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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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신예시인특선

 

백은선 白恩善

1987년 서울 출생. 201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viesecretek@naver.com

 

 

 

프랙탈

 

 

그곳은 천국이야?

난 단지 내가 운이 참 많구나

그리고 운이 없구나 하고 생각해

 

강을 따라 걷는

네 등을 보는 내가 있어

내가 있는 곳에서 네가 생겨나고

 

이 많은 얼굴을 좀 봐

모두가 한때는 뱃속에 열달씩 있던

사람들을 좀 봐

 

그런 것이 너무 끔찍하다고 하면

그런 내가 엄마라고 하면

내가 꾸는 꿈이 너무 어둡다고

네가 이야기하면

 

근사한 말로는 할 수 없는 얘기가 있어서

단지 환상이나 언덕에 대해서만

새의 하얀 날개나

사라진 연기를 포착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는 없어서

 

춤을 추는 영원한 비열(劣)을 이야기해줘

천국의 장르를 폭로해줘

얼굴이 얼굴을 데려가는 수법을

사람이 사람을 만드는 신비를

 

종 속에는 종이 감춘 동그란 것이 있다

천사가 날개를 버리는 비극이 있다

나는 창밖을 보면 슬퍼 모든 창이 그래

이해할수록 오해도 커지는 문법이야

 

매일매일 잠든 얼굴을 봐

단순하게 단순하게 저 얼굴을 끝까지 가져야지 하고

나는 내 운을 시험한다

 

대비되는 말들이 아니라 한통속인 말들

순간과 영원, 빛과 어둠 그런 거 있잖아

어깨를 마구 흔들어 깨워 밤새도록 네게 늘어놓고 싶어

 

병에 걸린 사람들 엎드린 채

울긋불긋해질 때

등을 보이는 사람은 등만으로 기억되고

 

저 많은 손가락들 좀 봐

이런 끔찍한 신비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면

 

 

 

동세포 생물

 

 

멀리 두번째 달이 떴다

 

너는 통속적인 말로 이루어진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새벽 두시, 커다란 음악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갑갑하고 편안했다 근사한 기분을 찾을 수 없었다

 

달은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다

 

꿈을 꿨다고 자주 썼지만 쉬운 시작이 필요했을 뿐 나무가 있고 내가 있는 우리의 세계는 없다 흑점 뭉툭한 얼굴로 너는 시, 시시, 하고 웃는다 있잖아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거절의 밤들 허락보다 거절이 쉬우니까 거절을 택했을 뿐이야 흑백화면 속 여자가 싸늘하게 읊조리며 된장국을 뜨고 밥을 퍼 식탁에 올린다 이상한 여자다 그치 빨리감기 버튼을 누르며 너는 뒤척인다

 

새벽 세시, 첫차가 뚫리면 바다에 가자 순식간에 약속한 듯 모두 동의를 표했고 디제이는 백판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수면 위에서

달은 수없이 부서지지만 그대로

 

한무리의 새들

증식하는

 

해와 달처럼 자연스러운 온도 자연스러운 청력 자연스러운 기분 불과 행 절과 망 누운 몸들 눕혀진 몸들

 

아가미가 벌어지는 물 밖의 마음으로

이제, 이제라고

 

먼지야 먼지 너는 정액을 삼킨 여자애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노래를 불러볼까 다 같이 성대를 공중에 널어버릴까 그럴까 더 크게 더 크게……

 

디제이는 이보세요 춤을 추세요 하고

 

말하겠지

 

몇살이니, 막 물으려는 찰나

 

바다는 무슨 바다

 

더 먼 쪽으로

 

커다란 손이 너무 커

달 같다

 

말할 뻔했어

옛날

첫번째 두번째 언덕의 그림자 뒤로

가늘고 뾰족한 눈들

기침하듯 왈칵 했어

 

남자와 여자는 마주 앉아 말없이 밥과 국을 퍼 먹는다 남자는 신문을 보고 여자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자를 곁눈질한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작게 국 좀 더 줘 할 뿐

 

조금씩, 깎여나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배를 가른 금붕어의 부레를 손끝으로 만져봤던 날

얇은 막이 불안하고 이상했다

 

신물이 난다 더 근사한 맛이 없었다 바위도 단풍도 첫눈도 여름바다의 정지와 반복 빛도 소금도 어둠도 설탕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실은

 

아무도 웃지 않는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이런 게 통속인데 이게 시 같니 이게 시가 되니 맞은편의 입이 벌떡 일어나 크게 벌어진다

 

그래 시다

손들 손을 아끼는 손목들

불가해하다

 

외출을 할 때마다 모자를 잃어버렸다 몇년간 바다에 간 적 없다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쉬웠다 술을 마시면 취하고 침대에 누우면 잠이 들었다

 

모든 밤이 흔들렸다

그대로

 

 

클럽의 무대에서 불이 꺼지면 디제이들은 다 어디로 갈까

 

더러운 행주를 쥐고 어깨를 들썩이는 여자

짧은 치마를 입고 베란다에서 코피를 흘리는 여자

너와 함께 영원히 걷고 싶어 웃으며 몸을 배배 꼬는 여자

 

그러면 어떤 장면에서든 남자는 옆에 있다

어쩌면 말하고 싶었을 거다 춤 따위 그만두라고

전부 나가 소리 지르고 싶었을 거다

 

들켜버리고 싶다고 네가 울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교대로 화장실에 다녀왔고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기로 했다 알 것 같지만 웃음은

여전히 여기

 

남자가 여자를 눕히고 옷을 하나씩 벗기며 여자의 살갗을 핥는다

 

나는 시에 대해 말하는 일이 잦았다 말할수록 내 말이 진짜 같아서

더 많이 말하게 되곤 했다

 

빛들, 넘치는, 검은 빛들

이를 딱딱거리는 거리의 개들

 

시, 시시

욕을 잔뜩 갈기고 싶다

 

남자는 이 여자 저 여자 다시 이 여자 다시 저 여자 그리고 새로운

여자들 사이를 오고 갔다 한 여자는 애를 지웠고 두 여자는 죽었다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달

사라진 투명한 얼굴

 

흔한 이미지에 사로잡힌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새벽 거리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 시시, 시……

소리를 내며

 

우리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우르르 뛰어 들어갔다 우산은 이미 동이

나 있었다 번개가 쳤고 천둥이 울렸다 굵은 빗방울이 빗금을 그으며

창 위로 흘렀다

 

코트를 뒤집어쓴 커플들

맞닿은 어깨들

멀리

 

달은 모습을 감춘다

 

한밤중 남자는 초를 들어올려 죽은 여자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입술

에 붉은 립스틱을 칠해주었다

 

마음이 마음을 향해 기울어지는 것

 

빛 속을 유영하는 은빛 빗금들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돌아보니 너는 리모컨을 쥔 채 잠들어

있었어 아버지처럼 소년처럼

 

 

어떠니

물 밖과 물 안이 동시에 여기

 

개헤엄을 치듯 몸을 뒤틀며 토하고 먹고 토한다

 

이 밤은 너무 길다 아니 너무 멀다

 

한때는 무언가를 마구 써놓은 다음 아니, 하고 부정하는 수법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지 여자가 매 끼니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식탁 위의 대칭을 이루는 식기들

 

가만히 들썩이는 어깨

 

음 그러지 말고 돌아누워봐 음소거 된 방 안에서 너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키득거렸다

 

멀리서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너에게 그 느낌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 여자와 남자가 하듯 밥을 먹고 밥을 먹고 밥을 먹었다

 

가만히 있어봐 다리 좀 벌리고 허리를 들어봐

그대로, 그대로

물속인 것처럼

 

시, 시시

아무것도 아니니까

 

바닷속 깊은 동굴에는 차가운 몸이 불을 끌어안고 있대 취한 네가 말할 때 나는 일어날 타이밍을 엿보며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비스듬히 펼쳐진 손바닥 차가운 월면

어떤 사람은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사랑하게 되었다

 

각자의 가방을 나눠 갖고 각자의 육체를 데리고 흩어지는 물과 고기 가장 투명한 것은 가장 어두운 것 나는 우리가 삭제한 문장들을 우리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문장들을 모두 모아 상자에 집어넣고 하나씩 꺼내보고 싶었다 그 조각들을 맞춰 시를 쓰면 어떨까 궁금했다

 

그게 네가 말한 통속적인 말로 이루어진 시일까, 근사할까

 

남자의 부인이 죽기 전에 한 말은 밥,이었다

빌어먹을 밥

 

파헤쳐진 땅의 흙냄새……

 

나는 너에게

전부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어

시가 되니, 묻고 싶었어

 

울음을 그친 네가 난망해하며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병신

더러운 날개들

 

시, 시시

 

아무렇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