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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선우 金宣佑
1970년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등이 있음. lyraksw@hanmail.net
비 오는 드레스 히치하이커
비가 내린다 오늘은 (죽은 門이 생피를 흘리듯)
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
빗줄기는 말랐구나 아, 나는 빗소리처럼 비만하구나
오래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고
핏대를 세운 발뒤꿈치를 들며 비 오는 오늘은 박물관에 갔네
세상 어디나 있는 식기들 (한참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러워지는,
더 한참 들여다보면 슬픔이 자글거리는)
총칼들 갑옷들 각종 서류들 인장들
목 없는 마네킹에 입혀진 화려한 씰크 드레스
아아 추워라, 우리의 고향은 정거장
오늘의 권력자에게 이 질긴 드레스를 보여주고 싶네
당신이 죽은 아주 오랜 후에도 우향우 좌향좌 기립해 있을
당신의 드레스
서성이고 서성이며 서성이는 드레스
(당신이나 나나 참,)
비 오는 날의 박물관 100년 간격으로 늘어선 방들
서성이다 지쳐 빗소리에 열쇠를 꽂는다
(정거장엔 빈 무덤들,
100년의 정거장에서 다음 정거장으로 떠도는
텅 비어 질겨진 드레스들 앞에서
윙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누군가)
이봐, 나 본 적 있지?
빗줄기는 저렇게 가는데
젠장, 빗소리는 왜 이리 질긴 거야,
두 생애나 밀린 급료를 어디서 받으라고!
박물관 지붕으로 쏟아지는 마른 빗줄기
헤치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멈추었다 떠난다
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이런 이유
그 걸인을 위해 몇장의 지폐를 남긴 것은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닙니다
하필 빵집 앞에서
따뜻한 빵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던 그 순간
건물 주인에게 쫓겨나 3미터쯤 떨어진 담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를 내 눈이 보았기 때문
어느 생엔가 하필 빵집 앞에서 쫓겨나며
드넓은 얼음장에 박힌 피 한방울처럼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이 적막했던 것만 같고—
이 돈을 그에게 전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잘 기억하기 때문
그러니 이 돈은 그에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나에게 어쩌면 미래의 당신에게
얼마 안되는 이 돈을 잘 전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