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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성대 金成大
1972년 강원 인제 출생. 2005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이 있음. ksdgod@hanmail.net
9월의 미발(未發)
여생의 예의
바람을 잘 느끼기 위해 머리를 길렀다
시간을 잘 느끼기 위해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린다
몸을 줍지는 않는다
여생의 예의란 그런 게 아니지
살아 있지 않은 것과 죽어 있지 않은 것이 공평하게
시간을 빌리는 것인데
시나브로 몸을 영결(永訣)하는 오후
막 병실을 들어온 신참 환자처럼 오늘은 이빨이 맑다
근성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어
잠든 사이 나도 모르게 이빨이 물었다 오는 것은 무엇일까
……, 일어났어?
우연의 방
서로의 알람이 되어가고 있는 방
열은 높은데 몸은 느리고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남아 있는 것이다
늘 처음 같아서 미리 와 있는 것 같은
서로의 우연이 되어가고 있는 것
우연이라고 해서는 안될까
잠은 점점 멀리서 오고
몸을 기다리는 현기(眩氣)와
제 무렵을 맡겨오는 그림자
나는 잠 속에서 손을 꺼내 눈을 만져본다
모든 날씨와 두절된다
광장묘지
이봐요, 거기도 묘지입니까
광장 북쪽 무렵을 건너는
살아 있지 않은 자들의 기나긴 꿈속
그림자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다
거기도 비어 있습니까 꼭 들어야 하는 말이 있는데
살아 있지 않은 자들의 불면이
그림자에 내려앉는 그림자를 가만히 듣고 있다
왜 비석은 머리맡에 두라는 걸까
몇기의 전생이 자신을 돌아눕고
내 몸에서 점멸하는 손톱십자가
그리고 9월이
창가를 서성이고 있다
눈은 왜 감겨주는 것일까
모든 무렵에는 불가피한 망설임이 있다
다만 전등을 끄기 위해 먼 거리(距離)를 온 것처럼
여생이란 이쪽 창이 식어가는 어떤 무렵
그때 남은 눈을 망설여 본다는 것
나는 내 눈을 감겨주고 있을 것이다
시민 해적판
오전 열시의 싸이렌
우리의 동작은 바뀌지 않았다
어제를 싸이렌으로 듣는 것
그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오랜 자세들
한때,라는 것이 없는 우리는
그때가 좋았다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굿빛 연탄재 깔린 샛길에서
해적 깃발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여직 그 변두리 팀을 응원한다
공은 둥글지 않았다
공이 주인공이 아닌 공놀이
아무도 모르는 구호를 속삭이면서
우리는 해적 깃발 아래 모였고
시합을 지속시키기 위해 계속 비겨야 했다
모두가 승부차기에 들어갈 때까지
몰랐지만, 운이 나쁠 때 실력이 드러나는 법이라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각오를 속삭이면서
변두리의 식도에 닭을 묻었다
식도가 가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불을 놓기에는 연기가 시끄러워질 테니까
닭들이 목을 내밀려는 건지
모래가 바람을 삼키는 건지
몰랐지만, 우리는 질병의 도움을 받았다
빈 링거에 오늘들이 담기는 동안
안 죽고 살아남느라 박한 운을 다 써버렸다
우리의 혈관은 퇴로가 아니었고
장기는 각서가 되지 못했다
잇몸을 떨며 샛길을 배회하다 올 때까지
다만 살아남기 위해 박한 운을 다 써버릴지
몰랐지만
우리는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몰려드는 벽인 줄 알았는데
덜덜 떨고 있는 벽돌 틈에서
우리가 적었던 글자들을 보았다
철컥철컥, 소인도 찍지 않고
변두리를 어딘가로 부치려는 것인지
몰랐지만, 샛길은 모여서 사라지고
우리는 텅 빈 유원지의 밤에 서 있었다
느린 휘파람을 불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만국기를 걸자마자 쓸쓸해진 유원지의 밤에서
우리는 불운을 나누느라 운을 다 써버렸다
어느 한때에 운을 몰아주지 않는 건
그걸 골고루 나누기 때문이라고
믿을 수 없었지만
박한 공은 다시 우리에게 넘어왔다
공이 주인공이 아닌 공놀이
우리는 여직 그 변두리 팀을 응원한다
오후 네시의 싸이렌
깃발을 옮겨다닐 뿐 시합의 끝은 아니었다
승리도 패배도 무의미해질 때까지 무작정 오래 끄는 것
승리가 패배를 빌 때까지
무한정 순수한 파울
여전히 우리는 오늘이 붙박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게 돌고 있는 해적판인지
소리 죽여 돌고 있는 해적판인지
오후 네시의 싸이렌
우리의 동작은 바뀌지 않았다
동작을 비집고 오늘로 착지하는 자세들
잊지 않고 오늘을 해적판으로 들을 거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