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심사경위
2016년 6월 10일 열린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에서는 권여선 김영찬 이영광 한기욱을 제34회 신동엽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 신동엽문학상은 등단 10년 이하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3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하며, 시·소설·평론 부문에서 2인에게 수상한다. 추천위원(창비의 시와 소설 분야 기획위원)들이 올린 12권에 후보에 심사위원 추천 1권(황인찬 시집)이 더해져 아래와 같이 총 13권이 심사대상이 되었다.
신미나 『싱고,라고 불렀다』, 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유계영 『온갖 것들의 낮』, 김현 『글로리홀』, 유진목 『연애의 책』,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황인찬 『희지의 세계』(이상 시), 금희 『세상에 없는 나의 집』, 김이설 『오늘처럼 고요히』, 최정화 『지극히 내성적인』, 최은미 『목련정전』, 정용준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김려령 『샹들리에』(이상 소설).
심사위원들은 7월 22일 모임에서 이상의 13권을 검토하면서 신미나 시집, 안희연 시집, 유진목 시집, 금희 소설집, 최정화 소설집, 최은미 소설집, 김려령 소설집으로 대상을 압축하고 장시간 토론을 펼쳤다. 그 결과 절실한 자기성찰의 시선에 공동체적 사유와 감각을 담아낸 안희연 시집과 경계인의 자리에서 소설의 고전적 미학을 펼쳐 보이는 금희 소설집을 제34회 신동엽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권여선(權汝宣)_ 소설가
이번 여름엔 유진목의 『연애의 책』과 연애를 했다. 언어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솜씨, 정서와 풍경을 사뿐하게 채취하는 감각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 뒤에 은근하고 침착하게 드리운 그늘이 좋았다. 이 시인의 시를 더 읽고 싶어서 이번에는 기꺼이 기다리는 데 합의했지만, 나의 매혹을 고백하는 건 미룰 수 없다. 기다립니다. 기다려요. 안희연의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는 첫시집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균형감이 있고 야무졌다. 그래서 위험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읽을수록 이상한 슬픔의 무늬가 그려졌고, 가만히 잠들라는 명령에도 가만히 울며 더 멀리 갔다 더 많이 흔들리고 돌아온 균형추의 진동이 느껴졌다. 야무져 보인 것은 다만 이를 악물었기 때문. 그 앙다문 실선 같은 단층 사이에 나의 슬픔도, 당신의 슬픔도 끼어 있다. 연루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 곁으로 선뜻 다가서기로 했다. 수많은 축하를 안고.
최은미의 『목련정전』은 정말 공이 많이 든 소설들의 탑이다. 단편 하나하나에 이토록 독한 정념과 치밀한 설계를 담아내다니, 감탄과 고마움이 교차한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기가 더 아깝고 아쉽지만, 쉽게 무너질 세계가 아니어서 든든하다. 금희의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이 한국소설에서 매우 특별한 성취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중요한 점은 그 성취가 조선족 작가라는 특이성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라는 데 있다. 금희의 소설을 읽는 것은 시간의 대륙을 통과하는 일, 망각된 불온한 과거와 파묻혀 잠복한 현재와 휙 스쳐지나가는 미래를 다층적으로 조우하는 일이다. 두께와 규모와 경계의 달라짐을 경험하는 일이다. 「세상에 없는 나의 집」과 「봉인된 노래」도 뭉클한 수작이지만, 개인적으로 「옥화」와 「월광무」를 만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 달려왔는데 그것을 지나쳐 달려갔음을 깨닫게 해준, 내 조급한 소설적 관성에 든든한 고삐를 매어준 독서였다. 금희가 구축한 두터운 현실감은, 그 속에 실핏줄처럼 정밀하게 얽혀 있는 온정과 비정의 리얼리티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그 실핏줄이 어느새 우리 내부로 흘러들어와 우리의 윤리를 시험하고 교란한다. 이것이 문학이다. 축하보다 더 큰 격려와 신뢰를 보낸다.
김영찬(金永贊)_ 문학평론가
신동엽문학상의 최종후보로 추천된 작품들이 올해는 유난히 많았다. 그만큼 오늘의 한국문학을 지탱하는 문학적 개성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빛깔로 넓어지고 또 그러면서 제가끔 설득력있는 내실을 키워가는 중임을 여실히 방증하는 것이겠다. 주어진 것과의 부단한 싸움이 신동엽 문학정신의 요체라 할 수 있다면, 그 정신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 예술적으로도 가장 신뢰할 만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하여 최종후보로 오른 작품들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성취는 그것대로 평가할 만한 것이나, 그중에서도 금희의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과 안희연의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에 특히 마음이 기울었다.
금희의 소설은 중국 조선족이라는 경계인의 자리에서 부단히 그 경계와 정체를 의식화하고 문제삼는다. 그러면서 두꺼운 역사적 지층의 무게와 밀려드는 자본주의 근대의 파장을 고스란히 떠안고 일상을 살아가는 중국 조선인들의 삶과 의식의 면면을 생생하고 실감나게 그려놓는다. 오늘의 한국문학이 잊어버린, 혹은 낡은 수법이라 오해하고 밀쳐놓았던 소설의 고전적 미덕을 새로운 질감과 정서를 입혀 아무렇지 않게 살려내는 작가의 감각은 언뜻 소박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소박과 세련의 아슬아슬한 균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금희 소설의 진중한 현실인식과 성찰적 문제제기가 한국소설의 시야 확장에 중요한 몫을 보태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안희연의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는 시인의 간곡한 ‘시적 진심’이 읽는 이의 마음으로 번져오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흔치 않은 시집이다. 자아의 안쪽으로 기울어가는 언어와 정서의 흐름을 조용히 바깥으로 돌려 끌어당기는 의식적 지향성, 그 불가피하면서도 윤리적인 균형을 끌어안는 시인의 순정한 목소리가 이 시집 전체의 애틋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실패가 내정된 세계 속에서 연약하고 무력한 시인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고 또 어떤 시를 써야 하며 쓸 수밖에 없는가, 라는 절실한 자기성찰의 시선이 그 긴장을 관통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세월호의 아이들을 시 쓰기에 대한 성찰의 한가운데로 불러들인 시 「월요일에 죽은 아이들」 또한 세월호를 제재로 씌어진 가장 감동적인 시 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몇몇 시에서 보이는 다소간의 투박함조차도 외려 미래의 가능성의 징표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 시인의 아름다운 시적 진심에 나는 진심으로 설득당했다.
두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는 마음을 전하며 축하인사를 보낸다.
이영광(李永光)_ 시인
유진목의 시집은 연시를 주조로 하고 가족사와 성장담을 담은 시편들을 곁들이고 있었다. 연시들은, 사랑에 빠진 여성 화자를 등장시킨 한국시들이 흔히 회피해온 몸의 반응을 섬세하고 뜨겁게 행간에 새긴다. 미래의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 분투하는 에로스는 비린데도 상한 느낌이 없다. 황진이가 현대에 온다면 이런 시를 쓰지 않을까. 신미나의 시집에는 성장기의 소외 체험, 사랑과 이별, 비근한 일상을 다룬 시편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제는 낡은 것이 된 농경적 정서가 새로운 감각의 옷을 입고 살아난다. 이미지의 예리한 활용이 불러오는 정서적 울림이 선연하고, 오래된 전통에서 길어올린 가락이 있다. 나는 이 두 시집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이들의 체험과 관심의 지평이 좀더 확장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안희연의 시편들은 공동체의 위기와 동료 인간들의 고통에 대한 기록이면서, 그 작업의 어려움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녀의 세계가 알레고리의 성격을 띤 것도 지금 여기의 비극적 현실과 관련이 있고, 행간의 독해가 쉽지 않은 것 또한 바로 이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막힌 자리에서 오래 견디려 한 태도에 기인할 것이다. 현실에는 길이 없다는 심경을 이따금 내비치고 있으나, 이 시집의 비현실적 포인트들은 예외없이 현실의 환부를 겨누고 있다. 사실성이 약한 묘사나 논리를 벗어난 진술들 자체가 현실의 부조리를 정확히 가격하는 것이다. 이 목소리는 타자의 고통과 더불어 앓는 자의 것이지만, 그전에 벌써 그녀의 시적 개인성이기도 하다. 몽상의 기록에서 악몽과의 싸움으로 움직여간 시적 변화의 궤적에서 이를 확인하게 된다.
최정화의 소설은 주로 정신이나 신체에 결함을 가진 인물들의 삶을 추적하는데, 나로서는 작품의 탄탄한 구성에 더해 이 인물들의 심리적 움직임에 대한 세심한 묘사가 흥미로웠다. 극적인 성격 변화를 보이는 「홍로」의 주인공이나, 「대머리」의 주인공처럼 악인에 가까운 인물을 그릴 때 작가의 필치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듯하다. 작품들의 ‘열린 결말’에 대해서는 호오가 나뉠 것도 같다.
금희의 소설은 진지하고 성찰적이다.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라 할까, 이주한 곳에서 다시 이주하기가 인물들의 삶의 조건이 된다. 중국 대륙의 급격한 자본주의화와 함께 조선족 사회, 중국, 한국, 북한이라는 공간의 경계들이 지워지고 겹쳐지는 시대에, 생존과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인간 군상들의 고단하고 혼란스런 삶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조선족의 정체성을 묻는 일과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작품을 읽는 일은 즐겁지만 심사에는 고심이 따른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지점에서는 상의 취지와 상이 기리는 분의 문학세계를 참조의 거울로 삼았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한기욱(韓基煜)_ 문학평론가
소설 부문에서 특별히 주목한 작품은 김려령의 『샹들리에』와 금희의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이었다. 김려령의 소설들, 특히 「이어폰」은 벼랑 끝에 내몰린 우리 청소년들의 삶을 생생하게 불러낸다. 그의 작품은 ‘청소년문학’으로 한정되기 쉽지만 그 특유의 생동하는 언어와 대범한 톤, 발 빠른 화법 등 소설 서사의 혁신을 수반하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지점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중국 조선족 작가 금희의 소설들, 특히 「봉인된 노래」 「옥화」 「월광무」 역시 전위적인 예술적 실험은 없을지언정 조선족 사람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성실한 묘사와 구체적 개인에 대한 깊은 관심, 그리고 시대의 새로움을 감지하는 감수성이 결합되어 상투적인 세태묘사를 훌쩍 뛰어넘는다. 가령, 「옥화」는 한 ‘밉상스러운’ 탈북여성에 대한 조선족 사회의 포용력 한계를 중심 주제로 삼되 그것을 조선족 교포에 대한 한국사회의 따돌림과 겹쳐서 성찰함으로써 “자기편이 아닌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함”을 구체적이고 복합적으로 사유하게 만든다. 두 작가 중 어느 쪽이 수상하더라도 좋았기에 다른 심사위원들이 후자를 수상자로 택할 때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다.
시 부문에서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은 유진목의 『연애의 책』과 안희연의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이다. 유진목은 연애시의 달인이라 할 만한데, 그의 빼어난 시편들은 인간관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어떤 표현도 닿지 않는 허망함을 딛고 다시 일어나면서 벼려낸 듯한 섬세하고 처연한 감각이 빛난다. 평범하게 들리는 “당신이 얼마나 좋은지 당신은 모른다”(「소설」) 같은 어구에도 살아 있는 관계에 대한 애틋함이 배어 있다. 다만 그의 시편은 ‘살아 있는 관계’의 감각이 더없이 진정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한편 그것을 연애의 두 당사자를 넘어 공동체의 지평으로 확장하는 데는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이 지점에서 안희연의 시는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의미심장해진다. 그의 시 세계는 개별적 주체의 경계가 안정된 정체를 구성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허물어져 있지만 다른 한편 타자와의 관계를 필수적으로 요청하기도 한다. 어쩌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주체인 나를 매번 새롭게 구성하는 세계라고 하겠다. 가령 그의 시적 주체에게 “단 한순간이라도 나의 최대치가 되어보는 일”(「러시안 룰렛」)이란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한 사람을 완성하는 일”(「입체 안경」)이지만 그 주체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일초에 하나씩/새로운 옆을 만든다”(「백색 공간」). 안희연의 시에서 주체의 찢김과 와해, 재구성의 고통스런 과정이 다소 과도하게 투영된 점도 있지만 ‘새로운 옆’이 매순간 생성되는 것에 주목하고 ‘죽은 아이들’이 정처없이 부유하는 이 불길하고 불안한 우리 시대를 함께 감당하려는 공감력이 남다르다고 느껴진다. 이런 공동체적 사유와 감각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수상자로 택하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수상소감
돌려드리러 가는 길
안희연 安姬燕
1986년 경기 성남에서 태어났다.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가 있다.
할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중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까주신 삶은 계란을 받아먹으며, 때아닌 소풍에 신이 나서, 모처럼 천진하게 웃고 까불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있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할머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몸이 물컹물컹한 피 주머니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왜 그래. 어디 아파?” 너무 놀라 할머니를 끌어안았는데 피 주머니가 터져 바닥이 흥건했습니다. 저는 피 묻은 손을 들여다보며 엉엉 울다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이튿날, 꾸었던 꿈입니다.
오래 먹먹했습니다. 돌아가신 지 2년이 가까워오지만 할머니가 꿈에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저희 할머니는 백수(白壽)를 사셨는데 돌아가시기 전 20년 동안은 눈도 멀고 귀도 먼 상태이셨어요. 제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주 깊고 캄캄한 곳에 계셨던 것이지요.
이왕 오실 거면 좋은 것 좀 주고 가시지 왜 하필 피 묻은 손을 주고 가신 걸까요. 따져묻고 싶어도 할머니를 만나러 갈 자신이 없습니다. 할머니는 아무리 걸어도 다다를 수 없는 곳에 계시니까, 그곳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춥고 외로울지 아니까, 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쉬우니까 덜 아프니까……
그런데 손에 남은 피는 어째야 할까요. 함부로 흘려버릴 수도, 물로 씻을 수도 없는 할머니의 몸인데……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왕좌왕 울고불고 하더라도 가야지요.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가야지요.
제게 할머니는 시의 다른 이름일 겁니다. 시집을 묶고 내내 공허했는데 어떤 마음들은 뒤늦게 도착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운 길 어렵게 가라고 뿌려주신 햇살 한줌,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영원한 슬픔 속에서도 해가 나고 싹이 난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요.
수상소감
‘껍데기’의 공상
금희 錦姬
1979년 중국 길림성의 작은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연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007년 『연변문학』에서 주관하는 윤동주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슈뢰딩거의 상자』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이 있다.
나는 지금, 혹은 우리는 지금 인류의 믿음직스런(?) 기록에 따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중이다. 정기적으로 물과 기름과 전기를 사고, 주중에 최소 한번씩은 대형마트에 들러 쌀과 야채와 육류와 휴지와 세제 그리고 체면과 허울과 안정제와 망각제와 각종 스트레스 해소물 같은 일용품들을 구입하면서.
일용품이란 곧 생필품인 것. 하루하루의 보잘것없는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쇼핑카트를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것이다.
가끔, 플라스틱 병 안에 고요히 봉인되어 있는 생수를 마시다가 나는 우리 집 안방, 곧 내 침대 위를 들여다본다. 시인을 흉내내어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건만 물과 기름과 전기와 쌀과 야채와 … 들로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저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세상이 원한과 다툼으로 소란스럽고, 주위가 달러 냄새로 한껏 부풀어 있고, 집안이 온갖 기계음으로 혼잡해질수록 왜 내 침대 위의 저것은 점점 더 웅크리고 더 숨죽이며 더 말라가고 있는 것인가. 아마 그것은 ‘향기로운 흙’ 반죽의 알맹이가 아니었던 겐가.
세상에 있어서나 내게 있어서나 시간은 이미 가속도가 붙어서 기하학적으로 빨라지고 있다. 나는 미친 듯이 돌아가는 세탁기 벽의 양말 쪼가리처럼 현대의 속도와 미래세대의 속도에 경외심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쪼록 나는 아직 방심하는 한순간에 펑 튕겨나가 떨어지는 물방울, 그런 껍데기이고 싶지 않다. 내게 그런 막연한 소망이나마 붙잡을 수 있도록 한턱이라도 내어준 것이 오늘 이 상과 창비와 이런 격려가 아닌가 싶다.
또한, 이국 타향에 있는 유약한 공상가일지라도 이렇게 기회를 주고 시선을 줌에 정말 감사하다.
2016년 7월 장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