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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하승창 『나의 시민운동 이야기』, 휴머니스트 2015
새로운 시민운동을 상상하다
이필구
한국YMCA전국연맹 정책사업국장 ymca289@hanmail.net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민주주의의 기초는 사회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판단하는 ‘시민사회’의 성장에 있다고 한 바 있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국사회 역시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사회변화의 핵심동력은 시민운동이었고, 그 선두엔 시민운동가가 있었다. 『나의 시민운동 이야기: 조직하기에서 연결하기로, 변화하는 시민운동을 읽다』의 저자 하승창(河勝彰)은 이런 사회변화를 이끈 시민운동 1세대 운동가로,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시민운동의 태동과 성장을 주도한 대표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변화를 꿈꾸는 운동가’다. 시민적 감성을 잃지 않고 변화의 흐름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묘한 힘이 있는 사람이다. 저자는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1992년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활동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함께하는 시민행동’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활동을 거쳐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와 안철수 대선 캠프에 참여해 현실정치를 바꾸기 위한 실험도 했다. 최근에는 새로운 플랫폼 운동을 하는 ‘더 체인지’라는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런 그가 87년 이후 시민운동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운동의 맥락과 의미를 정리해 한권의 책에 담았다. 『나의 시민운동 이야기』는 저자가 경험한 시민운동에 관한 이야기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었는데, 1~3부는 1990년대 시민운동이 발아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와 2002년 이후 개인의 출현으로 표현된 시민운동의 변화 요구, 2008년 시민운동을 넘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4부는 민감한 주제인, 정치중립을 넘어선 정치참여 문제를 다루었으며, 5부에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모이고 떠들고 꿈꾸는 사회운동의 등장과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다.
한국 사회운동의 시기를 구분짓는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4·19혁명, 전태일(全泰壹)의 분신,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그랬다. 특히 87년 민주화운동은 시민운동의 태동과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도적 민주화가 이행되고 경제성장이 더해지면서 사회갈등의 복잡화, 가치지향의 다원화라는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국교사협의회 같은 대중적인 단체가 설립되었고,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여성민우회, 녹색연합, 참여연대 등 90년대 시민운동을 주도한 시민단체도 차례로 생겨났다. 이후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까지 시민운동의 성장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사회적 영향력이 계속 확장될 것처럼 보였던 시민운동은 그러나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이다.
저자는 급격한 사회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민운동이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왔다. 그 주된 흐름은 첫째, ‘운동방식과 의제의 변화’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중운동에서 합법적이고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시민운동으로 운동방식이 변화되었다. 또한 80년대 경제적 성장 아래 다양한 계층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문제를 제기하는 생활정치에 관심이 높아져 기존의 ‘담론 중심 의제’보다는 삶과 밀착된 ‘생활의제’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늘어났고, 그 결과 1990년대 시민운동은 급속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시민운동이 주도한 의제는 80년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나, 생존권 투쟁이라 불렀던 노동자·농민·빈민의 요구와는 다른 것이었다. 당시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통찰하고, 그에 걸맞은 시대적 과제를 제시했기 때문에 이룬 성과였다.
둘째는 운동주체의 변화다. 90년대 시민단체들은 스스로 과제를 설정한 후 시민에게 호소하고 캠페인을 펼치는 과정에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렇게 커진 여론을 정치권이나 권력기관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방향적인 90년대 방식의 시민운동’은 2002년 월드컵 광장문화와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건이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회현상과 정치사안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자발적인 개인도 운동의 주체로 사회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동원’되던 시민에서 ‘참여’하는 시민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 흐름은 이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이런 일련의 사회적 사건을 통해 저자는, 과거의 시민운동이 이미 만들어진 의제를 제기하고 여론화하는 방식이었다면, 최근의 시민운동은 의제를 만들고 형성해가는 과정이 곧 운동을 조직하고 네트워킹하는 과정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십여년 전부터 회자된 ‘시민운동의 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인가? 저자는 ‘90년대식 시민운동’이 다양한 운동으로 분화·확장되어 폭넓은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지만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다고 말한다. 90년대식 시민운동은 조직된 시민권력으로 중앙권력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냈지만 그 권력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사회권력과 지역권력을 바꾸기 위한 토대를 구축하진 못했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 ‘전문가·명망가 중심의 운동’이란 비판도 시민운동을 주도했던 기성단체들엔 뼈아픈 지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거론되는 시민운동의 위기는 90년대식 시민운동의 위기일 뿐이다.
저자는 2002년 이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개인들의 출현으로 사회운동의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변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한발짝 앞서 전망했다. 그에 따르면 이제 운동주체의 구분이 없어지고 운동방식 역시 다양해지면서, 때로는 개인이 때로는 공간이 때로는 웹사이트나 네트워크 자체가 사회운동의 주체 혹은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개인과 단체, 영리와 비영리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직의 형태와 운동의 방식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저자는 이런 새로운 운동이 다시 한번 우리 사회를 지금보다 나은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상호 간의 경계를 넘어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길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는 지금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모든 활동가들에게 저자가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는 말처럼 지금은 변화를 위한 새로운 상상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