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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희중 李熙中
1960년 경남 밀양 출생. 1987년 『광주일보』 및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푸른 비상구』 『참 오래 쓴 가위』 등이 있음. kokul@paran.com
새 신의 감각
차마 맨땅에 내려놓을 수 없어
방안에서만 신어보다가
이튿날 아침 집을 나서서도
혼자 딴 나라를 걷지
진 데 딛지 않고
버스 안에서는 사람들의 헌 신을 경계하고
주저앉아 먹는 식당에 들어설 때는
손 타지 않게
벗어둘 곳도 세심하게 고르며
이번에는 뒤축 꺾지 않겠다고
나쁜 버릇 들이지 않겠다고
한번 잘해보겠다고
각오를 다지건만
언제부터던가
입성 가운데 맨 아래에서
무른 몸과 날선 세상이,
마른 몸과 물든 세상이 맞닿지 않게 하는 일이
고작 그것의 쓸모일 뿐임을 다시 용인하게 되는 때는
세상 더러움이 거기 다 뭉쳐 있는 양
이제 손대는 것조차 꺼리지
닭장 증후군
어려서 소읍 변두리 한물간 양계 마을에 잠시 산 적이 있습니다. 세칸 초가를 에두른 탱자나무 울타리 안 한켠에 네댓평 닭장 자리가 있었답니다. 놀리기 싫으셨는지 돈이 아쉬우셨는지 아니면 심심하셨는지, 어느 봄날 부모님께서는 병아리를 한 쉰마리 들여놓으셨지요. 고것들 자라서 낳은 따끈한 알을 날로 깨어먹던 맛이 가끔 생각납니다. 그게 비릿하던가, 고소하던가.
닭들은 종일 걸어다니며 무언가를 쪼아보는 게 일인데요, 간혹 똥구멍이 헌 닭이 있으면 다른 놈들이 하얀 바탕에 그 빨간 무엇을 무심히 툭, 쪼는 겁니다. 똥구멍의 상처는 조금씩 더 커지고 일삼아 따라다니며 쪼아대는 놈들까지 생겨나 표지 아닌 표지를 지닌 닭은 결국 내장을 다 쏟아내고 죽곤 했지요.
양계 마을을 떠난 지 수십년이 되었고 생달걀 따위는 이제 먹지 않는 세상이 되었고 흰 닭이 낳는 흰 달걀은 구경하기도 어렵게 되었는데도, 대수롭지 않은 구별 때문에 동무들에게 노리개가 되고 이윽고 먹이가 되던 닭장 속 참사가 가끔 새롭습니다. 어어, 여기가 닭장? 물론 약점이 있으면 도태되는 것이 야생의 섭리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