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사이’의 발견과 ‘큰 주체’의 물음
김혜수 시집 『이상한 야유회』
김영희 金伶熙
문학평론가. 제16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 주요 평론으로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 결합하는: 진은영 시의 ‘감성’과 ‘정치’」 등이 있음. yhorizon@naver.com
김혜수가 자신을 정의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감각은 결정적으로 ‘이상한’이라는 수사에 걸린다. 그것은 ‘나’라는 아이러니에도, 세계의 비참과 타인의 불행에도, 언어의 근본적인 모순과 한계에도 두루 적용되는 감각과 사유의 원리에 가깝다. ‘나’라는 아이러니에서 시작해보면 이렇다. 문득 ‘나’와 생(生)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지금의 나’가 “언젠가 어디선가 딱 한번 살았던 생을/재현하고 있는 것”(「러닝머신」)처럼 느껴질 때, ‘이번 생’이 “아무래도 여기는 다른 사람의 꿈속”(「좌회전 깜빡이를 켜고」)같이 느껴질 때 감지되는 ‘이상한’ 감각이다. 김혜수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감각을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시인은 일상에서 문득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거나(“빈집의 적요처럼 서 있는/너, 누구니”, 「어디 갔니」), 불현듯 자신을 둘러싼 지금-여기의 정체를 되묻는다(“여기가 어디였더라”, 「찰칵」). 주로 고요와 정적의 시간에 ‘어느새’와 ‘불현듯’의 형식으로 시인을 기습하는 이같은 물음은 자명하다고 여겼던 일상적 자기(自己)에 균열을 일으킨다. 하지만 여기서 자기에 대한 이상(異常) 감각을 어떤 초월론적인 사유와 연결시켜서는 곤란하다. 일상적 자기에 대한 낯선 인식도 근본적으로는 일정한 거리두기를 전제로 하는 자기응시, 즉 자신을 대상화하여 인식하는 예민하고 지적인 시선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나’와 ‘여기’와 ‘지금’에 관한 시인의 사유가 얼마간의 ‘기묘한’ 아우라를 풍기는 것은 『이상한 야유회』(창비 2010)의 세계가 무엇보다 삶이 ‘죽음’과 기거하는 방식을 실연(實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시간’에 관한 시인의 각별한 사유와 관련이 있는데, 예컨대 시인이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이번 생’이라는 표현은 그 안에 여러 생의 시간을 겹으로 내장하고 있다. ‘길’이라는 은유 또한 순환론적 시간, 영원성의 시간을 암시하는바, 자석에 이끌리듯 출구가 보이지 않는 러닝머신 위를 걷고 또 걷는 모습은 거대한 시간의 운동 속에 놓인 인간의 운명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시간의 회전 속에서 전생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예보는 동시에 작동하며, 때문에 시인은 현재의 시간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이상한 야유회』에서 삶과 죽음이 모래시계의 역류처럼 간단하게 위치를 바꾸며 반복되는 것은 그리하여 자연스럽다. 그들은 마치 “거듭되는 방생과 포획의 고리”(「세숫대야가 필요하다」)처럼 순환한다. 이곳에서 죽음은 삶의 허무를 직시하게 하거나 삶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존재론적 결단이라든가, 미래의 종말과 영원한 현재 같은 시간의 작용과는 거리가 멀다. 「야유회」에서 야유회 가는 길과 화장(火葬)의 절차가 동일한 풍경으로 겹쳐지는 장면은 그리하여 의미심장하다. 이곳에서는 삶이 죽음으로 야유회를 간다는 듯, 죽음이 삶으로 야유회를 온다는 듯 삶과 죽음은 동궤를 이룬다.
금생(今生)이라는 시간의식과 죽음의 친연성은 시인의 불행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이상한 야유회』가 담고 있는 현실의 비참과 개인의 불행에는 마땅한 출구가 없다. 비상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결국 추락한 날벌레의 형상으로 “한번도 챔피언이었던 적 없는”(「챔피언」) 삶을 살고, 공사장 인부, 정리해고된 가장, 행려병자 등은 이상한 족속, 이른바 재활용 쓰레기로 분류된다. 시인의 불행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인의 몸은 “세상의 지독한 부패”(「냉장고」)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묘사되고, 시인은 그 몸으로 “식어버린 선지처럼 겉돌며”(「역전 식당」) 매순간 존재의 버거움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이 삶이라고, “거기까지가 길인 거라고 하기엔”(「부적절한 보행」) 현실의 불행은 너무나 깊고 전면적이다. 현실에 대한 이상감각은 여기에도 예외 없이 작동하여, 김혜수는 이같은 불행이 뭔가 ‘부적절〔異常〕’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부적절한 불행’에 대한 감각은 다시 더 깊은 불행의 원인이 된다. 김혜수는 자신과 타인의 불행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응시한다. 때문에 자기 감정을 추상적으로 노출하지 않는다. 절망의 편에 서 있음에도 시인의 사유는 불행의 감상주의로 빠지지 않으며 그녀의 언어는 삶의 구체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아름다움이란 좀처럼 해석의 틀에 갇히지 않는 것이어서 그녀의 시는 해석 이전에 한편의 시로 온전하다. “무모하지 않은 것은 기다림이 아니네”(「얼음 속 구두는 입을 벌리고」)라거나 “몸에도 길이 있다는 건 적막한 일이다”(「봄밤」) 같은 구절을 보라. 이는 온갖 관념과 수사의 도움 없이도 온전한 ‘생’(날것)의 언어이며 긴 불행의 시간을 몸으로 체화한 이가 전달하는 ‘생’(삶)의 말이다. 잠언의 차원으로 승화되지 않고 감상의 차원으로 경도되지도 않는 사유의 깊이와 언어의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거니와, 우리는 김혜수의 불행에 관한 이상한 감각의 편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