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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혜영 片惠英
1972년 서울 출생.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장편소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홀』 등이 있음. fragmenta@naver.com
후견
입양기관 담당자를 만난 후 정소명은 아버지 정호인에게 곧 그 사실을 알렸다. 어차피 알게 되리라 생각해서였다. 수학교사로 교직을 시작한 정호인은 일찌감치 재단과 관계를 맺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M읍에서 유일한 고등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재임 중 전형적이고 권위적이라는 평판이 있었으나 퇴임 후에도 여전히 교장으로 불렸다.
해괴한 일이다. 정호인이 불쾌해하며 말했다. 방법을 찾아볼 테니 일단 내려오라고 했다. 다음날 정소명이 집에 도착했을 때 정호인은 클럽 회원들과 함께 있었다. 읍내 병원장, 농약사 사장, 현직 도의원이었다. 모르는 얼굴이 있었는데, 변호사라고 했다. 그들은 이 지역 R클럽 회원으로 어떤 안건이건 함께 의논해서 결정했다. 비밀을 훤히 알고 있는 사이라는 뜻이었다. 모여 있을 때면 특별한 의제 없이 입을 놀렸지만 방문객이 끼어들면 일시에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일반적인 수준의 대화를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들었다. 정소명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인사를 한번에 끝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정호인과 어울리는 클럽 회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면 이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은 얼추 끝나는 셈이었다.
“정기자, 오느라 고생했네. 최원장은 잘 있고?”
정소명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인은 딸이 의약잡지 기자로 단 6개월 근무했고 결혼 후 어떤 경력도 쌓지 않았다는 걸 잘 알았다. 이혼소송 중인 사위를 여전히 최원장이라 불렀고, 사위 얘기가 나오자 놓치지 않고 병원 규모를 떠벌렸다. 클럽 회원들은 이 화제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걱정 말게. 잘될 걸세.”
정호인의 얘기가 끝나자 병원장이 정소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일에 대해 이미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질문이 이어지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다였다.
병원장이 다시 시작하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가장 좋은 건 이웃에게 알려지게 하는 겁니다. 계고장을 붙여두세요. 대문 앞에서 연체 금액을 크게 말씀하셔도 되고요. 다른 말씀은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말에 정호인이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부끄러워봐야 인간이 되는구만.
정호인은 클럽 회원들과 조합 형식으로 기금을 마련해 처지가 어려운 농민들에게 자금을 대출해주는 사업을 벌였다. 의도와 달리 고금리인 탓에 사채와 다름없다는 비난을 받았고 연체율이 높아 자금 회수와 운용이 수월치 않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정호인은 자주 발끈했고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소리쳤고 마을 사람들 얘기를 할 때면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는 표현을 썼다. 추심에 관해 변호사의 조언이 필요한 걸 보니 대출에 문제가 생겼거나 누적 연체액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앞으로는 소액의 연체라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정소명이 학생 시절 지내던 방은 지금은 손님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쓰던 가구도 남아 있지 않고 청소해주는 아주머니의 뜻대로 정리된 방이라 이제는 제 방 같은 느낌이 전혀 없었다. 책상 위에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정소명의 학생 때 물건이 담겨 있었다. 정호인이 정소명의 상장을 죄다 벽에 걸어두었다가, 정소명이 질색하자 거기에 담아둔 것이었다. 어쩌다 이 방에 묵는 사람에게라도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게 분명했다. 상자를 내다버리려면 일단 차에 가져다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정호인이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 아이를 돕기로 했다.”
“어떻게요?”
“우리 클럽 하는 일이 본래 그런 거 아니냐. 봉사, 희생, 헌신…… 사정 얘기를 하니 다들 딱하다더라.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누가 딱하다는 거예요?”
“어허, 누구겠냐. 네가 친모인 줄 알고 멀리서 찾아왔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입양아지. 기관하고 합심해서 진짜 친모를 찾아줄 생각이야. 클럽이 나서면 결국 마을 사람들이 다 나서게 되어 있어. 오래전 일이지만 동네일이라면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갠지도 다 아는 사람들 아니냐. 아무리 꽁꽁 숨겨도 다음날이면 소문이 나는 게 이 동네다. 남의 이름으로 애 낳고 도망간 여자 하나쯤은 금세 찾을 수 있을 거야.”
정호인은 약속을 잡아놨으니 면사무소 앞 까페 주인을 만나보라고 일렀다. 아무래도 정소명 또래가 저지른 일일 테니 동기 사정에 밝은 사람에게 얘기를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까페 주인이 정소명과 동창이라고 했다.
“읍내 쏘다니던 흔한 날라리 중 하나일 게다. 걔들은 나한테 인사 한번 하는 법 없었다. 지들이 누구 덕에 사람 구실 하는 줄도 모르고 감히 네 이름을…… 은혜도 모르는 놈들.”
정호인이 누구에게인지 알 수 없는 욕을 내뱉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이현숙이라는 입양기관 담당자는 불쑥 전화를 걸어와서는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간곡한 투였다. 예전에도 정소명은 종종 모르는 여자에게 그런 전화를 받았다. 전화로 용건을 말하는 경우도 있고 무조건 만나자는 경우도 있었다. 만나면 남편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얘기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도 있고 정소명을 사납게 몰아세우는 여자도 있었다. 이현숙 역시 그런 부류 중 하나라면 만나두는 게 소송에 유리할 터였다.
이현숙은 맡은 업무를 설명하고는 사진을 한장 내밀었다.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눈이 크고 머리숱 적은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정소명 표정을 살피더니 사진을 한장 더 내밀었다. 여자 사진이었다. 작고 까만 얼굴에 흑단같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명랑하게 웃고 있었다. 어려 보였다. 갓 스무살이나 되었을까.
“사라라고 해요. 이쁘죠?”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서 정소명은 잠자코 있었다. 사라가 너무 어려 보여서 남편과 관계된 사람이라면 역시 꽃무늬 블라우스 쪽일까 싶었다. 짐작 가는 바가 없어서 기분이 나빠졌다. 기습적으로 벌어지는 일치고 좋은 일이 없었다.
“이 아이가 이렇게 자란 거예요.”
순서대로 두장의 사진을 가리키는 이현숙의 말에 자랑스러워하는 투가 묻어 있었다. 정소명은 금세 불쾌해졌는데, 그 말의 의도를 산발적으로 추측하느라 기운이 빠져서였다. 사진 속 여자가 남편의 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남편의 얘기를 들어왔다. 가급적 휘말리지 않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분은 위탁모예요.” 이현숙이 꽃무늬 블라우스를 가리켰다. “사라는 백일 무렵에 네덜란드로 입양됐어요.”
이번에는 서류를 내밀었다. 병원 기록과 입양동의서였다. 복사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서류에 기재된 산모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는 똑똑히 보였다. 주소란에 적힌 집 주소도 선명했다. 정소명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아버지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남편이 누군가를 시켜 일을 꾸몄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남편은 결혼 후 한푼도 벌어오지 않은 정소명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위자료까지 물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한동안 재산 명의를 돌리는 일에 몰두하는 것 같더니 소송이 시작되자 정소명의 흠을 찾으려고 여러모로 시간을 끌었다. 남편 짓이 아니더라도 그가 알게 된다면 이 일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려 들 것이다. 남편은 언제나 이런 일을 추궁해왔고 있으리라 짐작해서 화를 냈고 벌어진 일처럼 굴었다.
“많이 컸죠? 지금 한국에 와 있어요. 친엄마를 만나고 싶어해요.”
이현숙이 말한 ‘친엄마’가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정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전 아닙니다. 아이를 낳은 적 없습니다.”
이현숙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일을 자주 경험한 것 같았다. 제 자식이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일 말이다.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사정이 있으시겠죠.”
정소명은 당황해서 사람을 잘못 찾아왔다고 되풀이해 말했다. 이현숙은 잡아떼봐야 소용없다는 듯 가만히 서류를 내려다보았고 정소명도 뒤늦게 그것을 의식했다.
“제 글씨가 아니에요.”
“알아요.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게 뭔지 다 알아요.”
이현숙이 테이블 위에 놓인 정소명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뭘 안다는 걸까. 정소명이 아는 건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것, 산모란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자신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저희는 다 이해해요. 친모라고 모두 상봉을 원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사라를 두고 혼자 온 거예요. 상의도 드리지 않고 무작정 사라를 데려올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께 무슨 사정이 있든 저희는 배려해드려요. 현재 가족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지요. 당연히 이해해요. 그렇지만 이십년 만에 멀리 네덜란드에서 어머니를 찾겠다고 온 따님을 생각하셔서……”
이현숙이 정소명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누군가 출산 사실을 감추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거기에 운 나쁘게 제 이름이 도용되었고요. 얽히고 싶지 않아요.”
“당연히 그러실 수 있어요. 저야 다 이해합니다. 어쨌거나 힘드셨을 테니까요.”
정소명은 몹시 불쾌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이현숙 때문이었다. 이현숙은 서류상 누군가의 친모로 되어 있는 게 무슨 기분일지만 빼고 전부 이해했다. 아무리 해도 정소명을 설득시킬 수 없자, 이현숙은 출산 당시 병원 근무자나 의료진을 찾아 정황을 알아본 후 다시 연락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사라가 태어난 병원은 M읍에 아직도 있었다. 정소명도 그 병원에서 태어났다. 정소명의 엄마가 암으로 의심된다는 소견을 의사에게 처음 들은 것도, 2년 후 장례를 치른 것도 그 병원이었다. 제법 규모 있는 종합병원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진료 과목이 대폭 축소되고 요양시설이 확충되었다. 5년 전 원장이 바뀌면서 행해진 조치였다. 주민 수나 연령층을 고려하면 그럴 만했다. 당시의 의료진이나 직원이 현재까지 병원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좋은 일로 병원에 가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병원에 다녀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 모두 알게 되었다. 소문이 퍼진다는 건 한동안 불행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초등학생 때 정소명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니 엄마가 암이라며? 죽을병에 걸렸다며? 하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입양기관에서 나온 사람이 오래전 산모를 찾아다니는데, 그게 정소명의 이름이 적힌 서류 때문이라는 소식은 마을 사람들에게 무척 관심 있게 들릴 것이다. 엄격한 교육자였으나 지금은 대부업자나 다름없어진 정호인의 집안과 관계된 소문이어서 더 그럴 것이다.
마을은 내려올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다. 슬레이트 지붕이 금속 기와지붕으로 교체되거나 양철지붕이던 미곡처리장이 새로 지어지고 노후한 주택의 외관이 수리되었다. 신작로가 닦인 초기만 해도 건설자재나 폐농기구, 생활쓰레기 같은 게 함부로 버려져 있어 지저분했는데, 지금은 제법 정돈되었다. 이웃한 면과 통합된 초등학교 정문에 보건소 시설로 전환한다는 공지가 붙어 있었다. 면사무소 앞에는 도내 관광시설 안내도가 있었는데, 한번도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아본 적 없는 도시여서인지 고려 때의 잔존 산성이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관광자원이었다. 산성을 복원하는 공사 탓에 면사무소에서 산에 이르는 도로에 자재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꾸준한 변화와 지속적이고 미미한 개발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언제나 똑같아 보이는 게 기이했다.
사람들 때문인 것 같았다. 질병이나 사고사, 결혼으로 인한 주민 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구성원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더께와 나이테를 눈에 띄지 않게 늘려가며 사백년 된 마을의 보호수처럼 제자리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마을은 면적은 넓지만 분지 형태여서 주민들이 대체로 한곳에 모여 살았다. 외지인의 입적과 내지인의 이탈이 적어 평생 같은 사람을 이웃으로 두고 지낼 가능성이 많았다. 누군가를 잘 이해하기보다 오해하고 서운하게 여길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주민들은 대개 농사를 짓거나 농사를 거들거나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영세한 규모의 상업에 종사했다. 조합의 대출자가 는 것을 보면 경제적 처지가 나아지는 일이 없고 오히려 해마다 가진 걸 잃으며 더 가난해지는 게 분명했다.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끼리는 걱정거리가 비슷해지기 마련이었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알아보건 말건 정소명은 오래전 하던 대로 고개 숙여 인사했는데, 저들 중 누군가 얼마 후 정호인이 보낸 계고장을 받게 될 것이었다.
지금과 달리 정소명이 학생이던 때만 해도 성장기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그중 일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다른 지역의 대학에 입학하는 것으로 마을을 떠났다. 대학입시에 실패하면 특별한 계기를 만들지 않고는 마을을 떠나기 힘들었다. 정소명은 일찍 그 사실을 간파한 덕에 누구하고도 친구가 된 적 없이 성적에 매달렸다.
학업에 어떤 공을 세우건 교장인 아버지에 대한 상찬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았을 때는 맥이 빠졌으나 도리 없이 성적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마을 사람들은 권위적이고 엄격한 정호인의 간섭 아래 엄마 없는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지 흥미롭게 지켜보았는데, 정소명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법을 진작 터득했다. 일관성을 지키면 되었다. 성적이나 옷차림, 머리 모양, 가방과 신발 등속, 등하교 시간이나 인사하는 태도, 말버릇 같은 것에서 언제나 같은 정도를 유지했다. 조금이라도 변하거나 남과 다르면 질문을 받기 마련이었다. 천편일률적이고 전형적인 태도를 보이면 어른들은 문제없는 것으로 여겨 마음을 놓았고 모범적이라 칭찬했다.
또래는 달랐다. 정소명에게 흥미를 느끼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판에 박힌 태도, 동급생을 무시하는 건방진 눈빛과 고지식한 성격을 반길 리 없었다. 은근히 적의를 드러내긴 했지만 대놓고 따돌림을 받지 않은 것은 정호인 덕이었다. 교장의 딸에게 노골적으로 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들의 비호와 편애 덕분이기도 했다. 언제나 혼자라는 것. 정소명은 내심 두려웠지만 또래 친구와 어울리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어른은 하나도 없었다. 특출난 아이라서, 수준이 맞지 않아서 어울릴 수 없다 여겼다.
동창이 한다는 까페는 면사무소 앞, 간판 정비 사업을 한 오래된 단층 건물의 구석 자리에 있었다. 여고 앞 분식집처럼 단출한 실내로 들어서자 안쪽에 앉아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여자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안을 듯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정소명은 주춤거리며 멈춰 서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 기억나니? 한진희.”
정소명이 대답 없이 한진희를 쳐다봤다. 선이 분명하고 어색할 정도로 짙은 눈썹이 한진희가 말할 때마다 같이 움직였다. 짧은 머리에 구김 많은 면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정소명에게 동창은 두 부류였다. 자신을 싫어하는 무리와 자신에게 완전히 무관심한 무리.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한진희가 자신을 싫어하는 쪽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매사 적의를 드러냈으므로 정소명으로서도 기억해둘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어?”
정소명이 미안하다는 듯 살짝 웃었다. 한진희가 수줍어하며 말했다.
“실은 내가 쌍꺼풀수술을 했거든. 오랜만에 보면 다들 잘 못 알아봐.”
그러고 보니 눈두덩이 어색하게 부어 있었다. 정소명은 그게 내내 이 근방에서 살아온 사람의 특징 같다고 생각했다. 촌스럽다는 뜻이었다.
정호인은 한진희더러 분수를 모른다 했다. 추천서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다른 곳과 달리 이 지역 지부에서는 회원의 추천으로 가입 여부가 결정되었다. 클럽에 가입한다는 것은 지역의 유명한 식당에 예약 없이 가더라도 곧 자리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행사에 가면 개회사나 폐회사에 순서가 들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신문에 실리는 동정으로 소식을 알리게 된다는 의미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진희는 줄곧 이 마을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 한탄을 늘어놓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농약사에서 사무 업무를 보았고 이곳 태생의 공무원과 결혼하면서 그만둔 후 봉사활동이나 하다가 몇해 전 까페를 냈다고 했다.
그러고는 동창들 소식을 늘어놓았다. 알 만한 사람을 떠올리면 대화가 편해지기는 하겠지만 계속 이어지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데 특정한 얼굴을 연상시키지는 않았다. 정소명이 연신 모르겠다고 하자 한진희는 고유명사를 포기했다. 대신 수학여행 가서 여자 가수의 춤을 그대로 따라 해 전교생의 스타가 된 아이, 수업시간에 교실로 날아온 벌이 옷 속에 들어가 깐깐한 화학선생 앞에서 비명을 지른 아이, 노래를 잘해서 도 단위 가창대회까지 갔던 아이, 매질하는 선생한테 대들다 근신을 당한 아이, 유리창 청소를 하다가 옆 친구와 장난치는 바람에 화단으로 떨어진 아이, 소풍 갔다가 길을 잃어 전교생을 수색에 동원했던 아이에 대해서 얘기했다.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마도 그 아이들은 공부는 못해도 성격이 밝고 쾌활했을 것이다. 한진희가 어울렸던 친구들이 그러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정소명에게 특별한 반감을 가지지 않는 아이들이 대개 그런 부류였다.
조금 지나서야 한진희 역시 정소명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는지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정호인 얘기도 꺼내지 않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녀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교장의 딸이라는 사실뿐이리라 확신했다. 전교생 중에 정소명을 모르는 애는 없었다. 얼굴은 모르더라도 교장의 딸이라고 하면 다 알았다. 아버지가 교장인 학교에 다니는 건 이 도시에서 정소명이 유일했다. 게다가 선생들은 작정한 듯 불공정하게 굴었다. 빼어날 것 없는 글짓기나 그림, 포스터에 매번 상을 주었다.
당시에도 정소명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특권을 포기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거부하는 대신 합당한 능력을 갖추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어서 학교 시절 내내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시달렸다. 계속되는 상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을 흠잡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힐끔거리면 마음을 졸였다.
특출나게 상을 받던 학창 시절도 서울로 전학 가면서 완전히 끝났다. 성적은 떨어졌고 글짓기나 그림에서 애써 재능을 찾아내어 칭찬해주는 선생도 없었다. 당연히 능력을 갖추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졌다. 정소명은 고모네 묵으며 통학했는데, 고모부는 권장법대로 음식을 먹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처럼 느리게 횟수와 간격을 맞춰 음식을 씹으며 정소명을 빤히 쳐다보곤 했다. 사투리를 감추려는 말투 때문에 서울 학교 아이들은 정소명이 말만 하면 웃음을 터뜨렸다. 무시하고 놀리는 줄 알았다. 말투와 억양을 재미있어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번도 누군가를 웃겨본 적이 없어서였다. 입을 아예 다무는 것으로 주눅든 마음을 감췄다. 평범한 아이에 대한 선생들의 무관심에 익숙해지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편안해지기는커녕 모든 걸 빼앗긴 기분이었다. 지나친 관심과 비호에서 오던 압박감,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주어지던 상찬이 말할 수 없이 그리웠다. 깨달은 바가 있었다. 특혜나 혜택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의 권위와 인맥을 마땅한 유산으로 받아들였다. 행운은 더이상 짐이 아니었다. 궁핍이나 특권은 어차피 불평등한 방식으로 주어졌다.
“전학생.” 한진희가 갑자기 떠오른 듯 소리쳤다. “걘 기억나지? 2학년 때.”
정소명이 이번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몰라? 기억이 안 나?”
모른 척하고 싶다는 의미였지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진희가 당황한 듯 정소명을 쳐다보았다. 다 안다는 표정 같기도 하고 그저 멋쩍어서 짓는 표정 같기도 했다. 변명이 필요한 것 같아 아버지 때문에 친구가 없었다고 둘러댔다. 한진희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이상 동창을 떠올리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정소명은 이제 끼어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놀랐겠구나.”
한진희가 봉투에서 꺼낸 복사물을 살펴보고는 말했다. 정소명은 그녀를 쳐다봤다. 자신을 배려해준 말을 듣는 게 낯설고 어색한 나머지 자신의 기분을 생각해준 사람은 한진희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교장선생님은 네 이름하고 주소, 주민등록번호를 아는 사람이 친모일 거라고 하시더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알려줬을 수도 있지.”
당연히 그렇지만 내키지 않는 가설이었다. 추정 범위가 넓어질수록 친모를 찾기 어려울 터였다. 가능성 적은 얘기부터 꺼내는 걸 보니 한진희는 도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글씨체는 어때? 아는 사람 글씨 같지 않아?”
정소명이 관심을 끌기 위해 물었다. 한진희가 서류 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특별히 그런 느낌이 없어. 이렇게 쓰는 애들 많잖아. 이쁘고 귀여워 보이게 쓰는 글씨 말이야.”
사실이었다. 초성에 비해 종성을 작게 써서 불균형했고 글자가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천천히 꾸며 쓰는 데 열중한 글씨여서 선생의 말이 빠르다면 받아 적지 못했을 테고, 당연히 성적도 좋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진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애 글씨네. 애가 애를 낳은 거야.”
“소문 같은 건 없었니. 오래전이긴 하지만 그런 소문은 잘 안 잊혀지잖아.”
“소문이야 늘 있었지. 하지만 이 동네에서 뭔가 감추고 지내기는 힘들어. 너도 알다시피 여긴 작은 곳이야. 오히려 다른 곳에 살던 사람일 가능성이 많지.”
한진희가 정소명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알아온 제 친구들을 감싸려는 게 느껴졌다. 그 표정을 보자니 학교 시절의 모습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애도 자신을 혐오하던 무리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싶어졌다.
“특별히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어?”
더 묻는 건 의미가 없다 싶으면서도 순전히 한진희를 기분 나쁘게 하려고 질문을 던졌다.
“꼭 범인을 찾는 형사처럼 말하는구나.”
신원 도용은 범죄라고 항변하고 싶은 것을 정소명은 꾹 눌러 참았다. 한진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냉랭해졌기 때문이었다.
“소문은 아무것도 아니야. 남자애랑 손만 잡아도 음탕한 말이 도는 동네야. 악랄하게 말해야 퍼지니까 더 자극적으로 구는 거지. 너도 알잖아.”
그 말은 정소명에게 너에 관한 소문도 있었는데 알고 있느냐고 확인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진희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그게 무엇이든 소문이 나면 끝장이었다. 담임에게 불려갔고 심하면 교장인 정호인에게도 불려갔다. 그 단계에 이르면 사실 확인을 위해 친구나 부모가 동원되는 일이 허다했다. 정호인도 실제로 소문을 믿어서 그렇게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학생과 학부모를 그런 식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아이들이 정소명을 보며 노골적으로 키득거리고 수군거리던 때가 있었다. 일부러 쳐다보았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다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아이 중에 한진희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으니까. 서울로 전학 갈 때까지 정소명은 웃음거리가 됐다.
“내가 걸레라는 소문?”
정소명이 되물었다. 한진희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얘기는 처음 들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괜한 얘기를 꺼낸 듯 미안해하며, 한편으로는 그런 소문이 있었는지 의아해하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니 그랬다. 사정을 말해줄 수도 있었다. 전적으로 전학생 때문에 생긴 소문이라고. 말하는 대신 정소명은 완고한 표정을 지었다. 전학생을 모른 척했던 게 떠올라서였다. 다행히 실수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 서류, 내가 가지고 있어도 될까. 나보다 동창들 소식에 더 밝은 친구가 있어. 걔한테 물어보고 싶어.”
한진희가 이 자리를 끝내는 게 낫다 싶었는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얘기가 퍼지지는 않을 거야. 친모라는 사람이 어디서 누구랑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정소명이 걱정하는 건 소문에 자기 이름이 곁드는 것이었다. 당연했다. 제 이름을 훔쳐 쓴 여자를, 비난받아 마땅한데 걱정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찾아주고 싶어.”
한진희의 말에 정소명은 마음이 누그러졌다. 한진희가 자신을 위해 이리저리 캐묻고 다니며 애쓸 게 고마워졌다.
“찾아주면 좋잖아. 좋아할 거야. 사정이야 있겠지만 얼마나 보고 싶겠어.”
한진희가 커피도 대접 못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갔다. 정소명은 한진희가 자신을 위해 애쓸 리 없다는 걸 깨닫고 서운해졌다. 그만 가보겠다고 지금 말해야 했다. 동시에 그 말을 하기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갈고 물을 끓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커피 냄새가 퍼졌다.
종종 학생 시절을 다시 살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한진희 같은 아이들과 어울리며 걸레라는 별명을 가지고도 시시덕거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학교 시절과 관련해 정소명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아버지가 교장인 학교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었다. 철없는 가정이었다. 지금의 정소명이 어린 시절 스스로의 부모가 된다고 해도 잘할 자신이 없었다.
한진희가 커피와 커다란 머핀을 가져다주었다. 커피는 신맛이 났지만 향이 좋았고 머핀도 서툰 모양에 비해 맛이 괜찮았다.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산성 공사 자재를 실은 트럭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진희가 문가에 바짝 붙어서서 어두워져 더 가난해 보이는 바깥을 내다보며 산성 때문에 마을이 영 번잡스러워졌다고, 전부 다시 짓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다. 정호인은 아는 건축업자를 그 일에 소개했고,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 중 자신이 관여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다고 자부했다.
“클럽에는 왜 가입하려는 거야?”
“클럽?”
“우리 아버지가 있는 곳 말이야.”
“거기 봉사 모임이잖아. 남편이 공무원이야. 여기 면사무소에서 사회복지 업무를 맡고 있어. 아까 점심시간에 잠깐 왔었는데, 인사라도 나눴으면 좋았을걸.”
한진희가 잠깐 그 장면을 상상하듯 키득거렸다.
“너한테 보여주기 창피하긴 하다. 못생겼어. 키도 작고 얼굴도 까매. 배도 엄청 나왔어. 일은 재밌게 해. 성실한 사람이거든. 공공기관과 사설기관의 협업 프로그램을 궁리하고 있대. 나보고 주민들과 도우면 어떻겠냐는 거야. 내가 여기저기 봉사활동하러 다니고 그러거든. 별건 아니고 아주 작은 일들…… 말이 나온 김에 클럽 사람들이랑 추진해볼까 했어. 거기 회원들이 다 동네 유지잖아. 사람들 호응 얻기에 굉장히 좋지. 마침 교장선생님이 회원이라길래 가입 절차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봤는데, 추천서를 두장이나 받아오라는 거야. 그 추천서라는 게……”
한진희가 말을 멈추더니 잠시 후에 “없던 일로 하기로 했어”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묵묵해진 한진희 앞에서 정소명은 커피를 마시고 시간을 끌며 머핀을 먹었다. 다 먹은 후 테이블에 떨어진 빵 조각과 물컵 자국을 냅킨으로 닦으려고 일어섰다. 한진희가 정소명의 팔을 잡아 말리고는 기어이 자신이 닦았다. 정소명은 자리에서 일어선 김에 인사를 건넸다. 한진희도 더는 잡지 않았다.
“서울엔 언제 가니?”
“집에 들렀다가 바로 갈 거야.”
“한참 못 보겠구나.”
그럴 것이다. 우연히 마주칠 일도, 일부러 만나려고 노력할 일도 없을 것이다. 간혹 정호인을 만나러 오겠지만 시간을 내서 부러 한진희를 찾지는 않을 것이다. 연락처를 주고받은 적 없으니 새로운 소식이 생겨도 정호인을 통해 듣게 될 터였다.
정소명이 엉거주춤 서 있는데 손님 세명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그들이 어수선하게 자리를 잡는 참에 정소명은 까페를 나섰다. 좀더 시간을 끌면 전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학교 시절에 가장 기억나는 친구는 명백히 전학생뿐이었다. 친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전학생에 대해서는 물건이 더 많이 떠올랐다. 하나뿐인 레코드샵에서 그애가 사던 카세트테이프, 끈을 길게 해서 왼쪽 어깨에 메던 가방, 뒤축을 구겨 신은 운동화의 상표, 언제나 정강이까지 올려 신는 양말, 수업시간에 줄곧 돌리고 있는 몸체가 두꺼운 샤프, 검은 스팽글이 박힌 헤어밴드 같은 것들. 물건은 모두 정소명의 눈길을 끌었다. 동네에서 보던 공산품과는 달랐다. 가격이 훤히 드러나는 물건이 아니라 취향이나 기질을 보여주는 물건이었다. 말하자면 돈이 있어도 정소명은 고르지 못할 것들이었다.
정호인은 학교폭력 근절의 의지를 담아 ‘시스터 제도’라는 걸 만들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학교 측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아이들을 선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교사가 친구를 지정해주는 제도였다. 전학생이 오면서 시행되었고, 정소명이 첫번째 ‘시스터’가 되었다.
무슨 일을 할지 몰랐으므로 정소명은 그저 도와주는 기분으로 처음 얼마간 전학생을 따라다니며 학교시설이나 담당교사 이름을 알려주는 일에 공을 들였다. 전학생은 고마운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그 일이 끝나자 별달리 할 게 없었다. 같은 반 애들과 어울리게 돕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정소명도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뭐든 도와야 했으므로, 활동보고서를 작성해야 했으므로, 정소명은 묵묵히 전학생을 따라다니는 쪽을 택했다. 그러자 전학생은 정소명을 완전히 무시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정소명이 말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적응은 잘하고 있니? 정호인은 틈틈이 전학생에 대해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면 잘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어제 그애랑은 뭘 했니? 마음이 많이 아픈 애다. 네가 잘 지켜줘야 해. 담임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 질문과 당부 때문에 정소명은 시스터로서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친구가 되라는 게 아니었다. 적응을 도우라는 것도 아니었다. 말이 선도지, 문제아 곁에 선생의 통제가 가능한 학생을 붙여두겠다는 의미였다.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들로부터 고립될 터였다.
전학생이 어떤 경위로 정소명의 보고서를 읽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담임이 전학생을 불러 세워놓고 보고서를 들이밀며 쿡쿡 찌르고 추궁했을 수도 있다. 교사가 무심코 책상에 올려둔 보고서를 운 나쁘게 본 것일 수도 있었다.
전학생은 느닷없이 정소명을 향해 돌진했다. 혼자 돌진한 것은 아니고 교실 뒤쪽에 있던 대걸레를 들고 왔다. 할 수 있는 한 힘껏 걸레로 정소명의 얼굴을 짓눌렀다. 정소명은 충격을 받았는데 보고서가 유출되어서는 아니었다. 전학생이 자신의 우정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해서였다. 전학생에게만큼은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누구도 정소명의 얼굴에서 걸레를 치워주거나 전학생을 막아주거나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기세에 눌려 조용해졌다가 전학생이 걸레를 던지고 나가버리자 몰래 웃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수업시간에 들어온 선생에게 아무도 그 일을 고자질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걸레라고 불렸다. 정소명은 그 말이 보통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았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알았다. 자기편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의심을 사기 마련이므로 소문을 잠재우려면 더 큰 소문이나 소란을 만들어야 했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전학생이 이전 학교에서 쫓겨난 이유는 금세 퍼졌다. 정소명이 걸레로 맞은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인 탓이었다. 정호인이 서울에 있는 그애의 부모를 학교로 불러들였다. 저런 애를 받아줬으면 품행 유지에 만전을 기하도록 신경 써야 한다며 엄히 꾸짖었다. 정호인은 그애 부모의 머리를 잔뜩 조아리게 만든 후에, 아이의 학업을 여기서 끝마치고 싶지 않으면 피해 학생에게 곡진히 사과하고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경고했다. 정소명은 정호인과 담임, 그애 부모 앞에서 무릎 꿇은 전학생의 사과를 받았다. 그애는 너무 극진하고 공손해서 진심이 아닌 게 뻔한 사과문을 정중한 톤으로 읽었다. 심려를 끼쳐…… 부디 용서를……같이 친구에게라면 쓸 리 없는 표현이 섞인 글이었다.
꺼림칙한 사과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소명은 서울로 전학 갔다. 진학 공부가 명목이었지만 정호인에게는 걸레라는 별명을 피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말하자면 정소명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좀더 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는 기회.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 전학생이 힌트를 주지 않았다면 정소명은 그 생각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 돌아갔을 때 손님들은 다 돌아가고 정호인 혼자 거실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려는 정소명을 불러 세워 병원장이 당시 근무하던 사람들을 찾고 있다고 일러주었다.
“범인 찾듯 그렇게 하지 마세요.”
정소명이 한진희를 따라 말했다. 아버지와 공범이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게 싫었다.
“범인?”
정호인이 고개를 들어 정소명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패인 줄 알았는데 정소명이 배신했다는 표정이었다.
“그거 범죄다. 네 신원을 도용했잖니. 변호사 말이 명예훼손도 걸 수 있다더라. 걱정 마라. 입양아한테 고향의 정을 느끼게 해줘서 나쁠 건 없지. 어미한테 버림받았지만 고향은 버리지 않았고 누군가 도우려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사람은 온정을 경험해야 제대로 인간이 된다.”
“그럴 필요 없어요. 유전자검사만 하면 끝날 일인데, 복잡해졌어요.”
정소명의 말을 듣고도 정호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필요 없는 짓이라고 여기기는 그도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해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절실한 상태라야 고마운 줄 아는 법이야. 그 입양아 말이다. 네가 친모일지 모른다고 생각해야 울기도 하고 애틋하게 고향 구경도 할 게 아니냐. 곧 산성 공사도 마무리될 테니 거기서 뭔가 찍으면 보기도 좋고…… 다음주에 담당자한테 입양아를 데리고 내려오라 해뒀다. 며칠간 실컷 호사를 누리게 될 게야. 군수가 연락을 넣어줘서 방송국에서도 나오기로 했다. 나중에 결연을 맺어서 네덜란드 입양아들한테 정기적으로 고향 방문을 추진하려고 생각 중이다.”
정소명의 생각은 틀렸다. 정호인은 이 일을 가치 있게 만들 작정이었다.
“친모가 만나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는 안 될 게다. 제 사정 때문에 나 몰라라 해버리면 죄를 물어야지. 명예훼손. 네 이름을 욕보였잖니.”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듯 열을 내던 정호인은 말을 마치자 얼굴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뜻대로 안 될 경우 사라의 친모를 고소하고 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을 풀어준 것 같았다.
정소명은 방으로 들어가 종이상자 안에 든 것을 살폈다. 전학생이 쓴 반성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의미 없는 칭찬이 적힌 종이를 훑어보던 중 정소명은 도 대항 글짓기대회 상장을 발견했다. 그 상을 받았을 때 무척 기뻤다. 학교 선생의 편애와 비호 없이 정당한 외부 심사로 받은 유일한 상이었다. 정호인은 전교생 앞에서 수여식을 한 후 상장을 본관 중앙게시판에 붙여두었다. 도 대항 핸드볼 대회 준우승 상패, 교육제도 개선 노력으로 교육청에서 받은 공로상, 학업 관련 표창장, 재단의 각종 교육 공헌 자료들과 함께 정소명이 받은 상장은 유리 장식장 안에 진열되었다.
그곳을 지날 때면 스스로에게 조금 너그러워졌다. 한참 지나고 나서 자신이 쓴 원고를 국어선생이 수정하여 응모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 정소명에게 선생은 의아하다는 듯 당연한 거 아니니? 하고 되물었다.
정소명은 그 상장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수상자 이름과 출신학교 밑에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적혀 있었다. 오래전의 관습으로 자격증도 아닌 상장에 주민등록번호를 적어 넣은 것이다. 규모가 큰 대회여서 좀더 공식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정소명이 전학 간 후에도 정호인은 상장을 본관에 게시해뒀다. 그러는 동안 재학생뿐 아니라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정소명의 개인정보가 기재된 상장을 보았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무람없이 그 정보를 사용했을 것이다.
주민등록번호까지 알 정도로 친밀한 사람이 아니라, 나쁜 소문이 돌던 사람이 아니라, 마침 아는 정보여서, 흔하게 노출된 정보여서 가져다 썼을 뿐이다. 재학생이야 당연히 알았을 테고, 재학생과 멀거나 가까운 친구이기만 해도, 학교를 방문해 게시판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정보였던 셈이다.
정호인에게 이 사실을 말해줄 수도 있었다. 신원을 도용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애당초 신상을 만천하에 공개한 건 아버지라고. 그러나 사라에게 고향을 구경시켜줄 생각으로 들떠 있는 정호인에게 정소명은 그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정호인 말대로 어쨌거나 이 마을이 사라의 고향인 건 분명했다. 태어난 곳의 행운을 경험해서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많은 일을 겪지 않는가. 정소명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