멈춰 서기도 했다.

공중전화와 폐차, 깨진 술병의 유리파편들이 길바닥에 즐비했고 빗줄기가 굵어졌을 때, 그것들은 각자 다른 소리를 내듯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이 나타날 거예요. A가 말했다.

야광우비 입은 사람들이요? 경선이 물었다.

네. A가 대답했다.

갑자기 나타날 거예요. 그리고 갑자기 사라질 거예요. 무서울 수도 있어요. 그 사람들도 우리를 갑자기 알아보고 우리를 무서워할 거예요. A가 말했다.

야광우비는 어디서 사는 거죠? 경선이 A에게 물었다.

아마 인터넷이거나 문구점일 것이라고, A가 대답했다.

문구점이라니요. 경선은 혼자 웃었다.

경선은 지금 밤 열시쯤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A는 지금 밤 아홉시쯤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1

 

경선과 A는 이제 몇번 거리를 왕복했는지 세지 않고 걸었다.

열네번이거나 스물한번째, 그들은 거리를 걷고, 뒤돌아 다시 걷고, 또 걸었다.

경선과 A는 아직 아무와도 부딪히지 않았다.

경선과 A는 손잡지 않고 걸었다.

경선과 A는 걷는 동안 손잡지 않고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터득했다.

경선은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면 따라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른 다음에는 꼭 찢어질 듯이 크게 웃었다.

엊그제는 혼자 중국집에 갔는데, 짬뽕에 건더기는 없고 국물만 한가득이었어요. 그래서 눈물이 났어요. 경선이 말했다.

어두움과 안개가 짙어질수록 고백은 사소해졌다.

윤주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냈는데, 아직 전화 걸지 않았습니다. 사실 할 말도 없거든요. A가 말했다.

같이 손잡고 44바퀴 돌아볼래요? 경선이 A에게 제안했다.

경선과 A는 마주 보고 서서 각오를 다졌다.

넘어지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각오와는 다르게 경선과 A20바퀴째 돌았을 때 길바닥에 쓰러졌다.

A는 어지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A는 땅바닥을 짚고 헛구역질했다.

많이 힘들어요? 반대로 돌면 덜 어지러울 텐데 반대로 돌아볼래요? 경선이 쓰러진 A에게 제안했고,

아니요. A는 마다했다.

저도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몰랐어요. 경선은 B44바퀴 도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경선과 A는 어쩌면 시공간을 초월할 수도 있었다.

A는 밝은 바다에 잠수해서 눈을 끔뻑거릴 수도 있었다.

경선은 백금이 아니라 로즈골드를 택할 수도 있었다.

경선과 A는 헤어지기 전에 서로를 알아볼 수도 있었다.

경선과 A는 함께 거리를 빠져나가 커피나 술을 마실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육교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경선이 A에게 물었다.

오셨던 곳으로 죽 걸어가면 됩니다. A가 대답했다.

경선은 다 젖은 몸으로 투명우산을 들고 있었다.

경선은 앞으로 걸었다.

A는 거리의 어느 구석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A는 비가 차갑다고 생각했고, 이제 가을이라고 생각했다.

차가워. 차가워.

A는 떨어지는 빗속에서 잠이 오기도 했다.

파랑 속에 행렬. 전신의 분홍.

A는 경선이 손가방의 주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비 맞고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