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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용언 『문학소녀』, 반비 2017

복권의 복고취향, 혹은 반역사적 향수

 

 

양효실 梁孝實

미학자 hosil69@naver.com

 

 

177_445“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가 없다”고 성찰한 벤야민(W. Benjamin)은 이어서 “결을 거슬러서 역사를 솔질하는 것이 역사적 유물론자의 과제”(『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92, 347)라는 문장을 통해 문명사의 폭력과 비관에도 불구하고 약자 혹은 소수자가 과거에 개입해야 할 의무와 방법을 제시했다. 자신의 언어로 쓰인 역사를 갖지 못한 약자가 과거를 재방문하는 것은 승리자의 언어로 쓰인 역사를 ‘해체’하고 혹시라도 있을 ‘다른’ 역사기술의 실마리를 발굴하기 위함이다. 벤야민 사후의 (탈식민주의나 여성주의 같은) 후대 실천가들이 발견하거나 제시한 결을 거스르는 솔질의 방법은 크게 보아 두가지인 것 같다. 우선 폭력과 야만을 전제로 한 문명사의 구조를 가시화하기 위해 야만의 ‘기록’과 문명사를 함께 쓰는 방식이다. 다음으로 억압당했지만 흔적으로건 파편으로건 남아 있는 약자의 기록들을 이어 붙여 약자의 자긍심과 해방을 위한 서사를 쓰는 방식이다. 전자는 약자에 기댄 강자의 문명사 혹은 보편사를, 이분법적 언어, 즉 강자와 약자나 억압과 해방 같은 위계적 언어의 역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한계를 드러내면서 특수하고 당파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강등시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후자는 강자가 지금껏 사용해온 문명과 야만, 억압과 해방 같은 언어를 정당화하는 근대적 프레임을 이제 약자의 입장에서 재활용하려 한다.

여성, 유색인, 청년, 퀴어와 같은 주변부적 존재들의 역사에의 개입, 그러므로 현실에의 개입은 그렇게 두개의 극단적으로 다른 방법 사이에서 움직인다. 전자가 난해하고 엘리트적이고 비관적이고 공모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면, 후자는 대중적이고 퇴행적이고 반동적이라고 비판받는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 이곳의 여성주의는 두번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우발적으로 현실에서 발생한 여성주의의 긴급함 때문에 그려낸 불가피한 궤적이고, 전문가 엘리트의 전유물인 학문적 방법론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위한 프레임이라는 점에서 이 여성주의의 한계보다는 의의를, 지속 가능성보다는 적용 가능성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도 주지하는 바다. 그러나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자리, 정체성, 혹은 기표를 만든 비가시적인 이데올로기의 편재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남성과의 직접적 투쟁이나 남성에 맞서 말하기를 지속하는 것은 결국 남성의 자리 혹은 권력을 지지보증정당화하는 선에서 이 운동이 멈출 것이라는 비관 역시 유념해야 한다. 여성은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고, 여성의 경험은 그 자체로 진짜가 아니며, 여성의 행위성은 그 자체로 ‘다른’(진정한?) 실천이 아니다. 여성이 이미 항상 이데올로기적역사적으로, 즉 우연적으로 구성된 이미지, 언어, 관념임에 유의해야 한다.

친일, 친독재, 친군부, 친미라는 한국 근대사의 중심을 관통하는 중심 자리를 그것도 제일 앞에서 따랐던 전봉덕을 아버지로 두고, 아버지의 ‘권력’에서 영영 독립하지 못하고 매몰된 채 한국 최고의 학벌·집안·배경을 가졌음에도 ‘평범’을 거부했고,1 문학에 이르고자 했으나 수필가·번역자에 머물러야 했고, 아직도 변사인지 자살인지 모를 죽음으로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전혜린(田惠麟, 1934~65). 그런 그녀를 경유해서 한국의 근대를 재방문하는 발걸음들, 욕망들. 한때 문학소녀였거나 지금 문학소녀인 이들에게 여전히 잘 팔리는 문화상품이자 대중적 우상인 여자. 거의 모든 것을 가졌지만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결국 가질 수 없었던 것, 영영 부재했던 ‘능력’ 혹은 탁월함에의 욕망으로 고통받았던 여자. 전무한 역사적 인식과 과도한 자기연민 덕분에 소녀의 단계에서 사라진 그 여자를 문학소녀로 혹은 문학소녀의 텍스트로 다시 읽는 것은 어떤 반역사적 착종이고 낭만적 동일시인 것인가? 전혜린을 기존 문학사와 그녀를 보호하고 봉인한 사적인 관계로부터 떼어내서, 결을 거슬러 읽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경멸적 호칭으로서의 문학소녀를 자긍심의 원천으로 재전유하려는 여성주의적 각성에 필연적인 과정인가? 전혜린의 과도한 감상성과 자기연민, 그러므로 자기혐오는 그녀의 자살과 그녀의 상품성을 경유하면서 동화, 동일시, 수신해야 하는 여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소의 ‘운명’인가?

김용언의 『문학소녀: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는 저자 스스로가 밝히듯 “먼저 쓰인 연구서와 논문들에 온전히 기대고 있”(229면)는 책이다. 새로운 정보나 관점은 부재하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문학권력을 쥔 남성 비평가작가들에 의해 문학소녀나 ‘부잣집 딸내미의 교양 있는 공주 코스프레’와 같은 비난을 받아야 했던 전혜린을 ‘다시’ 구하기 위해 혹은 지금의 문학소녀라는 관점에서 복권하기 위해, 문학과 수필의 이분법, 문학청년과 문학소녀의 이분법 같은 근대적 이데올로기를 가시화하고 그것을 역사적 구성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전혜린은 그녀의 지인들의 ‘우정’, 그녀의 삶이 내포한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알아본 문화생산자들의 ‘혜안’ 덕분에 스테디셀러로서 문화산업의 중심을 차지하는, 이른바 문화‘권력’이다. 그녀의 이국 취향, 한국의 입시구조 ‘안’에서 증명된 그녀의 ‘천재성’, 좋고 우수하고 강렬한 것들을 보고 감각하고 재현해내는 감상적 수필가로서의 재능, 그리고 아직도 안개에 싸인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여전히 한국이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팔리고 소비되고 전유되는 이유이다. 전혜린의 자기혐오는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도 묻어 있는 역사적 상흔이자 산물이고, 서울대 법대 입학과 독일 유학이라는 이력은 한국 공교육의 구조적 문제를 탁월한 개인의 승리(신자유주의!)로 전치시키는 근대적 관습을 정당화한다. 전혜린의 복권은 결국 한국의 근대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근대의 문제 또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고, 계급적당파적세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차이를 사유할 수 없는 기제로 인한 무모순적인 동일시가 여전히 지배적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전혜린의 복권은 결국 문학소녀들의 복고 취향의 여파이고, 이 복고 취향은 아직 역사와 문명 혹은 근대에 들어오길 거부하는, 혹은 그럴 수 없는 반역사적이고 낭만적이고 그렇기에 따듯한 여성들의 욕망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전혜린의 수필-기행문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자의식이나 모멸의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남성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혹은 식민지 시기 한복판에 유럽으로 건너가지 않았기 때문”(104면)이라고 분석한다. 전혜린은 ‘근대’문학을 하는 데 필요한 고통받는 자의 자의식을 남성이 아니기 때문에, 즉 여성‘이기에’ 갖지 ‘않았다’는 뜻인데 사후적으로 전혜린에게 수여된 이러한 여성성은 그녀가 역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알리바이이고, 그녀가 역사적으로 사유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유학 시기의 특수성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고 이유이다.

저자는 전혜린이라는 문학소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긍정하는 ‘문학소녀’로, 남성작가들이 경멸적 언어로 전혜린에게 부착시킨 문학소녀를 덮는다. 그리고 전혜린에 대한 저자의 ‘복권’은 40대인 저자가 이제 전혜린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복고적 혹은 퇴행적 결론을 통해 완수된다. 즉 전혜린의 글을 읽는 것은 그녀를 창으로 삼아 “독일 뮌헨의 새로운 아름다움이나 철학적 고양”을 배우는 게 아니라 “교양 있고자 하는 전혜린의 발버둥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응시”(221면)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한다. 잊지 말자. 전혜린은 거의 모든 것을 가진 아버지의 훈육에 순종했던 딸이고 ‘남성적’ 제도로서의 문학으로 진입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러나 수필가번역자와 같은 ‘경멸적’ 단계에서 멈춘 근대적 인간이었다. 아버지가 준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 혜택을 ‘성장’이 아니라 ‘자기연민과 자기혐오’에 제한했던 그녀는 결국 아버지의 기대와 이상에는 부응했지만 그렇기에 자신을 잃어버린, 그럼으로써 문학소녀에 머물렀던 ‘평범한’ 여성이었다. 문학소녀는 경멸적인 언어지만 그 언어가 지금 이곳 여성들의 자기긍정이나 화해에 필요한, 결을 거슬러 솔질한 역사적 언어라면, 그 언어는 과거에 자기긍정이나 화해를 위해 이미 낭만주의, 멜로, 센티멘털리즘을 적극 활용했던 여성들의 기록을 통해 보충복권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문학소녀의 ‘복권’은 전혜린을 경유해서는 안 된다. 하위문화로서, 여성 대중의 자생적 문화로서, ‘읽고 쓰는’ 일상적인 쾌락을 누렸던 여성문화의 복권은 다른 과거로부터, 좀더 밑, 좀더 문화상품이 될 수 없는 주변부 여성들을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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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역설은 한국 근대 상류층 문화의 부재 혹은 무능을 방증한다. 상류층 문화가 살아 있는 삶을 경유했다면 ‘평범을 지향했고’였어야 한다. 전혜린은 너무 일찍 죽었거나 너무 일찍 죽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