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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마을공동체 정책과 지역사회 시민생태계

 

 

유창복 柳昌馥

서울시협치자문관. 전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장. 저서 『우린 마을에서 논다』 『도시에서 행복한 마을은 가능한가』 등이 있음. 61bok@hanmail.net

 

 

왜 마을인가?

 

요사이 마을이 대세다. 여야를 불문하고 광역·기초자치단체장들이 마을정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민선 5기를 거쳐 6기에 들어서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다. 왜일까? 21세기 첨단 글로벌 시대에 농경시대로 시간을 되돌리자는 낭만적인 시도일까? 그렇다고 종교나 특정 이념으로 무장한 강력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은 더더욱 아닐 터, 과연 마을이 뜨는 이유는 무얼까?

있는 집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기획력 있는 엄마와 돈 많은 할아버지, 거기에 무관심한 아빠가 삼위일체로 합작해야 애들이 공부 잘하고 ‘in 서울’이라도 한단다. 있는 집 애들이 인물까지 좋다는 푸념에 우스개로 넘겨보지만, 있는 집 애들이 성격도 좋다는 말에는 멍해진다. 씁쓸하다. 해방 이래, 국가가 주도한 압축적인 근대화정책으로 보릿고개가 없어지고, 통신강국의 반열에 오르고, 맹장염 수술에 천만원대의 병원비를 지불할 필요 없는 공공의료체계가 만들어졌다. 한 반에 80명 넘는 아이들이 드글드글 2부제로 돌아가던, 초등학교 가건물 교실의 기억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달아 빈부격차는 훨씬 모질고 심각한 사회문제를 만들어낸다. 한 가족이 단칸방에 모여 자살하고, 소리 소문 없이 외로이 죽어가는 노인들이 허다하다. 공부, 공부…… 아이들은 시험과 경쟁에 절어 10대를 보내고, 대학생활 내내 취업준비로 푸른 청춘을 다 쓸어넣지만 취업은 난망하다. 어쩌다 일자리를 얻어도 비정규직이고, 정규직이라 해도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몰라 불안한 30대를 보낸다. 40줄에 들어서면 새끼들 대충 건사하는 것도 버겁기만 하다. 50대면 퇴직하지만, 자식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갔다 와도 집에서 죽친다. 이렇게 심란하게 살아가는 고단한 가장을 자식으로 둔 노인들, 자식 교육에 부모 봉양에 한 인생 다 바쳐온, 엊그제만 같이 생생하기만 한 지난 시절이 서럽고 허하다. 100세까지 산다지만 도리어 걱정이다.

이제는 성장을 해도 고용이 동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동화와 구조조정으로 고용이 줄어들고, 그나마도 유연노동제로 갈수록 불안해지기만 한다. 이미 저성장 궤도에 진입한 한국 경제, 있는 사람들한테야 참 편리하고 좋은 세상이지만, 아예 없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좀 있어도 시원찮게 있는 사람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간당간당 매달리듯 버티는 그 수준에서 더 밀려나면 어쩌나 전전긍긍, 더 불안하기만 하다.

형편이 고만고만한 사람들, 어떻게든 살아낼 궁리를 해야 한다. 이웃끼리 함께 어울려 하소연하고 묘책 찾아 궁리하고, 그러다 십시일반으로 품앗이로 협동하여 해결하자고 나서보는 거다. 어쩌다 문제가 풀리면 풀려서 좋고, 비록 안 풀려도 푼다고 애쓰면서 맺은 살가운 이웃관계가 또다른 해법의 불씨가 된다. 그래서 마을을 ‘시급하고 절실한 생활의 필요를 함께 하소연하고, 궁리하고, 협동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이웃들의 관계망’이라 한다.

그렇다. 전통사회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고, 마을이 세상을 다 구원할 거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가 주도하고 관료들이 나선들 똑 부러지게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점점 줄어든다. 풀어야 할 문제들이 더더욱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시민단체가 나선다 해도 시민이 동행하지 않으면 역시 힘에 부친다. 동네에서 주민들이 이웃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자고 스스로 직접 나서야 시민단체들도 힘을 받고, 국가도 시민의 행복을 위해 제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 혁신의 불씨이고, 희망찬 미래의 마중물이다.

 

 

등장과 연결

 

3년 전 박원순(朴元淳) 시장이 서울에 마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마을은 정부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마을을 만들 수 있는 주민을 만들기로 했다. 지난 3년 서울시 마을정책의 목표는 마을을 만들 수 있는 주민을 등장시키는 일에 그 초점이 두어졌다. 3인 조례,1) 작고 만만한 사업, 수시공모제, 포괄예산제, 사전사후 지원시스템, 주민참여심사제 등이 주민의 등장을 촉진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들이었다.2) 그 결과 대략 10만여명의 서울시민이 주민으로 나섰고, 3천여개의 주민모임이 등장했다.

등장한 주민모임들은 인접한 동네끼리, 비슷한 의제별로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마을이란 나의 필요가 이웃의 필요가 되고 나아가 동네의 필요가 될 때, 비로소 나의 필요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다. 개인의 필요를 공감하는 몇몇 이웃이 모여 시작한 주민모임이 어느덧 다른 주민모임들과 연결된다. 모임마다 직면하는 공통의 어려움과 과제를 공유하고, 함께 해결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면서 문제가 함께 풀리는 경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초등 3학년 머슴애 방과 후가 걱정이었어요. 학원에 보내도 아이가 건성이고, 혹여 딴 데로 새는 것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이제 품 안의 자식이 아닌 거예요. 우연히 알게 된 같은 반 아이 엄마와 하소연하던 중 비슷한 또래를 가진 엄마들이 뭉치게 되었어요. 제 막내 시누이도 근처 사는데 그 집도 맞벌이라 고민이 비슷해서 부르고, 시누이가 아는 또래의 다른 엄마를 또 부르고 이런 식으로 다섯명 엄마가 모이게 되었어요. 그리고 주 5일을 나누어 하루씩 맡아서 아이들을 한꺼번에 돌보기로 했지요. 아이들이 더 신나하더라구요. 주말에는 엄마들이 다 모여 지난주 아이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지요. 어느덧 화제는 아이들 문제에서 ‘시월드’로, 남편 직장으로 종횡무진 넘나들게 되지요. 마치 여고 동창들을 만나기라도 한 것같이 즐겁고 친정 식구들보다 오히려 부담이 없어 좋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슬슬 어려움이 생겨요. 아이들 공부 봐주는 일이 만만치 않은 거예요. 요즘 초등 수학 너무 어렵잖아요. 머슴애들은 또 바깥활동을 하고 싶어하는데 엄마들이 감당하려니 힘에 부치는 거예요. 그런데 무엇보다 공간이 문제였어요. 다들 사는 게 고만고만해서 집이 넓지 않은데 머슴애 다섯이 천방지축 우글대니 집이 난장판이 되는 거예요. 공간이 절실한 거지요. 역시 동네 왕언니의 소개로 동네의 다른 모임을 만나게 되었는데, 아이들을 위한 작은도서관을 준비하는 부모모임과 합창단을 하는 모임이었어요. 인근에 우리 모임 말고 그런 분들이 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더라고요. 그런데 모두 공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거예요. 안정적인 공간이 필요한데 돈이 한두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엄두를 못 내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와 고민거리가 같았던 거지요. 각각의 모임에 대한 이야기가 한바퀴 돌고부터는 논의가 급물살을 타더니 공동공간을 만들기로 합의가 나버리는 거예요. 순식간이었죠. 이렇게 결론이 나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하하. 지금은 공동으로 만든 작은도서관에서 방과 후 프로그램을 아예 통합해서 진행해요. 전문 선생님을 한분 모시니까 엄마들의 부담도 훨씬 덜게 되고요. 아이들도 합창동아리를 만들어 활동을 한답니다.3)

 

이렇게 나의 필요가 이웃의 필요로 확인되는 순간, 나의 필요가 해결되고 나아가 동네의 필요로 좀더 널리 공유되면서 가로막는 걸림돌이 치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을공공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필요로 시작하지만 동네의 과제로 해결되는 것이 마을공공성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마을공공성과 공론장

 

공공성이란 평등한 주민들이, 공공의 복리를 위하여, 공개적으로 합의하고, 협동으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이 공공성이 재생산되는 원리가 바로 ‘민주주의’ 아닐까? 지난 세월 국가가 주도한 공공성, 시민단체가 자임하여 대변한 공공성을 넘어, 이제는 마을이 생활세계로부터 공공성을 다시 재구성해내야겠다. 한국전쟁 이후, 1960~80년대에 한국사회의 근대적 과제는 국가가 주도했다. 엘리트 관료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인들이 공공성 실현을 담당했다.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동력으로 교육, 의료, 교통, 주거 등 후발국가의 근대적 과제 대부분을 빠른 속도로 성취해왔다. 하지만 ‘권위주의와 획일성, 기득권과 양극화’가 공공성의 위기로 진단된다.

80년대 격동의 민주화운동 시대를 거치고 나서, 1990~2000년대에 우리 사회 공공성 창출의 과제는 시민사회로 그 배턴이 넘겨진다. 국가가 주도한 공공성의 혁신을 자임한 시민단체들은,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인 민주적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파고들어 혁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시민운동에 시민이 없다’는 반성이 나온다. 시대적 과제를 떠안기보다는 분과적인 ‘전문가주의’에 갇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다. 위임된 권력에 기초한 국가의 통치적 주도든, 자임(自任)의 진정성에 기초한 시민단체의 계몽적 주도든, 우리 사회의 공공성은 위기에 처했다. 이 공공성의 과제를 누가 다시 떠안을 것인가?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한다. 생활의 필요를 이웃과 함께 하소연하고, 함께 궁리하고, 함께 협동하면서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자기 생활의 필요를 공공의 필요로 전환시키면서, 이웃들과 지속 가능한 협동적 생활관계망을 형성해야 한다. 이게 바로 마을이다. 마을이 공공성을 주도하는 방식이다. 민선 5기에 씨를 뿌렸고 민선 6기에 본격화되고 있는 흐름이다. 2010년대는 바야흐로 마을공공성의 시대이다. 마을공공성은 시민공공성을 다시 부추기고, 국가공공성을 바로잡는 힘이 된다. 그래서 마을은 공공성의 혁신이다. 마을이 혁신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매우 다양한 차이 넘기와 가로지르기를 필요로 한다. 평소 살가운 이웃 사이에 ‘끼리끼리’의 친밀성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도록 해주는 ‘공공성’이 일상의 생활관계 속에서 떠올라야 한다. 소통의 난관이 대두한다. ‘좋은 게 좋다’를 넘어서는, ‘정의’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하는 만만찮은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개인의 필요와 욕구를 바탕으로 공통의 의제를 합의하고 메타 의제를 도출하는 ‘공론장’이 절실하다. 동네의 필요를 합의하고 실행하는 마을공론장. 이곳은 다양함이 풍부함으로 숙성되는 ‘판’이며, 이 과정은 주민이 공동체사회의 구성원이자 국가공동체의 주권자인 ‘시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마을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공동체적 시민주체가 성장하는 터전이다.

 

 

이제는 성장, 마을의 형성

 

등장과 연결, 그다음은 ‘성장’이다. 성장은 작은 주민모임들이 연결되면서 동네의 필요를 의논하고 그 해결을 위해 협동하는 이웃관계망을 만드는 일, 바로 마을을 만드는 일이다. 이제는 주민이 등장하고 연결되기 시작했으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난 3년간 만들어진 주민들의 관계망은 아직은 ‘마을씨앗’에 불과하다. 이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밀어올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마을의 꼴을 갖추게 된다. 토양과 종자의 특성에 맞는 맞춤지원이 강구되어야 한다.

우선, 정부의 지원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다양한 생활의 필요에 기초한 주민모임의 형성을 지원했던 1기와는 다른 지원전략이 필요하다. 이른바 ‘점()’과 ‘선()’ 전략에서 ‘면()’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다양한 의제에 일일이 지원하는 백화점식의 다양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집중’을 해야 한다. 집중을 통해 임팩트를 만들어내야 한다. 지난 1기를 돌아보면, 무엇보다 주민들이 적은 지원금4)에도 ‘자유롭게 상상하고, 스스로 결정하기’를 가능하도록 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1기가 개별 주민이 3인 이상 모여 등장한 것이라면, 이제 2기에는 이들 주민모임이 연결된 마을씨앗이 등장해야 한다. 그러려면 마을씨앗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행정은 각 부서별로 정한 지원금을 각개약진 식으로 내릴 것이 아니라, 마을씨앗들이 스스로 동네에서 무엇이 제일 필요한지 상상하고, 우선순위와 실행방법을 이웃들과 함께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야 자발성과 지속 가능한 힘이 쌓이고, 그 힘이 마을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정부지원이 ‘뱃살로 가지 않고 근육으로’ 가도록 하는 것, 즉 정부지원이 주민의 등장과 연결에 그치지 않고 마을형성으로 귀결되도록 하는 것이 서울시 마을정책의 목표다. “정부가 나서서 마을이 만들어지는가?” “Top down해서 Bottom up이 나오는가?”5)라는 서울시 마을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궁극적 질문은 ‘면 단위의 종합지원과 마을 형성’으로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면’ 차원에서 요구되는 절실하고 시급한 필요를 모아내고, 다시 면 단위의 지원이 강구되어야 한다. 이른바 종합지원이 필요하다. 안 그러면 잘게 쪼개진 공모사업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진다. 더욱이 그 지원이 마을 형성으로 귀결되지도 못한다.

개별 주민모임들이 가까운 동네에 있음을 알고는 서로 연결하여, 각자의 활동을 나누면서 공통의 과제를 발견하고 전체가 필요로 하는 메타 의제를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좀더 확대된 관계망에서 더욱 능력을 발휘하는 주민 리더를 발견하는 것이다. 혼자로는 엄두도 나지 않았으나 모이니 해볼 만한 거다. 우리끼리 모여서는 ‘그 나물에 그 밥’이었는데, 큰 판이 되니 별의별 재주 가진 사람들이 다 모여 무척 풍성하다. 드디어 마을의 등장이다. 마을 이름도 정해보고 마을의 바람도 모아보고, 비전과 희망을 정해보기도 한다. 마을의 호명, 자꾸 불러주고 마을이라는 틀로 내용을 궁리하다보면 그게 곧 마을이 되는 길이다.

 

 

혁신의 융합과 지역사회 시민생태계

 

이제 서울마을네트워크(이하 마을넷)6)가 본격적으로 등장할 시기다. ‘주민의 연결과 마을로의 성장’이라는 과제를 책임지고 촉진하는 역할이 바로 마을넷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이미 마을넷은 등장했고, 3년여 동안 실체로 성장했다. 3년 전 마을센터가 설립되기 전부터 우리는 서울시 행정과 대등하게 마주할 주체가 바로 마을넷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을넷은 몇몇 NGO기관이나 풀뿌리단체 대표들의 협의체가 아니라, 참여 의사가 있는 주민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현재 서울시 25개구 중 23개구에 마을넷이 결성되어 마을살이를 지원하고 촉진하는 공론장으로 성장하고 있다. 또한 마을넷은 최근 2년 동안 25개 자치구 대부분에서 중간지원조직을 출산한 바 있다.7) 마을넷의 기능은, 첫째, 지역에서 벌어지는 주민들의 다양한 활동에 대한 정보가 모이고 공유되는 허브 역할을 한다. 그러다보면 지역에서 서로 도움이 되는 활동이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품앗이처럼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받게 되면서 지역사회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더욱이 공공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도 바로바로 알게 되어 적시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지역 차원에서 절실하고 시급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함께 의논하고, 힘을 나누어 해결해보자는 수를 내보게도 한다. 정보가 모이고 사람들이 교류하다보면, 어느새 자기의 활동분야를 벗어나는 폭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다. 각자의 노력으로는 난망하던 문제도 모여서 큰 틀에서 논의하다보면 그 돌파구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지역 차원의 공공의제를 도출하고 그 해법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이른바 공론장이 생기는 것이다. 대체로 이런 지역 차원의 공론장은 구청과 협력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 이미 구청이 실행하고 있는 정책이나 사업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개선방안에 대한 공론이 만들어지기도 하면서 구청과의 협력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마을넷은 구청과 대등하게 마주하는 협치의 민간파트너로 성장할 것이며, 지역사회에서 ‘주민자치’를 실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역사회의 ‘시민생태계’를 구성하고 활력을 일으키는 유력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한편, 지난 3년 서울시 혁신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해온 것은 서울시의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청년허브,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인생이모작지원센터, NPO지원센터, 혁신센터 등 혁신 부문의 중간지원조직들이었다. 이 조직들은 모두 시 행정 내 과() 단위의 부서와 연결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과 단위의 행정기관이 각기 중간지원조직을 설립하고 그 사무를 민간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지원·관리하고 있다.

서울시의 해당 과들은 그동안 이러한 중간지원조직을 통해 혁신의 사례를 만들고 혁신의 주체를 등장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마을과 청년, 그리고 인생이모작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시민주체들이 등장하고 혁신의 사례를 만들어냈다. 사회적 경제와 NPO는 기존 혁신주체들의 활로 개척을 지원하며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촉진했다. 가장 최근에 설립된 혁신지원센터는 혁신적 솔루션을 사회문제에 적용해 해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팀들을 불광동 혁신파크에 대거 초대하고 본격적인 활동채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부문에 걸친 혁신주체들의 ‘등장’이라는 성과는, 이들 주체의 ‘연결’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마주한다. 마을에서는 이미 다양한 작은 주민모임들이 인근 지역끼리, 비슷한 의제끼리 연결되고, 마을기업으로 진화를 꿈꾼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등 사회적 경제의 여러 주체가 마을관계망에 파고들고, 청년과 베이비부머 들이 마을관계망의 유력한 주체로 등장한다. 기존의 NPO, NGO 활동가들도 지역사회에서 역할을 찾기 위해 마을관계망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른바 ‘융합’이 일어나고 있다. 각기 영역별로 등장한 혁신의 주체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융합의 기운이 지역사회에 움트고 있는 것이다.

 

 

협력적 거버넌스와 융합적 지원

 

지역사회에서 시민들은 서로 연결하고 협동하면서 닥친 문제를 해결한다. 즉 지역사회에서 시민의 이니셔티브는 ‘융합적 생태계’로 존재하고 성장한다. 하지만 중간지원조직은 행정부서의 칸막이와 꼭 닮은꼴로 각기 칸막이가 쳐져 있고, 이미 융합의 길로 들어서려는 지역사회에서 부서별로 각개약진을 한다.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는 지역사회에서 행정에 대한 불신으로, 거버넌스에 대한 피로감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행정은 중간지원조직에 대한 ‘위험관리와 성과관리’(행정의 편집)를 강화하게 되고, 시장이 임기를 채워가면 갈수록 그 관리의 강도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중간지원조직에 대한 행정의 칸막이 관리가 강화되면, 중간지원조직의 지역사회에 대한 각개약진이 강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서울시 혁신정책의 현주소 아닐까? 거버넌스의 위기라고 진단해도 지나치지 않는 상황이다. ‘주민 주도’(시민 이니셔티브)란, 시민이 더이상 ‘참여를 빙자한 동원’의 대상이 아니며, 시민의 진정한 참여는 이들의 ‘주도’에 이르러야 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박시장이 강조한 시정원칙이다. 구조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우선 중간지원조직이 융합되어야 한다. 행정의 칸막이가 허물어지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민과 관의 협업지대인 중간지원조직들이, 지역사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시민생태계의 융합적 흐름에 어울리도록 변신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기 때문이다. 광역 단위 중간지원조직들의 정책통합력을 강화하고, 기초 단위에서는 마을, 사회적 경제,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사업 등의 중간지원조직들이 조직적으로도 융합하는 것이 좋겠다. 요컨대 광역 단위에서는 상설적인 정책조정회의로, 기초 단위에서는 민간위탁형 융합중간지원조직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떨까?

재작년부터 논의하고 원칙적으로 합의해온 일이지만 추진이 쉽지 않다. 이제는 서울시가 정책으로 융합과 통합을 촉진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이러한 변화가 단순히 조직통합이라는 건조한 논의로 빠지지 않도록 혁신 영역의 ‘전략사업’을 중심으로 변화를 추진하면 좋겠다. 찾아가는 동주민센터8) 사업, 아파트 공동체 활성화나 지역재생처럼 다양한 혁신의 주체들이 함께 어우러져 협업할 때에야 비로소 그 혁신성이 잘 도드라지는 사업을 집중적(전략적)으로 추진하면서, 혁신의 지원체계를 융합하고, 지역사회 시민생태계의 융합적 진화를 촉진하고, 이를 통해 시민 이니셔티브를 현실화하면 좋겠다.

행정의 칸막이 조직을 허물기는 어렵더라도 부서 사이의 정책적 협업을 촉진하는 조정기능을 강화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각 부서가 담당하는 정책영역의 근간을 그대로 둔 채 하는 조정은 꼭 필요한 사안에 최소로 한정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될 수밖에 없다. 여성, 복지, 환경, 건축, 안전 등 기존의 부서별 정책을 뛰어넘는 의제가 필요하다. 이는 다양한 영역의 자원과 해법이 함께 동원되어야 해결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들이다. 민간에서도 시민 개인이 그 문제해결에 참여할 수 있고, 시민단체는 물론 기업도 참여할 수 있는, 그래서 모두 각자의 형편과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참여하면 할수록 그 해법이 풍성해지는 융합적인 미션이 필요하다. 이런 융합형 미션을 민과 관이 함께 추진해가면 행정의 칸막이는 물론 민간의 칸막이도 넘나들게 되고, 민과 관의 협력수준도 훨씬 역동적이고 신선하게 진화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마을 2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정 및 시민사회의 환경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일단 시장 임기의 절반이 지나는 시점이라 행정의 관리 모드가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는 ‘협치’를 매우 중요한 정책목표로 세우고 갈 예정이다. 단지 구호로 그치지는 않을 것 같다. 협치시정을 진화(進化)시키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박원순 시장의 협치시정 의지가 강력하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양면적인 시정 환경을 잘 살피며 지혜롭게 헤쳐가야 할 때이다. 전통적인 시민사회의 주체들은 이런 협치시정의 흐름을 타고 민관협력의 실행계획을 궁리하게 될 것이며, 지역사회에서도 구청과 지역사회 민간주체들이 협치 테이블에 둘러앉아 민관협력의 실천계획을 함께 수립해 실행에 나서게 될 것이다. 마을은 지역사회의 한 주력으로, 시민사회의 생활현장으로서 당당한 발걸음을 내디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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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을공동체 조례에 따르면 서울시민 3인 이상이면 누구나 서울시가 실행하는 사업에 참여하여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조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비영리민간단체 혹은 사단법인 등의 법인격이 있는 경우에만 그 자격이 부여되어 실질적으로 일반 시민이 서울시 사업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2) 상세한 내용은 졸저 『도시에서 행복한 마을은 가능한가』 (휴머니스트 2014) 2부를 참조.

3) 필자가 서울시 마을지원사업에 참여한 주민들과 한 인터뷰를 재구성.

4) 오히려 100만원 내외의 소액 지원금으로 주민들이 부담을 덜 가지고 소소하게 이웃 간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정부의 민간보조금은 주민들이 동네에서 마을활동 하는 것을 ‘만만하게’ 여겨 즐겁고 자발적으로 마을모임을 만들어가는 데에 중요한 마중물 역할을 했다.

5) 박원순 시장의 민선 5기 임기 초 마을정책을 민관이 합동으로 만들어갈 때, 일방적 관 주도를 탈피해야 하며 정부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투입(top down)하더라도 그 성과는 상향적(bottom up)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행정지원 방식의 혁신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6) 2012년 서울시 마을정책을 실행하는 초기에, 서울시 행정과 마주할 민간 측 파트너 역할을 담당한 주체로 서울마을네트워크를 설정하고, 구 단위의 마을넷 형성에 주력했다.

7) 자치구와 지역사회의 민간의 형편에 따라 민간위탁센터형, 행정직영센터형, 민간 주도 네트워크형 등 세가지 유형이 있다.

8) 서울시가 지난 7월부터 금천, 성북, 도봉, 성동 4개구에 시범실시하는 사업으로서, 동주민센터에 사회복지사들을 신규로 배치하여 가가호호 직접 방문해 복지수요를 능동적으로 찾아내고, 24개월 미만의 영아와 65세 이상의 주민 모두를 복지수요자로 보고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연결하는 정책이다. 이 사업은 동 단위로 촘촘히 찾아가는 시스템을 통해 복지사각지대를 없애고 보편복지의 틀을 잡아간다는 정책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내년부터는 17개구로 확장 실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