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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리 기획·번역 『페미니즘 선언』, 현실문화 2016

페미니즘 선언문들, 미국 래디컬 페미니즘‘들’

 

 

양효실 梁孝實

미학자 hosil69@naver.com

 

 


175_406한국의 메갈리안은 2017년에도 계속 활동 중이다. 어디서 어떻게 끝날지, 어떤 변이체들을 양산하면서 계속 이어질지 여전히 미지수지만 페미니즘 운동사에서 본다면 별 무리 없이 래디컬 페미니즘에 속하게 될 것이다. 더이상 일상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하에 할 수 있는 한 가장 공격적인 ‘남성혐오’로 되돌려주거나, 전례 없는 여성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면서 여성의 문제강간, 낙태, 임신, 생리 등를 여성의 언어로 ‘다시’ 말하는 지금 이곳의 페미니즘을 지지하기 위해 1960·70년대 미국 래디컬 페미니즘의 선언문들을 묶어 번역한 책이 『페미니즘 선언: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페미니즘 선언문과 에세이 중 “1960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에서 발표된 것으로 래디컬 페미니즘 내의 다양한 조류백인 여성, 레즈비언, 흑인 여성의 급진적·사회주의적·문화주의적 입장를 다룬 글”(21면) 9편을 묶고 번역했다.

이 책의 선언문들은 모두 ‘제2물결 페미니즘’(second-wave feminism)의 자장 안에 있다. 18세기에 시작된 ‘제1물결 페미니즘’이 여성참정권을 위해 싸웠다면 제2물결 페미니즘은 가정, 일터, 연애, 섹슈얼리티와 연관된 온갖 불평등을 의제로 가부장제 사회에 맞섰다. 여성의 정치적 각성 혹은 의식화를 촉구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선언문은 공격적이고 위반적이다. 60년대의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만이 아니라 유색인, 청년, 동성애자 같은 사회 내 다양한 집단의 차이가 광장을 메운 68혁명의 여파 안에서 등장했다. 이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비단 백인 (엘리트) 페미니스트들만이 아니라 백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최하층 계급 출신 페미니스트도 자신들의 긴급한 문제와 그것을 반영한 선언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하나의 동질적 운동으로 알고 있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가까이서 보니 이질적인 복수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차이들이 공존한다. 관념적 운동이 아닌 자생적인, 당면한 문제에 대한 긴급한 반응이다. 제2물결 페미니즘을 주도했던 ‘레드스타킹’의 1969년 선언문은 “여성 ‘계급’ 의식”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을 가부장제에 대한 전면전의 중요 의제로 삼았다.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의 저자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이 가담했던 레드스타킹의 선언문은 50년 가까운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선언문으로 전용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또한 ‘쌍년’ 선언문으로 번역하는 게 더 나았을 듯한 1969년의 「드센 년 선언문」은 “진정한 여성”이 될 수 없는 여자들, 기존의 성역할을 위반하는 양성적인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드센 년(bitch)이란 ‘욕’을 사용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경쾌하다. 레즈비언 부치(Butch, 레즈비언 관계에서 리드하는 쪽)들의 선언문으로 보아도 좋을 이 글은 모든 여성을 참칭하는 레드스타킹의 선언문과 달리 자신들을 푸대접한 “진정한 여성들”과의 차이를 계속 견지한다.

에세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1969)는 친밀함의 영역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비판하려는 페미니즘 정치의 구호를 제목으로 하고 있다. 저자 캐럴 해니시(Carol Hanisch)는 「강간 반대 선언문」(1971)을 작성한 뉴욕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일원이자 레드스타킹의 멤버이며 미스 아메리카 반대시위를 주도한 활동가다. 그런데 이와 병행해서 해니시는 “치유”나 “개인적인” 모임으로 불렸던 모임에 참여해서 “거리와 광장에 나서고 싶어하지 않는 여성들”, 비정치적인 혹은 비운동권인 여성들과 4년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이 에세이를 썼다. 이 경험과 연관해서 그녀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비정치적인’ 여성들의 의식에는 무언가가, 우리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의식만큼이나 정당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나는 그들이 매우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많은 여성이 행동에 나서지 않는지 알아내야 한다. 어쩌면 행동에, 아니면 우리가 행동하는 이유에 무언가 잘못된 게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마음속에서 행동이 필요한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106~107면)라고 술회한다. 해니시는 ‘우리’라고 부를 수 없는 여성들, 반페미니스트로 보아도 좋을 이 여성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면서, 그녀들의 ‘물러선’ 말하기를 경청할 것을 요청한다. 지금 이곳의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부분이다.

한편, 1966년에 창단된 뒤 주류 페미니즘이 된 전미여성협회(NOW)의 양순한 이성애주의 페미니즘을 거부하면서 그들의 회의장에 난입한 이들이 낭독한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문」(1970)은 향후 분리주의를 표방하면서 페미니즘 내부의 차이를 드러낸다. 반면 1977년의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문」은 가령 “우리는 흑인 남성과 함께 인종차별에 맞선다. 동시에 우리는 성차별에 맞서 남성과 싸운다”(154면) 같은 문장을 통해 백인 페미니즘과의 차이를 가시화하면서도, 여성억압에서 성적인 근원만 이야기하고 계급과 인종은 무시하는 앞서의 백인 레즈비언 페미니즘과 달리 분리주의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1967년의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은 작성자인 밸러리 쏠러너스(Valerie Solanas)가 유일한 당원인 결사단을 위한 선언문이다. 상당히 긴 이 선언문의 공격적이고 과격한 남성혐오의 어조나 어휘를 놓고 혹자는 위트와 패러디의 언어라고 분석했다. 그녀의 끔찍한 가족사나 비참한 삶은 그녀가 선언문에서 묘사하는 결사단원의 성격, 즉 “지배적이고 안정적이며 자신감으로 가득하고 심술궂고 폭력적이며 이기적이고 독립적이며 자부심이 강하고 스릴을 추구하며, 자유분방하고 오만한”(217면)에서 볼 수 있듯이 단지 그녀의 페미니즘을 더욱 입체적이고 살아 있게 만든 배경이었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표방한 것으로 가정되어온 래디컬 페미니즘이 이후의 포스트-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복수(複數)였다는 것이 이 책에서 다시 배운 사실이다. 내부의 차이는 ‘자생적’ 페미니즘들의 생생함을 증명한다.

2017년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즘은 긴급한 사안, 아니 당면한 문제 덕분에/때문에 가시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물론 이 책이 근거리에서 바라본 1960~70년대 미국의 페미니즘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곳의 페미니즘도 몇십년 후에는 복수였음이 드러날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대체 불가능성은 그럼에도 종료된 사건들의 기록인바 역사의 일반성에 비추어본다면 끝이나 결과를 이미 노정한다. 그러나 지금 미국과 전세계에서 다시 래디컬 페미니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반복(유사성)으로부터 차이(새로움)를 끌어낼 필요를 촉구한다. 당면한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된 움직임들은 거시적인 관점에 근거한 이론(의 초연함)에 저항한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의 래디컬 페미니즘이 문제가 많고 그 한계가 뻔히 보인다고 생각하면서도 침묵하거나 태도를 유보한 기성 페미니스트들, 다른 진영의 페미니스트들이 있을 것이다. 미움 받기 위해 아니 미움 받음에도 여성혐오에 맞서 싸우겠다고 일어선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내는 목소리의 기시감에도 불구하고 계속 듣고 읽고 보아야 하는 이유다.

양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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