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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지식채널 2014
과학에서 다원주의는 가능한가
이두갑 李斗甲
서울대 서양사학과·자연대 과학사 협동과정 교수 doogab@snu.ac.kr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스 라우싱 과학사 및 과학철학 석좌교수인 장하석(張夏碩)은 과학, 철학, 역사에 대해 우리가 가진 근본 가정들에 도전하며 혁신적인 주장을 내놓고 있는, 세계가 주목하는 학자이다. 근래에 출간된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2014년 봄 EBS 특별기획으로 방영되었던 열두차례의 강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이 책은 학술적 내용을 대중용으로 쉽게 풀어쓴 것만은 아니다. 저자의 전작 『온도계의 철학』(동아시아 2013)이 정밀한 논증을 통해 과학활동과 과학적 진보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추구했다면, 이 책은 그가 어떠한 학문적 여정을 거쳐 과학, 철학, 역사를 관통하는 새롭고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과학이라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지식체계에 대해 발본적인 차원에서 철학적·역사적 질문을 던질 때에 우리 사회가 창의력있고 포용적인 사람을 기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획일적인 사회를 극복하고 다원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음을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장하석이 도전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일견 단순하기 그지없다. 물은 1기압일 때 항상 100도에서 끓는가? 이를 측정할 온도계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산소를 왜 산소라고 하는가? 물 분자가 H2O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는 우리가 자연세계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믿는 사실들의 근본을 되묻는 것이 과학지식의 본질과 변화양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실제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끊는가? 스스로를 “물을 끓이는 이상한 철학자”(307면)라고 지칭하고 있듯이, 그는 실제 실험을 하면 물이 끓는 온도, 즉 비등점을 고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양은냄비를 사용하면 물은 97도에서 끊기 시작하고, 유리그릇을 사용하면 101도까지 물의 온도가 올라가고, 기름이나 흑연에 물을 중탕할 경우 105도까지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떻게 물은 1기압일 때 항상 100도에서 끓는다고 믿고 있는가?
그는 무엇보다 우리가 과학의 본질과 과학적 지식에 대해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과학이란 자연에 대한 유일한 진리를 산출하는 학문이고, 근대과학은 이미 확고한 이론적·실험적 토대를 구축해 지식을 발달시켜왔으며, 과학교육이란 이렇게 생산된 자연에 대한 정답을 배우는 일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그것이다. 그는 “‘진리가 정말 궁극적인 것이라면 과학이 다루기는 힘겨운 일 아닌가 생각”(166면)한다며, 철학이 사회의 상투적인 생각에 도전하며 사회 경직화를 막는 역할을 하듯이 과학에도 그 기저에 있는 근본 가정들에 대한 비판적 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날카로운 논의와 정교한 사례 분석을 통해 현대과학의 토대가 되는 온도, 길이, 질량, 시간 같은 과학의 기초적인 개념들이 종종 과학자들 사이에 합의된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측정의 창조와 개선이라는 인식과정의 반복을 통해 확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일례로 처음에는 온도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기준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량적 정확성도 미비한 온도계를 통해 연구가 시작됐지만, 연구를 통해서 더 훌륭한 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을 이용해 개선된 온도계를 만들면서 더 진전된 연구와 이론이 나온다. 이렇듯 과학은, 비록 확실하지 않은 토대를 기반으로 얻은 과학적 지식이라도 이를 통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실재에 대한 지식을 최대한 얻을 수 있다는 목표를 추구하며 점진적으로 정합성있는 지식의 체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설사 ‘과학혁명’ 같은 이론체계의 커다란 변화가 있더라도, 예전의 과학 또한 ‘틀린 사실’의 집합체이며 잊혀져야 할 지식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지적한다. 뉴턴 과학과 상대성이론이 융합된 GPS(전지구 측위 시스템)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과학적 지식과 체계는 새로운 이론적 변화 이후에도 그 나름의 가치를 유지하며 심지어는 새로운 과학의 다양성과 유연함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과학관에 기초해서, 물이 1기압일 때 항상 100도에서 끓는다는 ‘정답’만을 학생들에게 암기시키는 과학교육은, 과학이 점차 확장되고 정합성을 가지는 지식으로 발전해온 그 핵심적 동력과 이유를 깨닫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이를 잊게 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 비판한다. 그는 과학의 근본적인 문화적 가치란 정답에 의지하지 않고, 정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실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의문을 해결하려 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이나 가정을 스스로 의심하고 실험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과학적 탐구란 무엇인지에 대해, 과학을 통해 산출해낸 지식의 특징에 대해 한층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과학사, 과학철학이 창의적이고 다원적인 과학지식 체계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방식을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시각으로 살펴보게 되면, 현재 우리가 받아들이는 지식의 진정한 기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에게 철학은 우리 과학지식의 기초를 파고들어가서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역사는 이러한 철학적 질문을 정교화할 수 있는, 잊혀진 문제의 저장소이자 사고의 보고이다. 그는 이렇듯 역사적·철학적 접근을 통해 과학지식을 더 깊이 이해하고 다원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과학적 연구를 ‘상보(相補)과학’이라 부른다.
그는 상보과학이, 현재 전문가들이 고려하지 않고 있는 과학적 문제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해주고 이를 통해 과학지식의 다원성을 높여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현대 물리학자들은 이상적인 상태에서 물의 비등점에 대한 이론이 확립되어 있다며 장하석의 물의 비등점 실험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반면 공학자들은 원자로 냉각 등을 이유로 액체의 비등에 대한 복잡하고 실용적인 연구를 하고 있지만, 정작 물 자체의 비등점에 대한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장하석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물 끓임 실험 같은 상보과학적인 활동이 물의 비등점을 중심으로 새로운 과학적 질문을 만들어줄 수 있다며, 이러한 상보과학적 활동을 보장해주는 사회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창의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과학적 창조력의 기반을 강화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양하고 색다른 경험과 고민, 비판을 통해 다원적인 지식과 가치 체계를 구축하는 일의 중요성을 설파한 장하석의 책은, 천편일률적 목표와 가치를 좇는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