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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고경태 『1968년 2월 12일』, 한겨레출판 2015
베트남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유재현 劉在炫
소설가 hyoooo@hanmail.net
베트남이 남한에 있어 장막 너머로 사라진 존재가 된 것은 1975년 인도차이나 공산화 이후였다. 또는 마지막 파월병력이 철수를 완료한 1973년 3월을 단절의 기점으로 볼 수도 있겠다. 1992년 수교가 이루어질 때까지 3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두 나라가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는 데는 피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문제가 있었다. 베트남전쟁(2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한국은 미국에 이어 두번째 규모의 병력을 파병한 국가로 베트남에 침략국이었다. 그런데도 1992년 양국 간의 수교는 이 문제를 쟁점화하지 않고 그저 선선히 이루어졌다. 4년 뒤인 1996년 베트남은 마침내 미국과도 국교정상화를 성사시켰다. 미국과의 수교 직전 시점에서 베트남의 공식적 태도는 “우리는 과거의 증오를 상기시키길 원하지 않는다. 과거를 덮을 준비가 되어 있다. 미래만을 볼 뿐이다”라는 고위당직자의 말로 요약되었다. 따라서 전쟁에 대한 사죄나 배상책임은 수교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미국에 앞서 한국과의 수교과정도 다를 바가 없었다. 베트남으로서는 박정희정권의 굴욕적 한일협정을 능가하는 수교협상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협상자들은 꽤 즐거웠을 것이다. 특히 자본의 해외진출과 시장확보를 두고 이제 막 하위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던 한국으로서는 그 이상이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30년을 앞선 선발주자인 일본과의 경쟁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한국에 최소한 동등한 시작을 약속받을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었다.
두 국가가 지워버린 역사는 한국의 경우 민간의 몫으로 돌아왔다. 1999년 시작된, 파월 한국군의 양민학살에 대한 폭로는 그 시작이었다. 특히 반전평화운동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에서 베트남은 평화운동의 키워드로서 운동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전쟁의 역사에 대한 대중적 성찰과 자성은 또다른 성과였다. 그 성과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지구적 차원에서 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전쟁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성과였다.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는 15년 전,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양민학살을 폭로한 주역 중 한명인 고경태(高暻兌) 한겨레 기자의 결산처럼 여겨지는 책이다. 하지만 책은 양민학살에 머무르지 않는다. 1968년 2월 12일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역사적 의미는 베트남의 퐁니, 퐁넛에 머무르는 대신 서울과 토오꾜오, 워싱턴DC로 이어지고, 1968년 세계혁명의 열기에 타오르던 당대의 세계로 확장된다. 베트남전쟁이 지구적 차원에서 반제국주의 전선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한 핵심적 의제였음은 한반도 내에서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남과 북은 이 전쟁을 두고 또 하나의 전선을 형성했다. 예컨대 북한 무장게릴라의 청와대 습격이나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1968)이 그렇다.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이 본격적인 병영화를 시작한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심층취재와 수많은 인물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재현과 기록이 대부분 양민학살에 할애된 이 책에서 1968년 세계혁명과의 접점, 제국주의 전쟁의 경제적 측면 등은 단편적이거나 월간지 비사(祕史)처럼 흘러갈 뿐이다. 1968년의 하루를 통해 당대의 세계를 말할 수는 있겠지만 책 한권이 모두를 적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아쉽다. 또한 베트남전쟁을 통해 오늘 한국과 세계의 연원까지 더듬고 있는 책에서 정작 베트남이 희미하다. 15년의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인데 베트남은 여전히 양민학살이 폭로되던 1999년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한계는 사실 15년 전 가까스로 복원되기 시작한 베트남의 의미와 양국 간의 관계를 전혀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셈이어서 아쉬움은 안타까움으로 이어진다.
1968년 세계혁명의 주역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 또는 제국주의 본국이었다. 빠리와 베를린, 마드리드, 런던, 시카고와 뉴욕 그리고 토오꾜오가 주요한 무대였다. 그 대척점에 종전 후 마침내 세계적 패권을 장악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있었고 다시 그 대척점에 베트남이 있었다. 1968년 세계혁명의 많은 성격 중 하나는 반제국주의·신식민지 해방에 대한 지원이었다. 호찌민과 체 게바라, 마오 쩌둥의 초상화는 그렇게 시위의 상징이 되었다. 혁명의 불꽃이 사그라질 때쯤 미군은 인도차이나에서 패퇴했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푸념이 미군장성들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정작 전투(베트남전쟁)에서 이기고 전쟁(혁명)에 패배한 것은 세계혁명의 주역이었다. 베트남에서의 패퇴에도 불구하고 미 제국주의는 건재했고 지금도 그렇다.
베트남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30년 전쟁을 치르고 가까스로 평화를 찾은 나라가 다시 전쟁을 거듭했다. 캄보디아를 침공한 후 10년 동안 10만 병력을 주둔시켰고 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체제는 호찌민의 유훈과 전쟁으로 유지되었고 전후 사회주의 건설은 공염불이었다. 중소분쟁의 와중에 소련을 선택한 베트남은 소련이 손을 뗀 80년대에 붕괴될 지경에 이르러 덩 샤오핑의 시장개방을 본뜬 ‘도이모이’(혁신)로 돌파구를 강구했다. 외국인 직접투자가 생명줄이었으므로 한때의 적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자본에 대한 욕망이 기억과 역사를 모두 지웠다. 25년 동안 유지하고 강화했던 철권통치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 미국과 수교했지만 퐁니, 퐁넛의 피해자들은 공식적으로 사죄받지 못했고 배상받지 못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들의 국가가 그들의 권리를 억압했다. 그러는 동안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자본들은 최저임금 100달러 안팎의 저임노동력을 착취하는 동시에 상품을 판매하고, 한국 노동시장을 찾아 이주한 베트남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본국으로 이주한 신식민지 노동자가 늘 그렇듯 강퍅한 대우를 받고 있다.
우리에게 베트남은 무엇인가. ‘미안해요 베트남’이라고 말할 때 그 베트남은 어떤 베트남인가. 1968년 2월 12일 퐁니, 퐁넛에서 참혹한 학살이 이루어지던 그 무렵 제국주의 본국의 학생과 시민, 노동자들은 자신의 국가를 상대로 싸웠다. 그럼으로 그들은 지구 반대편의 전쟁터에서 학살당하고 투쟁하는 식민지 인민의 어깨를 부여잡았고 그들의 승리를 지원했다. 식민지 해방을 위해,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1968년의 어느 하루가 오늘의 우리에게 암시하는 게 있다면 그건 ‘미안해요’라고 말하며 자위하는 대신 국가를 뛰어넘어 불의에 대항해 평등하게 함께 싸울 수 있는 연대의 모색일 것이다. 나아가지 않고 1999년에 멈추어 있으면 1968년의 세계는 물론 오늘의 세계 또한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