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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이현 鄭梨賢
1972년 서울 출생.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이 있음. deepoem@hanmail.net
천사는 날개를 달고 오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함께 살았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벼룩시장’ 신문지를 방바닥에 깐 채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다. 남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우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나 죽는다고, 아니면 누군가 죽었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남우가 무거운 몸을 뒤척이자 침대 프레임이 삐걱거렸다. 갑자기 그가 매트리스를 주먹으로 퍽 내리쳤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목격한 남우의 행동 가운데 가장 폭력적인 것이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누가 죽었다고?
아니라고 남우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확실히 그즈음 남우는 미묘하게 변했다. 우리가 같이 살기 시작한 지도 일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같이 살아야겠다는 결정을 내릴 무렵 우리는 서로에게 미쳐 있었다. 남우는 선배와, 나는 전 직장의 동료와 함께 방을 얻어 살았는데 우리는 각자의 룸메이트가 없는 시간을 틈타 서로의 방에 스며들곤 했다. 한번은 남우의 방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허둥지둥 화장실로 숨어야 했고, 사정을 파악한 남우의 룸메이트가 서둘러 돌아나간 뒤에야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침, 내 룸메이트가 결혼하고 남우의 룸메이트가 외국에 가게 되는 시기가 비슷하게 겹치자 우리는 각각 새 동거인을 구하는 대신 서로의 동거인이 되기로 결정했다.
생활비에 관해서는 애당초 원칙을 세웠다. 월세와 공과금은 반분하기로 했고 식료품비와 외식비는 일정액을 똑같이 각출하여 공동명의의 통장에 넣어두고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기본원칙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상황이 속출했다. 이를테면 남우가 데려온 강아지 애니의 병원비 같은 부분이 그랬다. 노견인 애니는 잔병이 많았고 남우는 그때마다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진료를 마친 후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공통의 생활비가 들어 있는 카드로 계산을 했다. 카드 사용내역서를 받아들 때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몇주 전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뒷다리를 절룩이며 걷던 개가 별안간 일어서지 못했다. 수의사는 척추내부에 생긴 악성종양이 신경을 누르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며칠을 못 넘긴다는 설명을 들으며 나는 낯선 불안감을 느꼈다. 남우는 대기실 한구석에 얼굴을 처박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내가 병원 측에 수술비용을 물었다. 이백만원쯤이라 했다. 내 한달 월급보다 많았다.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느냐고 이번엔 남우가 물었다. 남우는 암흑 속에서 한줄기 구원의 빛을 발견한 사람으로 보였다. 열어봐야 알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오십 퍼센트 이상은 희망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수술해도 살리지 못할 확률이 나머지 오십 퍼센트는 된다는 거잖아요? 지금 살아난대도 재발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셔야 하잖아요?
동물병원 대기실에서 이런 반박에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우의 귀에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 공간에서 가장 절박한 사람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리려는 의논은 크게 할 수 있어도, 죽이려는 의논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남우에게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 않느냐고도 했다.
일시적으로 고비를 넘길지는 몰라도 그건 애니의 고통이 연장된다는 의미일 거야.
남우가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내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애니는 나한테 유일한 가족이야. 지금 한 말, 안 들은 걸로 할게.
남우가 이겼다. 애초에 질 수 없는 게임이었다. 남우는 응급수술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애니의 종양은 무사히 제거되었고 애니는 뛸 수 없는 개가 되었다. 회복실 앞에서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남우가 깨어난 애니를 품에 안고 감격을 만끽하는 동안 그가 과연 어떤 신용카드로 결제할 것인지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 속내를 아무에게도 드러낼 수 없다는 데에 짙은 외로움을 느꼈다. 남우가 지갑에서 꺼낸 것은 우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카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신용카드로 이백만원을 일시불로 결제했다. 그는 피트니스센터의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남우가 버는 돈은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적을 터였다. 그가 나를 위해 이백만원의 돈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미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멈추었다. 강아지의 목숨과 내 목숨을 동일한 저울에 달아놓고 측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밤 우리는 크게 다퉜다. 표면상의 이유는 남우가 침대에서 내 속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가임기간이라 밝혔음에도 동작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내가 다시 제지하자 남우는 괜찮다고 웅얼거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켰다. 남우가 눈가를 찌푸렸다. 괜찮다고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여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평소 우리는 유니더스 초박형 콘돔을 인터넷최저가로 구매해 사용하고 있었다. 남우는 서랍 속의 콘돔을 꺼내려고도 언쟁을 그만두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우가 말했다.
왜 너는 항상 미리 걱정하지? 문제는 생기기 전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생긴 후에 해결하는 거야.
그 문제가 구내염이 재발하거나 발목 인대가 늘어나는 문제하고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그가 모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화가 났다. 꼭 그럴 필요 없었는데도 나는 언성을 높였다.
아니. 내 인생엔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 이 좁은 방에서, 죽어가는 개 옆에서, 애를 키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절대로.
남우가 스탠드의 스위치를 탁 껐다. 침대 발치에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린 애니의 씰루엣이 보였다. 나와 남우는 각자의 어둠 속에서 몸을 뒤치다 잠들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곧 원룸 계약의 만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년치 월세계약을 갱신하는 문제에 대해 남우와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다. 남우도 나에게 묻지 않았다. 이제 나는 우리 사이에 남은 것은 헤어짐뿐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헤어짐이 동거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연인관계의 근본적인 종결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남우의 말대로 미리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미지야.
내가 발톱의 매니큐어를 말리는 동안 등을 돌리고 누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남우가, 불쑥 이름을 불렀다.
얼마 정도가 있으면 평생 살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남우는 잠자코 있다가 이내 급한 일이 있다며 나가버렸다. 매주 일요일은 우리가 함께 쉬는 유일한 날이었다. 지금껏 나와 남우는 모든 일요일을 함께 보내왔다. 나는 월요일이 되면 부동산에 가야겠다고, 현재의 월세 보증금 절반으로 방을 구할 수 있는 동네를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드물게 햇살이 좋은 오후였다. 이불 빨래라도 할 요량으로 붙박이장의 문을 열었다. 이불더미 옆에 처음 보는 검은색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기내 반입용 사이즈의 가방이었다. 남우가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었던가. 나는 한 손으로 가방을 들어보았다. 꽤 묵직했다. 자물쇠도 없었고 비밀번호도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가방은 맥없이 열렸다. 가방 안에 차곡차곡 쌓인 것은 오만원권 뭉치들이었다. 가방 안을 꽉 채운 돈다발이 모두 몇개나 되는지 어림잡아 헤아리기 힘들었다. 비현실적인 종이뭉치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 멈추었다. 어느새 애니가 발치에 다가와 있었다. 늙은 개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은 말간 눈동자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황급히 가방을 닫았다.
안 그래도 얘기하려 했다고 남우가 비교적 덤덤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일어서더니 삼분의 일쯤 열려 있던 창문을 꼭 닫고 블라인드까지 내리고 왔다. 그는 얼마 전 PT(퍼스널트레이닝)를 받는 개인수강생이 새로 왔다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귀를 막고 싶다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더 나은 일도 있다. 알게 되는 순간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일. 아랑곳없이 남우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수강생은 중년의 남자였다. 첫날 PT가 끝난 뒤 차를 한잔 마시자고 청해왔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피트니스센터 일층의 까페에서 그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고백했다. 새로운 수강생은 그의 형이었다. 어떤 형을 말하는 거냐고 내가 묻자 남우는 친형이라고 대답했다.
형제 없다고 했잖아.
응, 그랬었지.
남우가 내 눈을 피했다.
그런데 있었어.
남우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은 어머니와 둘이 살아왔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모들이 많아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도, 그래서 가족이 무엇인지 잘 안다고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외가 식구들과 자주 왕래하며 지낸다고도 했다. 돌이켜보면 묻지 않은 말들이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밝히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내 아버지에 대해서도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 남의 아버지를 궁금해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느끼는 당혹감은 그의 거짓말 때문이 아니었다. 남우가 작정하고 남을 속이는 행동 같은 건 못하는 남자라고 철석같이 믿어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친형은 친형인데…… 남우가 잠시 뜸을 들였다.
반쪽만 친형이야.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나도 몰랐어. 아주 어렸을 때 한번 본 적은 있었지만 그후론 만난 적도 없다고.
들여다보면 단순하고 평화로운 집안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의 부모만 해도 오래전에 헤어졌고 각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살고 있었다. 나도 그런 사실을 남우에게 말한 적 없었다. 내가 진심으로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친형과 저 현금다발들의 상관관계뿐이었다.
그럼 벽장에 있는 가방을 형님이 준 거야?
남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유산이라도 나눠 받은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아직.
남우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멈추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직,이라는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그때는 몰랐다. 나는 그 가방 속의 돈뭉치가 남우가 뒤늦게 받게 된 위로금이나 밀린 양육비쯤 되는 모양이라고 멋대로 짐작해보았다. 어쨌거나 그는 운이 좋은 남자였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았다고 모두가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내가 가까이서 보아온 삶들은 달력 속의 평화로운 풍경화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반쪽만 친형이든 온전한 친형이든 뺏어가는 쪽보다야 쥐여주는 쪽이 훨씬 낫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진실이었다. 나에게는 남우가 그것을 벽장 속에 계속 보관할 것인가만이 관심사였다.
어쩔 수 없이 받긴 했지만 쓸 수 없는 돈이야.
세상에 쓸 수 없는 돈이 어디 있어?
미지야, 세상에는, 그냥 쓸 수 있는 돈은 없어.
나는 기분이 상했다. 어쩐지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남우는 지금 저 돈다발의 소유자가 명백히 자신임을, 나는 제삼자일 뿐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축하한다고 하는 내 목소리가 팽팽해졌다.
저걸 쓸지 말지는 네 맘이지만 여기 놔두는 건 문제가 달라. 여기는 우리 두 사람의 공동공간이고 저 벽장도 마찬가지니까. 이 동네가 별로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 테지.
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몇달 전에 이 원룸 건물에 좀도둑이 침입해 경찰이 다녀간 적도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안전하지 않은지 강조하고 나니 벽장에 있는 게 돈가방이 아니라 시한폭탄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선가 째깍째깍 초침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일어서려 하자 남우가 다급히 팔을 잡았다. 그는 사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구국비밀결사대의 조직원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그건 일종의 예약금 같은 거야.
뭘 예약했는데?
죽음.
나는 남우의 앙다문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최동우’라고 치면 제일 윗줄에 뜨는 남자, 최동우성형외과 대표원장, 그가 남우의 형이었다. 포토샵으로 덧칠해놓은 프로필이라 실물과는 차이가 있으리라 감안해도 나이에 비해 확연히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날렵해 보이기도 하고 친절해 보이기도 하고 피로해 보이기도 하고 사악해 보이기도 하는 남자였다. 아무리 뜯어봐도 나는 최동우의 얼굴과 남우의 얼굴 사이에 닮은 부분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느 쪽이 부계를 닮았는지는 부친의 얼굴을 보기 전에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남자의 아버지인 C회장의 사진은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남우는 아버지의 사진을 한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1988년 이후 아버지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남우는 그동안 이복형과 열번에 걸쳐 만났다고 했다. 일주일에 두세번 꼴이었다. 웬만한 연인의 데이트 횟수보다 잦았다. 최동우는 PT 가장 마지막 타임에 예약을 잡았고, 남우의 지도를 잘 따르며 성실히 운동했다. 그러고 나서 둘은 근처에서 커피 한잔씩을 마셨다. 성형외과 전문의인 마흔셋의 남자와 헬스 트레이너인 서른의 남자가 심야에 커피를 앞에 두고 나눌 수 있는 공통의 화제가 무엇일까. 운동에 관한 얘기를 주로 한다고 남우는 말했다. 형님은 오랜 시간 서서 수술을 하니까 아무래도 허리가 안 좋은 것 같다고 말하는 남우의 음성에서는 약간의 걱정이 묻어났다.
그들은 어머니가 다르고 성(姓)도 달랐다. 최동우가 친부의 성을 따른 것과 달리 남우는 어머니를 따라 ‘김’씨가 되었다. 최동우는 C회장의 가족관계증명서에 올라 있는 단 하나의 자식이었다. 그 사람이 정말 친형 맞느냐고 나는 다시 물었는데, 그 안에는 네가 그 C회장이라는 노인의 친자인 것이 확실하냐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 남우는 아마도,라고 했다. 자기 이름이 남녘 남(南) 자를 쓴 남우이고, 형님의 이름이 동녘 동(東) 자를 쓴 동우인 것을 보면 맞지 않겠느냐고 했다. 최동우의 어머니는 동해안에 사는 여자였고, 남우의 어머니는 남해안에 사는 여자였다는 것이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증거였다. 그러면 전국 방방곡곡에 다채로운 성씨의 서우, 북우, 북북우, 남동우, 동서우 등등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남우가 반문했다.
형님이 찾은 동생이 나 하나뿐이니까. 그거면 됐다고 생각해.
나는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남우는 최동우에게서 C프로젝트의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C프로젝트의 개요는 단순명료했다. (1)C회장이 죽는다. (2)최동우가 C회장의 부동산을 포함한 모든 자산을 상속받는다. (3)최동우가 상속받게 되는 유산의 일부를 남우와 나눈다. 그게 다였다. 3번의 조건이 이행되기 위해서는, 필히 1번의 과정에 남우가 참여해야 했다. 이것이 한쪽의 일방적인 복종계약이 아니라 양측의 합의를 기반으로 하는 상호 평등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남우가 계약을 이행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C회장을 죽음에 이르게 하면 되었다.
죽이는 것과는 명백히 다릅니다.
최동우는 남우를 동생이라고 불렀으며 깍듯한 경어를 썼다. 그것은 남우에게 다정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
궤변이지만 묘하게 설득력있는 의견 아니냐고 남우가 내게 물었다. 나는 머뭇거렸다. 누구나 죽는다. 그것은 분명히 과학적 사실이다. 그러나 때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 밖, 신뿐이지 않은가? 인간은 다만 겸허히 기다리는 존재이지 않은가? 나는 대답 대신, 내게는 C프로젝트가 이해하기 힘들고 불완전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1번이었다. 1번이 선행되지 않으면 2번과 3번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남자는 가장 중요한 그것을 남우에게 맡기려고 한다. 이 계획에서 내게 가장 껄끄럽게 다가오는 것은 그 부분이었다. 남우는 나약했다. 남우는 실수하거나 변심하거나 배신할 수 있었다. 최동우는 왜 그를 믿는가?
형제잖아.
남우가 천천히 대답했다. 최동우의 주장은, 아버지 입장을 생각해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평생 수전노 소리 들으며 지독하게 모은 재산인데 그 일부라도 생판 남에게 주는 것은 마지막 도리가 아닌 듯하다,라고 말이다. 그러면 누군가와 나눌 필요 없이 모든 과정을 형님 혼자서 다 하시면 되지 않느냐고 남우가 의문을 제기하자 최동우는 허허 웃었다.
내가 그렇게 용기있는 인간으로 보입니까. 나는 무서워서 못합니다.
아, 용기라면 저도 별로.
아니, 동생은 충분히 용감합니다. 혼자 힘으로 이렇게 잘 살아왔지 않습니까.
그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고 남우는 말했다.
이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동생과 내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둘이 평생 서로 지켜보며 살아갈 것 아닙니까. 다시는 허튼짓 못하도록. 선량하게 살도록. 우리가 그렇게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면 아버지도 안심하실 겁니다.
C회장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남우도 잘 모른다고 했다. 종로의 상가건물 외에도 인천과 수원 중심가에 비슷한 건물이 각각 하나씩 있고, 그밖에도 전국 여기저기에 땅이 많다더라고 하는 남우의 목소리가 어쩐지 쓸쓸하게 들렸다. 상속이 완료되는 즉시 최동우는 인천과 수원의 건물을 급매할 예정이었다. 세금을 제외한 매각대금을 7:3으로 나누자고 했다. 그는 제 몫의 삼분의 일은 채무를 변제하는 데 쓸 것이고 나머지는 새 병원의 개업비용과 유학 가 있는 아이들의 학비로 사용할 것이라 했다. 자식들이 음악을 공부한다고 했다. 종로의 건물은 현대적으로 매끈하게 리모델링할 것이고 건물 가치를 높여 세입자들을 물갈이할 것이었다. 남우가 원한다면 한층을 쓸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직장인 대상 피트니스센터를 차려도 괜찮을 자리라는 게 최동우의 조언이었다.
뭐라고 대답했어?
생각해보겠다고 했어.
애니가 남우의 무릎 위에 앞다리를 올리며 끙끙거렸다. 남우가 늙은 개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아까부터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나한테 다 하는 거지?
남우의 눈이 둥그레졌다.
사랑하니까.
그것은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증인이 필요해서, 같은 정도의 대답을 나는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기꺼이 증언해줄 만큼의 작은 용기는 있으니까. 혹시 법정에 서게 되면, 얼마간의 위증일지라도 최동우와 김남우 중에 김남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진술할 것이다. 어쩌면 세상사람들은 바로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너였어도 나한테 다 말했을 거야.
남우가 말했다. 아니 그는 틀렸다. 나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가는 늙은 개한테도. 어떤 감정이 나를 먹구름처럼 부풀게 만들었다. 남우가 개를 바닥에 내려놓고 나를 안았다. 남우의 가슴팍은 내 상체가 푹 파묻힐 만큼 널따랗고 단단했다. 한참 동안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함께 멈춰 있는 것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것을 알았다. 위층 어딘가에서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후 버스를 타고 가다가 C회장의 건물을 보았다. 무척 오래전, 한번쯤 지나고는 다시 들를 일 없던 길목이었다. 그 길을 지나가기 위해 나는 일부러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건물은 크지 않은 사거리 대로변에 있었다. 나를 태운 버스가 마침 신호에 걸려 멈추었으므로 꽤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육중하고 낡은 건물이었다. 날렵하게 빠진 신축 빌딩들로 둘러싸여서 더 그렇게 보이는 듯했다. 크고작은 간판들이 외벽 전체에 다닥다닥 어지러이 붙어 있었다. 편의점, 약국, 커피숍, 한의원, 치과, 냉면집, PC방, 중국어학원…… 나는 1층부터 한층씩 차례로 세어보았다. 1층, 2층, 3층…… 자꾸만 틀렸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었고 C회장의 건물이 시야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 건물 꼭대기 층의 가장 끝 방, 내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 방과 그 방의 노인에 대해 떠올렸다.
C회장은 일흔세살이었다. 마지막 여자가 오래전 떠난 이후 줄곧 혼자 살아왔다. 이제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 노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해놓은 패턴대로 살았다. 매일 아침 지하철과 도보를 이용하여 출근했고 매일 늦은 저녁 퇴근했다. 그에게는 지병인 1형 당뇨가 있었다. 한때 몹시 위험하던 시간을 지나왔다. 고비를 넘기고 나서 그는 말수가 퍽 늘어났는데 대부분의 언어를 건물의 세입자와 고용인을 다그치거나 나무라는 데 사용한다고 주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건강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다고, 그 집착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끔찍하게 불어나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이십년은 너끈히 더 버티실 거라고, 이것은 아들로서가 아니라 의사로서 예측하는 바라고 최동우는 남우에게 말했다. 이십년 후면 자신은 환갑이 넘었을 것이며 지금의 재정상황으로 보면 진즉에 파산하여 감옥에 있을 가능성도 크다고 말할 때는 정색을 했다.
아니면 필리핀이나 캄보디아 같은 곳에 숨어 살며 골프나 실컷 치겠지요. 감옥 같은 삶을 살고 있겠지요.
그 말을 들으며 남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십년 후에는 남우도 나도 쉰살이었다. 키우던 늙은 개는 죽었을 텐데 누구를 가족이라 여기며 살고 있을까, 남우는. 쉰살의 헬스 트레이너는 없을 텐데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 남우는. 그러면 쉰살의 나는. 나는……
남우가 네모난 나무상자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뚜껑을 열면 금장만년필이나 오팔브로치 같은 것이 들어 있을 법한 상자였다. 안에 든 것은 동그란 약통처럼 보였다. 포장용 에어캡으로 여러겹 둘둘 말려 있었다. 인슐린 주사제였다. C회장은 하루 두번 자신의 복부에 인슐린을 직접 주사했다. 1980년대에 만들어진 노인의 고동색 가죽가방 안에는 점심에 사용할 인슐린 주사제와 주사바늘이 상비되어 있었다. 그것을 이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 최동우의 아이디어였다. 이것은 노인이 평소 투약하던 것보다 몇배의 고농도 인슐린이 응축된 약제였다. 하던 대로 제 손으로 주사를 놓은 후 노인은 저혈당 쇼크에 빠질 것이고, 곧 혼수상태가 될 것이다. 비자발적 자살인 셈이었다.
고통은 거의 없을 겁니다.
최동우가 단언했다. 건물 경비원과 주차관리원, 청소원이 출근하지 않고 빌딩 내 점포 대부분이 문을 닫는 일요일 오전이 그가 꼽는 적기였다. 하나뿐인 아들이자 상속자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이번 주말 최동우는 토오꾜오의 학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비보를 받자마자 급거 귀국하기 편리한 곳이었다. 나무상자는 냉장고 속, 김치통과 우유팩과 플라스틱 계란판 사이에 놓였다. 그러고 보니 명란젓이 담긴 상자라고 하면 믿길 것도 같았다. 나도 모르게 냉장고를 자꾸 열었다 닫았다 했다.
그러다 변질될지도 몰라.
남우가 한마디 했다. 크진 않았지만 어쩐지 가슴을 쿵 내려앉게 하는 목소리였다.
그 사흘 동안 가장 기억할 만한 일은 애니가 쓰러진 사건이었다. 남우가 일을 하러 가고 나 혼자 집에 있을 때였다. 나는 토요일 저녁의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여러명의 연예인들이 뛰고 뛰고 또 뛰는 모습을 보면서 저녁으로 컵라면을 먹었다. 냉장고를 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식사였다. 뛰지 못하는 남우의 개가 어느새 옆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개의 주둥이에 면발 몇가닥을 넣어주었다. 지난번 쓰러지고 난 뒤부터 남우가 보지 않을 때면 종종 내가 먹던 것을 애니에게 나눠주었다. 라면가닥을 물고서 뒷다리를 질질 끌며 욕실 방향으로 가던 개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추었다. 개는 몸통을 부르르 떨더니 뒷다리를 뒤로 쭉 뻗었다. 무너져내리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혀를 쭉 빼물고 눈동자는 꼼짝하지 않았다. 축 늘어진 그 청회색 혓바닥을 나는 난감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나의 불운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왜 늘 이런 식인가. 왜 하필 혼자일 때.
남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개의 사지가 빳빳하게 굳어가는 동안 몇번 더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바깥이 캄캄해지는 사이 개의 생명이 천천히 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늙은 개가 죽어가는 방에 있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는 죽음이었다. 벽장에는 돈가방이, 냉장고에는 인슐린 주사제가 들어 있었다. 전부 남우의 것이었다. 남우는 유일한 가족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진심과는 관계없이,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데 애니의 숨은 완전히 끊겼을까?
기다리는 동안 나는 먹던 컵라면을 개수대에 쏟아붓고 젓가락을 수세미로 빡빡 문질러 닦았다. 가장 좋은 타월로 애니의 몸을 감쌌다. 불과 이십여분 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개의 뼈와 털의 감촉이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나는 냉동실 문을 열었다. 비닐봉지에 담긴, 오래전에 잊힌 꽝꽝 언 고기들을 다 꺼내고서 대신 애니를 집어넣었다. 가냘픈 개는 그 네모난 공간에 꼭 들어맞았다. 애니가 몸집이 작은 짐승이어서 다행이었다. 냉동실 문을 닫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제 나는 벽장에는 돈가방이, 냉장고의 냉장실에는 인슐린 주사제가, 냉동실에는 죽은 개의 사체가 들어 있는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남우는 자정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술 냄새가 좀 나긴 했지만 만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미안하다고 그가 웅얼거렸다. 뭐가 미안하냐고 하자, 전부 다,라고 했다. 그가 겉옷도 벗지 못하고 곧바로 쓰러져 잠들어버렸기 때문에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를 놓쳤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눈을 뜨자마자 창밖을 보았다. 맑지도 않고 흐리지도 않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지도 안개가 짙지도 바람이 거세게 불지도 않았다. 나는 남우를 흔들어 깨웠다.
벌써 여덟시야.
남우가 눈을 끔뻑끔뻑했다.
일요일이잖아.
남우는 내가 준 힌트를 알아채지 못하는 눈치였다. 출근 안해도 되는 날 아니냐고 그가 되물었다.
그거, 오늘까지 아니야?
카드대금일이거나 바겐세일 마감일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어리둥절해하던 그의 눈빛이 한순간 서늘하게 바뀌었다.
그거. 안해.
남우는 다시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진짜 안할 거야?
그럼 하는 줄 알았냐.
남우의 목덜미와 어깻죽지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빳빳하고 완강해서 슬퍼 보였다. 나는 그의 등에 가만히 한쪽 뺨을 가져다댔다.
가자.
아무 대꾸도 없었다.
내가 같이 가줄게.
남우의 등뼈가 꿈틀 움직였다.
건물 입구를 지키는 이는 없었다. 우리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는 5층에서, 남우는 6층에서 내리기로 했다. 6층에는 관리실이 있었다. 일요일엔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고 종합병원 당직의사가 회진을 돌듯 C회장만이 건물 구석구석을 자주 순찰했다. 나는 5층과 6층 사이의 비상계단에서 C회장을 기다렸고, 남우는 6층 남자화장실에서 내 신호를 기다렸다. 얼마 뒤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C회장임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예상보다 체구가 컸다. 젊어서 둔중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몸이었다. 자세는 구부정했으며 한손으로 계단 손잡이를 잡고서 조금 천천히 걸었다. 그는 내가 선 쪽을 흘낏 보고는 층계를 마저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멸종 직전의 늙은 공룡 같았다.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 나는 남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응.
그 한 음절은 가슴속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남우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다시 얼마 후에 남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응.
그가 일을 잘 마쳤다는 의미였다. 이제 나는 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걷기가 힘들었다. 5층 복도에서 노인과 마주쳤다.
어딜 찾으시오?
노인이 물었다. 가랑가랑 가래 끓는 소리가 숨에 섞여 있었다. 나는 중국어학원엘 왔는데 기다려도 문을 열지 않아 돌아가는 길이라고 둘러댔다. 누구의 귀에도 장황한 핑계로 들릴 만했는데 노인의 귀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중국어학원은 일요일에 문을 닫는다고,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노인과 나는 다시 서로를 스쳐 지났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볕이 제법 따뜻했다. 남우는 보이지 않았다. 일을 마친 뒤 만날 장소를 정해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우는 혼자 가버린 것일까. 나는 휘청휘청 길을 따라 걸었다. 몇십 미터 못 가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리는 남우를 보았다. 파란불이 들어왔는데도 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남우와 닮은 데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우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서울 시내를 무작정 쏘다녔다. 영화를 보고 스빠게띠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애니는 화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나는 남우에게 재차 확인했다. 남우가 응,이라고 했다. 뒤늦게 애니의 죽음을 알게 된 남우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인터넷 검색으로 애견장례대행업체를 찾았다. 검정색 장의차가 집 앞까지 왔다. 우리도 애니와 함께 차에 실려 화장장에 도착했다. 애니의 관이 화장로에 들어가려는 찰나 남우가 울기 시작했다. 그는 꺽꺽 소리 내어 통곡했다. 내 눈에서도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도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일들이 오래도록 꿈에 나타난다. 아이를 낳으러 가던 밤에도, 우리 엄마의 갑작스런 부고를 받고 고향에 내려가던 새벽에도, 설핏 든 잠의 꿈속에서 그 건물의 입구로 나란히 걸어 들어가는 나와 남우의 뒷모습을 보았다. 십년 동안 여러 일들이 있었다. 조심했지만 나는 임신을 했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식에는 남우의 이모들과 그 가족이 총출동해 꽤 시끌벅적한 예식을 만들었다. 가족이 무엇인지 잘 안다는 남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반드시 아이 때문에 한 결혼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아이가 아니었으면 구태여 법적인 관계로 묶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쌍둥이 남매가 태어났다. 사람들이 아들은 남우를, 딸은 나를 쏙 빼닮았다고들 말하면 나는 정색을 하고 아니라고 말했다. 아이들 돌 무렵에 남우가 피트니스센터 손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히 합의는 보았지만 남우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 뒤로는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남우는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느닷없이 아무 물건이나 발로 차기도 하고 가구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오랫동안 울기도 하고 그러다 갑자기 크게 웃었다. 정신과 전문의는 반복성 우울장애라는 진단을 내렸다. 남우는 상담치료를 계속하지 않았다. 의사 앞에서 혹시 비밀을 털어놓게 될까봐 두렵다고 했다.
아이들이 여덟살이 된 어느 봄날의 휴일, 남우가 노란색으로 칠한 스타렉스를 몰고 왔다. 남우는 미술학원의 통학버스를 운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타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들로 갔다. 아이들이 뒷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바다를 옆에 낀 좁은 도로를 지나는데 넓은 모래사장이 보였다. 남우가 차를 세웠다. 아이들이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들어가지 마시오. 손바닥만 한 나무표지판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조심해!
남우가 외쳤다. 남우의 목소리는 끝이 갈라지고 탁했다. 아이들의 귀에 닿을 기력도 의지도 없는 음성이었다. 조심하라는 외침 따위에 아랑곳없이 남매는 계속 앞으로 달려 나아갔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 그대로 바다에 빠져버릴 기세였다. 화장실엘 좀 다녀오겠다고 남우가 말했다. 흐린 날이었다. 그릇 헹군 물빛 같은 하늘에 뭉개진 구름 몇점이 박혀 있었다. 한떼의 갈매기들이 낮게 날았다.
나와 아이들 사이에는 오십 미터쯤의 거리가 있었다. 나는 멀리 선 채, 남매가 모래사장을 달리고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바다를 향해 돌진했다 멈추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십년 전 그날, 아무리 기다려도 최동우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남우가 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강남의 최동우성형외과는 결번이었다. 홈페이지도 닫혀 있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어떤 신문에도 한줄의 부고도 실리지 않았다. 네이버 검색에도 이름이 안 나오는 사람의 죽음이 신문에 날 리가 있겠느냐고 내가 남우를 달랬다. 그 건물에 다시 가볼 용기는 둘 다에게 없었다. 하긴 가더라도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보겠느냐고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이들은 빠르게 자랐고 우리는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최동우가 남기고 간 돈가방의 현금 뭉치는 조금씩 헐어 썼고 오래지않아 바닥났다. C회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날 그 6층의 방에서 남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최동우라는 존재는 어쩌면 원래 없었다고도. 그렇다고 지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바다 앞의 아이들은 이리 달리고 저리 달렸다. 각각의 그림자까지 넷이서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었다. 나는 남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여기, 나와 애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상상은 너무 그럴싸해서 덤덤하게 느껴졌다. 나는 세워둔 자동차로 걸어갔다. 조수석 시트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몸을 길게 뉘였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터무니없이 크게 들려왔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잠시라도 혼자인 순간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뇌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아주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눈을 떴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남우는 오지 않았고 정적 속에서 풀벌레만이 쓰, 쓰, 울었다. 선뜩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하나가 더 있었다. 어떤 아이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의 순간도 머지않으리라. 또다시 살아가기 위하여 나는 바다 쪽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