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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양효실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시대의창 2015 

소수자 문화운동의 과거와 오늘

 

김남시金楠時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namseekim@ewha.ac.kr

 

169촌평-김남시_fmt이 책은 펑크록, 레게, 힙합 등의 대중음악뿐 아니라 히피문화, 영화운동, 벽화운동, 네그리뛰드(négritude, 1930년대 흑인문화운동), 동성애운동, 여성주의 예술 등 매우 이질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문화적 실천들을 ‘소수자 문화운동’이라는 키워드로 함께 묶는다.

“이 책은 상투적인 말하기와 이미지에 도사린 자신들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더이상 그 편견 안에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길거리에 나선 소수자들의 집단적인 문화운동에 대한 것이다. 흑인, 여성, 청년, 동성애자 같은 보편적인 인간(Man)에서 제외된 이들, 게으르고 무능하고 히스테리컬하며 예의가 없고 이상한, 그래서 이성적 인간이란 규범에 포섭되지 못한 이들에 대한 것이다. 이들이 입을 열고 ‘우리는 존재한다’고 목소리를 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어떤 상상력이 현실의 옷을 입고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준다.”(10면)

“보편적인 인간에서 제외된” 타자들이 목소리를 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최근 우리는 시청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2015.6.28)에서 확인한 바 있다. 이에 반대한다며 한복을 차려입고 거칠게 북을 때려대는 광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일부 기독교인들은 동성애를 ‘나라가 무너지고 세상이 멸망할’ 공포로 받아들였다. 동성애자를 ‘비주체’로 정립함으로써 구축된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니, 그 질서에 의탁해 있던 이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의 참정권이나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의 시민적 권리, 동성애 합법화가 처음 주장되었을 때 기존 질서의 옹호자들이 느꼈을 충격은 어떠했을까. ‘소수자들의 집단적인 문화운동’이란 이처럼, “자신들을 정상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회-현실” 속에서 “이성애자, 남성,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문화적·상징적 권력”(10~11면)에 의해 배제되었던 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문화적 실천을 말한다.

그런데 흑인과 여성, 동성애 운동은 그렇다 하더라도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이나 멕시코 벽화운동이 ‘소수자들’의 집단적인 문화운동에 포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저자도 지적하듯 소수자, 타자 혹은 “비(주)체”란 ”건강하고 정상적인 주체“(259면)를 정립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는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누벨바그 영화감독이나 멕시코 벽화가들은 어떤 중심권력이나 질서에 의해 ‘타자화’되었는가. 반식민주의 저항을 내용으로 삼은 멕시코 벽화운동은 심지어 멕시코 정부의 국가 이데올로기라는 거대 주류질서를 대변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멕시코 벽화운동을 “모든 소수자운동이 거쳐갈 과도기적 단계”로 보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주변부적 삶에 대한 보호·관리를 자처한 중심의 권력에 맞서 소수자들의 저항운동은 첫번째 단계에서 비동일시와 긍정적 정체성 구성으로 맞섰다. 그리고 두번째 단계에 이르면 첫번째 단계에 요청된 정체성을 거부하면서 내부의 차이와 다양성을 주장하게 된다.”(67면)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맞서 ‘민족’과 ‘국민’이라는 ‘긍정적 정체성’을 구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 벽화운동을 소수자 저항운동의 첫번째 단계로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이라면, 반제국주의운동의 역사를 자신의 ‘긍정적 정체성’의 강한 요소로 수용한 북한도, 서구 중심의 세계체제에 맞서 폭력테러를 벌이고 있는 이슬람국가(IS)도, 심지어 기존의 진보적 정치와 문화에 ‘몰이상주의적 혐오’로 맞서는 ‘일베’도 첫번째 단계의 ‘소수자 저항운동’이라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단계론은 문화다원주의의 딜레마를 더 심화시킨다.

더 의아스러운 건 흑인, 여성, 동성애자와 함께 ‘청년’을 소수자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 책이 함께 다루는 히피와 펑크 문화를 ‘주류에 맞선 소수자 문화운동’으로 포착하기 위한 궁여지책 같다. 네그리뛰드, 액트 업(Act-up,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 게릴라 걸스(Guerilla Girls)가 백인-이성애주의-남성 중심 문화와 대결했듯 여기서도 그런 대결의 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히피와 펑크는 ‘어른/부모들’(기성세대)의 질서와 가치관에 대항한 청년운동이었다. 예를 들어 히피 운동은 1960년대 “유례없는 경제번영”이 초래한 “동시대 물질만능주의와 어른/부모들의 규격화된 삶에 환멸을 느낀 젊은이들의 심리적 갈등[이], 기성 질서나 가치관을 타파하려는 히피 운동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히피들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대하는 청년세대의 대안적 삶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려고 했다.”(95~97면) 비슷한 시기 일어난 펑크는 런던 도시개발의 여파 속에서 “더 극빈해진 노동계급이 자식세대에게서 더이상 예전처럼 존경받지 못하게 되는 위기”에서 출발한다. “청년들은 부모세대의 권위가 아닌 다른 것에서 집단결속과 연대의 요소를 회복”하기 위해 “전통에 토대한 정체성 대신 기호, 상징, 스타일을 통해” “부모 문화와 강제로 결별한” “새로운 연대의식을 만들어”낸 것(114면)이다. 말하자면, 펑크는 “아버지의 실패한 삶을 목격한 노동계급의 비행청소년”의 문화인 것이다. 그로부터 “기성가치를 조롱하고 ‘기호놀이’로 끌어들이”며 “어른은 모두 ‘꼰대’라고 생각하는, ‘가치’는 모두 엿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는”(115~16면) 펑크가 생겨났다.

이 설명 속에서 ‘청년’은, 기성세대의 경제적 번영을 함께 향유하기보다는 물질주의에 저항하는 대안적 가치관을 찾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한 기성세대에게 존경을 거두어들이고, 자신들만의 또래문화를 만들어내는 비순응적 존재로 그려진다. 히피와 펑크의 서로 다른 계급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청년’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기성세대의 질서와 가치관을 거부하고 대안문화를 만드는, 거의 천성적인 저항의 기운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탈계급화, 낭만화된 ‘청년’에 대한 저자의 과한 애착은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상한 문화운동”(318면)2009년 두리반 농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느껴진다. 그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일어나지 않은, 그런 점에서 “딱 한번, 정말로 한번 일어난 이 사건”(346면)의 동력은, 경제적 이해관계나 계급적 갈등도 아닌, 오로지 ‘젊음’과 ‘청춘’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 모인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모든 우리는 독특하다. 바깥의 구경꾼들은 몸으로 묶인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서 코뮌을 출현시켰는지를 사후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를 묶었던 것이 생존이건, 진지함이건, 상상력이건, 자유이건, 모든 우리는 일시적이다. 한때 젊었던 사람들과 지금 젊은 사람들과 계속 젊은 사람들이 기존의 우리를 찢고 새로운 우리를 현시할 것이다. 청춘은 모방이나 반복, 동일시나 상승, 동의나 순응, 권위나 인정, 성공이나 생존이 아닌 것을 가리키는 이념이고 삶이기 때문이다.”(346면)

‘권력에 맞선 상상력’을 이야기하면서 이 책은 실패의 여정은 에둘러 피해간다. 60년대 히피와 펑크였던 ‘청년’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유연해진 지배질서에 의해 차이를 인정받은 과거의 ‘소수자들’이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차별이 아닌 ‘차이’로서 타자의 삶을 인정하며 공존”(68면)하려던 문화다원주의의 이상은 어쩌다가 각자의 취향을 인정한다는 명분으로 타자와의 만남 자체를 회피하는 ‘단속사회’(엄기호)로 이어졌는지.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이 버글거리는 질문들은 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릴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권력에 맞선 문화운동이 화려하게 피어나던 저 좋았던 시절에 대한 노스텔지어적 정조에 머무르게 한다. 어쩌면 그건 이 책이 아니라, 우리가 도달한 지점이 딱 여기까지이기 때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