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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신규 朴信圭
1972년 전북 남원 출생.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창작지원금을 받고 2010년 『문학동네』로 작품활동 시작. poemuse@hanmail.net
철조망을 중심으로 안과 밖
바다에 가까워지면서 민통선 안쪽엔 둔치 평야
바깥쪽으로 우회전을 하면 책공장들이 있다
출입을 허가받은 농부는 한명도 만나질 못했는데
퇴근길에 보이는 씨 뿌리고 추수한 흔적들
그 한복판 시계청소에도 살아남은 버드나무 속
새둥지 하나가 간신히 팔년을 이어온 출근의 배후이다
해마다 주인이 바뀌는지는 모르지만
강안개의 촘촘하고 적막한 눈동자 같은 둥지
철조망에 고립되어서야 고요한 그곳은 당신이 꿈꾸는 집
가까운 군부대에서 간혹 총성이 울리고
휴전을 기억해냈다는 듯 해안포가 터지기도 했지만
포연과 총성이 피어오르고 포신이 향하는 곳은
늘 인간의 마을 쪽이었다
얼어붙은 강에 새겨진 달무리의 체온은 둥글었지만
낡은 서정을 읽다 잠드는 주말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창밖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음부 같은 초승달이 떠오르고
철조망 사다리를 타고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꿈을 꾸어도
세상은 여전히 점진적이거나 다급하게
전쟁과 내전을 기록하는 흑백영화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한파가 최고점을 넘어간 날 밤
좌우 남북에 찔러총 하고 탈영한 초병의 분노와 애인의 변심과
안개를 틈타 정차한 어린 연인들의 입김이 뜨거웠고
당신의 숨결이 밤새 잠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칠고 서툰 사랑들이 냉각되는 그 순식간에
차창엔 서리꽃, 녹슨 가시마다엔 서리서리 상고대 피었다
해가 솟자마자 동해까지 번지면서 빛나는 낙화의 행렬
녹아내린 꽃들에 목을 적신 철새들 다시 날아오르고
휴전선의 침묵을 뚫고 오느라 자꾸만 대열에서 뒤처지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 땅을 방문하는 철새의 여린 호흡소리가
항로 각도를 조정해 인간의 마을에서 멀어진다
간신히, 본능적인 삶의 기술로
새의 눈 속에서 조감도를 그리면 양안에 이어진 통제선
바깥쪽이 아니라 갇히고 격리된 쪽에
시계를 방해하는 공장과 마을과 사람들이 있다
유리비행
산과 나무를 튕겨내며 유리는
길을 자른다 오늘 낮에도 벽을 울리는 소리
붉은뺨멧새 한마리 바르르 떤다
쿵쿵 손금을 타고 녹아들어오는 박동
아직 남아 있는 체온을
허공에 힘껏 날렸다
신도시 외곽 습지에 들어선 생태도시
반사하는 사무실들의 유리는 견고하고
건물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의 얼굴도
속을 보이지 않는 거울처럼 표정이 없다
밀어내고 밀어낸 빛이 눈부셔
투신하는 뺨 붉은 날개와 고백들
맹금류처럼 노려보다가
안으로 스며든 죽음을 생각하다가
병든 원고의 위태로운 글자들
찌르고 쓰다듬어 묻어주고만 있는데
보다 못한 K선배가 버드쎄이버를 붙이자
거짓말처럼 우회하면서 길이 흐른다
허상을 좇는 마음을 허상으로 쫓는 그 마음!
허나 사랑의 길은 신기루에 눈멀어 피 흘리는 것
저 스티커들이 멧새의 비행을 밀어내는 순간
유리에 갇힌 심장이
매의 허기처럼 떨면서 차가워진다
두달째 이어진 야근을 끝내고
창문을 잠그려다 멈칫한다
달빛이 통과하면서 그린
사륙전지만한 교정지 위에서
파닥거리는 날갯짓,
창밖 공중으로 빠져나가는
달빛 깃털을 쫓아가다
쿵, 이마에 금이 가 쓰러진 자리
깨어져 쏟아진 달빛에서
붉고 다스한 피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