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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 제22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작
역사의 눈과 말해지지 않은 소년
조갑상의 『밤의 눈』과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 대하여
김요섭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이 어떻게 소통되며,
기억이 어떻게 보존되고 세대 간에 전달되는가 하는 것이다.1)
1. 죽음의 기억과 기록
죽음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는 자들만이 말할 수 있으므로 시간의 지평에 세워진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을 경유해야만 역사-세계에 등장할 수 있다. 역사-세계를 만들어내는 사건들은 수많은 죽음을 그 결과와 조건으로 한다. 그러므로 역사-세계는 죽음 위에 쌓아올려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역사-세계는 죽음을 말하는 방식뿐 아니라 죽음 앞에 침묵하는 방식으로도 만들어져왔다. 죽음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비극은 지워지고 지배는 정당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역사-세계를 둘러싼 갈등은 죽음을 말하지 않으려는 자와 말하려는 자들 사이의 긴장이다. 세계에 말을 거는 존재로서 문학이 불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말해지지 않은 죽음을 다시 되뇌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침묵을 통해 견고해지려는 역사-세계에 배회하는 문학은 끝없는 웅얼거림으로 균열을 만들어간다.
우리 시대에도 죽음을 말하려는 불온한 문학은 침묵하지 않는다. 아니 침묵하지 못한다.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저 차가운 바다의 입에 수백의 생명이 삼켜지는 것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바다에 목 놓아 울기 전에도, 용산의 화마가 가난한 이들을 삼키기 전에도 우리 시대에는 수많은 죽음들이 촘촘히 수놓아져 있었다. 역사의 물결에 떠밀려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가던 그 비극들을 건져내어 시대의 이정표로, 별자리로 새기려는 문학의 노력이 있어왔다. 세월호 이후 다시 죽음을 말하여 세계에 맞서려는 불온한 문학을 위해서 어떤 죽음들이 어떻게 말해져왔는가 살피고자 한다. 때로 어떤 죽음은 단지 말하는 것만으로는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죽음은 침묵 속에서 사라지는 데 반해 어떤 죽음은 반복되는 호명에도 불구하고 틈이 벌어져 있다. 말해지지 않은 죽음이란 이 두가지 형태 모두로 나타난다. 말해지지 않은 죽음의 차이를 보여주는 우리 역사의 두 비극이 ‘국민보도연맹학살’과 ‘광주민주화항쟁’이다. 국민보도연맹학살은 그 광범위한 학살 피해에도 권력의 재갈과 역사의 망각에 풍화되어 그 이름조차 희미하다. 그에 반해 광주민주화항쟁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5월의 모든 피가 민주주의만의 출혈일 수 없다. 그 땅에 쓰러진 주검들을 ‘시민’이라는 하나의 이름만으로 모두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5월 광주, 총탄에 무너진 각각의 이름들도 보도연맹학살처럼 희미하다. 이렇게 희미해진 ‘죽음의 이름’을 포착한 두편의 소설이 눈길을 끈다. 바로 조갑상(曺甲相)과 한강(韓江)의 근작 장편이다. 조갑상 장편 『밤의 눈』이 침묵 속에서 사라져간 보도연맹학살을 포착해내고 있다면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죽음의 이름 속에 있는 틈을 파고든다.2) 두 작품은 국가폭력이라는 유사해 보이는 사건들에 대한 상이한 접근을 통해 죽음의 이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한다. 또한 학살 ‘이후’를 치밀하게 파고들며 죽음이 역사-세계를 규정짓는 방식을 각각의 시선으로 분석해낸다.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조갑상과 한강의 차이는 모든 죽음을 지켜보는 자, 바로 ‘달’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통해서 가시화된다.
몇 사람이 소리치며 몸을 일으키고, 같이 묶인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땅! 하는 소리가 울렸다. 한용범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달을 보았다. 밤의 눈. 허벅지인지 옆구리인지가 뜨끔하다 싶더니 앞사람들이 벼 가마니 쓰러지듯 풀썩 몸을 덮었다. 그는 달이 공포가 아니라 밤의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고 있음을 의식을 놓기 직전에야 알았다.(『밤의 눈』 149면)
달은 밤의 눈동자래. 모임의 막내였던 당신은 어쩐지 그 말이 무서웠다. 저 검은 하늘 가운데, 얼음같이 하얗고 차가운 눈동자 하나가 침묵하며 그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말 들으니까 달이 무섭잖아요 언니.(『소년이 온다』 136면)
밤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눈동자. 달에 대한 두 작품의 이미지는 언뜻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달에 대한 두 작품 속 인물들의 감정은 전혀 다르다. 보도연맹학살에 휩쓸린 ‘한용범’은 총격에 정신을 잃기 직전 달과 마주한다. 그는 달을 죽음의 밤을 채운 공포에서 분리해내어 자신을 지켜보는 눈으로 파악한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공포를 덜어준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의 ‘임선주’에게 차갑고 침묵하는 눈동자의 응시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아직 광주의 5월과 마주하기 이전의 기억이지만 달의 생명 없는 응시에 대한 두려움은 5월 이후의 감각과 동일하다.
한 그림자가 나에게서 떨어져나갈 때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어. 구름에 싸인 반달이 눈동자처럼 나를 마주 본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건 단지 텅 빈 은빛 돌, 생명이 살지 않는 거대하고 황량한 암석 덩어리일 뿐이었어.(『소년이 온다』 49면)
생명이 없는 밤의 눈, 그 황량한 시선은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무의미한 것이다. 어느 경우도 달은 한용범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지 않는다. 왜 두 인물은 밤의 눈인 달에 대해 전혀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는가. 죽음과 직면했던 이들이 서로 전혀 다르게 말하는 달의 모습을 보며, 조갑상과 한강이 ‘말해지지 않은 죽음’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죽음과 죽음 이후
죽음은 역사-세계의 원인이자 결과다. 주검들은 한편에서 역사-세계를 쌓아 올리고 다른 편에서는 역사-세계에 밀려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쏟아진다. 역사-세계와 죽음의 순환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어른거린다. 조갑상과 한강의 소설은 과거에서 미래로 연장되는 죽음의 속성을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학살의 무더위가 식은(공교롭게도 보도연맹학살과 광주민주화항쟁 모두 초여름의 무더위와 함께 시작된다) 뒤에도 이어지는 죽음의 파장을 정교하게 추적해간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쟁의 참화는 남하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밀려 내려왔다. 전장의 총성과 비명도 그 걸음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리라. 그러나 전쟁의 시작과 함께 남녘의 이곳과 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전장에서 멀어질수록 더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정부에 의해서 조직된 좌익전향자 단체 국민보도연맹3)에 대한 예비검속과 예방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밤의 눈』은 1950년 수개월에 걸쳐서 자행된 보도연맹학살과 그 이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밤의 눈』은 보도연맹학살이 자행된 1950년의 여름과 전쟁 이후인 1960년, 1961~68년, 1972년, 1979년이라는 다섯개의 시간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 이후의 시간에 대한 세밀한 분절은 소설이 학살의 실상만큼이나 학살 이후에 대해서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밤의 눈』을 구성하는 다섯개의 시간축은 두개의 흐름으로 나뉘어 중심인물인 한용범과 옥구열의 삶 속에서 유사한 양상을 반복한다. 반복되는 시간의 구조는 1950년과 1960년의 한 축과 1961~68년, 1972년, 1979년의 또다른 축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 국가에 의한 낙인, 국가폭력과의 조우 그리고 낙인에 대한 저항의 과정을 거친다. 1950년과 1960년의 시간은 보도연맹원으로의 낙인, 학살과 은폐(1950년) 그리고 4·19 이후 조직된 유족회의 진상규명 시도와 읍장선거(1960년)로 이어진다. 1961~79년까지의 이야기는 5·16쿠데타 이후 유족회 활동으로 인해 옥구열과 한용범에게 사상범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에서 시작해, 감시와 폭력(1961~68년, 1972년) 그리고 옥구열이 부마항쟁 시위행렬 속에서 더이상 사상범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표출하는(1979년) 것으로 끝을 맺는다. 1950년과 1960년의 이야기가 학살이 자행된 소설 속 배경인 대진읍의 집단적 체험의 성격이 강하다면, 1961년 이후의 이야기는 한용범과 옥구열의 개인적 체험 속에서 폭력의 실체를 파악할 전형성을 발견하고 있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의 광주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광주항쟁의 마지막 날 도청에 남아 있다가 계엄군에 의해서 살해당한 소년 ‘동호’와 소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밤의 눈』이 보도연맹학살의 전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학살사건 이후를 촘촘하게 구축했듯이 『소년이 온다』는 소년의 죽음 전체를 서사화하기 위해서 80년 5월 이후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소년이 온다』는 에필로그인 「눈 덮인 램프」를 포함해서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소년 동호의 시선을 따라가는 1장 「어린 새」와 계엄군에 사살당한 또다른 소년 ‘정대’의 이야기인 2장 「검은 숨」, 이 두 장면뿐이다. 이 외의 다섯개 장은 80년대 중반(「일곱개의 뺨」), 90년대 이후(「쇠와 피」 「밤의 눈동자」 「꽃 핀 쪽으로」 「눈 덮인 램프」)를 배경으로 한다. 흥미로운 점은 「어린 새」를 제외하고는 소년 동호가 중심이 되는 장이 없다는 것이다.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소년이 온다』는 그가 어린 시절 계엄군에 의해서 살해당한 소년 ‘박동호’에 대해 듣게 되면서 잉태된 작품이다. 그럼에도 동호의 서사는 1장에서 멈출 뿐 아니라 그 1장조차 동호의 죽음 이전에 끝을 맺는다. 동호가 맞이한 죽음의 순간은 4장 「쇠와 피」에서 타인에 의해 진술될 뿐이다.
광주의 5월 이후를 다루고 있는 다섯개의 장은 작가 본인을 포함해 소년 동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들의 삶과 시선을 따라간다. 소년의 어머니를 다룬 6장 「꽃 핀 쪽으로」는 동호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압도된 것 같지만 소년을 드러내는 알레고리로 작동하는 대신 그의 부재를 짊어진 어머니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이처럼 『소년이 온다』는 희생된 소년을 위한 이야기임에도 생존자들의 삶을 통해 소년의 부재를 선명히한다. 그리고 이로써 죽음으로 인한 부재의 절대성을 보여준다. 그 절대적 부재와 제목 ‘소년이 온다’가 암시하는 존재의 귀환이라는 테마가 이루는 모순을 풀어나가는 데 『소년이 온다』 서사전략의 핵심이 있다.
이렇듯 조갑상과 한강은 죽음 이후를 천착해 들어간다. 학살의 비극은 한 생명이 숨을 멈추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의 시간이 죽음의 자장 아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죽음의 지속성을 조갑상은 폭력의 반복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읽어간다. 반면에 한강은 그것을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 공백으로 그려낸다. 소년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을 절룩거리게 하는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된다. 그 절룩거리는 삶들 속에서 소년의 죽음은 지속된다. 이처럼 죽음 이후를 말하는 조갑상과 한강의 방식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인물의 존재 여부다. 『밤의 눈』이 옥구열과 한용범을 중심으로 서사를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데 반해 『소년이 온다』는 독립된 각각의 인물들로 파편화된다. 중심인물의 존재와 부재는 다시 달의 이미지와 결합되는데 이 결합의 방식을 읽어낼 때 죽음을 응시하는 두 작가의 의식 전모가 파악될 수 있다. 이제 달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밤의 눈』과 『소년이 온다』를 읽어내려가자.
3. 밤의 눈
폭력은 언제나 그것으로 인해 파괴될 대상이 누구인가를 찾아내는 데서 시작된다. “집중시키거나 체포하지 않고는 어떤 집단도 죽일 수 없고, 누가 그 집단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고는 그들을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4)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도연맹학살 과정에서 ‘보도연맹원’ 혹은 ‘사상범’ 낙인을 찍는 일이 선행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낙인찍기5)가 자의적이고 맹목적인 과정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밤의 눈』은 학살의 피해자이자 유가족인 한용범과, 옥구열이란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경남에 위치하는 것으로 설정된 가상의 공간 ‘대진읍’의 지주이자 지식인인 한용범과 소농의 아들이자 장사꾼인 옥구열이 한 범주로 묶였다는 데서 그들에게 가해진 낙인의 자의성이 감지된다. 옥구열의 아버지 ‘옥수한’은 보도연맹 가입자 할당량을 채우려는 읍장에 의해서 원치 않게 보도연맹원이 된다. 반면 지주인 한용범은 보도연맹원은 아니었으나 좌익의심분자로 몰려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예비검속의 대상이 된다. 단지 ‘의심된다’는 자의적인 이유만으로 전향 대상자가 된 이들은 결국 학살 대상으로 확정된다. 1961년 이후 한용범과 옥구열에게 가해진 ‘사상범’ 낙인은 50년의 그것처럼 여전히 자의적이다. 보도연맹학살의 실태를 조사하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한용범과 옥구열이 조직했던 유족회 활동이 군부에 의해서 좌익활동으로 규정된 것이다.
낙인은 폭력의 질서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통행증과도 같다. 낙인이 찍힌 대상을 향한 폭력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1950년 대진에서는 군병력과 그에 협조하는 준군사조직에 의해서 학살이 자행된다. 옥수한을 비롯해 연행된 인원 대다수는 사망하고 한용범은 부상을 입으나 도주하여 살아남는다. 그러나 준군사조직을 이끄는 지역유지인 이주호에게 한용범의 동생인 ‘한시명’이 살해당한다. 낙인이 가해지는 순간 약탈도, 가족을 대신 살해하는 것도, 심지어는 혐의에 대한 조작조차 허용된다. 한용범을 위협했던 지역유지와 군인들의 결탁처럼 대진읍에서 수일간 진행된 학살에서 국가 하부의 말단 실행자들은 빨갱이란 국가의 낙인을 무기로 삼아 자기의 욕망을 달성했고 국가는 이를 묵인한다.
낙인 찍힌 자들에 대한 제약 없는 폭력은 학살 이후에도 반복된다. 유족회 활동으로 인해서 처벌받은 전과 때문에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된 한용범과 옥구열은 국가의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된다. 한용범에게 사상테스트라는 명목으로 간첩으로 위장한 형사를 보내서 가짜 혐의를 만들려는가 하면 뒤숭숭한 시국에서 국민의 이목을 돌릴 가짜 간첩단을 만들기 위해 옥구열을 고문하기도 한다. 낙인 찍힌 자들은 언제든 ‘사건’이 필요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예비자원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완고하게 버텨서 누명은 면했으나 “언제 또 간첩사건이나 시국사건이 터져 대공기관에 불려가고, 인적이 드문 시간에 길에 버려질지”(340면)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의 삶을 옥죈다. 국가에 의해 낙인이 찍힌 이상 그들과 폭력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던 것이다.
낙인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뿐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위력을 잃지 않는다. 1950년의 대진읍은 학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전까지는 주민들이 견고하게 얽혀 있던 곳이었다. 주민들은 보도연맹원과 불온분자 들을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조우해왔으므로 낙인을 수용하는 대신 그에 저항한다. 지역사회의 압력을 통해서 학살의 확산을 일정부분 억제한 것이다. 지역사회의 반발은, 도망쳤다가 붙잡힌 한용범의 처형을 막고, 전쟁 이후 준군사조직을 거느리던 지역유지들의 처벌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지역공동체 바깥에서는 오직 ‘사상범’이라는 식별부호로만 인식됨으로써 낙인의 강력한 위력이 드러난다.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희생자인 옥구열이 “내 형님이 전쟁 때 빨갱이 손에 돌아가셨다”는 또다른 희생자에게 “대한민국 국민이몬 다 같은 국민인 줄 아나”라며 차별받는 장면(344~45면)은 고향을 떠나온 그가 국가의 시선을 통해서만 인식되는 존재라는 걸 보여준다. 옥구열을 옥죄는 국가의 낙인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끝없이 재현된다. 낙인 찍힌 자는 ‘같은 국민’이 아니라 국가의, “우리의 영원한 표적”(326면)일 뿐이다. 그 누구와 함께 있다 할지라도.
낙인은 한용범과 옥구열을 둘러싼 모든 곳에 스며들면서 그들을 고립시킨다. 국가에 의해서 낙인 찍힌 대로, 희생자가 아닌 ‘빨갱이’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유가족들의 저항은 낙인에 맞서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4·19혁명 직후 각지에서 유족회가 조직되는바 대진읍에서도 옥구열과 한용범을 중심으로 유족회가 결성된다. 이들 유족회는 희생자를 ‘빨갱이’에서 ‘피학살자’, 잊혀진 존재에서 기억해야 할 희생자로 만들려 한다. 유족회는 한용범을 읍장에 당선시키며 훗날의 정치적 변화에 대비하려 한다. 낙인에 대한 저항이 정치적 문제임을 분명히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인해서 또다시 희생자뿐 아니라 유족들에게까지 ‘사상범’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그날의 죽음들은 다시 낙인과 망각의 사이에서 배회한다. 낙인에 맞서려다 자신까지 낙인 찍힌 옥구열이 다시 저항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18년의 침묵을 거쳐야 했다. 1979년 부마항쟁의 시위 행렬에 휩쓸린 옥구열은 국가에 맞선 시민의 무리 속에서 오랜 침묵을 깨게 된다. “몰려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옥구열도 박수를 쳤다.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사람의 시민이 되었다.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며 할 말을 하는 국민이고 싶었다.”(378면) 시민의 행렬 속에서 옥구열은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 됨으로써6) 그를 옥죄는 ‘사상범’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간다. 소설은 다시금 그에게 닥쳐올 신군부의 억압은 말하지 않고 그 걸음을 바라보는 데서 끝을 맺는다.
보도연맹학살의 희생자들을 파괴한 것은 총구가 아니라 낙인이었다. 그들의 낙인, ‘빨갱이’ ‘사상범’이 정의되는 순간 희생자들의 운명은 봉인되었다.7) 그들은 국가의 규정에 의해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그들과 타인의 모든 관계 속에서 국가폭력은 재현된다. 그렇기에 그들의 저항은 낙인으로부터의 탈주여야만 한다. 조갑상은 낙인의 억압과 그것으로부터의 탈주라는 구도 속에서 잊혀지기를 요구받았던 죽음을 역사화하려고 했다. 죽음의 역사화라는 조갑상의 문제의식은 ‘밤의 눈’, 달의 존재에 대한 엇갈린 감각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러나 그 단서를 풀이하기에 앞서 ‘낙인’을 중심으로 죽음을 축조한 의식의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낙인과의 싸움이 죽음의 기억을 넘어 역사-세계에 가하는 균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도연맹학살에 대한 조갑상의 관심은 그의 초기작에서 이미 나타난다. 1990년에 발간된 그의 첫 단편집 『다시 시작하는 끝』에는 이 주제를 다룬 1989년작 「사라진 하늘」이 수록되어 있다. 보도연맹학살에 대한 첫 소설인 이창동(李滄東)의 「소지」가 1985년에 발표된 것과 비교해볼 때 그 사건에 대해 조갑상이 민감하게 반응해왔음을 알 수 있다. 과작 작가인 그가 인터넷 연재소설 『표적』(2002)과 『밤의 눈』으로 두번에 걸쳐서 보도연맹학살을 장편소설화했다는 것도 조갑상의 문학에서 그 사건이 가지는 위상을 보여준다.8) 그중 『표적』은 연재공간이던 ‘이노블타운’이 폐쇄되어 현재 확인할 수 없고 「사라진 하늘」과 「어느 불편한 제사에 대한 대화록」만이 『밤의 눈』에 앞서 보도연맹학살에 대한 조갑상의 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두 작품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상이한 시간의 설정이다.
「사라진 하늘」은 40년대말 보도연맹 가입과정과 1950년 여름의 학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어느 불편한 제사에 대한 대화록」은 학살로부터 50년 이상 지난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시간적 배경의 차이로 인해서 두 작품은 보도연맹학살의 각기 다른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 「사라진 하늘」은 강압적인 보도연맹 가입과 학살 과정을 그리며 사건의 실상을 고발하면서, 희생당한 지식인 ‘재엽’의 시선을 통해 사건의 배후에 도사린 정치적 의도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제시한다. 압도적인 현실에 저항할 수 없는 개인의 무력감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로 나타난다. 학살 이후를 다루고 있는 「어느 불편한 제사에 대한 대화록」의 초점은 이와 다르다. 보도연맹학살에 희생된 아버지의 기제사(忌祭祀)를 중단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가족의 갈등을 통해서 강요된 침묵과 연좌제로 희생자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죽음의 기억이 정치적 억압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복권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라진 하늘」이 보이는 역사화의 시도와 「어느 불편한 제사에 대한 대화록」의 학살 이후에 대한 관심은 『밤의 눈』에서 종합된다. 그런데 이 두가지 초점을 종합하는 데 역시 ‘달’의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용범의 총살장면을 연상시키는 「사라진 하늘」 속 재엽의 총살장면에서, 그의 시선은 한용범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향한다. 그러나 한용범과 달리 그의 하늘은 ‘별도 없는 먹장 하늘’(231면)일 뿐이다. 재엽의 죽음으로 방황하다가 폭격으로 비명횡사하는 그의 아버지 ‘한실영감’도 그의 머리 위 “하늘에는 그냥 아무것도 없었다”(233면). ‘텅 빈 하늘’은 가해자의 시선 이외에는 어떠한 목격자도 없는 그들의 현실을 암시한다. 반면 보도연맹학살의 기억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를 논하는 「어느 불편한 제사에 대한 대화록」에서는 달의 존재가 수차례 환기된다. 숨겨왔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꺼낸 이후 그 기억을 이어갈 것인지에 대해 ‘준오’와 ‘영오’ 형제의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달이 배경으로 반복해 등장한다. 그 달의 존재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도 보름달이 떴을까?”(124면)라는 의문으로 이어지는 지점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과거의 기억에 대한 논의와 과거에도 있었을 달의 관계가 가해자의 시선이 아닌 역사의 목격자로서의 달, ‘밤의 눈’의 이미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친 듯 닮아 있는 재엽과 한용범의 총살에서 중요한 차이는 한용범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아니다. 주목할 것은 그 죽음의 순간에 재엽이 ‘먹장하늘’ 밑에서 혼란과 공포로 절규한 것과 달리 한용범은 ‘공포가 아닌 밤의 눈’과 마주했다는 점이다. 그 죽음이 오직 가해자의 눈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먹장하늘에 갇힌 희생자들은 무력하다. 그들은 낙인으로 인해서 굴절된 모습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떠한 왜곡도 낙인도 찍지 않는 ‘생명 없는 객관’에 비춰진다면, 그들도 ‘빨갱이’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다. 생명 없는 객관, 즉 밤의 눈을 통해서 국가의 낙인에 맞서 새로운 기억을 구축할 가능성이 발견되는 것이다. 텅 빈 하늘에서 점차 달의 이미지가 선명해져갈수록, 희생자들을 압도하던 무력감과 고립감이, ‘빨갱이’ ‘사상범’이라는 낙인이 한 사람의 국민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에 밀려나게 된다.
낙인에 맞서 기억을 새길 생명 없는 객관, 달의 차가운 토양은 희생자들이 종속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가능성의 열림에 주목할 때 조갑상이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옥구열의 열망이 좌절될 것이란 자명한 역사의 흐름을 소설에 담아내지 않고 마무리 지은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옥구열이 부마항쟁의 행렬에 합류하기 전에 그는 낙인에 의해 고립되고 길들여져 있었다. “표적이 된 범주에게 합리적 결정을 위한 유일한 준거의 틀로 ‘자기 자신의’ 관료집단만 남겨”9)져 있었으므로 그들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는 것만이 희생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군부독재의 등장으로 인해서 낙인 찍힌 자들이 바로 그 군부독재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72년 유신헌법 국민투표장에 누구보다 먼저 나선다는 슬픈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옥구열은 국민투표의 그날에 국가에 맞선 시민의 행렬과 조우하게 되자 그 순간이 그가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 갈구했던 “빛을 찾아가는 노정의 시작”(379면)임을 직감하게 된다. 이제 그는 고립에서 벗어나 ‘사상범’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그들과 함께 걷는다. 낙인을 찍는 국가에 맞설 수 있다는 것, 국가의 용서를 통해서가 아닌 시민의 행진 속에서 시민으로 복권될 수 있다는 체험은 그 행렬이 좌절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전과 같은 일방적 억압 앞에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 행진이 멈출지라도 언젠가 다시 낙인에 맞설 걸음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국가만이 희생자들을 규정할 수 있다는 규칙은 밤의 눈 앞에서 무너진다. “유족회 일이 반국가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이 자기 생전에 밝혀지기를 소원하는 마음을” 옥구열이 새겨두고자 하는 자리가 밤의 눈이 그를 내려다보는 곳, 한 사람의 시민으로 돌아간 “오늘 밤 저 하늘”(380면)인 것은 너무도 당연하리라.
4. 흔적의 서사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가 자신의 어머니와 사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사진들을 살펴보던 그는 결코 어머니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사진 속 여인은 분명 그의 어머니였으나 동시에 완전한 어머니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진은 ‘지금 여기’의 바르뜨에 앞서 존재했던 어머니, 현재에 앞서 존재했던 역사로서의 어머니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사진 속의 어머니는 그가 알고 있고 다시 만나고 싶던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라 그가 바라보는 순간 재구성된 ‘역사’일 뿐이다.10) 어머니를 하나의 역사로 관념화된 채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 바르뜨는 사진 속에서 어머니의 흔적을 꼼꼼하게 찾아나선다. 관념화된 역사로 남은 존재를 흔적 속에서 다시 찾아내는 그의 작업은 『소년이 온다』를 써내려간 한강의 서사전략과 닮아 있다. 한강 역시 역사의 관념으로 남은 한 소년의 흔적을 여러 삶 속에서 끄집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의 일곱 장은 각각 한 중심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며 진행된다. 에필로그의 작가를 제외한 각 장의 중심인물은 동호와 함께 그해 광주에 있던 이들이며, 그들이 겪는 사건 역시 소년과 소년을 앗아간 5월 광주의 기억과 연관된 것들이다. 작가와 2장 「검은 숨」의 중심인물인 동호의 친구 정대를 제외하면 모두 그해 5월의 생존자들이다. 이들이 겪게 되는 사건에는 그 5월 광주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나타나며 그 영향 속에서 사라진 소년의 흔적이 발견된다.
80년 광주에서 동호와 함께 시민들의 유해를 수습했던 ‘김은숙’의 이야기인 「일곱개의 뺨」은 80년대 중반의 어느 일주일을 다룬다. 출판사 직원으로 일하는 은숙은 수배 중인 번역자를 체포하려는 경찰에게 폭행당한다. 그후 은숙이 일주일 동안 그 번역자와 만나고 경찰서를 오가는 장면은 80년대의 억압적 사회상을 보여준다. 작가는 은숙이 겪는 사건들을 통해서 소년에 대한 기억을 끌어온다. 폭행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데도 신체의 상처는 아물어가는 것이 마치 생생한 그해 5월의 기억을 전혀 없던 일처럼 여기듯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한 광주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은숙에게 밀려든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 문신 같은 뺨의 상처가 라디에이터의 열기에 달아오른다.”(77면) 상처 입은 내면이 보이지 않도록 가두는 얼굴처럼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97면)라며 그녀를 다그치는 일상도 그녀의 상처를 숨기려고만 한다. 그러나 검열로 삭제된 문단을 그녀가 기억해내듯이 상처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일상이 그 기억을 가두자 오히려 기억이 그녀의 삶을 가둔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99면)라는 검열로 지워진 희곡의 대사처럼 매듭지어지지 않은 5월의 기억과 사지에 소년을 남겨두고 왔다는 죄의식이 그녀를 지배한다. 소년의 죽음이 남긴 흔적이 그녀의 삶에 흉터가 되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김은숙의 삶을 통해서 소년의 흔적이 드러나는 방식은 다른 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소년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망가져가다가 자살한 ‘김진수’의 삶에서(「쇠의 피」), 고문후유증으로 삶의 의지를 잃어가다 소년의 죽음이 찍힌 사진을 보며 남겨진 분노로 살아갈 동력을 얻는 ‘임선주’에게서(「밤의 눈동자」), 소년의 기억을 되살리며 살아가는 그의 어머니에게서(「꽃 핀 쪽으로」) 소년의 흔적이 나타난다. 소년은 죽어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통해서 배회한다. 한강은 배회하는 흔적에 혼(魂)이라는 실체를 부여한다.
혼의 존재는 여러 장에서 암시되지만 또다른 죽은 소년 정배의 시선을 따라가는 「검은 숨」에서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정배에 의해서 설명되는 혼의 성질은 왜 이 소설이 환상성을 통해서 죽은 소년에게 실체를 부여했으면서도 그를 흔적으로만 보여주는지 이유를 알려준다. 혼은 말할 수도 만질 수도 없고 서로를 찾거나 볼 수도 없다. 혼은 존재하나 고립되었고 기억되나 만날 수 없다. 죽음이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살아 있는 자들을 경유해야 하듯이 혼도 스스로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이런 혼의 성격은 이 소설이 소년이 아니라 소년의 흔적만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친절하게도 소설의 배열은 이 의도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첫 장인 「어린 새」에서 동호는 시민들의 유해를 수습하면서 죽은 자들은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해한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13면) 같은 소년의 호기심은 잔인하게도 그 자신의 죽음이 남긴 흔적들 속에서 풀려간다. 혼이 된 정배의 설명은 바로 그다음 장에 배치되어 있으며 이후의 장들은 실체를 볼 수 없는 혼의 흔적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해당한 소년은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실체로서, 혼으로서 배회한다. 그의 혼은 흔적을 통해서 살아남은 이들의 삶 위에 일렁거린다. 이런 혼의 이미지가 소년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소년이 온다』가 취한 서사전략을 묻는 것인 동시에 한강이 5월의 광주를 소설화한 이유를 살피는 일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본 『밤의 눈』은 보도연맹학살이라는 충분히 말해지지 못한 죽음을 역사화하고 있다. 그에 반해서 80년 5월의 광주는 잊혀진 죽음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담론화된 죽음의 하나로, 반대 세력과의 담론투쟁 속에서 끝없이 환기된다. 그렇다면 한강은 도전받는 담론을 방어하기 위해서 나선 것인가? 그러나 그가 공식화된 민주항쟁으로서의 광주를 호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공식화된, 그래서 추상화된 담론에 맞서는 듯한 인상을 준다. “지금 내 말들을 녹취함으로써 김진수가 죽어간 과정을 복원할 수 있습니까? 그와 나의 경험이 비슷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혼자서 겪은 일들을 그 자신에게서 듣지 않는 한, 어떻게 그의 죽음이 부검될 수 있습니까?”(108면) 그에게 죽음은 추상이 될 수도, 담론이 될 수도 없다. 죽음은 혼이 그러하듯 실체, 말할 수 없는 실체다. 한강이 5월 광주의 죽음을, 그 소년의 죽음을 가져온 이유는 무엇인가. 왜 흔적으로 일렁이는 죽음으로서만 그것을 보이려 하는가. 그 모든 의문은 다시 밤의 눈, 그들을 내려다보는 창백한 객관에 대한 설명 속에서 풀어가야 한다.
『밤의 눈』의 한용범에게 그를 지켜보는 달의 존재는 안도감을 준다. 그의 죽음이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의 눈, 낙인으로 굴절된 그 눈이 아니라 어떠한 왜곡도 없는 시선에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에서 달의 존재는 소름끼치는 시선, 또는 생명 없는 황량함일 뿐이다. 왜 한강에게 달은 소름끼치거나 무의미한 것인가. 그의 달에 대한 비판이 조갑상의 달, 즉 ‘밤의 눈’을 의식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갑상이 달을 역사의 눈으로 설정했듯이 한강도 달을 지켜보는 존재, ‘눈’이라 명시하고 있다. “그 어두운 거리 위로, 얼음의 눈동자 같은 열이레 달이 당신이 탄 소형 트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169면) 달은 총살당하던 한용범을 내려다보았듯이 계엄군에게 끌려가던 임선주를 지켜본다. 그러나 달의 시선은 임선주에게 어떤 의미도 없다. 달의 시선은 고작 하나의 추상으로서만 그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바르뜨가 지적했듯이 역사는 살아 있는 생명을 포착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추상으로서 재구성할 뿐이다. 역사는 죽은 자를 가시화, 재현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역사의 눈, 달에 맺힌 상에는 희생된 이들과 닮은 자가 보이지만 결코 그들 자신은 아니다. 그래서 4장 「쇠와 피」의 중심인물인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증언자는 생존자의 내면을 조사하려는 연구자에게 자신의 증언 속에서 김진수의 죽음을 복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추상이 아닌 실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처럼 죽음을 체험한 본인에게 직접 들어야 한다. 그러나 혼은 무엇도 말할 수 없다. 역사의 시선 속에서는 결코 실체와 조우할 수 없다는 인식과, 혼은 말할 수 없다는 인식이 하나의 결론을 향하게 한다. 즉 희생당한 삶 그 자체는 재현되지도 복원되지도 못한다는 결론 말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을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결국 역사의 수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추상화에 머무를 수 없다. 소년의 죽음을 역사로, 추상으로 남겨두기에는 생존자들의 삶에서 소년의 흔적이 계속 일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174면) 임선주는 볼 수는 없지만 자신을 찾아오는 희미한 무엇을 느낀다. 이 일렁이는 흔적, 그 희미한 실체가 살아 있는 그들의 감각을 스쳐가는데 “증언. 의미. 기억. 미래”(166면) 따위의 추상으로 치환할 수 있겠는가? 당장 그들의 삶에서 그 죽음이 물러나 역사가 되는 대신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134면)되고 있지 않은가. 역사로서 말해지는 것은 충분치 않고 실체는 스스로 말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흔적의 서사는 바로 이 딜레마에 대한 돌파 전략으로서 사용된다.
죽은 소년은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자들은 소년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이 품은 5월 광주, 그 피의 기억은 자기의 상처 입은 몸과 그 몸에 밴 타인의 시취일 뿐이다. 죽음을 체험한, 그래서 이제는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배회하는 혼들과 말할 수 있는 자들 사이에는 어떤 가교도 없다. 단지 서로를 어렴풋하게 감지할 뿐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아무도 소년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211면) 하려는 작가의 의지는 달성되기 요원한 목표로 보인다. 죽음의 체험이 대신 말해질 수 없는 고유한 것이기에 말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유의미한 증언자일 수 없다. 이러한 증언의 딜레마는 온전한 증언자들은 “자신들을 관찰하고 기억하고 비교하고 표현할 능력을 상실”11)했다는 쁘리모 레비(Primo Levi)의 주장에 부합한다. 레비에게 진정한 증언자는 자기 존재의 죽음에 이르러 그 비극을 체현한 자들뿐이며 살아남아 말할 수 있는 자들은 증언의 자격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이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 증언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아감벤(G. Agamben)은 생존자의 증언이 증언할 수 없는 자의 증언과 통합될 때, 그 양자가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통합하는 것12)이라 설명한다. 증언하는 자와 증언할 수 없는 자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하나의 증언을 구축하는 방식을 한강은 흔적의 서사를 통해서 제시한다.
죽은 소년의 실체는 살아남은 자들의 삶 속에 그가 남긴 흔적, 그들의 삶을 마모시켜가는 기억으로서 현현한다. 증언자들의 삶은 소년이 살아서 관계 맺고 영위한 삶의 영역에 걸쳐 있다. 소년이 죽음으로써 발생한 공백은 주변 인물들의 삶에 발생한 빈 공간과 일그러짐으로 가시화된다. 죽은 소년은 보여질 수도 말할 수도 없지만 그가 남긴 흔적이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속에서 암시되면서 독자에게 제시된다. 소년의 죽음, 그 말해질 수 없는 체험의 비극성은 소년의 흔적에 의해 일그러진 증언자의 삶 속에서 확인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99면)란 대사를 되뇌는 김은숙은 소년의 흔적이 소년과 관련되었던 이들의 삶과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살아남아 말하는 자들의 증언 속에서 죽음의 저편으로 사라진 소년의 실체가 되돌아‘온다’. 살아남은 자들의 말은 그들의 삶이 소년의 흔적에 깊이 침식됨으로써 자기만의 체험 그 이상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소년의 흔적을 간직한 여러 삶이 작가의 시선 속에서 결집됨으로써 조각난 소년의 흔적들이 모여 그의 실체로 형상화되어간다. 흔적의 서사를 통해서 작가는 상실된 증언을 복원하여 결코 모독되어서는 안될 소년의 삶을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죽은 소년은 희생자들의 사진 속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관념이 아니라 한때 살아 웃고 말했던 소년이 되어 찾아온다.
스스로 증언할 수 없는 자의 삶을 말하는 서사전략은 한강의 전작들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검은 사슴』(문학동네 1998) 『그대의 차가운 손』(문학과지성사 2002) 『채식주의자』(창비 2007)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 2010)에서 작가는 상처를 가진 여성관찰자가 너무 큰 고통 속에서 상징의 질서, 즉 언어세계로부터 이탈된 여성인물을 관찰하는 구도를 선보인 바 있다.13) 한강은 이 구도를 통해서 자기 언어를 상실한 이들의 증언을 구체화하는 매개자로서 역할을 확보한다. 소설 속 상실된 증언이 다른 여성관찰자에 의해서 가시화되듯 한강 자신이 여성의 고통에 대한 관찰자가 되어 공동체에 전달하는14) 증언자가 된다. 작가 스스로가 증언자가 되는 이러한 그의 글쓰기는 『소년이 온다』에서 작가 자신을 또다른 증언자로서 에필로그에 삽입한 의도를 가늠케 한다. 이렇듯 불가능한 증언을 복원하는 방식은 『소년이 온다』가 조우한 말해진 죽음의 설명되지 않은 틈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문학 속에서 준비되어 있었다. 이 증언의 방식이 공식화된 언어에 대한 불편과 대립인식을 확보하는 중간단계로서 그의 장편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이 있다.
『희랍어 시간』을 관통하는 언어에 대한 불편한 감각은 언어가 주체의 체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을 만들어내는 별개의 주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167면)의 공포가 인물들을 압도한다. 이전 한강의 소설 속에서 언어의 상실이 여성 인물들의 고통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희랍어 시간』 속 ‘그녀’의 실어증은 언어 그 자체가 원인이 된다. “자신이 말을 잃은 것이 어떤 특정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셀 수 없는 혀와 펜 들로 수천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 화해할 수 없었다. (…) 그 어떤 것도 잊지 않기 위해 꾹꾹 눌러적는 말들, 그 속에서 어느새 부풀어 오른 거품들의 악취 속에서.”(165~66면) 언어 그 자체와의 갈등으로 인해 언어로서 매개되지 못한, 그래서 서로 엇갈려 관계 맺는 두 남녀의 마주침이 작가에 의해서 중개된다. 『희랍어 시간』이 보여주는 언어에 대한 인식과 고통 받는 실체를 중개하는 작가의 서사전략 속에 『소년이 온다』가 등장할 수 있었던 실마리가 배치되어 있던 것이다. 5월 광주의 죽음의 말해지지 않은 틈을 주목한 『소년이 온다』는 여성의 고통을 다루어온 한강의 작품들 속에서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그 소설의 방식은 전작들을 거치면서 발전해갔다. 그러므로 『소년이 온다』는 한강의 서사전략이 그 외연을 확대하고도 견고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 의미있는 작품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5. 밤하늘에 새기다
수백의 생을 앗아간 그 잔인한 바다, 그 죽음의 기억은 작가들로 하여금 다시 죽음을 말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말하는 것만으로 죽음을 전부 짊어질 수 없다. 죽음의 언급을 통해서 그 이상을 말해야만 한다. 역사-세계가 죽음의 지평에 자리하고 있다면 죽음을 말함으로써 역사-세계를 형상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갑상과 한강이 죽음을 말했던 방식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소설은 죽음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 세계의 실체를 가시화하고 있다.
조갑상은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을 통해서 국가폭력의 내밀한 구조와 그로부터 이탈할 가능성을 발견해간다. 낙인을 통해서 희생자들을 분리하고 길들이는 국가폭력은 그 물리적 실체가 가시화되는 작용점에서 맞서야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폭력을 가능하게 한 낙인과의 싸움에서 시작해야 한다. 밤의 눈, 역사의 시선을 열어놓음으로써 관찰과 낙인을 자행하는 국가의 독점적 지위를 흔들어놓아야 한다. 시민의 행진 속에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 돌아간 옥구열은 낙인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할 가능성을 발견함으로써 희망을 얻는다. 이를 통해 조갑상은 역사-세계 위에 희생된 자들을 복권하는 일이 희생자 자신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려 한다.
한강은 역사-세계의 틈을 집요하게 포착해낸다. 역사-세계 위에 그려진 죽음은 비극에 대한 모독까지는 아닐지라도 진실의 진정한 포착에 이르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증언, 설명이 오히려 실체를 가리고 살아 있던 자들을 관념화된 기념비로 남긴다. 그렇게 죽음을 해부하여 얻어낸 설명과 관념의 언어로 희생자들을 재현하려고 한다면 결국 그들의 실체를 흩어놓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한강은 자신이 쌓아올린 언어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바탕으로 생명 없는 객관, 밤의 눈이 가진 황량함을 포착한다. 그는 오히려 희생된 자들의 실체가 재현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희생자를 기억하는 이들의 삶 속에서 볼 수 없던 그들의 실체를 복원해낸다. 죽은 소년은 역사의 희생자란 관념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삶에서 느껴지는 감정으로 되돌아온다. 그 누구도 모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 위에 쌓아올린 역사-세계를 파악하는 조갑상과 한강의 의식을 살펴보았다. 이 두 작가가 가진 의식의 차이는 표면적으로는 두가지 장치를 통해서 가시화된다. 하나는 중심인물의 존재와 부재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의 눈으로서 달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이 두가지 차이는 사실 하나로 결합된다. 역사의 눈, 달이 공포일 때 그 관념의 세계 위에 살아 있는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생명 없는 관념의 세계 위에 소년의 생명을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년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가 있을 생명의 자리, 구체적 삶들 속에서 일렁이는 그의 흔적을 포착해야 한다. 반면 역사의 눈이 비극의 목격자이자 그 의미를 새기는 장소일 때, 희생자는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이 내린 낙인을 지워내고 자신을 새롭게 써내려갈 수 있다. 희생자는 국민이 아닌 것, 권력의 표적에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 변화할 수 있다. 역사의 눈은 희생자가 역사의 주체로서 전환될 공간이 되는 것이다. 한강이 구축한 역사에 맞선 귀환의 서사와 조갑상이 쌓아올린 역사 형성의 서사, 저 바다가 삼킨 생명을 위하는 문학은 어느 길에 서야 하는가. 대립하는 듯 보이는 이들의 세계 인식 속에서 하나의 선택이 요구될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에 침묵하는 방식이 여럿이듯 그에 맞서 죽음을 말하는 방식 또한 여럿이어야 한다. 역사-세계 속에서 생명은 권력의 낙인으로 인해 왜곡되고 때로는 역사가 지어준 이름으로 인해 잊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이한 방법들의 긴장 속에서 문학은 그 진폭을 넓혀가며 비극과 맞서야 한다. 밤하늘의 길잡이인 별자리가 수많은 별들의 교차를 통해 그려지듯 각각의 문학적 탐구들이 모여 비극에 맞서는 문학의 길을 그려줄 것이다. 이를 길잡이 삼아서 비극에 맞서는 길을 찾으려는 도래할 문학들을 기다리며 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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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버트 허시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강성현 옮김, 책세상 2009, 123면.
2)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작품은 다음의 다섯편이다. 조갑상의 장편 『밤의 눈』(산지니 2012), 단편 「사라진 하늘」(『다시 시작하는 끝』, 세계일보 1990), 「어느 불편한 제사에 대한 대화록」(『테하차피의 달』, 산지니 2009), 한강의 장편 『소년이 온다』(창비 2014),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 이후에는 제목과 면수만 표기한다.
3) 국민보도연맹은 공식적으로는 전향자에 의해 관리되는 민간단체였으나 실제로는 정부 최상층이 개입하여 관에 의해서 통제된 단체였다. 최호근 『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 책세상 2005, 409면.
4)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 김학이 옮김, 개마고원 2008, 1396면.
5) 폭력의 희생자 집단을 분리, 구별해내는 작업을 힐베르크는 ‘정의’(definition)라고 부른다. 이 글은 ‘정의→집중(혹은 체포)→절멸’이라는 학살과정에 대한 힐베르크의 구분(홀로코스트를 설명하는 네단계 구분 ‘정의→집중(혹은 체포)→약탈→절멸’ 대신, 그가 일반적인 학살과정을 설명할 때 활용하는 세단계 구분을 따랐다)에 기초하고 있지만 정의 내리기의 인식론적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의’ 대신에 ‘낙인’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6) 한 사람의 ‘국민’으로 돌아가려는 옥구열의 열망은 국가로의 순응이라 읽힐 가능성도 없지 않다. 국가권력에 의해서 배제당했던 국민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 역시 국가에 의해서 관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의 선택이 아니라 옥구열이 시민으로서 스스로 복권하려는 행위는 국가에 의한 배치와는 다른 자기해방의 시도로 읽어야 한다. “스스로 해방된다는 것은 이탈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 세계를 함께-나누는 자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우리가 상대와 같은 게임을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13, 93면)이라는 지적처럼 ‘국민 아닌 자’에서 국민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옥구열의 선택은 국민을 규정하는 국가권력의 독점권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체의 자리에 서는 ‘해방’의 시도이다.
7) 이 표현은 힐베르크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빌려왔다. “1933년 초 중앙 부처 관리가 공직자 훈령에 “비아리아인”을 처음으로 정의했던 그 순간, 유럽 유대인의 운명은 봉인되었다.” 힐베르크, 앞의 책 1453면.
8) 『밤의 눈』은 『표적』을 개작한 작품이다. 최학림 『문학을 탐하다』, 산지니 2013, 124면.
9) 지그문트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13, 213면.
10)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85면.
11)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91면.
12) 같은 책 222면.
13) 손정수 「식물이 자라는 속도로 글쓰기」, 『작가세계』 2011년 봄호 63면.
14) 같은 글 7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