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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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제19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박소란 손택수 2인을, 본심위원으로 김행숙 안도현 최원식 3인을 위촉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예심에서 검토한 결과와 본심위원의 추천을 종합해 아래 총 9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랐다.

김경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송찬호 『분홍 나막신』, 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여정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육근상 『만개』, 이장욱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가나다순).

본심은 10월 31일에 진행되었는데, 규모와 수준 면에서 근래 한국시의 풍요를 증명하듯 여러 문제작이 경합하여 심사가 쉽지 않았다. 본심위원들은 우선 신용목 심보선 허수경 시집으로 대상작을 압축하여 논의를 거듭한 끝에 신용목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창비 2017)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는 시대현실을 관통하는 가운데 타자에 대한 깊이있는 사유와 자유로운 언어적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세월호 이후의 시’가 다다른 일단의 성취를 보여준다는 평가와 함께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았다.

 

 

 

심사평

 

김행숙(金杏淑) 문학평론가

신용목, 심보선, 허수경 시인의 시집 세권을 가려놓고서는 이 상이 누구에게 돌아가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중 누구의 시집에 상이 주어져도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다른 두권의 시집이 아까워서 더 오래 마음에 남을 것도 같았다. 세분의 시집은 백석의 ‘서정’과 ‘모던’의 가능성이 오늘의 시 속으로 더 멀리 걸어 들어가는 매혹적인 세갈래 길을 보여주었다.

허수경 시인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읽는 일은 잃어버린 기억들을 불러내는 프루스트적인 감각의 계기들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그 누구의 것이라고 지목할 수 없는 묻히고 지워진 기억들을 불러내고 노래하는 자, 그녀에게 역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나는 없어지고/시인은 탄생하는”(「눈」) 그 익명적인 순간의 노래를 부르고자 한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이 한국어가 앉아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머나먼 이국에서 보내오는 한국어는 시인이 탄생하는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한국시의 국경을 지운다.

세번째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에서 심보선은 그 시집 제목의 목소리처럼 낮게 중얼거리듯 말할 때에도 몇번은 불에 댄 듯 뜨거워지게 만든다. 그의 언어는 물처럼 흐르다가 문득, 문득, 뼈가 서고 살이 붙고 피가 솟는다. 약하기 때문에 돌처럼 맺히고, 헐벗었기 때문에 불꽃처럼 뜨거워지게 되는 존재의 어떤 지점들을 그는 귀신처럼 찾아간다. 또한 그것이 그를 계속 가게 할 것이다. 세계의 부조리 속으로 그리고 주체 안의 검은 구멍 속으로 “끝까지” 나아가는 자는 “진실을 향하게끔 되어 있”(「당나귀문학론」, 시집 부록)다고 생각하는 것, 지금은 이것이야말로 심보선의 힘일 것이다.

신용목 시인의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는 타자(이웃)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리에다 자신을 옮겨놓는 것을 시적 실천으로 삼는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들이 돌려받는 것이 거울 같은 메아리뿐이라면 시인은 그 부재(대답 없는 자)의 자리에서 몸을 얻으려고 한다. 샤먼처럼 시는 간곡하게 타자의 몸을 빌리고 타자에게 몸을 내준다. 신용목의 ‘-되기’는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공동체」)라는 물음 속에서 기도하듯 뒤척인다. 이 시집은 ‘세월호 이후의 시’가 ‘슬픔의 힘’으로 가닿으려 했던 ‘시적 공동체’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미학적 성취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신용목의 시력(詩歷) 안에서도 어떤 절정을 이루는 시집으로 기억될 것이다. 깊고 섬세하고 단단하다. 마땅히 이 시집에 올해의 백석문학상이 주어졌다.

 

안도현(安度昡) 시인

백석이 이루어낸 탁월한 시적 성과의 뒤쪽에는 그가 돌파하지 못한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백석의 시대는 모국어로서의 한글이 타민족의 강압에 의해 참담한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그는 모국어 방언의 기능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시어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당시의 현실을 미적으로 견인하려고 했다. 모국어는 그에게 매우 시급한 시적 전략이었으며 핍박한 삶을 견디게 하는 무기의 하나였다. 백석이 일본에서 습득한 모더니즘은 그의 시어에 정제된 이미지와 감정의 절제력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의 시가 공동체의 운명을 타개해갈 수 있는 어떤 전망을 확실하게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개인의 불편과 불화를 공동체의 운명과 치밀하게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팔십여년이 흘렀다. 본심에 오른 시집들을 읽으며 백석과 이 시집들 사이의 거리를 생각했다. 심보선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거리낌 없는 사유 체계와 활달하게 요동치는 어법으로 독자를 묘하게 잡아당기는 시집이다.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된 비극적인 소재들도 그에게 가면 튀어오르는 기운을 얻는다. 그는 절대 예정된 수순으로 시를 전개하지 않는다. 행과 행 사이 상상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통쾌한 반전의 맛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간간이 숨겨둔 위트와 해학은 백석에게 없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 당나귀를 주체로 삼자는 그의 시론은 신뢰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시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탐구하는 대표적인 시인이 있다면 허수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시간에 갇혀 있으나 시간 너머를 보고자 몸을 떠는 자아가 아프게 그려져 있다. 사랑과 그리움, 혹은 연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속적 감정들이 허수경의 시간 속으로 편입되면 하나같이 살뜰하게 전경화(前景化)한다. 이국에 거주하면서 모국어로 시를 생산하는 시인의 특이한 경험은 40년대 이후의 백석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시가 낳은 울렁거림을 우리는 오래 기억해야 한다.

신용목의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는 우리를 지배하거나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진 허상에 주목하면서 어둡고 피폐한 중간자적 삶의 불안을 드러낸다. 이 시집의 주요 화두는 “슬픔과 몸이 하나”(「가을과 슬픔과 새」)라는 표현 속에 집약되어 있다. 시인은 가시화되지 않은 슬픔을 가시화해서 보여주는 일에 주력하는데, 그 기법은 조각을 새기듯 정교하고 치밀하다.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고 있는 점도 믿음직했다. 경이로운 조형술로 빚은 그의 시는 우리 시대 서정을 한 정점으로 끌어올렸다고 판단된다. 백석이 다다르지 못한 지점을 돌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올해의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선택한다.

 

최원식(崔元植) 문학평론가

본심에 오른 아홉권의 시집을 통독하면서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시집들을 만날 때도 없지 않았지만 낯선 이름에서 뜻밖의 정진과 해후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가령 김경후가 대표적이다. 아직 툭 트이지 않았지만 불모를 견디는 언어의 지옥훈련을 수행하는 그 자세나 이룸이 만만치 않아 앞날을 두고 싶은 심정이다.

수상 후보작으로 최종 압축된 세 시집 가운데 나는 신용목의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와 심보선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에 주목하였다. 두 시집은 공히 타자 또는 타자성의 문제를 깊이 사유함으로써 젊은 시의 사회성을 다른 수준으로 들어올린 점에서 나에게 특히 계몽적이었다. 나를 남에 해소하거나 또는 남을 괄호 치고 나로 국척(跼蹐)하는 두 편향을 여의고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닌, 또는 나이기도 하고 남이기도 한 그 무엇을 향한 언어의 모험이 아름답다.

주목할 만한 시집들답게 규모도 적지 않다. 특히 심보선의 시집은 면수도 면수지만 장시에 준하는 시편들이 접종(接踵)해서 처음에는 지레 뜨악해지기도 했거니와, 정작은 끝이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시읽기의 현재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만큼 관념을 다루는 솜씨가 일류라는 것일 게다. 우리 현대시, 특히 해방 후의 한국시가, 김수영을 비롯한 예외들을 제외하면, 짧은 서정시 중심이라는 특성도 이와 연관될진대, 정서의 과잉과 짝할 사유의 부족은 문제적인데, 신용목의 시편들은 자재(自在)하다. 호흡 따라 자율 조정되는 언어의 천변만화가 장관이다.

토론 끝에 신용목을 수상자로 하는 데 기쁘게 합의하였다. 심보선의 시가 더 설계적이란 점도 감안했지만 시적 압축에도 더 유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상소감

 

시의 이유들은 매번

 

신용목 愼鏞穆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등이 있음.

 

 

시인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면, 시대의 촉수이자 정의로운 지사, 하다못해 ‘대신 울어주는 자’였다면, 나는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당위도 자유로운 시인을 구속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떤 ‘불편’과 ‘불안’이 시인을 쓰게 한다. 나에게 시인은 그저 ‘쓰는 자’ 이상이지 않으며 시는 ‘쓰여진 것’ 이상이지 않다. 시를 통해 세상을 이기는 분들의 다정한 충고처럼 언젠가 나는 시인으로서의 위의를 이렇게 저버린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아마도 내게 오늘의 ‘불편’이나 내일의 ‘불안’ 따위가 사라진 때일 것이고, 그런 때라면 틀림없이 목전에 죽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죽음을 위해 살고 싶지 않다.

 

편편마다 시는 다른 장르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혹은 합의된 독법을 가진 시의 시대는 갔다. 그런 시대가 다시 올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니, 그런 ‘시대’는 이제 겹겹의 세계 속에 혼재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정치적 진보성이 그대로 미학적 진보성이 아니듯이 미학적 진보성이 그대로 정치적 진보성이라고도 말하지 말자. 미지의 논리로 모두를 묶어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면 무엇보다 말하기에 좀 편할 것 같고, 그러면 시에 덧씌워진 위험한 신화를 벗겨낼 수 있을 것 같고, 어쩌면 문학을 빌미로 태어나는 추문과 추행들이 조금은 줄어들 것 같다. 내 주변에는 문학하는 자의 최소한으로 무언가를 지키려다 다친 친구들이 많다. 그들의 상처가 인공 진실 혹은 인공 거짓에 의한 것이기에 내내 안타깝고 또 무력한 만큼 그 허구에 가담한 것 같아 미안하다. 세계는 이편과 저편으로 나누어진 장소가 아니라 몸의 감각으로 이루어진 불투명하고 불균질한 곳이므로, 어떤 프레임이 선명할수록 자신을 선으로 규정하기 위해 악을 발명하고자 하는 욕망의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적어도 자신의 내면을 경유하지 않은 언어가 문학이 될 수 없다는 지극한 사실을 돌이켜 함께 떠올리면 좋겠다.

 

내게 백석은 오래고 먼 스승이었고 선후배 동료들은 늘 가까운 스승이었다. 각자의 고독이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우쳐주셔서 감사하다. 한줌의 흙을 삼켜야만 그만큼 나아가는 지렁이처럼 내 속의 축축한 어둠을 밀어내지 않고서는 길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시인’이 그저 생활인이라는 앞의 말과 달리, 모든 ‘시’는 죽음과 만나기를 바란다. 미래는 죽음과 같은 이정표를 쓰니까. 나는 이 균열과 어긋남이 ‘시’와 ‘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연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육체 속에 갇혀 살아갈 때 사랑이 우리 몸을 두드리듯이, 비바람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기척이라는 것을, 눈송이 하나하나가 초인종 소리라는 것을…… 적막이 밤의 교실을 열어 가르쳐줄 때, 차가운 현관 손잡이를 잡고 망설이는 자의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시가 매번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시의 이유들은 매번 성공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