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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시민의회,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길

 

 

오현철 吳泫哲

전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정치학. 저서 『시민불복종』『전환시대의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음. ohyunchul@jbnu.ac.kr

 

 

1. 시민의 집단적 의사결정이 정당성의 원천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선거에서 선출된 엘리트의 통치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간주한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미국의 정치제도를 만든 ‘건국의 아버지’들은 선거로 선출된 자신들을 ‘자연적 귀족’으로 간주했다. 이 단어는 조상 덕에 권력을 차지하는 영국 귀족과 달리 자신들에게는 자연이 준 선물인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자부심을 담고 있다. 선출된 귀족들의 통치를 당연시하는 현대적 관점을 ‘정치적 노동분업’ 테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테제는 사회가 분화되고 전문화될수록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는 전문 정치인에게 맡기고 일반인은 생업에 전념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철학의 대가인 하버마스(J. Habermas)의 토의민주주의이론(심의민주주의나 숙의민주주의로도 알려져 있다)은 ‘국가의 법률이나 정책은 그것에 의해 영향받는 모든 사람들의 이성적 토의에 의해 결정된 경우에만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바는 선출된 정치인들이 국가정책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책이건 시민들이 이성적으로 토론하고 결정한 내용에 부합하는 것만 정당하다는 뜻이다.1 예를 들면 4대강을 보로 막아 호수로 만드는 것, 그리고 핵발전소를 건설하거나 폐기하는 것같이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을 정부가 결정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거나 들었어도 무시한다면 그 결정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4대강사업이나 노후한 핵발전소를 계속 가동하는 것처럼 국민들의 이익에 상충하는 정책이 결정되는 원인을 ‘주인-대리인의 딜레마’에서 찾을 수 있다. ‘주인-대리인의 딜레마’ 개념은 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데, 주인에게 봉사해야 할 대리인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주인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현상을 의미한다. 오늘날 이러한 딜레마는 거의 모든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관찰되는 현상으로,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시민을 정치과정에서 배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이 법정과 민회에 참여하여 도시국가의 공적인 사안을 결정했다.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의회는 전체 시민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들의 결정에는 ‘주인-대리인의 딜레마’가 없었다. 국민주권이란 이처럼 국가의 법률과 정책 혹은 중요한 정치적 판단을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의민주주의의 국민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무늬만 주권자이고, 대리인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주권적 사안을 대신 결정한다.

대의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지탱해주는 ‘국민이 주권자’라는 믿음은 기만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의민주주의의 시민은 공적 사안을 집단적으로 함께 결정하는 아테네 시민의 권력을 박탈당하고 선거에서 한표를 행사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스스로 국가를 위한 이성적 결정을 내리는 대신 결정권력을 행사할 유력한 대리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투표권을 행사한다. 선거에서 유권자는 개인으로 흩어지고 파편화되어 지역에 묶이거나 정당에 귀의하거나 대통령 후보의 극성팬이 된다. 시민의 집단적 의사결정이 정치과정에서 배제되자 미국의 민주주의는 로비스트와 이익단체들이 주도하는 금권정치로 변질되었고, 한국에서는 그보다 더 열악한 적대정치가 일상화되었으며 나라 전체는 ‘헬조선’이 되었다.

 

 

2. 시민의 집단적 결정이 세상을 바꾼다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을 원한다면 시민의 집단적 의사결정 권한을 되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핵발전소를 계속 건설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를 전문성을 핑계로 원전 관계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 전체가 참여하여 결정해야 한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시민참여 토의기구들은 풍부한 정보를 제공받아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토론한 후에 집단적으로 의사결정하는 능동적인 정치행위자를 배출하고 있다. 그 결과들을 보면 토론하는 시민의 결정은 ‘자연적 귀족’들의 결정보다 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다.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개개인의 시민이 전문가 한 사람보다 전문성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시민 다수가 모여서 지혜를 모으면 전문가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희곡을 보고 전문가가 쓴 비평도 좋지만 시민 100명이 쓴 비평 100개를 모은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파티를 할 때에도 요리사 한명이 만든 100가지 음식보다 파티에 참석하는 100명이 각자 만든 음식을 갖고 와서 즐기는 방법이 더 좋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소수 전문가의 전문성보다 시민들의 집합지성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므로, 전문성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은 전문가의 전문성을 토대로 시민들이 생활지식을 결합해 판단하는 것이다. 어느 구두장이가 좋은 구두장이인지 알려면 구두장이들이 만든 신발을 내가 신어보면 된다. 어떤 신발이 내 발에 잘 맞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2

시민들의 집단적 의사결정은 구두장이의 구두를 시민이 직접 신어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토의포럼에 참여한 시민들이 해당 이슈에 대해서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질문하고 정보를 접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토론해 결정한다. 집단적 의사결정을 위해서 전 국민이 한자리에 모여서 토론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다양한 토의포럼을 활용할 수 있다. 토의민주주의에서는 전 국민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한 것과 유사한 결과를 나타내는 소세계(microcosm)를 통계학적으로 구성해 토의하게 한다. 전체 국민이 참여하는 토론이 지역, 연령, 성, 지식, 재산 등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에 소세계는 규모가 작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기 때문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하다.

토의민주주의 관점이 널리 수용되면서 시민들의 집단적 토의에 의해 중요 법률과 정책을 결정한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무수히 많다. 대표적으로 성공한 사례들을 거론하면, 편견을 교정하고 집단적으로 대안을 마련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 국민에게 주권을 돌려주는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 과학기술과 관련해 인지적 불확실성을 내포한 문제를 다루는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시민들에게 예산편성권의 일부를 부여하는 참여예산제, 도시나 자치단체의 첨예한 갈등이 표출되는 발전계획을 수립하는 공동체 대화(community dialogue) 등이 있다. 이하에서는 민주적 대표성에서 가장 탁월한 방법인 공론조사와 시민의회를 간단히 살펴본다. 공론조사와 시민의회는 국회와 달리 민주적 대표성을 유지하면서도 깊이있는 토론이 가능한 유망한 토의포럼이다. 그곳에서는 특정 계층이나 이해집단의 의견만이 아니라, 시민 전체의 다양한 의견들이 대변된다.

 

⑴ 공론조사

공론조사는 이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응답자로부터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의견을 취합한 여론조사보다 깊이있고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의견을 파악하기 위해 고안된 의견조사 방식이다.3 조사과정은 층화무작위 추첨(stratified random sample)을 통해 통계학적으로 대표성 있는 시민들을 선발한 다음, 이슈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고, 참여자들이 심도 있게 토론한 후, 참여자들의 변화된 의견을 조사하여 결과를 공개한다.

공론조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절차로 진행된다. 특정 이슈에 대한 일반 시민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1차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그 조사 결과의 의견 분포 및 인구통계학적 특성(지역별, 계층별, 성별, 세대별 등)에 맞게 토론 참여자 표본을 할당하여 선발한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에 관한 토론을 위해 한국의 5천만 국민을 대신할 소세계를 501명으로 구성한다면, 먼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여 신고리 56호기 폐지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은 뒤 그 결과와 동일한 비율에 따라 추첨으로 대상자를 선발한다. 지역별로는 서울의 인구가 한국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므로 서울에는 100명의 대표를 할당하고 전북에는 그 1/520명을 할당한다. 성별로는 여성 인구가 50%를 넘으므로 여성 몫으로 251명을 할당하며 같은 방법으로 계층별, 세대별로 동일한 비율로 할당한다. 그러면 선발된 501명의 찬반비율은 전체 국민의 찬반비율과 동일하게 된다.

다음으로 참여 예정자들에게 찬반 양측의 주장과 근거를 소개한 자료집을 제공하고 일정 기간(약 1~2주)이 지난 뒤 소집한다. 참석자들을 무작위로 소그룹으로 나누어 그룹 안에서 토론하고 전문가 패널과도 토론한다. 토론이 끝난 후 토론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1차 조사와 동일한 설문지로 2차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이때 참여자들이 1차 조사 때와 다른 것을 선택하는 ‘선호전환효과’가 반영된다. 이 2차 결과를 공론이라고 부르는데 전체 국민(주민)이 진지하게 토론한 후에 내린 결론으로서 통계학적으로 인정된다.

2001년 호주에서 “토착 원주민과의 화해 정책”에 관한 공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이 문제가 호주사회의 중요한 이슈임을 인식한 사람이 31%에서 60%로, 원주민들의 불이익을 인식한 사람이 52%에서 80%로 급증했고, 원주민 문제, 정부 서비스, 정치 지도자들에 관련된 지식수준이 11%에서 50%로 높아졌다. 호주가 원주민들의 동의 없이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사람이 68%에서 81%로, 원주민들이 땅과 물의 원소유자임을 인지한 사람이 73%에서 81%로 각각 높아졌다. 공론조사 효과로 원주민들에 대해 갖고 있던 호주 백인들의 편견이 사회적 갈등을 치르지 않고서 교정되었다.

미국 텍사스주에서는 발전소 건립에 관하여 1996, 1998년에 공론조사를 실시하였다. 텍사스주 정책결정자들은 새로운 발전소로 원자력, 화력, 재생에너지 중에서 무엇을 택할지와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들은 선택 결과에 대해 주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정책결정에 참고하기 위한 사전조사로 공론조사를 실시했다. 과거 전례대로 포커스 그룹의 의견을 반영하면 대표성이 없고, 타운미팅을 하면 로비스트나 조직된 이익이 지배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텍사스의 여러 지역에서 공론조사를 8차례 실시했다. 공론조사 결과 저비용 발전소를 예상했던 ‘전문가들’의 의견과 달리 시민들은 천연가스, 재생에너지 그리고 환경보호의 결합을 선호했다. 재생에너지를 위해 기꺼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사람들의 비율이 52%에서 84%로, 환경보존을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사람들의 비율도 43%에서 73%로 급등했다. 텍사스 사례의 핵심은 공론조사가 대중의 의견변화를 이끌고, 세금인상을 회피하던 정치인·관료들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고, 갈등을 유발하는 이슈의 결정과정에서 민주성정당성효율성을 확보한 것이다. 이후로 텍사스주는 재생에너지 부문에 적극 투자했고 캘리포니아주와 함께 풍력에너지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⑵ 선거법 개정을 위한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시민의회

시민들이 스스로 의제를 통제해 외부의 간섭 없이 새로운 선거법을 입안한 경우도 있다.4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주의회 의원 선거 방식으로 한국과 같은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이 제도는 의석수를 득표수에 비례하여 배분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캐나다의 1996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42%를 득표하여 39%를 득표한 신민주당을 앞섰다. 그러나 의석수에서는 신민주당이 75석 중 39석을 차지하여 ‘소수득표 집권당’이 되었다. 2001년 선거에서는 자유당이 57%를 득표했지만 의석수는 79석 중 77석을 차지해 득표율과 의석수가 현저하게 불비례하는 터무니없이 ‘균형 잃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선거로 의회 내에서 집권당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져 ‘선출된 독재’라는 비난을 받았다.

의원으로 선출된 사람들은 대부분 고등교육을 이수한 중년의 백인 남성들이었는데 이들은 하나의 특권층이 되었으며, 유권자들의 이해관심을 정책으로 산출하는 일에는 열정이 없었다. 정치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높아졌지만 이를 해결해야 할 의회 시스템은 기능마비에 빠졌고 만연한 당파주의가 의회를 지배했다. 그 결과 민주정부가 시민들에 ‘의해’ 운영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시민들에 ‘대해’ 운영되어, 의회제도 자체가 심각한 민주적 결핍을 드러내었다.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했지만 정치인들은 나서지 않았고, 의원과 정당의 이해관계 때문에 의회가 합리적인 개혁안을 만들기 어려웠다.

2004년에 역사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새로 선출된 주정부의 수상이 선거제도 개선을 위한 시민의회를 제안했고, 주정부는 층화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로 브리티시컬럼비아 시민의회를 구성했다. 시민의회는 주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법안 작성 권한을 부여받았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선거에 대한 선거법 개정권한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 시민의회는 캐나다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시민의회는 20034월, 나이, 지역, 성별 균형을 보장하는 층화무작위 추출 방식으로 79개의 선거구에서 각 2명씩을 선발하여 구성했는데, 최종 선정된 161명은 다양한 직업군이 포함된 다문화 그룹이 되었다. 시민의원들은 회의에 참여했던 1일당 150달러의 수당과 교통비·숙박비를 지급받았다. 시민의회가 활동한 약 1년의 기간 동안 중도 탈락자는 단 한명이었고 시민의원들의 출석률은 일관되게 95% 이상을 유지했다. 시민의회의 임무는 다양한 선거제도들을 평가한 후 기존의 단순다수대표제를 유지하는 결정을 내리거나 새로운 선거제도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시민의회가 새로운 선거제도안을 작성하면 그 안을 주민투표에 회부하여 최종 결정하도록 하였다.

시민의원들은 20041월부터 11월까지 학습, 공청회, 토의 등 세단계로 나누어 활동했다. 첫번째, 학습 단계에서는 2004111일부터 426일까지 6차례에 걸친 주말학습으로 진행되었다. 시민의원들은 전문가들의 강의 및 문헌자료 등을 통해 다양한 선거제도에 관해 학습했다. 두번째, 공청회 단계는 20045월부터 6월까지 수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시민의원들은 총 50회의 공청회에 참석하여 수천명의 시민들이 제기하는 의견을 청취하고, 문건으로 제출된 1603통의 의견서를 읽었다. 시민들은 공청회에 자유롭게 참석하여 발언하고, 메일이나 우편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시민의회에 보냈다. 각 공청회에 최소 4명 이상의 시민의원이 참석했고 50회의 공청회에 연인원 약 3천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세번째, 토의 단계는 9월부터 11월까지로, 최종 선택할 선거제도를 집중적으로 토의하였다. 1주차에 8가지의 바람직한 선거기준 중에서 3가지를 선정하도록 했는데 참여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효과적인 지역 대표성, 비례성 원칙, 유권자 선택권의 극대화를 선정했다. 1주차에 다섯가지의 주요 선거제도를 검토한 뒤 하나씩 배제했는데 혼합형 비례대표제와 선호투표제가 끝까지 남았다. 혼합형 비례대표제는 정당이 득표한 비례대표 득표수를 기준으로 정당별 총 의석수를 배분한다는 점에서 지역구 당선자를 중시하는 한국의 비례대표제와 큰 차이를 보인다. 선호투표제는 투표지에 기재된 모든 후보에게 유권자가 선호하는 순서를 기재한다. 당선자 결정 방식은 1순위자가 과반수를 득표하지 못하면 1순위 최저득표자의 2순위 표를 그 지지에 따라 다른 후보자들에게 배분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여 과반수를 넘기는 후보자를 당선시킨다.

2주차에는 배제되지 않고 남은 투표제 중에서 선호투표제에 대해 토론했다. 3주차에는 가능한 12가지 혼합형 비례대표제 모델을 대상으로 토의했는데 토론할 때마다 오히려 선호투표제의 장점이 더 부각되었다. 비례대표제하에서는 비례대표 후보 순위를 정하는 정당 간부의 권력이 강화되지만, 선호투표제는 후보자들의 순위를 유권자가 결정하기 때문에 시민 중심의 제도라고 판단되었다. 4주차 토론에서 선호투표제가 1주차에 선정한 3가지 주요 가치에 더욱 부합된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시민의원들의 최종 표결 결과 146표 대 7표로 선호투표제가 선정되어, 현행 투표제를 ‘브리티시컬럼비아 선호이전식 투표제’로 바꿀 것을 권고하는 안을 채택하였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시민의회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 직업정치인들의 의회와 달리 시민의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간에 증오심이 없었으며, 시종일관 편향성에 기울지 않고 진지한 자세를 유지했다. 시민의회가 제시한 선거제도가 주민투표에서 부결되긴 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평등한 참여수단인 추첨으로 선발된 보통 시민들이 토의로 선거제도를 결정했다는 점과, 시민의원들이 편향되지 않고 내내 진지하게 시민의 덕성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시민의회 실험을 성공한 것으로 평가한다.

시민의회는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시민들에게 중요한 공공정책을 검토하고 법률을 바꾸도록 제안하는 권력을 준 최초 사례다. 시민의회는 정치권력을 시민들에게 부여했다는 측면에서, 또 시민들이 강력한 권한을 갖고 정치제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세계 개혁가들의 주목을 끌었다. 학계로부터는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민주정체라는 찬사를 받았다. 캐나다에서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퀘벡, 뉴브런즈윅 주의 수상들이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기구 설립을 명령했고, 온타리오주는 비슷한 시민의회를 구성해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초당적 비당파층 의원들은 2006년에 모든 계층의 시민들이 참여해 주정부를 개혁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시민의회를 수립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네덜란드는 2006년에 선거개혁을 위해 이와 유사한 시민포럼을 출범시켰다. 호주에서는 공화주의적 헌법 개혁의 기제로 시민의회가 제안되었다.

 

⑶ 개헌을 위한 아일랜드 시민의회

아일랜드는 201212월부터 20143월까지 아일랜드 헌법회의(The Convention on the Constitution)를 운영하였다.5 헌법회의는 정치인 33명,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 66명, 의장 1명으로 구성되었고, 의회가 정한 7개 의제와 자체적으로 정한 2개의 의제를 다루었다. 헌법회의가 제안한 사안 중 동성결혼 합법화와 대통령직 출마가능 연령을 21세로 낮추는 안을 정부가 국민투표에 회부했고 동성결혼 합법화가 가결되었다.

헌법회의의 제안을 의회가 많이 반영하지 않자 국민들이 크게 반발했는데, 2016년 총선이 끝난 후에 집권당이 헌법회의를 대체하는 시민의회를 법률로 제정하였다. 시민의회는 헌법회의와 달리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시민들로만 구성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헌법개정 논의에 접근하는 탓에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 연방대법원 판사인 의장 1명과 52명의 여성, 48명의 남성으로 시민의회를 구성하였으며, 연령과 성별을 고려한 인구통계에 따라 표본추출 기준을 만든 뒤 면접원들이 방문해 기준에 맞는 대상자를 찾아냈다. 시민의원은 언제든 중도에 포기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같은 연령·성별·지역 조건 등을 가진 예비인원으로 교체된다. 이들에게는 교통비, 숙박비, 식비 외 다른 수당은 지급되지 않는다.

시민의회는 201610월 출범해 1년 동안 활동하면서 낙태, 국민투표, 인구고령화 대책, 선거일 고정 문제 등을 다루어왔으며, 매달 첫 토요일에 12일에 걸쳐 전체회의를 개최한다. 20172월 개최된 제3차 회의에서는 전문가 9명의 주제발표, 발표내용에 대한 원탁토론, 전문가 대상 질의응답을 반복하며 낙태 문제 쟁점을 학습하고 의견을 정리해갔다. 탁자별로 회의 진행자와 기록자가 배치돼 시민의 토론을 돕는다. 시민의회는 ‘낙태 주제’와 관련해 의학법률 전문가, 헌법 전문가(2명), 산부인과 의사(2명) 등 5명의 상설 자문그룹을 두고 있다. 이슈에 대한 시민의원의 이해도를 확인하기 위해 회의가 시작될 때와 끝날 때 몇개의 질문에 대한 의견을 적도록 하고 있다.

시민의원들의 자유로운 발언과 토론을 유도하기 위해 이들의 이름과 거주지역 외의 신상정보를 밝히지 않으며 해당 주제의 논의가 종결될 때까지 언론이나 SNS를 통한 의견 표명이 금지된다. 원탁별 개별토론을 제외한 모든 토의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며,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 시민들이 13500건 이상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3. 시민들의 토론이 의회 토론보다 우월하다

 

앞에서 살펴본 시민의 집단적 의사결정 과정은 시민의 토론이 특정 정당이나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전 국민의 관점에서 공정한 결정을 이끌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헌법이나 선거법처럼 국가의 근간과 정치체제 구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법률 개정을 논의할 때 특히 정치인이 아닌 시민들이 토론으로 의사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의회 토론이 국회 토론보다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6

대표성. 층화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의회는 직업, 계급, 연령, 성, 사회적 지위에서 기득권층이 과잉대표되는 국회와 달리 통계학적으로 전 국민이 축소된 작은 소세계와 같기 때문에 민주적 대표성이 가장 높은 대표기구이다.

토의성. 국회의원들은 정당 지도부의 인정과 공천을 받아야 하고 선거 승리를 우선적 과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토의한다. 이와 달리 시민의회는 머릿수, 돈, 지위, 계급이 아니라 ‘논증의 힘’, 즉 합리적인 설득과 동의에 의해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성적 토의에 적합하다.

공개성. 시민의회 토의는 전체 토의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기 때문에 특정 이익을 옹호할 수 없다. 토의 속에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공적 이익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하여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 주장에 다른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그 이익은 사적 동기에서 출발하지만 공적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성. 대리인들의 도덕성은 특히 문제가 된다. 공리주의자 벤섬(J. Bentham)은 모든 사람의 욕망과 이기심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정치인들의 도덕성을 더 신뢰해서는 안 되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권력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획득하려는 유혹에 자주 노출되므로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회는 도덕성을 의원 개인의 양심에 맡기지만, 한국 국회의원들의 부도덕한 행태를 보면 이 체제의 허약성이 드러난다. 국회 의사결정의 대부분은 공개된 토론이 아니라 정당 지도부의 타협에 의지하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도덕성을 지킬 내적 동기가 강하지 않다. 반면에 시민의회의 공개된 토론에서는 투명한 토의 과정이 도덕적 동기를 이끌어낸다는 사실과, 다른 시민의원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부도덕한 동기를 관철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평등성. 시민의회 토의는 합리적인 논증과 설득에 기반하여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국회가 의지하는 협상, 강압, 투표보다 참여자들의 권력관계를 평등하게 한다. 평등한 관계에서 토론하는 만큼 강박이 아닌 이성적 권고와 이해에 도달하기 쉽다.

공공성. 앞의 특성들 때문에 시민의회의 토의 결과는 사적 이익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익을 담아내는 공공성을 띠게 된다. 시민의원은 선거를 치르지 않기 때문에 선거구민이나 정당에 구속되지 않으며, 표를 거래할 이유가 없다. 또 정당의 당론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토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합리성과 전문성, 도덕성에 따라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다. 그 결과, 특정 개인의 이익이 아닌 전체 사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공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전문성. 시민의회는 다양한 전문지식 중에서 특정 정파나 이해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이익에 가장 적합한 최적의 전문성을 선택하기 때문에 그 토의 결과가 국회의 결정보다 우월할 수 있다. 시민의회 토의 결과는 대중이 전문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는데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첫째,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정치적 이슈에 관련된 전문적인 판단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이슈와 관련된 전문성은 그 문제와 관련된 정당과 이익집단의 수보다 더 많을 수 있다. 관련 집단들은 자신의 전문적 관점에서 ‘올바른 지식’을 제시하고, 관료들과 시민단체와 시민 개인들도 자신의 전문성을 반영한 관점을 주장한다. 이렇듯 전문성은 ‘복수’로 존재하지만 그중에서 올바른 의견을 가리는 절대지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의사결정을 위한 토론에서 각자의 의견을 끝까지 주장하고 대체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4대강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토론이 대표적이다. 상충되는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의 토론에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전문성을 관철시킨다. 정치적 결정은 전문성이 아니라 대부분 선거 득표수에 의해 결정되므로,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전문성이란 실제로는 ‘진짜 전문성’을 배제하는 구실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둘째, 정치인들의 토론과 마찬가지로 전문가들만의 토론도 도덕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전문가들도 직업적 이해관계 때문에 도덕성을 결여할 수 있으며, 공공선의 관점에서 전문지식을 활용한다는 보장도 없다. 반대로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전문성과 정보를 활용할 수도 있다. 역대 정부에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곡학아세하고 정권에 아부했으며, 4대강사업과 방산비리 등 수많은 사례에서 전문성을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아닌 사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활용하였다.

셋째, 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전문가들에게 의존하는 방식을 벗어나 전문가들의 특수한 지식(special knowledge)에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지식(lay knowledge)을 결합해야 한다. 정치적 이슈에서 전문성과 적합성을 판단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이 판단하는 것이며, 이 판단을 가장 효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토의기구가 시민의회다.

 

 

4. 이것부터 시작하자

 

시민의회가 좋다는 이유로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폐지할 필요는 없다. 유능하고 헌신적인 대리인들로 채울 수 있다면 그들을 부리는 것이 국가와 국민에게 득이 된다. 그러나 헌법개정이나 핵발전소 문제처럼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사안과, 국민 전체가 그 문제를 이해하고 토의한 후에 동의를 해야 할 사안이라면 반드시 국민 전체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토의하는 데 공론조사와 시민의회가 적절한 방법이며 이 제도의 장점이 널리 알려지면 앞으로 더 많은 이슈에서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가 도입되고 활성화될 수 있다.

현재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문제와 같이 그동안 정부와 이해관계자들이 밀실에서 추진하던 사업의 공과를 판단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 할 때, 공론조사가 유용하고 타당할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의 전횡으로부터 전체 국민의 이익을 수호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이다. 발전소 건설 문제에 봉착한 미국 텍사스주에서 20년 전에 활용하여 성공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성과 효용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는 지금 국회에 제출되어 있는 시민의회 법안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지지를 보내야 한다. 현재 국회에는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개헌특위와 별도로, 시민단체인 추첨민회네트워크가 주도한, 개헌을 위한 시민의회 구성 법안이 제출되어 있다.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헌법개정에서 역사적인 한해가 될 것이다. 우리 헌법은 초기에 국민발안제를 채택하여 50만명 이상이 요구하면 헌법개정안의 발의가 가능했지만, 1969년에 박정희가 3선개헌안에서 국민발안권을 박탈했다. 6월항쟁 30주년인 올해를 박정희가 박탈한 국민발안권을 다시 쟁취하는 역사적인 터닝포인트로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시민의회를 적용할 수 있는 더 많은 제도와 영역들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견제하는 최고 권력기구인 헌법재판소를 시민의회로 대체하는 방안, 법원과 관련해서는 시민이 사법심사의 주체가 되는 배심원재판을 전면 확대하는 방안까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입법부와 관련해서는 현직 국회의원들과 거대 정당의 특권적 권력을 보장하고 있는 선거법, 정당법, 국회법을 개정하기 위해 시민의회를 구성하는 방안, 그리고 국회의원들의 비윤리적 행위를 심사하여 해임을 결정할 권한을 시민의회나 시민배심원단에 맡기는 방안, 국회의원 소환을 지역구 투표가 아닌 시민의회에서 담당하는 방안을 추진할 수 있다. 행정부와 관련해서는 행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 일정 수 이상 시민의 요구로 시민의회가 정책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평가하는 정책배심제와,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이 아니라 국가원수로서 행사하는 인사권, 예를 들어 헌법재판관과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추천권한을 시민의회에 부여하는 인사배심제를 고려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영역과 문제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실질적인 방법을 다양하게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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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르겐 하버마스 『사실성과 타당성』, 박영도·한상진 옮김, 나남 2007.
  2.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이병길 옮김, 박영사 2006.
  3. 졸고 「국가정책결정 거버넌스와 공론조사」, 『사회과학연구』 제15권 2호, 2007.
  4. 졸고 「토의민주주의와 시민의회: 브리티시 컬럼비아 사례를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NGO』 제8권 2호, 2010.
  5. 이지문·박현지 『추첨시민의회』, 삶창 2017 참고.
  6. 오현철·강대현 「교육정책 결정에 적합한 의사결정 모형 탐색: 정부 주도 및 이익집단 경쟁에서 시민의회 모형으로」, 『시민교육연구』 제45권 4호, 2013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