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17년 6월 8일에 회의를 열고 신용목 안현미 황규관(이상 시 부문) 심진경 이경재 황정아(이상 소설 부문) 백영경 이남주(이상 비문예 부문)를 예심위원으로, 서영채 조갑상 최정례 한기욱을 본심위원으로 위촉해 심사진을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은 7월 5일까지 각 부문에서 그 성취가 인정되는 대상작을 선정하여 심사를 진행했다. 만해문학상 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한 예심에서 시집 5종, 소설 5종, 비문예물 2종(총 12종)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정했다.
이어서 4인의 본심위원들은 8월 5일 1차 본심을 열고 다음 7종을 최종심 대상작으로 결정했다. 은희경 『중국식 룰렛』, 정이현 『상냥한 폭력의 시대』, 황정은 『아무도 아닌』(이상 소설), 김정환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이상 시), 민종덕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상 비문예).
9월 14일 가진 2차 본심(최종심)에서는 더 본격적인 논의를 이어갔다. 최종심에 오른 7편의 작품이 저마다 개성적이고 의미있는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어 한 작품을 선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선 심사자들은 5·18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2017)를 특별상으로 선정하는 데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초판 출간 당시 지하에서 숨죽여 읽던 책이 32년 만에 전면개정판으로 나와 촛불혁명으로 이룩해갈 시대에 새로운 울림을 주게 된 것도 벅찬 일이거니와 앞으로도 국가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역사적 증언록으로 길이 남을 것이라는 데 입을 모았다.
이어서 소설집과 시집 등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본상 논의에 들어갔다. 심사자들은 은희경 정이현 황정은의 소설집과 허수경의 시집이 각기 도달한 경지는 높이 살 만하지만 최고의 기량과 저력을 발휘할 다음 작품을 응원하기로 하였다. 심도있는 토론 끝에 심사진은 김정환 시집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문학동네 2016)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난해한 듯 읽히는 특유의 문장 속에서 강건하게 빛을 발하는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시구들이 시인이 구축한 염결한 경지를 실감케 하며 특별한 감흥을 선사했다는 데에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했다.
심사평
서영채(徐榮彩) 문학평론가
서로 다른 장르가 섞여 있으니 심사가 쉬울 수 없다. 게다가 예심과 1차 본심을 통해 골라진 책들은 수상작이 되기에 어느 하나 모자라지 않은 수준이다. 그래도 만해를 기리는 상이라는 의식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아는 만해는, 세상일에는 심지 곧고 개결하지만 문학을 대하는 마음은 부드럽고 따뜻한 분이다. 좋은 문학이라면 어떤 문학이든 만해에게 사랑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좋은 문학을 골라내면 내 임무는 끝이다.
다행인 것은 특별상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32년 만에 나온 개정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특별상에 선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 책은 광주항쟁에 대한 신뢰할 만한 표준 역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고, 또한 새롭게 대두된 광주항쟁에 대한 진실규명 요구(회고록 사건을 만들어준 전두환씨에게 감사한다)에 부합하는 책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시의도 있다. 발포 책임자를 가리고 국가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는 일의 중요함은,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거듭거듭 강조되어야 하겠다. 초판 이후로 32년 동안 축적된 증언과 자료를 새롭게 반영한 이 책의 수상이, 그 일을 실현하는 데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이심전심이었을 것이다.
김정환 시인의 시집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을 수상작으로 합의하는 데는 다소 곡절이 있었다. 어쩌면 그 곡절은 나만의 것일지도 모른다. 뛰어난 세권의 소설집 중 하나를 마음에 두고 심사장에 갔으나, 다른 두분의 심사위원이 이 시집의 가치에 대해 부드럽게 역설했고 나는 설득되었다. 설득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수상작이 결정되면서 차곡차곡 내 마음에 들어와 앉는 기쁨을, 신기하고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 시집은 매우 불친절한데다 다변이다. 자동진술처럼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문법을 무시하기 일쑤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들이 끊어진 사슬처럼 툭툭 던져져 있다. 알기 쉽고 짧아야 사람들이 좋아할 텐데 반대로만 간다. 아부해도 부족할 판에 대놓고 독자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시당했는데도 불쾌하지 않은 마음은 또 무엇인가. 시집 속에 있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형편없는 사람(“네가 너한테 나를 사랑하기에는 사랑 말고 너무 불쌍한 사람이지만./내가 나한테 너를 사랑하기에는 사랑 말고 너무 형편없는 사람이지만.”(「신(神), 첫, 지구」)) 혹은 불쌍하고 형편없는 사람이다. 몸에 내려앉는 늙음과 죽음을 태평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이다. 사막화되어가는 고유명사의 기억을 나른하게 떠올리는 사람이다.
지금 세상에 어울리지 않은 그런 사람을, 만해는 사랑하셨을 것이다. 그런데다 시집 한가운데는 커다란 슬픔이 산봉우리처럼 솟아 있다. 너무 큰 슬픔이라서, 이미 슬퍼했는데도 다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만해가 그러셨을 것이다.
조갑상(曺甲相) 소설가
올해 소설 부문에서 본심에 오른 3권은 모두가 단편소설집이다. 은희경의 『중국식 룰렛』은 술과 가방 등 우리가 가까이하는 사물들을 모티브로 이야기를 펼치는데, 사물들이 우리 삶에 관여하고 작동하는 모습들이 의외로 다채롭고 진지하다.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에는 7편의 단편이 모여 제목으로 삼은 주제의 울림을 전하는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의 모습이 뚜렷하고 감각이나 문장을 눈에 보이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할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은 일인칭과 독백체가 주를 이루면서 절망에서 절망하지 않으려는, 생에 대한 사소하면서도 충만한 감각이 넘치는 소설들이 모여 있다.
소설집은 장편에 비해 읽어내는 힘이 분산된다. 뛰어난 작품과 그보다 조금 못한 작품이 가려지고 이야기의 일관성과 주제로 모아진 힘에 시선이 가게 된다. 나름의 목소리와 개성은 확인하면서도 끝내 어느 한 작가의 소설집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시가 남고, 김정환의 시집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을 32회 수상작으로 하는 데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했다. 자신의 시론을 확보한 지 오래인 시인이 더 분방하면서도 치열하게 현실을 탐구하고 있는 이번 시집에 대한 상찬이 앞으로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에 큰 힘이 되기를 바란다.
비문예물로 본심에 오른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우리 현대사의 엄중한 시기를 치밀하게 되살리고 올곧게 해석한다. 출판된 책을 다시 보완하고 고쳐 썼다는 점에서도 동일하지만 평전은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부담스러운 글쓰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소선이 아들의 죽음을 딛고 한국 노동사와 민주운동사의 주요인물이 되는 과정을 진솔하고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귀한 저작이 아닐 수 없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이 다루어야 하는 확장된 시간에 비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기간 그 자체를 다루기에 시간이 집중되어 있다. 필자들이 책의 성격을 ‘기록’이라고 봉인한 데에는 사실과 진실의 정신 외에 이런 점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국가권력이 어떻게 분단체제를 이용해서 국민에게 폭력을 자행하는지, 언론의 굴복이 그 만행을 어떻게 왜곡·합리화하는지, 미국에 한국이 어떤 기준으로서의 우방인지를 말해주는 증언이다. 그리고 이름이 밝혀진 시민부터 밝혀지지 않은 시민까지 그들이 보여준 고귀한 희생과 용기, 인간성의 승리를 알려준다. 그해 5월 광주에 대한 폄하와 편견을 극복해야 하는 소명과 더불어 2017년의 시대정신과 어울리는 노작이다. 만해문학상 특별상 수여가 긴 시간의 힘든 노고에 작은 보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정례(崔正禮) 시인
쉽게 읽히기를 거부하는 시가 있다. 김정환의 시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익숙지 않은 어법으로 처음부터 거친 벼랑길을 제시하며 올 테면 따라와보라는 식이다. 두번에 걸쳐 진행한 본심 과정에서 1차 심사가 있던 지난 8월 5일까지는 쉽게 오를 수 없는 산행과 같은 그의 시집을 쩔쩔매며 읽다가 거의 포기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높고 거칠다고 해서 오르기를 그만둔다면 정상에 가닿기를 포기하는 어리석고 무책임한 독법이라는 생각에 작정하고 다시 정좌하여 시집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에 도전하기로 했다. 2차 본심인 9월 14일 무렵에는 한달여 전에 읽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경지의 세계가 난해한 어법의 틈새를 뚫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안 보이던 것이 보여서 기뻤다. 나도 모르게 그의 시에 매료되어 행마다 줄을 치며 읽게 되었다. 하마터면 이 시집을 놓칠 뻔했다는 생각과 함께 굽이굽이 숨겨놓은 심오한 구절에 빠져들었다. 김정환 시인은 늘 일반적인 시형식을 배반하며 지금까지 20여권에 달하는 시집을 펴냈다. 시에서 형식이란 무엇인가? 내용의 필연적 폭발 아닌가, 이 필연적 폭발이 야기한 혼미함으로 그의 시가 오랫동안 일반 대중독자로부터 소외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독자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꾸준히 자기만의 길을 뚫고 왔다.
사실 1차 본심까지는 이번에 특별상으로 선정된 광주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느라 정신이 온통 거기에 빠져 있었다. 또한 젊은 작가 황정은의 소설과 은희경의 소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은희경 소설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지만 황정은 소설의 매력에서도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러느라 1차 본심에서는 김정환,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읽는 데 충분한 에너지를 쏟지 못했었다. 2차 심사일이 다가오자, 김정환 시집의 어떤 요소가 나를 완전히 다른 마음으로 바꿔놓았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우선 그의 이번 시집은 단 한줄도 상투적이거나 감상적인 부분이 없다. 뻔한 소리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시를 향한 염결성과 권력을 갖지 않으려는 그의 인간성이 간직한 감각이 젊은이들의 그것보다 훨씬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 그는 샤워를 하면서 등허리의 중간께를 굽히고 몸을 씻는 이유를 “중력의/위치에 대한 육체의 이견 때문”(「모기 실내」)이라고 말하는 유머를 지녔다. 세심하게 그의 시를 따라 읽다보면 한 고개 너머 특별한 생각이 나타나고 한 굽이 돌아가면 또다시 특이한 감각과 결합한 구절을 만나게 된다. 문득문득 드러나는 구절들은 낯선 그리고 날카로운 잠언이 되어 파고든다. 예를 들어 “마음이 마음을 어떻게 비우나,/비루가 비루를 어떻게 벗겠는가?”(「젖무덤 전망 햇살 체」)라고 말하는 구절이나, 세월호의 죽음에 관해서 “이들의 죽음에 뜻이 없다면 살아남은 생에 무슨 뜻이 있을 수 있는가, 살아온 생과 살아갈 생에 무슨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물 지옥 무지개」)라고 말하는 구절을 보라. 그는 “시의 내용은 생의 형식”(「보유(補遺): 발굴 바벨탑 토대」)이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얼마나 엄혹한 말인가. 시에 온몸을 바치며 조금도 이 생에 비굴하거나 얍삽한 자세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 아닌가. 1980년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37년간 온 에너지를 오로지 시가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투지로 뚫고 나간 김정환 시인이 제32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은 당연하며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인생 선배로서 시의 최전방 지대에서 후배 작가들을 견인해온 그에게 오히려 너무 늦은 찬탄을 보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기욱(韓基煜) 문학평론가
최종심에 오른 7편의 작품은 저마다 남다른 문학적 기량과 어법으로 우리 시대의 중요한 개인적·집단적 삶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었기에 수상작 선정이 쉽지 않았다. 이럴 때는 수상작을 선택하는 기쁨 못지않게 수상하지 못한 작품들에 대한 미안함이 큰데, 다행히 작년에 신설된 특별상 덕분에 본상 수상작 외에 또 한편의 소중한 작품을 만해 선생의 이름으로 기리게 되었다.
민종덕의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한 개성적인 여성이기도 한 이소선 여사의 인물 됨됨이를 실감나게 조명한 ‘평전’일뿐더러 그의 신산한 삶을 통해 한국노동운동의 면면을 추적한 값진 기록이기도 하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1970년부터 이소선 여사가 작고한 2011년에 이르기까지 한국노동운동의 역사가 곡진한 서사로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으로, 1985년에 출간된 초판본은 당시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30여년 후인 올해, 갑절의 두툼한 분량으로 출간된 전면개정판은 초판본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 광주시민들의 증언과 기록에 더해 계엄군 쪽의 군사작전 내용과 5·18재판 기록, 미국 측 자료까지 반영함으로써 폭넓은 수정보완이 이뤄졌다. 초판본이 가혹한 폭력과 살육을 당한 시민들 쪽의 생생한 증언과 기록이었다면 전면개정판은 가해자인 보안사와 계엄군, 특전사 그리고 미국 측의 동향과 관점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광주항쟁의 입체적 조망이 이루어져 역사 기록의 성격이 보강되었다. 또한 수많은 증언자와 집필자, 편집자 들이 협업하는 과정에서 그들 각자의 노고와 염원이 곳곳에 스며들었기에, 한 시대의 비극을 여러 민중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서사시적 울림마저 획득하게 되었다. 심사위원들은 두권 모두 소중한 저작임을 확인하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특별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본상 수상작 심사는 두권의 시집과 세권의 소설집 사이에서 약간의 난항을 겪었으나, 최종심에서 김정환 시집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의 특별한 성취를 높이 평가하여 수상작으로 정할 수 있었다. 수상작과 경합을 이루었던 소설집들의 성과도 만만찮았고 작금의 한국 소설문학의 착실한 진전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은희경의 소설은 인물들 각각의 특징적 면모와 그 내면의 움직임, 얄궂기도 필연적이기도 한 우연과 운명의 조우를 발 빠르게 잡아내는 완숙한 솜씨로 감탄을 자아낸다. 정이현의 소설은 유난한 갑질 폭력에도 유지되는 중산층적 삶의 ‘상냥한’ 표피와 그 속에 펼쳐진 처절한 내면 풍경을 섬뜩하게 드러낸다. 군더더기 없이 벼려진 언어로 인물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파고드는 솜씨는 빼어난 리얼리스트의 경지에 값한다. 황정은은 이미 양극화된 우리 시대 삶의 성격을 성찰한 바 있지만 이번 소설들에서는 계급과 젠더, 세대의 차이에 따라 삶의 관점과 풍경이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그 특유의 정교하고 내밀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특히 「상류엔 맹금류」의 경우처럼 신뢰하기도 불신하기도 힘든 화자의 애매한 이야기를 통해 이런 사회적 억압과 차별이 개체적 삶에 미치는 영향을 사유하는 지점이 놀랍다. 그렇지만 소설 부문의 성과가 이처럼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와 사유의 반경이 각 작가의 최대치에 달한 것은 아니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허수경의 시들 역시 그 감성적·언어적 호소력과 세계시민적 개방성의 매력은 여전한데, 이번 시집으로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김정환의 이번 시집이 군데군데 난해한 대목이 적잖음에도 불구하고 수상작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시집에는 「물 지옥 무지개」에서처럼 한 사람의 작은 마음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섬세함과 동시대 사람들과의 관계를 사유하는 타자성의 고민이 담겨 있거니와, 긴 부제가 달린 「최근 미국 사정」에서 보듯 시대와 세상에 대한 때론 엉뚱하고 때론 핵심을 찌르는 물음과 진단이 담겨 있다. 그것도 그 특유의 변칙적인 형태로 간단없이 이뤄지고 있다. 가령 소비에뜨 멸망 이후의 세상에 대해 “최근 미국 사정이 소비에트 멸망을 신발처럼 신고 급기야 무슨 수의나 되는 것처럼 입고 다닌다”는 논평을 단다. 현실세계에 대한 이런 뼈 있는 발언을 우리 시에서 발견하는 기쁨은 각별하다. 그의 이번 시집은 서정과 서사를, 작은 이야기와 큰 이야기를 가로지르며 문득 그런 이분법적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특이한 경지로 들어서기도 한다. 사유와 언어에서 어떠한 형태의 익숙함과 상투형도 거부하고자 하는 시인 김정환의 이 도저한 실험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그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수상소감
김정환 金正煥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0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울 수 없는 노래』 『황색예수전』 『회복기』 『좋은 꽃』 『기차에 대하여』 『사랑, 피티』 『희망의 나이』 『하나의 이인무와 세 개의 일인무』 『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 『텅 빈 극장』 『순금의 기억』 『해가 뜨다』 『하노이―서울 시편』 『레닌의 노래』 『드러남과 드러냄』 『거룩한 줄넘기』 『유년의 시놉시스』 『거푸집 연주』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 등이 있다. 백석문학상과 아름다운작가상을 받았다.
만해는 널리 알려진 대로 일제강점기 조선 불교의 쇄신과 민족혼 수호 및 창달에 진력한 흠잡을 데 없는 선각자이자 지도자, 그리고 지금도 가장 대중적인 시집 가운데 하나인 『님의 침묵』의 시인이지만 내게 좀더 중요하고 소중한 점은 그의 시가 민족적 울분을 토로하거나 종교적 교리를 설파하는 전통적인 수단으로 쓰이기는커녕 오히려 편협해질 수 있는 민족주의와 신비화할 수 있는 종교의 다름 아닌 모더니티 그 자체가 확보되는 놀라운 미학적 매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근대와 민족과 민족국가가 완성되는 데 오백년이 걸린 서양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겠으나 왕조 멸망 직후 40년이 안 되는 식민지 기간 중에 시를 통해 민족이 모더니티에 이르는 경우를 나는 만해 시 말고 읽은 적이 없다. 제국의 영향을 받은 모더니즘 아니라, 민족의 모더니티 말이다. 한마디로 만해는 가장 모범적이고 건강한 현대 시인이다. 만해의 이런 면이 좀더 크게 조명받지 못한 것이 작금의 여러 ‘이분법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학적 재능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이 문학적 재능이 아닌지는 잘 안다. 다시 한마디로 내게 없는 어떤 것이다. 누구 못지않게 다방면으로 많은 글을 썼기에 누구 못지않게 다방면으로 소상하게 알고 있다. 재능을 낭비한다는 말을 귀담아들은 적이 없다. 없는 재능을 어떻게 낭비하나? 글을 좀 덜 쓰라는 충고는 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쓰는 글의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그것도 내가 반드시 써야 하고 쓸 만한 글이 아니라 나라도 땜통으로 써야 할 것들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니 내게 재능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이를 갈면서도 알고 있고 팔자로도 알고 있다.
그렇게 한 37년 그런 내가 언감생심 만해의 이름을 따온 문학상을 받는다. 이런 것을 문운(文運)이라고 해야 하나? 어쩔 수 없이 많은 글을 썼는데 그중 봐줄 만한 것이 혹시 있다면 그걸 문운이라고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지만 아직은 내게 그럴 만한 것이 없다. 심사위원들께 감사. 물론. 하지만 본심에 올랐다기에 화들짝 놀라 둘러보니 만해문학상에 걸맞게도 글을 너무 잘 써서 그 앞에서 내가 늘 켕기던 이름과 글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미끈하게 빠진 이름, 이름들만으로도 모자라 지울 수 없는 역사적 명분과 키워가야 할 현재와 미래의 명분이 즐비한 가운데 내 이름이 섞여 있는 것만 해도 어리둥절 영광인 것을 하필 제일 못난 나를 꼭 집어서 따로 뽑아내니 당해본 적은 없지만 왕따당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 것 같기도 하다.
40년 가까이 시를 쓴 지금 나의 시 정의(定義)랄 게 있다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언어구조의 실물감’쯤 된다. 달리, 대표적으로 말하면 크든 작든,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모든 희생은 끝내 억울 아니라 희생 자체를 스스로 의미화하면서 희생된다. 모든 죽음이 스스로 공공(公共)의 수준을 드높이는 희생일 때까지 그렇다. 모든 정의는 미흡하고 실패가 예정되어 있지만 돌이키고 싶은 세월은 내게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다시 한번 심사위원들께 감사.
수상소감
황석영 黃晳暎
1943년 만주 창춘(長春)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인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학활동을 본격화했다. 그후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등을 발표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1976년 전남으로 이주해 해남과 광주에서 집필과 현장문화운동을 병행하던 중 1979년 계엄법 위반으로 검거되고 당국의 권고로 1981년 제주도로 이주했다. 1982년 다시 광주로 돌아와 5월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각종 활동을 펼쳤다. 1985년 군사독재의 감시를 피해 출판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저자로 나선 뒤 유럽과 미국, 북한으로 이어지는 긴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1993년 귀국하여 방북사건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1998년 석방되었다. 2000년대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재개하여 장편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을 잇달아 펴내며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자전 『수인』을 발표했다.
이재의 李在儀
1956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1980년 초 전남대 총학생회 비밀기획팀 멤버였다. 5월항쟁 당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했으며, 그해 10월 체포되어 1981년 8·15특사로 석방됐다. 1980년 말부터 비밀리에 시작된 항쟁 기록 작업에 참여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초고를 책임집필했다. 2000년 내외신기자들의 5·18 취재기를 모은 The Kwangju Uprising을 『뉴욕타임스』 토오꾜오지국장을 지낸 헨리 스콧스톡스와 공편하여 미국에서 출간했다.
전용호 田龍浩
1957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1978년 전남대 재학 시절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했다. 5월항쟁 당시 투쟁위원회 홍보팀으로 들불야학 학생들과 투사회보를 제작·배포하다가 투옥됐다. 1982년 「임을 위한 행진곡」이 삽입된 노래극 제작에 참여한 뒤 광주민중문화연구회 등 지역문화운동을 펼쳐왔다. 1998년 광주매일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한 이래 5월항쟁 관련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2017년 5월, 참으로 아름답게 빛나던 순간이었습니다. 지난겨울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오르던 촛불이 마침내 어둠을 거둬내고 밝은 세상을 이루어냈습니다. 새로운 세상의 눈부심이 가장 빛나는 순간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37년 전 5월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1980년 5월, 그 공포와 암흑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의 눈부심은 그저 평범했을지도 모릅니다.
37년 전 5월 광주는 참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1985년 5월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넘어』)는 5·18 당시 광주 상황을 증언한 기록물입니다. “나는 그 학살의 순간 무엇을 했는가?” 당시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 질문은 사람들마다 내면의 양심과 마주하게 만들었고, 극심한 분노, 부끄러움, 자책감에 몸서리쳤다고 하지요. 마침내 그런 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1987년 6월항쟁을 만들어낸 힘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 30년간 우리는 민주정부를 누렸으며, 두번의 보수정부까지 경험했습니다. 그사이에 민주주의라는 세련된 겉옷을 걸쳤으나 몸체는 분단된 안보국가라는 본질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실감했습니다. 유신독재로의 퇴영적 회귀를 꿈꾸었던 박근혜정부는 노골적으로 광주를 모욕하고 수모를 주었지요. 특히 『넘어넘어』가 국민들의 머릿속에 5·18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너무 강하게 심어준 결과 역사가 왜곡됐다며 집중 공격하였습니다. 북한 책을 베낀 것이고, 필자들이 간첩과 선이 닿아 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주장도 공공연하게 펼쳤습니다.
광주 사람들로서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더이상 참을 수 없었지요. 30년 전 위험을 무릅쓰고 이 책 초판 출간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모여 『넘어넘어』를 다시 출간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2014년 초 개정판 출간 계획이 알려지자 일부 극우 언론매체들이 집필진을 향해 모욕적인 언사와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몰래 숨어서 촬영한 영상을 악의적인 댓글과 함께 인터넷 공간에 일방적으로 게시·유포하는가 하면, 컴퓨터 해킹, 전화 도청 등은 물론 표적수사·조작수사까지 벌이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필자들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사이에 거리에서는 촛불혁명이 진행되었고, 수구세력의 극심한 협박과 방해 책동을 뚫고 마침내 올해 5월 『넘어넘어』 개정판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넘어넘어』는 극심한 왜곡과 폄훼에 준열하게 맞선 진실의 기록입니다.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 속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앞으로 『넘어넘어』는 미흡했던 ‘5·18 진상규명’과 더불어 ‘헌법정신 규범화’를 통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선진적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엄혹했던 시절 초판 편찬을 책임졌던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전계량 회장, 고 나병식 풀빛출판사 대표 등은 물론 초판과 개정판 간행위원회를 이끌었던 정상용 위원장,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용화 이사장, 조봉훈, 최평지, 김상집, 김창중, 조양훈, 고인이 된 정의행, 초기 기록을 시도했던 소준섭 등을 비롯, (사)5·18기념재단,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전남대 5·18연구소 등과 그밖에도 하나하나 이름을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이 나오는 데까지 조력을 아끼지 않은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특히 출판사 창비의 편집진과 ‘만해문학상 특별상’ 심사위원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수상의 영광을 5·18 희생자와 5월정신 계승을 위해 싸우다 산화하신 영령들에게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