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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과학잡지 에피』 창간호, 이음 2017

과학의 소란과 소음을 이야기하기

 

 

하대청 河大淸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daecheong.ha@gmail.com

 

 

177_439 사실 과학현장만큼 시끄러운 곳도 없다. 실험기기들이 쏟아내는 온갖 소음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늘 겪는 일상이며 이들은 여느 직장인처럼 수다와 넋두리로 스트레스를 이겨낸다. 평소에 과묵한 이들도 매주 열리는 실험실 회의시간에는 목청 높여 논쟁을 벌이며, 획기적인 연구성과가 발표되면 이 결과를 의심하는 논평과 반박이 이어지면서 한참 소란스러워진다. 이렇게 과학현장은 기계 소음, 한탄, 수다, 실수, 혼란, 의심과 반박 등이 뒤섞인 채 떠들썩하지만, 현장을 벗어나 일반 대중이나 학생들 앞에 서면 갑자기 이 모든 소란이 자취를 감추곤 한다. 마치 그런 소란과 소음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번에 창간호가 나온 『과학잡지 에피』는 바로 이 과학의 소란과 소음들을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위, 옆, 바깥, 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유래 접두사 ‘epi’를 잡지 이름으로 내걸고 과학 내부와 과학 주변의 여러 소란들을 찾아서 이야기한다. 창간사에서 언급하듯이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과학은 설명하고 해설할 대상이지 비평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정치비평이나 예술비평이 익숙한 것과 달리 과학비평은 어색하게 들리는데, 바로 그만큼 과학에 대한 질문은 빈곤해져온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과학에 “이것이 과학적 사실인가?” 또는 “이것이 국가발전을 가져오는가?”라고만 반복해서 물었을 뿐이다. 과학적 사실을 말하지 않고, 국가발전을 가져오지 않는 이상 과학에 관심이 없다는 듯 대했던 것이다. 과학비평은 과학에 말을 거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과학은 진리를 생산하는 실천 중 가장 유력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국가의 경제성장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그 역할만 하는 것도 아니다. 『에피』는 그 다양한 방식과 관점들을 보여주면서, 있는 그대로의 과학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창간호에서는 하나의 주제를 여러 시각으로 다루는 ‘키워드’ 섹션으로 ‘가짜: 가짜는 거짓인가?’를 선택했다. 창간사에서 잘 밝히고 있듯이, 과학의 역사는 가짜, 사이비, 허위, 유사 과학을 규정하고 이를 진짜 과학과 구분해내는 역사이기도 했다. 가짜를 규정하는 일은 때로는 간단치 않고 힘겨웠으며 사이비로 몰린 이들의 저항으로 소란스러웠다. 어쩌면 과학을 둘러싼 소음과 소란을 다루는 데 가짜와 진짜의 구분만큼 좋은 주제가 있을까 싶다. 게다가 최근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이른바 ‘대안적 사실’이라는 말로 가짜 뉴스를 옹호하면서 사실과 가짜, 혹은 과학과 허위라는 이분법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 주제 아래 국내외 저자들의 짧은 글 여덟편이 실려 있는데 천체물리학부터 문화재 복원 기술까지 그 주제가 매우 다양하다. 국내에서 잡지를 편집하다보면 참신한 주제를 선정해도 적당한 필자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에피』는 현직의 다양한 필자를 발굴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가짜는 진짜가 아니고 거짓이기 때문에 제거하지 않으면 위험하거나 최소한 무익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섹션에서 ‘가짜’를 대하는 필자들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우선 가짜는 진짜를 이해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중력파 검출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정리는 가짜 신호가 단순한 허위가 아니라 진짜 신호를 발견하는 도구라는 실례를 보여준다(「‘큰 개’ 신호: 라이고 중력파 검출 성공의 뒷이야기」). 중력파를 검출한 선례가 없어 교차 검증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인위적으로 생성한 가짜 신호는 진짜 신호를 구분해내는 데 도움을 준다. 한편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늘 명확하지 않다. 진짜가 가짜를, 혹은 가짜가 진짜의 속성과 특성을 규정하기도 한다. 이강원은 안드로이드와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진짜 인간’을 정의하는 특성이 계속 변해왔다고 말한다(「인조인간과 인간, 함께 인간이 되다」). ‘가짜 인간’을 제조하는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진짜 인간’의 본질은 창의성, 감정, 도덕성 등으로 계속 이동해왔다는 것이다. 이현진은 훼손된 문화재를 복원하는 기술에서 해서는 안 될 ‘금지된 가짜’가 있고 ‘허락되는 가짜’가 있다고 말한다(「허락된 가짜: 문화재 복원의 과학」). 어떤 기술이 원본을 훼손하지 않는 가짜인지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문화재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따라 역사적으로 달라진다.

과학기술학자 실라 자사노프의 짧은 에세이는 섹션의 첫 글이지만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은 이런 상황에 대한 일종의 처방처럼 보인다(「가짜 뉴스와 대안적 사실의 지식 정치」). 트럼프 취임 이후 시민을 교육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곤혹스러움을 우선 토로하는 자사노프는 사실과 공공지식을 생산하는 사회제도를 해체하려는 이른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맞설 방법은 우리가 기존에 안다고 말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성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식과 권력이 함께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다양한 지식생산 방식들의 한계를 인식한 바탕 위에서 집단적 앎을 위한 제도들을 강화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를 위협하는 적이라며 가짜와 드잡이만 할 게 아니라 우리의 ‘진짜’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좋은 쪽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이 어떤 권력과 연루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글이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사실 어떤 글은 배치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 특집 섹션은 탈진실의 시대를 직면하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듯하다.

쟁점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크리틱’ 섹션에서는 이른바 ‘4차산업혁명’이 일종의 정치적 유행어일 뿐 새로운 과학기술정책을 바라는 많은 이들의 기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홍성욱의 글(「정치적 유행어로서의 ‘4차 산업 혁명’」)과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비판한 앤드루 러셀과 리 빈셀의 글(「화성으로 가는 백인: 일론 머스크의 값비싼 몽환」)이 인상적이다. 국내외 혁신가들 사이에서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 각광받는 머스크의 야심찬 프로젝트가 갖는 문제점은 ‘4차산업혁명’의 광풍이 몰아치는 우리 현실의 문제점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의 문제를 깊이 톺아보지 않고 새로운 미래나 또다른 행성으로 우리의 관심과 자원을 돌리는 것은 과학기술을 대할 때 주의해서 지켜봐야 할 지점이다.

『에피』는 우리가 과학기술에 질문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과학기술은 하나의 지식일 뿐만 아니라 쟁점, 방법, 현상, 사건, 역사, 실천, 인공물, 문화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복합적인 대상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수많은 소음과 소란이 발생한다. 『에피』는 이런 소란과 소음을 제거하고 단조로운 질문만 반복하기보다, 소란과 소음을 드러낸 채 여러 방식으로 과학에 말을 걸고 있다. 얇은 책 속에 담긴 소란과 소음이 너무 많아서 다소 어지러울 때도 있지만, 과학이 매력적인 것은 이런 소음과 소란 속에서 위태롭게 질서를 찾아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