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우리 모두의 함성이 가리키는 곳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월례 304낭독회가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수많은 장소를 거치며 매회 참여자가 달라지고 내용도 바뀌었지만 마지막 순서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낭독자와 청중이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한목소리를 내는 ‘함께 읽는 글’ 순서가 그것이다. “오늘은 4월 16일입니다”로 시작해 “끝날 때까지 끝내지 않겠습니다”로 마무리되는 이 짧은 글에는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메시지와 함께 “모두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다. 그러나 지난 2년여 동안 나는 단 한번도 이 문장을 끝까지 따라 읽지 못했다. 이 문장에 도달하는 순간의 그 무너지는 듯한 감정을 형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실감은 상실감대로 일상의 엄중함은 그것대로 보살피며 긴 시간을 견디고 맞서온 우리는 또다시 ‘모두의 이름’으로 새로운 ‘명령’을 내려야 할 사태에 직면했다. 바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다. 그리고 마침내 거리로 쏟아져나온 거대한 촛불의 물결 가운데서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국정원 선거개입 수사와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 요구를 조직적으로 가로막았으며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마저 막무가내식으로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명령’하는 민중의 함성이 작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명령’이 도착했어야 할 최종 수신처가 애초부터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설마’의 최종 저지선이 무참히 짓밟힐 때까지 이를 방조하고 심지어 조장하기까지 한 새누리당과 수구언론이 그 부역자들이었음은 물론이지만 고비마다 그 함성의 정확한 전달자였어야 할 야권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통계적 의미가 거의 없는 한자릿수 지지율이 보여주듯이, 그리고 광장에 운집한 백만개의 촛불이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듯이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대통령은 탄핵되었다. 이제는 이미 결정된 ‘국민적 탄핵’의 정치적·법리적 절차가 남았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들을 조리있고 일사불란하게 매듭짓는 일이 정치권에 시급한 책무로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실망스럽기 이를 데 없다. 내치와 외치를 분리하는 책임총리론을 내세워 국정주도권을 유지하려는 청와대와 여권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으로 국제정세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진 마당에 대체 누구에게 외치를 맡긴다는 말인가. 더구나 이렇게 되면 내각에 포함되지도 않는 국정원과 감사원 등 유력 정보·사정기관은 현직 대통령 휘하에 그대로 남게 된다. 대통령 2선후퇴라는 애매한 전제 뒤에서 이쪽저쪽 눈치를 살피며 국민들이 만들어준 절호의 기회에 무임승차하려는 더불어민주당식 정치공학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역풍, 국정공백, 국정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이지만 국민들은 어느때보다 질서정연하고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우왕좌왕 혼란에 빠진 것은 정권탈환을 따놓은 당상쯤으로 여기며 정치적 이해득실의 계산에 바쁜 제1야당인지도 모른다.
국민의 명령은 이미 내려졌다. 조기대선을 포함해 현행헌법 절차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의 뜻을 받드는 정부를 출범시켜야 한다. 일각의 개헌 주장도 그다음 순서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직선제 쟁취라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87년 개헌과 어떠한 합의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현재의 개헌론이 처한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대통령 4년중임제냐 내각제냐 아니면 그 절충형이냐에 매몰된 권력구조 개편안이 개헌 내용의 전부일 수도 없다. 어떻게 하면 ‘민(民)의 자치’라는 이상을 높은 차원으로 숙성시킬 수 있을지를 두고 더 큰 차원의 전환을 위한 청사진이 토론되어야 한다. 개헌도 수단의 하나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령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도 그러한 과정들이 매끄럽게 추진되리라는 보장 또한 없다. 그것만으로 국정농단 사태를 조장한 수구세력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며 분단체제가 존속하는 한 민주적 거버넌스 체제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그들의 롤백(roll back) 기도가 쉽게 종식될 리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들의 손에 쥐어진 사회적·정치적 자원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단순한 정권교체나 개헌논의를 넘어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는 이유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여혐살해사건 이후 비약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젠더적 각성의 물결만 해도 단순한 약자보호나 차별철폐, 양성평등론의 수준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SNS를 중심으로 일어난 ‘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도 그 징후의 하나일 것이다. 만연한 위계폭력 가운데 상처입은 존재들이 스스로 일어나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촛불의 함성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 흐름을 되돌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제는 낡은 반동일 수밖에 없다.
이런 시점에 모든 종류의 구속과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할 문인들이 오히려 위계에 의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었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다. 이 문제가 뜻있는 문인, 독자 또는 단체들의 몇몇 조치와 제도개선 노력만으로 완전히 해소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점 또한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바와 같다. 우선은 이미 시작된 변화에 이바지하면서 함께 진화해나갈 방향을 숙고하는 일이 절실하다. 그 첫번째 고리가 ‘경청’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지난 11월 11일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연대 ‘탈선’의 성명발표회는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문학인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새삼 돌이켜보게 한 소중한 계기였다. “우리는 문학이자 산증인으로서 우리 스스로를 증명할 것”이라는 그들의 엄숙한 선언 앞에서 문학계가 어떻게든 응답해야 함은 물론이다.
창간 50주년의 겨울호 머리글을 새로운 다짐 대신 국정농단 사태와 문단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논평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러나 마냥 안타깝지만은 않다. 거리와 광장에 운집한 촛불의 물결에서, 상처를 딛고 위계를 뒤집으며 연대의 위엄을 보여준 여성들의 목소리 가운데서 더 큰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근본적인 변화는 늘 아래로부터 시작된다. 섣부른 낙관이나 대책 없는 좌절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것이 대개 ‘아래로부터’에 근거하지 않고 ‘위로부터’의 의식에 갇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패닉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예상 밖의 결과를 낳은 미국 대선은 타산지석이다. 선거기간 내내 대세론을 점유했던 힐러리 클린턴은 왜 자질부족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트럼프에게 패배한 것일까. 트럼프가 대변하는 여성혐오나 백인중심주의의 득세로 이를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핵심을 비껴난 진단이기 쉽다. 이번 선거는 트럼프의 승리라기보다 부패 기득권층의 전형인 힐러리의 패배다. 대세론에 취해, 온갖 불평등에 신음하는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 패인일 것이다. 트럼프의 통치과정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지만 이러한 혼란을 낳은 책임에서 미국 민주당과 후보 힐러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박근혜 이후’를 준비하는 우리 야권 주자들이 통렬히 새겨야 할 대목이다. 보장된 미래는 있을 수 없다. 지금부터 무엇을 하느냐가 매순간의 의미를 결정지을 것이다.
이번호 특집은 지난여름에 이어 현실의 무게를 정직하게 감당하면서도 미래를 향한 기투를 멈추지 않는 시인·작가들의 작품을 ‘리얼리티 탐구의 문학적 형식들’이라는 주제 아래 집중 검토한다. 무엇이 더 ‘리얼’한가를 묻고 답하는 문학적 고투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저마다의 문학적 형식들은 그 다양함과 깊이로 관행화된 비관주의를 무색게 한다.
송종원은 황인찬과 김정환의 최근 시집들을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각각이 구축한 시적 리얼리티의 성격을 논한다. 황인찬 시의 분열하는 감각이 풍부한 시적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이질성의 통합 노력이 결여된 것과 대조적으로 김정환의 시가 시공간적 지평의 확장을 통해 역사와의 접목을 시도하는 점을 주목한다. 정주아는 젊은 세대의 두 소설가를 다루면서 그들 각자가 감지하는 리얼리티를 어떤 형식을 통해 탐구하고 구현하는가를 면밀히 짚는다. 동물적 삶을 탐구하는 김엄지와 공동체적 가치에 주목하는 최은영의 소설들 각각의 특성을 사유하면서 그 나름의 ‘총체성의 형식’을 제시하는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유희석은 김숨과 이인휘의 최근 소설들을 87년체제에 대한 문학적 애도로 해석한다. 김숨의 근작에서 시대의 비극을 복원하려는 소설적 시도의 성과와 한계를 예리하게 짚고 「시인, 강이산」을 비롯한 이인휘 소설들을 꼼꼼히 분석·평가하는데, 쟁점에 직핍하는 예리함이 남다른 관심을 끈다. 최원식은 한강의 소설세계 변화를 ‘소시민성’에 대한 본능적 저항으로부터 소수자들의 익명성에 기초한 비(非)총체성의 특이한 성취로 나아간 과정으로 파악하는 한편, 권여선의 근작들을 자본의 포섭이 강화되는 시대의 묵시록적 풍경을 탁월하게 그려낸 사례로 평가한다. 작품 내측으로 파고드는 분석의 면밀함이 흥미진진하다.
문학평론으로는 『채식주의자』의 번역자로 잘 알려진 데버러 스미스의 글을 소개한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텍스트와의 내밀한 대화 체험을 드문 실감으로 전하는 가운데 작품의 진면목에 도달한 독특한 평문이다.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소설가 이호철의 작품세계를 개관한 임규찬의 글도 주목해주기 바란다. 한편의 균형 잡힌 작가론이자 고인에게 헌정하는 아름다운 추도사로서도 손색이 없다.
창작란은 어느때보다 풍성하다. 신작시선 특집의 마지막회에는 시단의 미래를 걸머질 스물다섯명의 젊은 시인이 참여했다. 빛나는 개성으로 무장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 시의 미래를 가늠하는 특별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중편소설 기획의 대미는 황정은과 박민규가 장식해주었고, 금희와 이장욱의 신작 단편을 만나게 된 것 역시 기쁘다.
문학초점에서는 장이지 시인을 패널로 초대해 활발한 토론을 이어간다. 은희경 정이현 백수린의 소설과 허수경 박기영 안미린의 시집이 지닌 깊이와 넓이가 세 사람의 겹눈을 통해 오롯이 드러난다. 한해 동안 이 지면을 이끌어준 백지연 김소연 두분께 감사드린다. 작가조명은 최근 소설집 『회색문헌』을 출간한 중견작가 강영숙이 주인공이다. 은유와 알레고리에 정통하면서도 시대적 진실에 독특하게 뿌리내린 강영숙의 작품세계를 문학평론가 박인성이 세심하게 짚어주었다.
‘대화’는 연속기획 ‘한국의 ‘보수세력’을 진단한다’의 마지막회로 재벌 문제를 다룬다. 재벌 중심 경제구조가 어떻게 한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보수화 경향을 낳는지 송원근 신학림 이원재 이일영 등의 전문가들이 토론한다. 최근 정국을 강타한 국정농단 사태와도 깊숙이 관련된 주제인바, 재벌의 현재와 그 작동 메커니즘을 점검하고 대안시스템을 모색한다.
논단에는 두편의 주목할 만한 글을 싣는다. 이승환은 미국의 아시아 회귀, 북한의 통일대전론, 남한의 사드 배치가 공히 전쟁위협을 높이는 정책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면서, 망가져버린 평화협상 테이블을 복원하는 길을 제시한다. 스벤 뤼티켄의 글은 ‘소유권’이라는 범주와 예술작품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역사적 해명을 시도한 중요한 논문이다. 표절담론의 진전에 유익한 참조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현장에서는 연속기획 ‘소수자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본다’의 마지막회로 이향규의 글을 게재한다. 흔히 ‘탈북자’로 불리는 북한이주민들의 소수자적 삶을 그 실상에 즉해 강렬한 울림으로 전한다. 커 쓰런의 글은 ‘중국 굴기’라는 거대한 도전 앞에 ‘문화주체성’의 위기를 맞은 싱가포르가 동아시아 논의의 주요한 고리 중 하나임을 부각하고 있다.
산문으로는 부산에 거주하는 소설가 김곰치의 생생한 지진 체험담과, 『돈 끼호떼』의 작가 세르반떼스의 400주기를 기린 아리엘 도르프만의 글을 실었다. 이번 계절에도 주목할 만한 신간들을 소개하는 촌평란은 많은 토론거리를 제공한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식견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거니와, 지난 1년간 고정필자로 활약해준 진태원 전치형 두분 필자의 노고에 각별한 감사를 드린다.
제31회 만해문학상은 기존 노동소설의 경직성을 벗어나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룩한 이인휘의 소설집 『폐허를 보다』에 돌아갔다. 아울러 새롭게 시행되는 만해문학상 특별상 부문은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의 『다시 봄이 올 거예요』와 김형수의 『소태산 평전』이 공동으로 수상하게 되었다. 제18회 백석문학상은 중견시인 장철문의 시집 『비유의 바깥』에 주어졌다.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이제 겨울이다. 이 겨울이 얼마나 혹독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세월호참사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에 남아 세번째 겨울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작년 11월의 민중총궐기 현장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뒤 병상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故) 백남기씨의 장례는 유족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 41일 만에야 엄수되었다. 우리 모두의 함성이 저세상의 고인에게도 들렸을까. 『창작과비평』도 다시 한번 분발을 다짐한다.
강경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