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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죽음과 야만을 넘어서, 봉인된 진실의 기록

 

 

심진경 沈眞卿

문학평론가. 평론집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떠도는 목소리들』 『여성과 문학의 탄생』 등이 있음. stariz87@naver.com

 

한수산 韓水山

194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경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월의 끝」이 당선되고 1973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모집에 『해빙기의 아침』이 입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유민』 『푸른 수첩』 『말 탄 자는 지나가다』 『모래 위의 집』 『4백년의 약속』 등이 있고, 그가 아끼는 작품에는 『거리의 악사』 『바다로 간 목마』도 있다. 『부초』로 제1회 오늘의 작가상, 「타인의 얼굴」로 제36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한수산의 소설 『군함도』(전2권, 창비 2016)는 일제강점기에 재일조선인 징용공들에게 지옥섬으로 불리던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軍艦島)를 배경으로 조선인 강제징용과 나가사끼 피폭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이다. 일제 식민지 말기 하시마 탄광으로 끌려간 징용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의 현장, 일본 패망 직전 가까스로 그곳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나가사끼 원폭 피폭의 참상, 그 지옥 같은 삶의 현장을 살았던 사람들의 면면이 생생하다. 우리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끔찍한 역사적 진실을 촘촘히 그려나가는 이 소설의 독서 경험은 전율과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소설의 한가운데 군함도라는 지옥이 있다. 군함도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지만 이미 그 자체가 주인공이기도 하다.

군함도란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철근 콘크리트 고층 건물과 섬을 둘러싼 높은 제방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군함처럼 보여 붙은 별명이다. 행정구역상 나가사끼 현 나가사끼 시에 소속되어 있는, 축구장 세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작은 섬이다. 1890년부터 미쯔비시(三菱) 사의 소유가 되어 탄광 산지로 본격 개발되었다. 전성기였던 1960년에는 총 5267명이 거주하여 1헥타르당 835명이라는 세계 최대의 인구밀도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석탄 산업이 내리막길을 걷던 1974년에 폐광된 후 지금까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남아 있다. 군함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군함도’는 실제 올라가는 데 2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좁은 섬입니다. 1990년대 초에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과 함께 들어갔을 때는 광부들이 살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옛날 잡지 같은 것들이요. 지하갱도는 탄광시설이 폐쇄될 때 파괴됐다고 합니다. 지금은 갱도로 들어가는 입구를 다 싹 시멘트로 발라버렸어요. 오래전 일본 신문기사를 보면 폐광 이후에는 범죄자들이 자주 들어갔다고 했는데, 지금은 아예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렇기도 하지만 관광선이 많이 드나들다보니 다른 배는 정박할 곳이 없어 접근이 어려워 그렇기도 합니다. 군함도 자체만으로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건축물이라 연구 대상감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오래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은 주로 폭파시켜 주저앉히기만 하지 자연상태에서 노후되는 과정을 연구한 자료가 별로 없다고 해요. 군함도는 엄밀히 말하면 떠돌이 생활을 하던 광부들을 정착시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복지시설들을 갖춘 완벽에 가까운 인공도시였습니다. 터가 없어 유치원을 아파트 옥상에 만든다든가 좁은 공간을 짜임새있게 꾸려갔다는 점에서 건축학적으로는 선구적인 면이 있겠죠.

불행한 것은 조선인 징용공들을 섬 구석 거의 수용소 시설처럼 만든 곳에 가둬놓고 고강도의 노동을 강요했다는 거죠. 지열이 30도를 오르내리는 곳에서 하루 15시간 이상 석탄 채굴을 합니다. 제가 취재를 위해 만난 생존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한 게 너무 배가 고팠다는 겁니다. 너무 배고파서 울었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매 맞아서 운 것은 그다음 얘기죠.

 

분명 하시마는 근대 문명의 실험장이자 근대 구조물의 인공적 집결지로서 의미있는 공간이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근대화의 산물이자 역사적 유물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하시마 탄광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징용공에게는 “캄캄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지옥문”(1143면)이 있는 ‘지옥섬’에 불과했다. 한수산의 『군함도』는 이렇듯 제국일본자본의 관점에서 찬란한 근대화의 산물로 받아들여져온 군함도를 거꾸로 식민조선노동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군함도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죽음과 비루한 생존, 특히 나가사끼 원폭투하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사실은 그동안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수산의 작업이 소중한 것은, 그것이 아무도 틀어막지 않은 입을 우리 스스로 틀어막고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동시에 지난 역사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지 못한 채 오늘을 사는 우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출간된 두권짜리 장편소설 『군함도』는 2003년에 다섯권으로 출간된 『까마귀』의 개작판(改作版)으로,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사이 2009년에 『군함도』라는 제목의 일본어 번역본이 먼저 출간되었다. 『까마귀』(2003), 일본어판 『군함도』(2009), 그리고 이번 『군함도』(2016)에 이르는 개작과정은 언뜻 생각해봐도 상당히 길고 험난했으리라. 작가에 따르면 이 소설의 시작은 무려 1989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한 작품에 매달린 셈이다. 1990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원폭 피해자와 징용공 출신 재일한국인 취재를 시작하면서 그는 말 그대로 이 소설에 ‘들려’ 있었다.

 

한수산

한수산

저는 일제강점기의 여러 문제에 대해 늦게야 눈을 뜹니다. 그때 가슴을 친 것이, ‘이렇게까지’ ‘이다지도’ 해결도 청산도 없이 35년의 과거가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아 있었단 말인가 하는 참담함이었지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비참함에 대한 기록들, 그 증언들도 저를 이 작품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 동력이었어요. 그러나 무엇보다 취재원으로 고난 가득했던 삶을 이야기해준 많은 분들을 생각할 때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 작가인 나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마음의 부채 같은 것이 떠나지 않고 늘 자리하고 있었지요.

악몽에 시달린 가장 쓰라린 기억은, 나가사끼에 취재를 가 있을 때인데 한밤에 꿈을 꾸다가 ‘신음소리’에 놀라 잠을 깹니다. 일본말로 우메끼(き)라고 하지요. 파도치는 방파제에서 바로 그 비명 같은 ‘우메끼’가 들렸던 겁니다.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방 안에는 어제 살펴보다가 지쳐서 잠든 여러 자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널려 있어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겪었던 참상에 대한 자료, 사진 들이었지요. 기도인지 소리없는 절규였는지 저는 못 쓰겠다 부르짖으며 흐느끼는데 눈물이 그치지를 않아요. 이 작품을 밀어놓고 지내자면 불쑥불쑥 군함도의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에 뒤섞인 비명소리, 풀숲이 흔들리며 들리는 신음소리에 잠을 깨곤 했습니다. 무언가에 포획되어 있는 것 같은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심진경

심진경

“무언가에 포획되어 있는 것 같은 그런 세월”이었다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이삼년 사이에 군함도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예능 프로그램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한국에서도 군함도는 더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함도와 군함도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 그 지옥섬에서 탈출했지만 결국에는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나가사끼에서 피폭되어 죽은, 혹은 피폭 이후 죽음 같은 삶을 견딘 피폭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낯설다. 한수산은 1989년 도일 직후 토오꾜오의 고서점에서 『원폭과 조선인』(原爆朝鮮人, 나가사끼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1982)이라는 책을 만나면서 『군함도』라는 소설의 밑그림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군함도』의 후반부를 차지하는 나가사끼 원폭투하의 참혹한 상황과 그러한 피폭의 전후 배경에 대한 서술은 사실 이 소설의 출발점이지 않았을까? 피폭된 재일조선인을 따라가다보니 결국 발견하게 된 곳, 그 낯설고 끔찍한 노동지옥이 군함도이지 않았을까? 군함도는 원폭으로 상징되는 전쟁의 비극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식민과 지배로 상징되는 힘의 논리가 원시적인 방식으로 압도했던 비현실적인 야만의 공간이었다.

하시마가 군함도가 되는 과정은 일차적으로는 자연이 인공으로 바뀌는 과정이지만, 이 자연과 인공의 관계는 겉보기만큼 단순하지 않다. 문명화되고 질서정연한 근대적 공간(아파트와 공장 등) 아래에는 온갖 병균이 들끓는 움막집 같은 징용노동자의 야만적인 공간이 웅크리고 있으며, 그 뒤에는 기형적으로 뒤틀린 노동자의 무력한 육체가 눌려 있다. 그리하여 제국의 근대화의 질서와 가치를 내장한 인공섬 군함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노예제를 통해서만 간신히 지탱되는 모양새가 된다. 작가는 소설 안에서 ‘무인도가 어떻게 낙원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이 질문은 이렇게 고쳐질 수 있다. ‘무인도는 어떻게 낙원(으로 위장된 무간도)이 되었는가.’ 낙원과 무간도 사이의 이 낙차야말로 작가에게 소설적 상상력은 물론 겉보기와는 다른 진실에 대한 탐구심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짐작된다. 질서정연한 인공낙원의 또다른 ‘지옥문’을 열면 펼쳐지는 무저갱 위에 세워진 잔인한 노동감옥. 제국과 자본이 결탁해서 만든 이 수용소야말로 군함도의 민낯이다.

낙원과 무간도의 저 아득한 낙차는 소설에서 공간적으로 망루와 갱도의 차이로 암시된다. 군함도의 망루가 제국 일본의 지배와 확장을 함축한 상승의 이미지를 집약한다면, 거꾸로 승강케이지의 낙하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갱도는 하강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망루가 높이 치솟은 만큼 갱도는 더욱 깊어진다. 그런 점에서 갱도는 뒤집어진 망루나 다름없다. 소설 속 다음 구절은 ‘군함도’의 망루와 갱도 간 반비례적 관계를 잘 보여준다.

 

밖에서 바라보면 하늘 높이 치솟은 시커먼 야구라(やぐら, 망루)와 안으로 들어가면 캄캄한 어둠 속을 승강케이지가 떨어져내려가는 지옥 같은 굴, 그 두가지는 지상에게 절망의 덩어리였다.(1162면)

 

그렇게 군함도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마지막 동네”, 즉 “땅끝”(2190면)이자 모든 곳이 ‘땅끝’이 되어버린 식민지 말기 제국의 비유적 축소판이다. 식민지의 치욕과 제국의 악랄함, 거기에 더해 자본의 영악함이 총집결된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군함도야말로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의 비참한 노동현실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식민지배적, 자본주의적, 국제 헤게모니적 역학관계가 복합적으로 뒤얽힌, 그 자체로 중층적인 문학적 공간이다.

 

처음 군함도에 들어갔을 때, 이건 소설을 위한 세트구나! 했어요. 소설적 재구성이 필요없는 현장을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없는 게 없어요. 파도가 때리는 방파제와 망망한 바다, 치솟은 아파트군(), 한구석에 처박힌 징용공 숙소 옆으로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게 학교가 있고, 방파제로 걸어나가면 바라보이는 유곽 건물터, 섬 맨 위에 돛처럼 서 있는 신사(神社) 그리고 멀리 바라보이지만 난류 때문에 헤엄쳐 건너기 힘들다는 바다 너머로 바라보이는 어촌. 취재를 위해 뛰어다니기는커녕 한참을 주저앉아 있을 정도였어요. 채탄시설은 폐광과 이도()를 거치며 다 파괴해버렸지만 지상의 구조물들은 남겨두었거든요.

군함도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뒷받침하던 대표적인 군수기업 미쯔비시가 만들고 지배하던 곳이었습니다. 피폭지 나가사끼도 미쯔비시의 ‘성 아래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미쯔비시의 자본 아래 놓여 있는 도시였고, 거기에는 조선소를 비롯하여 태평양전쟁에 사용된 어뢰의 80%를 만들었다는 미쯔비시 병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패전을 앞두고 공습을 피해 공장을 옮길 지하터널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군함도를 탈출한 주인공 우석을 투입시켜 일을 하게 구성하고 나자 제가 다른 어떤 소설적 가상공간을 만들 필요조차 없게 되더군요. 이미 군함도와 나가사끼는 ‘식민지의 치욕과 제국, 자본이 총집결된 역사적 공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 문학적 촉수가 이것을 포착했을 때 작품으로서의 기본 조건은 다 갖추어졌던 거지요. 그렇게 소도구 대도구가 다 있으니까 저는 그곳의 인간만을 그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군함도』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지상’이다. 그는 춘천고보 시절 상록회 사건(일종의 비밀결사 사상운동)에 연루되어 학교를 그만둔 전력이 있지만 현재는 양조장을 하는 친일파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장사꾼이다. 친일파 아버지 덕분에 안락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자각적인 존재이며, 친일파의 자식이면서도 징용에 끌려가게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식민지 조선의 복잡 미묘하고 모순적인 현실은 지상의 이런 모순 복합체적인 면모를 통해 효과적으로 부각되는데, 일본에 대한 그의 모호한 시선도 거기에 한몫을 보탠다. 그의 소학교 시절 ‘일본’은 단아하고 청초한 나까무라 에쯔꼬 선생으로 상징되었다면, 그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자각하면서부터 일본은 점점 “집안의 놋그릇 제기까지 걷어가는 총독부의 일본”으로 변모한다. 이렇듯 지상은 조선을 떠나기 전까지, 일본을 “나까무라의 일본과 총독부의 일본”이라는 ‘두개의 일본’으로 분열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다가 조선 징용공으로 강제동원되어 일본 탄광촌으로 끌려가면서부터 지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외부자의 시선, 즉 “물자가 되어 끌려가는 반도인”(이상 191면)의 시선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일본의 얼굴을 포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탐욕스러운 자본가의 모습이다.

이렇듯 소설 『군함도』에서 지상이 만나는 일본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본은 근대화된 야만적인 제국이면서 노동자의 피 한방울까지도 짜내는 냉혹한 자본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상은 동시에 일본인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예컨대 군함도의 노무관리사이자 기록자인 이시까와, 조선인 접대부인 금화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는 일본인 접대부 야스꼬, 지상을 도와준 에가미 부부와 그들의 딸 부부인 아끼꼬와 나까다 등의 휴머니스트가 바로 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대개 비뚤어진 군국적 애국주의에 세뇌되어 학살을 애국으로, 와전(瓦全)을 옥쇄(玉碎)로 전도하는 어리석은 전쟁광이거나 죽음 앞에서조차 일본과 비일본을 나누는 인종주의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어쩌면 이 각각의 얼굴 모두가 일본일 게다. 그런 점에서 『군함도』는 지금까지의 다른 어떤 소설들보다도 더 다양한 모습의 일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일본에서 책이 나온 후, 일본 문화인과 만나 나눈 이야기의 결론이 ‘국경을 넘어선 작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좋은 일본사람이 나오는 한국소설도 있단 말이냐?’ 하는 반응은 저를 좀 당황하게 하더군요. 이때까지 일본에 소개된 한국소설의 정형이 그랬던가봅니다.

 

지상이 만나는 다양한 일본의 모습은 지상을 비추는 (거꾸로 된) 거울상이 되는데, 이는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존재성을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확인하게 되는 지상의 정체성 변화와 맞물린다. 그는 소설 초반 군수노동자로 일본에 징용되면서 점차 인간에서 물자로, 개별적 존재에서 집단적 무더기로의 변화를 겪는다. 그러다가 지상은 소설 중반쯤 지옥섬을 탈출한 뒤 나가사끼 조선소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서 한번의 변화를 더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비개별적인 물자덩어리로 취급되던 지상은 점차 자신의 개별적 정체성을 회복한다. 그렇게 그는 식민지 규율권력에 복종하는 노동자에서 그러한 권력의 부당함에 저항하는 노동자로, 친일파 아버지 밑에서 식민지 현실을 외면해온 조선인에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해방을 염원하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이렇듯 자유를 완전히 억압당하는 타율적 상황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지상은 주체화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상을 비롯한 재일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은 식민지 규율권력에 의해 생산된 주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탈규율화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이 그렇게 식민 규범으로부터 탈주하여 ‘조선인’ ‘노동자’로서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군함도』의 주요한 서사 라인을 이룬다.

사실 지상은 억울하게 끌려온 가난하고 무지한 조선 징용공이라는 기존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벗어나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순응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틀로는 요약되기 어려운 식민지인의 복잡한 의식구조를 대변하는 동시에 일견 단선적일 수 있는 서사를 중층적으로 만들어 『군함도』라는 텍스트를 좀더 두텁게 만드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군함도』에 등장하는 대개의 인물들이 그러하다. 예컨대 소설 속 조선인 징용공들은 한편으로는 제국 일본에 의해 모든 것을 착취당하는 극단적인 피해자인 동시에,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투쟁가이면서 피폭된 일본인들을 도와주는 구조대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만 형상화되기 쉬운 일본인들을 좀더 다양하게 그려냄으로써 『군함도』는 서사 층위에서나 인물 층위에서 입체감과 깊이감을 획득할 수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은 단연 지상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친일파 아버지 밑에서 식민지 현실을 외면해온 조선인에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식민 해방을 염원하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은 이 소설의 작의(作意)이며 핵심입니다. 실제로 많은 한국문학이 일제강점기를 ‘순응과 저항으로 단순하게 이분화’해오지 않았나요? 이건 아니다 생각했고, 인간이나 사회를 그렇게 이분화하는 데 저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은 다른 환경에 서 있는, 친일파로 손가락질당하는 집안의 차남이면서도 항일독서운동인 상록회에도 관심을 가졌던 지상의 혼란스러운 의식을 바닥에 깔고 소설을 시작했습니다. 여선생 에쯔꼬의 흰 블라우스나 풍금으로 상징되는 환상이 하나하나 깨지면서 그의 의식이 어떻게 분열되고 그 자리에 민족으로서의 자각이나 각성이 자리잡는가를 그려내겠다는 의도였지요. 부산까지 실려 가면서 제일 먼저 깨닫는 것도 친일파로 살아온 자신의 집안 행태가 얼마나 많은 이웃 조선인에게 적의에 찬 상처를 주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가사끼 조선소에서 일어를 가르치게 되었을 때 왜 명령어만 가르치느냐고 묻는 하세에게 그가 말하지요. “반도 응징사(應徵士, ‘징용에 기쁘게 응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일본이 당시 징용공을 지칭한 용어)가 들을 수 있는 일본말은 전부가 명령어입니다.” 그렇게 지상은 조금씩 성장합니다. 바로 이러한 인물의 성장을 그리려 했고, 그것이 없다면 이 소설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편 지상의 부인인 서형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언뜻 소설의 구성상 불필요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에서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는 남자들을 끌어당기는 상징적 구심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원도 춘천에서 식민지적 일상을 영위하는 이 여성의 이야기가 중간중간 삽입되는 구성방식이 갖는 의미는 그런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소설에서 조선인 징용공들은 군함도를 벗어나서도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서형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조선의 일상은 끊임없이 조선의 밖에서 떠돌 수밖에 없는 그들의 귀향에 대한 절박한 소망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간접적인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 소설 전체에 걸쳐 그것은 조선 바깥으로의 원심력과 조선으로의 구심력 사이에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거기에는 서형의 전통적 조선 여인 이미지가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녀가 개성이 강한 캐릭터였다면 소설에서의 이런 긴장과 효과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에 관한 이야기 없이 징용공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할까 했지만, 강제 징용된 조선노동자들에 관해 쓰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비록 낙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이 돌아갈 곳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어찌 보면 그들에게 고향이란 ‘정처’인 거죠. 소설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도 서형이 지상을 기다리는 고향은 필요한 공간이었습니다.

서형은 전통적인 조선여성의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갓난아이를 업은 채 남편을 찾아 군함도까지 갔다 오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까마귀』에서 이 인물은 군함도에 가지 않아요. 그런데 『군함도』에서 그렇게 바꾼 건 제 장모님의 실제 경험담을 듣고 나서입니다. 전쟁 중에 장모께서는 남편이 백령도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무작정 아이를 들쳐업고 남편을 찾으러 가셨다는 거예요.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멀리 떠난 남자를 기다리면서 눈물 찍는 것이 한국여성이 아니라 애를 들쳐 업고라도 남편을 찾아 떠나는 것이 조선여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성을 남편을 찾으러 군함도로 떠나보낸 거죠.

 

하시마 조선 징용노동자들의 비참한 삶과 죽음은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과연 한국문학이 『군함도』에서처럼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문학적 자리를 내어준 적이 있었는지 질문하고 싶었다. 『군함도』는 이렇듯 거의 잊혔던 역사적 사실을 신뢰할 만한 자료와 꼼꼼한 현장 취재 및 생존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로서의 감동이 줄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소설은 그러한 과거 식민지 조선에 실재했던 비극을 허구적인 서사적 틀 안에서 구체적 상황을 통해 재현하고 역사로부터 소외된 개개인들의 삶을 부조(浮彫)함으로써 독자에게 역사적 통찰은 물론 개별 인물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면서 동시에 군함도를 둘러싼 현재의 논란을 환기시키는 실제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허구의 리얼리티 효과라고 해야 할까? 『군함도』를 단순히 역사소설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증언문학이라고 하기도, 르뽀문학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나에게 이 소설은 이 모든 장르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소설로 읽혔다. 특히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방식(관련 자료를 참조하거나 사건의 전후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등)과 창조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허구적 서술방식(인물의 형상화, 내적 갈등, 서사적 경로 등)을 교차시키는 이 작품 특유의 서사전략은 더더욱 이 소설을 기존의 특정 장르에 포섭하기를 주저하게 한다.

 

저는 처음부터 기존의 ‘증언문학’이나 ‘르뽀문학’을 지향하거나 아니면 이 두 장르가 결합된 형태의 어떤 문학도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역사소설이라든가 증언문학, 혹은 르뽀문학의 문법들을 반복하지는 말자는 생각은 가졌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제게도 미지수였지만요.

‘육체가 하는 일에, 영혼아 네 몸을 맡겨라’ 그러면서 마지막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몸이 졸리면 자고 몸이 깨어나면 일하자, 밥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인간에게 세끼를 먹도록 했더냐. 배고프면 먹고 식욕 없으면 그냥 넘기자, 그렇게 살았지요. 그러니까 새벽 한두시에도 깨어나 일하러 작업실로 가고, 어떨 때는 다섯시에 일하러 갔다가 열두시쯤 돌아오고 정신이 흐리고 피곤하면 하루종일 자고. 몸의 리듬에 정신을 맡겼어요. 그때마다 일을 시작하고 또 끝내면서 ‘작가 노트’라는 것에 몇줄씩 앞으로 쓸 소설의 방향이나 인물의 변화, 내적 갈등 등을 구체적으로 대사와 함께 적어놓곤 했는데, 초고를 끝내고 보니 그 방향과는 아주 다르게, 어떤 것은 정반대로 써놓은 경우가 참 많더군요.

소설을 쓰다보면 특히 장편의 경우 때때로 겪는 일인데, 내가 이렇게 쓰려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써놓고 보면 아주 다른 모습이 이루어져 있을 때가 있어요. 참 신비한 순간이지요. 그럴 때면 생각하지요. ‘아, 글쓰기의 신()이 날개로 살짝 감싸고 가셨나보다.’ 이번 작업에서도 그런 순간을 많이 느꼈습니다. 쓰기의 신이 자판을 두드리는 손을 조금씩 틀어주고 가셨구나 생각했지요. 제가 쓴 게 아니라 ‘쓰기의 신’이 도와주신 거라고. 의도적으로, 벗어나면 안된다고 다잡고 또 다잡은 건 어떤 역사적 사실 등 모든 자료는 인물의 내적 갈등에 맞추어야 하고 그것이 어떤 동인(動因)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지요.

 

분명 『군함도』는 증언문학도 르뽀문학도 아니다. 그럼에도 소설 결말부에서 우리는 증언자 역할을 맡은 두명의 등장인물을 만날 수 있다. 첫번째 증언자는 바로 하시마 탄광의 노무관리사인 이시까와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자신이 그동안 해온 일들을 기록한 공책을 다시 한번 살피는데, 흥미롭게도 그 공책의 겉장에 쓴 제목이 ‘조선인 광부 유입사’다. 비록 이 공책이 공식적 기록물은 아니지만 이시까와의 업무와 직책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이 기록은 조선인 광부의 유입과 현황 등에 대한 기록물의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두번째 증언자는 지상과 마찬가지로 군함도를 탈출한 뒤 나가사끼의 지하터널 공사 일을 하다가 피폭되어 죽은 우석이다. 사실 기록자 혹은 증언자로서 우석의 소설 내 위상은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소설에서 작가는 우석이 무언가를 기록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작가는 죽은 우석의 보따리와 공책을 가지고 조선으로 떠나는 이필의 “그 친구가 일기를 다 적었데예. 어디선가 만나지 않겄십니까. 좋은 시절 오모 그때 함께 읽어보며 옛말해야지예. 좋은 친구였는데. 우리한테 희망이었다 아입니까.”(2470면)라는 진술을 통해 우석이 군함도와 나가사끼에서 조선인 징용공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 기록해왔음을 은연중에 밝힌다. 그러나 우석의 노트는 그 내용이 개봉되기도 전에 소설의 종결로 인해 영원히 침묵 속에 봉인된다. 그의 증언은 결코 발화되지 못한 채 은폐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사실은 『군함도』야말로 그의 발화되지 못한 증언의 상상적 재구성이 아닐까?

 

이필이 우석의 노트를 가지고 조선으로 가는 마지막 장면은 우석의 증언되지 못한 증언, 기록되지 못한 기록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일본으로 끌려와서 매 맞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당시 조선인 징용노동자는 피식민 국가의 국민이자 노동자로서, 전쟁 말기 급박한 일본의 대외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지배국가 일본의 전쟁과 그 패배를 떠받드는 최하위계층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일본은 내선일체를 주장하면서도 조선인을 결코 일본인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특히 『군함도』에 따르면, 재일조선인 징용노동자는 미쯔비시와 일본의 이익을 창출하거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배체제의 하중을 온몸으로 견디면서도 비가시적이고 비실재적 존재로만 취급되었다. 그런 점에서 군함도에 강제 징용, 수용되어 노동을 강요받았던 재일노동자들은 일종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즉 사법적 권역의 바깥에 놓인 벌거벗은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수용소적 존재인 셈이다. 이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제국 일본과 전범 기업 미쯔비시는 이들을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라 에너지가 소진되면 언제든지 폐기처분할 수 있는 쓰레기건전지이자 재판에 회부되지 않는 존재인 호모 사케르로 다룬다. 일본 정부와 미쯔비시 사의 초법적 태도는 그런 맥락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내적 설득력과 정당성을 획득하는데, 왜냐하면 어찌됐든 조선인 강제징용공은 법 테두리 바깥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 속 “인권의 사각지대”(1130면)라는 표현은 이런 정황을 잘 설명해준다. 다음 구절 또한 마찬가지다.

 

전투기, 전함에서부터 어뢰까지 부족한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공장을 가동할 수 있는 양질의 석탄이었다. 나날이 불리해지는 전황을 뒤집어보려는 전략은 도미노처럼 육해군 본부에서 군수공장으로, 거기서 다시 탄광으로, 그리고 광부들에게 그 짐이 넘어왔다.(1168~69면)

 

이렇듯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은 가시적으로는(사실은 거짓으로) 내선일체 담론을 통해 천황의 자식이자 제국 일본의 국민으로 호명되면서도, 비가시적으로는(사실은 실제로) 침략전쟁에 동원된 원료에 불과했다. 즉 그들은 일본이라는 혹은 미쯔비시라는 “공장을 가동할 수 있는 양질의 석탄”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의 구절은 제국 일본의 연료에 불과했던 당시 징용조선인의 상황을 더할 수 없이 리얼하게 재현한다.

 

이 소설에서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말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게 사실이란 말이냐?’라고 생각하실 분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인물과 구성은 허구이고 그것을 엮어낸 모든 에피소드는 사실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소설 『군함도』에서 어느 것이 사실이고 허구인가를 나누는 것은 저로서는 무의미합니다. 사실과 허구가 융합되어 있다고 할까요. 어느 에피소드 하나도 제 상상만으로 만든 것은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한 예로 갱내에서 사고로 죽은 젊은 징용공 창수의 시신을 밖으로 올리는 장면이 있지요. 그때 창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올라간다! 창수야, 올라가자!” 하면서 시신을 데리고 올라오는데, 이 장면도 일본어 탄광사전에서 규슈지역의 탄광에 이런 오랜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 소설화한 것이지요. 장마철이면 기승을 부리는 ‘다니’라는 벌레 이야기나, 징용공 숙소의 천장에서 잠자는 징용공 얼굴에 쥐가 떨어지는 장면도 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피폭 장면과 부상자에 대한 이야기는 수많은 체험 자료와 상황을 놓고 200개쯤을 뽑아낸 후 그 가운데서 소설의 상황에 맞는 것을 골라내 조합, 배치했지요. 이때 일본어가 가능한 딸과 아내에게 번역을 부탁했는데, 그 상황이 너무 끔찍하다보니 ‘도저히 못하겠다’ ‘밥을 못 먹겠다’라고 하더군요.

오늘이 아닌 시대를 그려내려면 철저하게 기록이나 자료에 의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없고 그래서는 어떤 감동을 끌어낼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군함도』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나가사끼를 초토화한 원자폭탄의 대폭발과 그 피폭의 아비규환을 생생하게 묘사한 후반부다. 피폭 이후 살이 타고 뼈가 녹는 등 형언할 수 없는 극한적 상황 아래 놓인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와 평범한 일본인 들의 죽음에 대한 극사실주의적 묘사는 가히 이 소설의 압권이다. 이들의 육체가 처참하게 파괴되는 현장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마치 언어가 사라지고 그 현장이 그 자체로 통째로 육박해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한편으로 소설 속에서 이 대폭발은 서사 안에 흩어져 있던 인물들을 잡아당기는 서사적 구심점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서사가 진행되면서 차곡차곡 쌓아왔던 각각의 비극적 사연들을 압축해 그 비극성을 더욱 강렬하게 하기도 한다. 거기에 몇몇 일본인 피폭자의 사연(특히 아끼꼬와 나까다 부부의 주변인물들)이 더해지면서 소설의 초반에 설정되었던 ‘식민지 조선/제국 일본’, ‘노동자 조선/자본가 일본’, ‘피해자 조선/가해자 일본’이라는 대립구도는 반전과 전도를 겪으면서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그래서 독자로서 일본의 패전과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단순할 수 없다. 양국 간의 갈등과 대립은 미국이라는 또다른 침략자와 학살자의 등장으로 좀더 입체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생존한 조선인 징용공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구호활동을 벌임으로써 기존의 제국/식민의 경계를 다시 긋는 일이 멀고 큰 일이 아님을 증거한다. 반면에 죽는 순간까지도 철저하게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던 아오모리와 오까노의 사례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순종적 주체를 생산하는지, 그러한 주체에 의해 실연되는 지배논리란 얼마나 허구적이면서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국적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피폭의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식민/제국의 위계적 질서는 그렇게 해체되면서 새롭게 조정된다.

그런 점에서 원폭투하는 분명 끔찍한 비극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기도 하지 않을까? “풀과 꽃이 피어나고 있는 폐허, 나가사끼를 뒤로하고 지상은 고향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2470면)라는 소설의 결말은 그런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마지막 장면은 작가가 지옥도를 연상케 하는 피폭의 참상 속에서도 모종의 가능성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을 준다. 피폭과 피폭 이후의 또다른 서사적 가능성을 암시하는 장면을 마지막에 배치하면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실제로 나가사끼에서는 피폭 후에 여러가지 기상이변과 생태계 변화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느닷없이 계절도 아닌 꽃과 풀이 자라기 시작한 겁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것을 배치했던 것도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만들어낸 인류 최악의 재앙을 겪으면서, 그 이후의 삶이 원폭투하 이전과는 선을 긋고 변화해야 한다는 각성을 가지기 원했던 뜻을 담고 싶었던 겁니다.

소설에서 피폭 이후 생존한 조선인 징용공들이 국적을 불문하고 구호활동에 나서는데, 이 장면을 쓸 수 있게 한 단초는 나가사끼 조선소의 일본인 간부가 쓴 증언이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이 펴낸 『원폭전후』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놓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구호활동에 주도적으로 나섰던 젊은 조선인 응징사들의 활동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복받치더군요. ‘그랬구나. 조선인 징용공들은 마지막까지 인간의 길을 택했구나’ 하는 감동이었지요. 그 장면은 문학적 설정이면서 실제 상황이었기도 합니다. 인간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창조적으로 재생된다는 저의 이 믿음을 육화(肉化, incarnation)하고 싶었습니다.

『군함도』는 우리 선조의 고난과 통한의 역사를 그린, 과거를 이야기하는 역사소설이 아닙니다. 『군함도』에는 무수한 오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죄악까지 말이지요. 그런 이유로 저는 『군함도』가 단순히 우리 선조의 고난과 통한의 역사를 그린 역사소설로만 읽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군함도』는 분명 일차적으로는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징용공의 지옥 같았던 삶과 죽음에 대해 고발하고 증언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모든 좋은 소설이 그렇듯이, 이 소설 또한 작가의 말대로 은폐된 역사적 진실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온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소설은 단순한 역사증언소설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오늘의 우리 삶에 대한 절박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인터뷰 말미에 작가가 간곡히 덧붙인 당부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젊은 독자들에게는 읽어내기 힘든 이야기일 수 있겠습니다만, 미해결의 늪에 잠겨 있는 한일 과거사의 해결과 청산에 젊은 감성과 치열한 지성으로 가열차게 나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우리의 역사가 분노를 넘어 용서의 지평을 열 수 있기를 꿈꿉니다.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젊은 독자들이 ‘과거의 진실’에 눈뜨고 그것을 기억하면서 ‘내일의 삶과 역사’에 대한 첫걸음을 내디뎌주신다면, 작가로서 더할 수 없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