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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봉곤 金蓬坤
1985년 경남 진해 출생.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으로 등단. writeroom@naver.com
라스트 러브 송
형이랑 자는 꿈을 꿨어요.
내가 그 문자를 보낸 오후엔 비가 내렸고, 긴소매를 입기에 조금은 더운 계절의 끝이자 초입 무렵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쑥색 장우산을 집어들었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비탈진 마을길을 걸어 내려가다 코너를 돌았을 때 문득, 트럭에 실린 포도들로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한 냄새가 날아들었다. 내게 이렇다 할 공감각 능력은 없었지만 포도의 색깔만큼 짙은 향기네, 느껴질 만큼. 밤이야? 착각할 만큼 강렬한.
우산에 내려앉는 빗소리, 고인 열기, 물웅덩이, 반사되다 일그러지는 낮 하늘. 나는 문득 밤을 보았지만, 다시 코너를 돌았을 땐 쪼다 같은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었고, 같은 박자로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돌았나봐, 이제 와서 어쩌자고, 오늘 이상하게 덥지, 후회할 줄 알았으면 안 보냈을 거니? 양말은 괜찮겠어? 문자를 보내버렸다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제일 먼저 문자를 지웠고, 쓸데없는 말을 끊임없이 지어내 내게 던졌다.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오기 이분 전이었다. 나는 플랫폼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나는 이제 달리는 사이의 풍경을 떠올려보려 한다. 무엇이 보여?
다 합쳐 삼만원쯤 될까, 겨우 종아리 높이의 좌판에 코팅된 네잎클로버—군데군데 노랗게 시든—를 늘어놓고 개당 천원에 파는 여자, 부서진 액정화면 위를 위태롭게 스크롤하는 손가락, 올해는 브림리스 볼캡이 유행인가? 환풍구 아래 물미를 바닥에 찧어 빗물을 털어내는 남자. 그런 것들이 보이고 그때의 내가 형의 모습을 어떻게 그렸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아, 나는 열차의 진동과 바람에 놀라 습관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두시 이십삼분에 서는 열차를 타, 그가 내게 보낸 문자가 사십일분에 도착했으니 삼각지를 지났겠지, 나는 마키하라 노리유키의 노래를 들으며 사랑에 빠진 상냥한 남자가 되는 상상을 하고 있었겠지, 우산 손잡이에 턱을 괴고 앞에 선 남자의 가랑이를 힐끔거리며, 그에게서 더러운 냄새라도 났으면 바랐지만 무취에 당황하여 매력 없다 관심 없다 사실은 의미 없다 생각하며 눈앞의 남자처럼 당신도 영영 모르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겠지.
추행과 플러팅의 한끗 차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 내가 지금처럼 형을 좋아할 줄 몰랐으니까. 좋아할 사람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장난, 우린 겨우 육개월 전 우연히 한번 만난 사이로, 여태 단 한번도 떠올리지도 않은 채 살아가다 오늘 꿈 음행의 동반자였을 뿐. 형은 내게 그 정도의 사람이었지, 하지만 슬슬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초조해지기 시작했을 때
달링, 혹시 이거 섹스팅의 시작인가요? ㅋ
하고 답장이 온 거야. 어, 나를 기억한다고, 나를 까맣게 잊은 건 아니라는 사실에 기쁜 건 나중 일이고 나는 무례함을 용서받은 것만 같아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안심, 그제야 안도하며, 플래그가 잔뜩 붙은 프루스트의 책을 무릎 위에 꺼내놓으며, 순식간에 쾌적하게 바뀌어버리는 지하철의 공기와 소음, 고작 답장일 뿐인 일에 전혀 엉뚱한 회로로 돌진해 내 미래는 밝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얼씨구야」, 그때와 똑같은 환승 음악, 나는 씨발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고, 당신이 죽어 누워 있다는 병원으로 향하면서, 그러니까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후회해야 좋을지 생각할 때, 도돌이표를 만나 부딪혀 또다시 돌아가 시작하는 오후의 풍경을 나는 본다.
*
형은 활짝 웃으며 물론 날 기억한다고, 아주 잘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난해하고 장황하고 못 알아듣겠는 발제는 처음이었거든요.”
해는 짧아져 그를 만났을 때에는 이미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아주 멀리, 짙고 넓게 퍼진 구름 사이로 맑게 갠 하늘의 작은 조각이 보였다. 그와 나는 젖은 의자를 들어올려 빗물을 털어냈다. 그도 나도 약속한 듯 인적이 없는 테라스로 나가 자리를 잡았고, 이 정도의 수고로움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저녁이 되자 마침 테라스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기에 딱 좋은 날씨가 되어 있었다.
나도 물론 그를 기억했다. 그를 마주하고 보니 더욱 그랬다. 빳빳하게 다림질된 흰 셔츠에 토시를 끼고 내 말을 받아 적던 남자. 저 남자는 분명 시대착오적인 패션을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사람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거라고 확신했었으니까. 8층 테라스 너머 내려다보이는 캠퍼스 위로 추를 늘어뜨린 타워크레인이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망한 포럼을 끝내고 신촌 거리를 향해 내려가던 때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봄이었고 벚꽃은 끝물이었다. 나는 새롭게 단장한 백양로에 많이 감탄하며 조금은 아쉬워하며 일행과 떨어져 걷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나가는 것을 완전하게 그만둔—하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포스터 미감이었고, 또 하나의 이유는 거기서 만나 사귀던 애랑 깨졌기 때문이었다—게이 커뮤니티에서 이틀짜리 LGBT 포럼을 주최했고, 나는 문학 파트에서 발제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모임을 관두기 전 약속된 것이었고, 포스터, 그 망할 놈의 포스터가 이미 제작되어 있기 때문에라도 나는 그 발제를 강행해야만 했다. 다행히 내가 오는 것을 알고 미리 피했는지 활동가로 일하던 옛 남자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나는 프루스트와 바르트, 기형도의 작품을 요약하며 퀴어 계보도를 그리고 시간이 되면 베케트와 이인성까지 뻗어나가는 프루스트의 위대함……까지 설파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나의 욕심은 과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루스트의 풍성함과는 판이한 췌사만 가득 늘어놓고선 지난날의 연애처럼 망했다. 애초에 사랑 않는, 사랑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그 텍스트들에 애정을 담아 전달할 리 만무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그리고 그때의 내 심정의 색채—화창한 봄이었으니까 아이러니라도 있었겠지—와 가장 비슷했을 기형도 하나만을 다루었어도 이 정도로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원형강의실에 앉아 마이크를 쥔 지 십분도 지나지 않아 이 발제가 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딴짓하는 사람, 지난 섹션의 발제가 끝나자 눈치를 보며 슬며시 일어나는 한 무더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수를 찾는 사랑꾼 사이에서 유일하게 나와 눈을 마주치며 내 말을 받아 적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최대한 빨리 증발하고 싶었지만, 한시간을 그 사람의 토시에 의지해 그것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위태롭고 시든 표정으로 꾸역꾸역 발제를 끝마쳤다.
“내가 그게 좋아서, 다 알아들어서 그랬겠어요?”
그때의 토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꼭 같은 헐렁한 와이셔츠에 한쪽 팔에는 얇은 코트를 접어 걸치고 있었다.
“오늘은 좀 큰 토시를 끼셨네요. 한짝만.”
그가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젖히더니 크게 한번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그가 인디언 보조개를 가진 사람이구나, 알게 되었다. 주문한 차가 나왔을 때 기찻길 위로 잿빛 화물열차가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는 나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단 한번도 그를 생각하면서 음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고, 음심은커녕 생각조차 품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정문 앞에서 만나 굴다리를 지날 때 그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건 내가 지난봄의 실패를 떠올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꿈 때문이었을까? 그의 집요하진 않았지만 꼭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암시에 미리감치 나는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받을 예감으로 가득 차 그를 보는 것일까? 그건 꿈이나 예감이 아니라 이제 곧 사실이 될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겠고
“그때 연락처를 받아간 것도 다른 뜻이었나봐요?”
내가 묻자 그는 은테 안경 너머로 알아달라고, 알지 않느냐고 거의 눈빛으로 말했다.
“그랬었죠. 근데 동생이 저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수소문해 들었어요.”
나는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어서 고개를 살짝 돌려 웃었다.
“그래서 연락이 없으셨군요?”
“그날 뒤풀이 끝나고 칼같이 사라져서 너무 아쉬웠어요.”
“전 그날 탈반할까 생각도 했었다고요.”
“귀여웠어요.”
맥락 없는 칭찬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의 생김새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이곳 음대에서 강사로 있다는 사실—정확하게는 ‘음대’나 ‘강사’가 아니라 ‘연세대’를 나온 남자라는 사실에, 난 언제나 그 학교 출신의 남자들을 까닭 없이 좋아하곤 했다—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아니다. 빼앗기진 않을 것이다. 순순히 드릴 것이다. 물론 나중에.
*
형을 만났을 무렵, 나는 사랑하는 데에 지쳐 있었다. 누가 사랑하랬지? 누가 사랑하는 존재랬지? 그건 누가 만든 이미지지? 수십번을 물어봐도 결국은 나였고, 나는 이제 그만 자기증명의 관성을 끊고 싶었다.
상경 후, 내적 갈등을 끝낸 스물네살 겨울 이후로 나는 단 한순간도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 적이 없었다. 과장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실과 사정과 사건이 내가 게이라는 걸 지시하거나 게이가 아님이 아님을 지시했으니까. 나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 사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건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게 내 기쁨이었다. 매분 매초, 이제껏 나를 가려왔던—내가 가려왔던 베일을 벗고 선명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면을 발견하고 조명하는 것. 그건 다시 한번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나는 언제나 더 많이 살고 싶어했으므로 그건 내게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세상을 여태까지와 다르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강박, 눈으로 주워 담은 새 세계의 에너지를 모—든—것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가기, 그걸 다시 남자에게 집중시키기. 그건 일정 부분 학습의 효과였을 테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나는 그 수업의 모범생이자 우등생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남자를 사랑하는 데 특화된 생물처럼, 주인만을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개가 주인을 따지지 않듯 별 볼 일 없는 남자에서부터 꼴값하는 남자에 이르기까지 좋아할 구석을 어떻게든 찾아내 듬뿍 사랑했다. 그렇다고 내게 돌아오는 사랑이 있었느냐?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수지가 터무니없이 맞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그렇게나 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왜 나를 좋아해주진 않지? 의아해하며, 하지만 전혀 지친 내색 없이, 마음만 털리고 재수도 털리고 몸은 잘 안 털리는 나날 속에서 그 이유를 어떤 날에는 내 몸—충분한 발기, 균형 잡힌 몸매, 매끈한 등과 종기, 튼살, 착색 없는 피부,가 내겐 없지—에서 어떤 날에는 내 성격과 행동—지나침, 과민함, 사랑이 없어도 의미만 있다면 지속하는 맛도 멋도 없는 짓—에서 찾아냈는데 이러는 것도 지친다 이제는 정말 지친다, 사랑하는 건 지친다 이제 끊겠다, 하며 특별한 계기랄 것도 없이 그냥 한순간에 그만둬버렸다. 내가 사랑만 하지 않으면 얻을 것은 너무 많다 비약적으로 내 삶은 윤택해질 것이다 그러니 끊는다 끊었다 정말, 하던 시기에
나를 사랑해주는 형을 만났고 보름 만에 연락이 끊겼지. 그래서
또 끝이라고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매번 똑같냐.
라고도 생각했어. 그때 이미 형은 죽었겠지만, 내가 저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뭐가 좀 달라졌을까? 그건 형과 내가 사귄 지 고작 보름째 되던 날에 한 생각이고, 그 전날, 나는 더없이 행복한 상태로 강의를 끝내고 돌아와 형에게 연락을 했었지. 그날 약속이라도 잡았으면 어땠을까?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지 않아?
*
모교의 공통교양학부에서 기획한 가을 특강 수업을 끝낸 그날 밤, 불과 그저께, 추억이 깃든 쾌적한 강의실과 조교가 된 까마득한 후배, 추천도서를 칠판 가득 적었을 때 하나도 빠짐없이 읽겠다는 눈으로 필기하는 의욕 넘치는 학생들이 여전히 온기를 가득 머금은 채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눈빛을 바라보며, 한없이 떨렸겠지만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꾹꾹 눌러쓰고 전했던 나의 말들도 여전히 생생했다. 형도 그러지 않았었냐고, 당신을 닮아갈 수 있어서 더 기쁘다고, 작은 세부사항 하나도 놓치기 전에 그러나 적당히 가라앉은 시각에, 승도 패도 없을 그 일에 느꼈던 작은 승리감을 나는 형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지난날, 홀로 된 것이 가장 당혹스러웠을 때는 생기 없는 내 모습을 발견하거나 옛 남자와 함께한 장소, 뜻밖에 돌출하는 사물을 보았을 때가 아니라 기쁨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랑거리도 못 될 사소한 기쁨을, 부모님과 친구와는 공유할 수 없고 공유하기 싫은 그런 것들을 말할 수 없는 적막함. 망연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 마음을 가누어 억눌러야 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있다! 있었다.
분명 하나도 재미없겠지만, 나에게만 의미 있을 너무 좋을 이야기들. 그렇대도 우린 앞으로 훨씬 재미있어질 거야, 그치?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마음 놓고 좋아해도 좋겠다. 그 사실을 보란 듯이 말해주고 또 사랑받아야지, 이미 좋아하지만 형도 그렇게 말해준다면 아니 무슨 말을 내뱉든 나는 이제 정말로 형을 사랑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해주고 사랑해야지. 그 미칠 듯이 달콤하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난 몸만 보는데, 목소리에 반하다니!)
물론 형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날 이후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나는 복수라도 하듯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어놓고는 눈을 감고 등 뒤로 훌쩍 날려버렸다. 하지만 채 몇분도 지나지 않아 그런 행위는 우리의 관계를 불경스럽게 만드는 것이라 느껴졌다. 이런 나의 모습은 그가 싫어할 거야. 나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방 안에서 핸드폰을 되찾고 벨소리를 최대치로 맞춘 뒤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이 행동을 반복했다.
가끔 핸드폰을 집어던지며 미신을 만들기도 했다. 이것을 십분 안에 찾을 수 없다면 형과 나는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오분을 넘겨 찾는다면 우리는 오년 동안 행복할 것이다. 물론 찾는 일을 허투루 하는 것은 반칙이었고, 거짓된 행동은 미신을 깨는 짓이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다. 하지만 길어야 일분 남짓한 시간에 나는 급격하게 침울해졌고, 따져보니 이만한 크기의 원룸에서 십분에 걸쳐 찾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따라서 무효였다.
*
정말로 무효네, 헛웃음이 났다.
화가 많이 났었다,라고 쓸 수밖에 없어 화가 난다. 긴장감을 유지한 채 형에게 품었던 의심들—네 모든 것이 가짜였을 거야, 형의 모든 말은 거짓이고—을 나열할 수 없어서 화가 난다. 이미 폐기된 의혹들—벌써 질렸냐? 넌 좀 좆같다 말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다시 보니 아니디?—을 토로할 수 없어 화가 나고 나는 허접한 물건을 판 사람의 불안감을 불량품을 만든 사람의 초조함과 위축감을 느끼며 맞아, 내가 상품성이 좀 떨어지긴 하지? 매가리 없이 한탄하며 구애가 애구(哀求)로 변해가는 모습을 흐름을 좇다 반복하다 지쳐 나가떨어져야 했기에 화가 났다.
근데 형,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건 내가 형의 죽음에 얼마만큼의 어떤 감정을 느껴야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야.
*
당신의 형은 내게 “죽은 사람에게도 연락이 많이 오네요” 하며 말을 뗐다. 모르는 번호였기에 나는 분명 잘못 걸린 전화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구에게 전화를 거신 거냐고 묻자, 그는 내 번호와 이름을 되돌려주며 형의 이름을 말했다. 수화기를 떼어 발신번호를 확인해보니 형과 뒷번호가 같았다. 동생의 안녕을 빌거나 울분을 터뜨리는 문자는 쌓여 있지만, 그쪽처럼 수십통을 건 번호는 하나라 아무래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고 부연했다.
나는 죽어도 ‘아는 동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함께 공부하는 사이’라는 하나 나을 것 없는 말로 대꾸했다. 당신의 형은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묻더니 내가 대답을 찾아 머뭇거리는 사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머니가 혁상이 냄새를 그리워하시네요.”
본명이 혁상이 맞는구나. 나는 당신의 이름이 맞아서 덜컹 내려앉았고 틀리지 않아서 안도했다. 당신은 가족에게 말했을까? 알 수 없지만, 그럴 리 없고, 그는 어머니에게 드릴 옷가지를 챙기러 왔다고, 발인 전 함께 묻어줄 것은 없을지 동생의 집에 잠시 들렀다고도 말했다. 그러다 핸드폰을 충전해보았다면서.
혁상을 말하는 것이 맞나요? 형이 어쨌다고요? 물어보았지만, 그는 내 질문에 별 반응 없이, 잠시간 침묵,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느 순간 당신이 없는 집 안의 풍경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쩌자고 형의 집에 가자는 걸 거절했을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아 답답해 미칠 것 같고.)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형과 몹시도 비슷한 목소리, 완전한 경상도 말씨, 당신과 내가 버린 그 말투에 나는 어쩌면 형의 과거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아주 잠시 황홀했다. 조금만 더 그와 통화하고 싶었다.
쏟아지는 찬물을 맞으며, 이상하게도 슬프지는 않았다. 슬플 수가 없었다. 형이 죽기 전이거나 죽어갔을 즈음이거나 죽었을 때 이미 나는 다 슬펐으니까. 그 지긋지긋한 기다림에서 놓여났다는 해방감과 나는 또 한번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다는 안도감. 당신은 좆같은 새끼가 빌어먹도록 흘러넘치는 이 바닥과 이 세계의 물음표 남자가 아니었다고, 나 같은 걸 좋아하는 또라이가 아니었다고, 그래그래 내가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다고, 나는 형을 잘못 본 게 아니었다고, 그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아니라 그저 형은 죽은 것뿐이었다고. 그래서 기뻤다. 미칠 듯이 기뻤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입꼬리가 광댓살을 밀어올렸다. 그제야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매면서, 언젠가 글자가 아닌 목소리로 된 부음을 듣게 된다면 그건 아주 중요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왔다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고민해, 형은 내게 어떤 사람인 거냐고, 어느 정도의 사람인 거냐고. 내가 형을 사랑하는 모든 원인이 형에게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좀 알려달라고. 이젠 당신과도 나와도 무관하게 증폭되는 이 감정 속에서 여전히 나는 좀 멍하고, 마침 기다린 사람처럼 처량함을 연출해 한탄하고 비통에 빠진 나를 감상할 여력이 이번엔 없으며, 구두에 발을 집어넣는 순간까지도 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질문은 다른 모든 게 아니라 과연 내가 그곳에 갈 자격이, 아니 이유조차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아니 처음으로 비탈길을 휘청이며 내려가며 말갛게 갠 하늘을 본다. 하얗게 번져나가는 때늦은 월광초를 지나쳐, 무취한 포도 앞에 서서 한참을 노려본다. 문득 이제는 정말 끝난 것이 아니냐고 그 어떤 착각과 환각과 망상의 선택권이 이제 내겐 없지 않느냐고, 이런 건 정말 싫으니까 그만하면 안 될까? 형을 다시금 만나게 된 그날의 오후를 소환해내 다시금 풍경을 바꾸어보려 하지만 그 무엇과도 겹쳐지지 않고
연인이 죽는 꿈은 그 사람이 아주 잘될 거라는 길몽이래요.
그렇다면, 당신이 이미 죽었다면, 나는 좋은 꿈을 꾸었어야 하고, 며칠째 잠들지 못한 나는 형과 다시 만나게 된 날의 꿈, 꿈이었지만 내가 보낸 문자로 인해 정말로 형과 자게 돼버린 얼토당토않게 흘러가버린 미친 그날 저녁, 밤, 새벽, 아침을 어떻게든 다시 한번 살려내보려고 하지만, 그건 다시는 찍을 수 없었던 단 한번의 망해버린 컷을 건네고 잠적해버린 감독과 그것을 어떻게든 살리겠다고 애쓰는 편집기사의 노력 같고, 뒤섞인 카드를 모아쥐고 한번만 더 게임을 하게 해줘 이번엔 내가 카드를 섞게 해줘 애걸하는 실패한 도박사처럼 부질없는 또다른 꿈을 꾸는 자의 마음일 텐데
나는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것이 꿈이며, 당신은 죽지 않았고, 실연의 상실감을 극도로 문학적으로 비약해 환상하는 중이며—나는 언제나 이별을 죽음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건 절대적으로 똑같다고 여겨왔으니까—사랑에서 깨든 잠에서 깨든 둘 중 하나만은 하게 해달라고 빌어보지만, 둘 다 잘, 아니 아예 하나도, 도무지 되지를 않는다. 나는 이제 명령한다. 제발 기억하라고.
*
호재인가! 그럴 기회가 없는 것이 문제였지 누군가가 나를 원한다고 느낄 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지는 않았다. (많이 사랑해본 사람이 사랑받을 줄도 안다는 것은 이 맥락이던가!) 아무래도 오늘 그와 자게 될 것만 같은데 이대로라면 너무 헐한 진행이 아닌가, 아니 어른의 만남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동안의 회한은 무르자, 밝히는 남자에게 밝혀지는 건 웰컴이니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하나도 어려울 것도 없이 단순해졌다. 하거나 말거나.
약간은 경직돼 보이는, 세상에서 제일 모범생처럼 생긴 음대 강사—작곡 전공이었으며 이번 학기에는 음열기법을 가르친다고 했다—의 수줍은 구애와 칭찬에 나는 슬슬 마음을 고쳐먹고 있었다. 우리는 까페에서 나와 불이 켜진 창천교회의 뾰족탑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섰다. 그는 잠시 차만 마시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짐을 챙겨야겠다고 말했고 나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다.
정문을 지나 근사하게 다듬어진 관목 사이를 우리는 함께 걸어나갔다. 어느 순간 구두 소리는 풀을 밟는 소리로 바뀌어 있었는데, 노랗게 변해가는 잔디 위에서 그는 음악관으로 가는 길은 이쪽이라고 손짓했다. 그는 조급한 것이 아니라 나를 리드하고 있었고, 미숙한 것이 아니라 꽤 과감했다. 아무렴 캠퍼스를 구경하는 것은 좋았다. 나는 혼자서 매번 본관까지는 가보았으나 이 길을 택해 걷는 건 처음이었고, 계절이 바뀌려 할 때의 어쩐지 달뜬 날씨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려 했다.
“그럼, 그날 포럼에 온 건 실수였네요?”
“그렇죠. 나도 그땐 진짜 초짜였어.”
“저는 형이 너무 열심히 받아 적길래 문학하는 사람이거나 의욕이 과하신 새 상임활동간 줄 알았잖아요.”
“제가 좀 재미없게 생기긴 했죠?”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날 형은 어떻게 봐도 좀 이상하긴 했어요.”
커뮤니티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는, 신참자들이 으레 그렇듯 중요한 포럼이라고, 꼭 참석하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것이었다. 모교에서 열린 포럼이라 부담 없이 왔다고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모교였기에 더욱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일이기도 했다. 걸을 때마다 그의 갈색 코트에 참나무 그림자가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모교,라는 말을 반복해서 생각해버렸기 때문일까? 말이 많아지는 형을 보며 생각보다 단조로운 건물에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보며 나는 그의 고향에 함께 와 있다는 착각마저 잠시 들었다. 어쩌면 형은 그때 큰 용기를 내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그리고 그건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새삼 고마운 일이었다.
*
타인의 삶을 천천히 음미할 수 없을 것이란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를 한입 가득 집어넣고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짓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것이 쓰든 달든 아주아주 천천히, 이번에는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성급하게 미래를 맛보는 짓을 이번에는 안 한 것 같은데. 형과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머릿속의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소리내어 뱉은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더 놀랄 것이 있어? 묻고 힘없이 웃어버렸다.
차창에 기대 프루스트가 말했던 일본 종이꽃 놀이를 떠올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수중화(水中花) 이상의 이름—대개의 장난감이 그렇듯—을 찾을 수 없었던, 마른 꽃잎이 물에 잠기면 활짝 피어나는 장난감. 나는 티포트 속 블루밍 티를 볼 때면 어김없이 소설 속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물에 잠기며 천천히 펴지는 꽃을 볼 때, 서서히 윤곽이 잡히고 색이 짙어져갈 때, 우리는 꽃의 과거를 보는 것일까 미래를 보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꽃의 현재를 보는 것뿐일까. 그 어떤 하나로 결정짓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경이. 그것을 보며 나는 여지없이 나와 나 비슷한 사람들에게 투영하기도 했었다. 처음 만나 너무 많은 것을 예감해버리는 사람, 성마름을 기민함으로 바꾸는 사람, 예민함을 섬세함으로 바꾸는 사람, 의뭉스러움을 신비로움으로 바꾸는 사람.
그리고 나는 형을 보면서 형의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지금 무얼 보는 중일까?
열차를 뚫고 들어오는 빛다발에 눈이 아팠지만 흘러가는 풍경을 그저 바라보았다. 볼 것이 볼 수 있는 것이 오직 풍경밖에 없었으므로 풍경을 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사라진 거리에 오직 풍경만이 남았듯, 기억 속에서라면 서로에게 몰두하느라 풍경이 없는 거리가 더 진실에 가깝지는 않을까. 나는 어쩌면 형에게 집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를 둘러싼 것들이 생생하게 떠오를 때마다 그날들의 날씨와 온도와 거리와 나무와 건물이 보일 때마다, 그건 어쩌면 상상된 기억일 것이란 불안에 시달리며, 혹은 기억이 어느 순간 유기체가 되어 제멋대로 상상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 속에서, 무엇이 되든 내게 부적절해지고 말 빈 답안지 앞에서, 주인이 사라진 풍경을 그저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더 선명해지려 할 때마다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가 아래 여기저기로 뻗는 철로들을 보며, 차량기지에 멀뚱하니 선 열차들을 보며, 내 아래로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왜 철로가 하나가 아닌 거지? 어째서 유리는 차갑지? 사람에게선 왜 소리가 나지? 내가 탄 것은 지상철이야 지하철이야? 나무의 초록은 왜 노랑이 되지? 파랑이 될 수도 있지 않아? 삐걱거리는 머릿속 자꾸만 바보 같은 질문만 솟아나 쌓일 뿐, 명쾌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은 그중 단 하나도 없었다.
그와 처음 잤던 날 모텔을 나가기 전, 우리는 현관문에 서서 가벼운 입맞춤을 서너차례 나누었고, 마지막으로 내게 입맞춤을 하고 입을 뗐을 때 그는 내 허리를 감은 손을 벨트로 옮겨 쥐고선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건 그날 이후 우리의 작별 세리머니가 되었다. 그때 나는 예감했을까?
아니면, 신촌의 모텔에서 나와 비탈길을 내려가며 형이 가방을 뒤져 썬크림을 꺼냈을 때,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자 가로수를 가리키며 저기 봐봐, 저기만 단풍이 들었지? 저게 다 햇빛 때문이야, 하고 가짜로 겁을 준 아침. 나는 못마땅한 척 손을 내밀고 형이 짜준 썬크림을 받아 몸을 돌려 발랐을 때, 어느 순간 우리 둘 다 얼굴을 문지르다 함께 웃어버렸을 때 나는 예감했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맥모닝을 먹으면서 우리 계속 만날래? 만나볼래? 조르듯 장난치듯 형이 물어봤을 때, 진짜 멋없다 근데 지금만큼 좋을 타이밍이 언제겠어, 하며 형의 환타를 빼앗아 한모금 들이켠 뒤 좋아요, 말하고 내가 미소지었을 때 그때 그랬어야 할까? 그때를 후회해야 할까?
가령 형과 함께 잠들었다 깨어난 아침이 좋지 않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았다면, 찝찝함이 남거나 불쾌감과 후회가 없는 섹스가 이어지지 않았더라면, 마른 사람과는 잘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몸이 잘 반응하지 않았더라면, 절정에 이르러 형의 입에서 내가 잘 아는 성조의 사투리가 나왔을 때 형은 부끄러워했고 그것마저 귀엽지 않았더라면, 잠들어 있던 이 수줍게 밝히는 남자가 점점 더 좋아지려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의 부정을 해보아도
끝은 없고 시작만 반복되는, 또다른 시작만 자꾸 생겨나는 회상 속에서 후회와 예감을 겹쳐봐야 하는 순간을, 하지만 좋기만 한 일들을 떠올리며 나는 좋기만 할 당신을 당신의 기억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런 방부의 상태를 점점 더 표백될 티 없는 당신을 잘못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던 사이의 형을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본 모습인 그것을 나는 앞으로 어떻게 남겨놓아야 할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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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처 열흘을 매일 만났다.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만났다. 만날 이유가 없어도 만났다. 세월이 쌓이지 않은 사람과의 얕은 층위의 대화는 언제나 내게 불편한 일이었지만, 그와 함께라면 그 불편함은 모르는 것을 알아갈 때의 두려움 섞인 쾌감, 미지를 알아갈 때의 기쁨이 되리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기대감 속에서 나는 충만했다.
기적 같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그건 비단 나의 지난 연애에서뿐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패착이기도 했다. 당신과 내가 만난 건 기적이에요. 거기에다 당신과 내가 게이일 확률을 곱해버리면 그 기적은 무한대가 되어버렸다. 그 환상이 사그라들 때쯤 혹은 그 환상이 일방적으로 폐기되었을 때 패착은 집착으로 변해버린다. 끝은 천차만별로 다양했지만 하나같이 끔찍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린 확실히 좀 다르지 않은가, 아니다 우린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다른 거 하나 없이 우리 뻔하게 남들처럼 오래 하자 운운.
형을 마지막으로 봤던 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째서 난 일기를 쓰지 않으며 살았던 거지? 그날 왜 나는 계산을 하나도 하지 않았던 거지? 창천 교회의 불 켜진 종탑, 정문을 비추는 하얀 불빛, 천천히 좌회전하는 파란색 버스, 신호등 경보음, 드문드문 불이 켜진 세브란스 병원, 옹색한 소나무, 이런 뻔해빠진 풍경 속 그를 뒤로하고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뒤돌아본다. 그러면 형이 손을 흔든다. 언제나처럼 같은 셔츠를 입고 비슷한 갈색톤의 치노 팬츠를 입고서, 내가 현수막쯤 걸어가 다시 돌아보면 그땐 정말로 사라져 있고 그건 형을 만난 첫날부터 내게 반복되는 것으로, 하나도 특색이 없었을 마지막 작별 풍경 속에서 그건 어쩌면 첫날일 수도 셋째 날일 수도 마지막 날일 수도 지금의 머릿속 풍경일 수도 있을 전혀 구별되지 않는 장면 속에서 나는 무엇도 길어낼 수 없어 속이 바싹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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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행열차의 종착지를 알리는 소리에 놀라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나는 선 채로 깜빡 잠이 들었다. 싯누렇게 짙어진 햇살, 북광장이라 불리는 곳의 로터리—유년이나 순환을 떠오르게 하는, 질릴 때도 되었지만 매번 매료되는 반복의 이미지—앞에 서서, 난생처음 다다른 곳이지만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공간을 바라봤다. 쇠락한 역사 앞으로 듬성듬성 구색 맞추기로 심어진 앙상한 벚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형과 내가 나고 자란 바닷가 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이 도시. 어째서 당신은 이곳에 살았고 어째서 당신은 이곳에서 죽었을까? 문득 형의 사인을 단 한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것이 이제 내게 마지막 하나 남은 당신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 이전, 나는 당신의 사인에 가닿을 수나 있을까?
내 앞으로 천천히 멈추어 서는 택시를 타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달라고 말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턱을 덜덜 떨면서도 그게 무슨 두려움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기사가 백미러로 내 옷차림을 보고 누가 죽어서 가느냐 물어본다면, 연인이 죽었다고, 사랑하는 형이 죽었다고 말해주려 준비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그가 조금만 무례했다면 좋았을걸, 나는 불필요한 실망을 했다. 옅은 보라색으로 변해가는 창밖 육차선 도로 위, 교차로에서 멈추어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덤프트럭이 옆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차체가 조금씩 흔들렸다. 지금껏 이곳에 와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을 찾아야만 했다.
이곳 어딘가에 당신이 있나?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병원을 올려다보았다. 급작스럽게 토기가 치밀었다. 형이 여기 있다는데, 당—신인데, 마땅한 몸이 눈앞에 없었다. 솜털, 저걸 다 뽑아버리거나 이빨로 물어뜯고 싶다고 거의 난폭한 마음이 들게 했던 당신 목 뒤의 털. 치노 팬츠에 오줌을 한방울 묻혀와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곳을 계속해서 가리던 당신의 손. 어떻게 이렇게 봉긋하게 아름다울 수 있냐고, 어떻게 이렇게 마른 몸에서 이곳만 살질 수 있냐고 내가 얼굴을 파묻던 엉덩이. 당신의 고간에서 나던 달고 매운 냄새, 그게 여기에 있냐고 물어보지만 있는지 없는지조차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넥타이를 풀었다 다시 고쳐 매고 구두끈을 발등이 아프도록 조이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장례식장이란 글자만 바라보았다. 이유도 자신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가야 한다고, 보지 않고서는 안 된다고, 주차 차단기가 올라가는 것을 신호로, 아니 아직, 하지만 어느 순간, 내 마음도 내 몸도 무관하게 당신이 있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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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큰가든 속, 금연 문구가 무색하게 기름통으로 만든 재떨이 주변으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겠지. 나도 한대 피워볼까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챙겨오지 않은 듯했다. 나는 그들 중 가장 씩씩해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가 담배와 불을 빌렸다. 어지러웠지만 빠르게 뛰던 심장은 조금 가라앉았다. 이제 곧 당신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뒤집힌 활주로처럼 양 끝만 불을 밝힌 복도의 초입, 형의 이름 세 글자가 노란색 LED가 되어 깜빡이고 있었다. 당신의 홀어머니, 그리고 끝글자만 다른 당신 형의 이름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 김, 혁, 상. 형을 떠올리기엔 지나치게 남자다운 이름이라고 잠시 생각했다. 여전한 비실감.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내 옆으로 남자 세명이 붙어 섰다. 어디선가 본 적도 있는 듯한 하지만 그럴 리 없는 말쑥하게 빼입은 익숙한 스타일의 사람들. 예상대로 형의 빈소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다 나는 그들이 조문을 마치면 들어가야지 마음먹었다. 그들은 형의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나는 형에게 친구가 있는지조차 몰랐구나. 하지만 원한다면 오늘이 가기 전 그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 핵심으로 들어가기까지 변죽을 울리는 게 수고롭겠지만.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이 절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멀리, 흐릿하게 형의 사진이 보였다. 내가 본 적 없는 시절의 형이었다. 언젠가의 팸플릿에 쓰였던 것일까? 나는 조금만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숨죽여 세걸음을 더 걸었을 때, 당신의 어머니가 아마도 당신의 새로운 친구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들은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함께 자리에 주저앉아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머리를 짧게 다듬고 턱수염을 기른 한명은 그녀 옆에 붙어 앉아 그녀만큼 크게 울었다.
이제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의 와이셔츠를 품에 안고 낮게 읊조리다 웃었다. 형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었는지 어찌나 뽄만 지기는 아이였는지 이 웬수를 어떻게 갚느냐며 다시 울먹이다가 어느 순간 당신을 사랑했다고 말하는데, 그건 우리가 서로에게 단 한번도 해주지 못한 것—어째서 사랑한다는 말은 꼭 서울말로 하게 될까? 그렇게여야만 할 수 있었을까?—내가 살면서 단 한번도 발음한 적 없는 그 성조의 사—랑, 그녀의 말은 점점 뭉개져 넋두리로 그 넋두리는 타령으로 변해가는데,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대도 성조로만 이루어진 저 음률을, 절대로 옮겨 적을 수 없고 따라 할 수도 없는 저 소리를, 나는 그 어떤 죽음도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당신의 어머니가 내는 저 소리만큼은 어째서인지 알 것만 같고,
내가 모르는 형을 그녀는 알고 그녀가 모르는 형을 내가 안다는 사실에 나는 뛰어 달려가 말하고 싶지만, 먼저 쏟아지려 하는 눈물을 참아야 했다.
여전히 붙박인 채로, 질문해. 순간일 뿐인 감정과 어쩌면 영원해질지도 모를 마음을 나는 여기에 오지 않고는 분별할 수 없었던 것일까? 어쩌면 나는 기다릴 것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을까? 그렇다면 당신의 죽음은 기다림의 시작일까 소멸일까? 나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를 보며, 들으며, 내게만 환상적일 상상과 기억의 궤변이 더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녀의 선명함 앞에서 당신을 겹쳐보는 짓은 이제 좀 역겹고, 계속되는 그녀의 타령을 이제는 점점 노래가 되어가는 그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형은 죽은 것이 맞는다는 사실이 선명해져갔다. 나는 아는 것을 다시 알았을 뿐인데도 숨조차 고르게 쉴 수 없었다.
형을 만나기 전 내게 미지는 언제나 기쁨이었어.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을 두려움 없이 한껏 빨아들이기란 불가능하리란 걸 느낀다. 아직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너무나 많지만, 원한다고 꿀 수 없는 꿈처럼, 형도 그러니까 이제 그런 사람이 된 것이지요? 그럼에도 당신 생각으로만 가득한 이곳에서 나는, 형이랑 만나는 꿈을 꿨어요. 당신의 없음이 아니라 있음으로 가득 찬 이 공간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돌이켜보고 겹쳐보고, 후회해보고, 떠올려보고, 상상해보고, 기억해보는 그 모든 것 중에 내가 단 하나만 할 수 있다면, 그 무엇보다 형을 그저, 보는, 꿈을 꾼다고.
딱 한번만 더 형이 보고 싶었다.
더는 순환하거나 반복되지 않는, 자기지시적이지도 않을 순정한 다음의 풍경이 보고 싶었다.
어떤 모습이든, 어떻게든. 나는 그것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