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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지역문학의 저녁

 

 

이선욱 李禪昱

시인. 월간 『대구문화』 취재기자. 2009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탁, 탁, 탁』이 있음. malmanson@naver.com

 

 

‘저녁의 시인들’이라는 행사가 있다. 매달 한번씩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 콘서트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시작해 올해까지 약 20여명의 시인이 무대에 올랐다. 젊은 시인부터 원로 시인은 물론 전통과 현대를 오가는 시조시인, 그리고 교육·의료·사회운동 등 각계에 몸담고 있는 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면면을 지닌 이들이 ‘저녁의 시인들’이라는 이름 아래 마이크를 잡고 관객들을 만났다.

지금까지 이 행사의 실무를 맡아오면서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여전히 시인들은 달변과 거리가 멀다는 점. 다른 하나는 오늘날 시인들에게는 그보다도 거리가 먼 것들이 존재한다는 점. 이를테면 사람들의 흥미나 관심 같은 것인데, 시뿐만 아니라 문학계 전반에 걸친 이같은 현상은 어떤 면에서 불가피한 현실처럼 보이기도 했다.

달변이라 해도 불가피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매체의 변화에 따라, 즉 텍스트를 중심으로 사유하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가면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문학적인 관심을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문학을 다소 권력론적인 입장에서 접근한 방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한가지가 마음에 걸렸는데, 그러한 흐름 한가운데 지역의 문학이 있기 때문이다.

어스름이 물드는 과정처럼 문학에 대한 관심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저 어두워지는 것 같다. 이를 지역문학과 시민 간의 관계로 좁혀 보면 좀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저녁의 시인들’ 같은 경우도 매번 30여명 내외의 관객이 자리하지만 소위 ‘문학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일반 시민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행사 자체의 흥행은 둘째 치고, 대구 지역문학계 전반을 둘러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문학에 대한 관심이 어두워지는 추세라면 어째서 유독 지역부터 더 짙어지는가. 상대적으로 서울에서 펼쳐지는 크고 작은 문학 행사들이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고, 또 유명 작가들이 출연하는 행사의 경우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황을 이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지역문학의 상황은 더 어두워 보이기만 한다. 그 때문에 장기간의 면역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문학의 위기’ 같은 말이 다시 피부에 와닿는 요즘이다.

‘저녁의 시인들’이라고 행사명을 지은 데는 저녁시간대에 열린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같은 지역문학의 상황을 염두에 둔 측면도 있었다. 행사의 기획과 사회를 맡고 있는 이하석 시인과도 이러한 뜻을 공유하며 좀더 의미있는 시간을 만들고자 했다. 갈수록 더 어둡게 잊힐지도 모르는, 지금 현재 대구 시단의 중요한 면모들을 알리고 기록하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사이 전국 곳곳에서는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촛불들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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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대구에서도 동성로와 중앙로 일대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 촛불을 들어올렸다. 당시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에서 펼쳐진 집회라는 데 주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그곳에 모인 시민들에게도 그러한 사실이 중요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들의 촛불 또한 다른 지역의 촛불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민주사회의 기본에 대한 질문이었고, 나아가 삶의 본질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이 아닌, 오로지 제 손으로만 밝힐 수 있었던 각자의 충실한 의견이었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는 대구의 촛불집회에 대해 달리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온 도시가 들썩였다기보다는 상징적인 측면이 강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를 전후로 ‘주권’이라는 말이 다시금 빛을 찾고, 그것을 기반으로 지역사회에서 ‘분권’을 외치는 목소리가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촛불의 여파라면 여파인데, 무엇보다 이처럼 삶과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부각되는 풍경은 불현듯 도로를 가득 메운 촛불의 물결만큼이나 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 어둠과는 대비되는 밝음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정작 분위기에만 그칠지 모른다는 우려도 든다. 실생활의 변화나 처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변하는 이 시대의 이슈들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간의 정치적 경험에 비춰 보자면 매번 대선이나 총선, 지방선거를 전후로 빠르게 상승하는 기대와 급격한 실망, 그리고 이후 점진적인 무관심이라는 일련의 반복된 과정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선거로 인한 기대와 실망이 빠른 굴곡을 그리다가 잦아드는 것은 결국 실생활이라는 대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즉 삶은 어떤 개념이나 슬로건처럼 쉽게 변화하지 못한다. 대구의 양극화는 여전히 공고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세대적·정치적 성향의 갈림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으며, 큰 이변이 없는 한 이같은 구조는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흔히들 전통적이라 말하는 보수성 또는 ‘대구는 이래서 안 돼’라는 식의 자조 섞인 입버릇을 마주할 때마다 삶이라는 이름으로 이 도시에 뿌리내린 부동의 힘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의 경험이 이러한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당장에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차분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지금의 밝은 분위기가 분위기로만 그친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분위기조차도 설 자리가 없는 저녁이 있다. 함께 촛불을 들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더라도, 주권과 분권이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더라도, 거리로 나가 시화를 전시하고 축제를 열더라도, 혹은 사드 배치를 반대하며 삭발을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어떤 어스름이 있다.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어두워지고 있는 이 문학의 저녁은 촛불을 통해 밝힌 어둠보다는 삶이 지니고 있는 무거운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문학의 위기’와 더불어 ‘문학의 역할’까지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요즘이다. 유독 빠르게 어두워져가는 대구의 저녁 앞에서, 여전히 달변과는 거리가 먼 ‘저녁의 시인들’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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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부터 대구로 터를 옮겨 지역 문화예술계 소식을 전하는 월간지의 취재기자로 일하면서, 또 잡지의 기획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저녁의 시인들’ 행사를 운영하면서 대구의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담긴 고향의 문학이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가진 측면도 있었는데, 사실 오늘날 문학계가 당면한 흐름을 감안한다면 단순한 관심에 그칠 부분은 아니다.

저녁이라는 말로 비유하긴 했지만, 현재 대구 지역의 문학계를 이루는 기반들만 놓고 보자면 이 표현에 의아함을 가지게 될 법도 하다. 지역 내 주요 문학단체에 가입한 회원만 1천여명이 훌쩍 넘는다는 점을 비롯해, 해마다 수여되는 문학상은 10여개에 이르며, 나아가 지역의 대표 신문사 두곳에서는 각각 60년 내외의 역사를 지닌 신춘문예 공모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몇종의 전문 계간지를 비롯해 정기적·비정기적으로 간행되는 문예지들과 해마다 펼쳐지는 대규모 문학축제들, 더불어 대구 지역의 문학적 기록들을 보관하고 다양한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문학관, 곳곳에서 펼쳐지는 창작 아카데미, 문예창작학과와 국어국문학과 등 직접적으로 문학을 다루는 대학의 학부들까지. 인구 250만 도시에 이 정도 규모의 문학적 기반이 갖춰져 있다는 점은 이전까지 저명한 몇몇 문인들로만 인식했던 대구의 문학적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이러한 면모만 놓고 보자면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도대체 어디에 저녁이 찾아왔다는 것인가.

그러나 나열한 풍경들 가운데 상당수가 양적인 측면 위주라는 것은 한번쯤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알다시피 지역문학의 어려운 상황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문화의 중앙집중화 현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제들은 지금의 저녁이 오기 훨씬 전부터 제기되어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지역문학계를 이루는 기반들의 양적인 수치는 마치 거대한 늪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버팀처럼 강조되어온 측면이 있다. 문제는 이때 늪으로 상징되는 중앙집중화 현상이 아직까지도 지역문학계에서는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늪이 전반적으로 낮아지는 문학에의 관심과 더불어 더욱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심지어 그 늪조차도 더 거대한 저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면, 이제 비판의 대상은 중앙이 아닌 문학의 저녁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측면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이 바로 지역 내에서 지역문학을 묘사하는 모습이다. 지역문학의 역사와 전통을 거론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현재 대구 문학계의 면모들은 우수하고, 풍성하고, 희망 찬 분위기로 강조되는 성향이 짙다. 문학적 기반에 대한 강조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지금 문학계 전반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그 모습은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역문학을 좀더 밝은 곳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임은 알 수 있지만, 어떤 지향점을 그린다기보다는 이미 밝고 환하게 자리하고 있는 풍경에 대한 묘사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촛불정국으로부터 느낀 밝음과 환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민들을 비롯해 지역사회 전체, 혹은 문학계 전반을 대상으로 지역문학의 밝고 환한 면만이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모습은 현재 이곳의 문학계가 여전히 중앙집중화라는 현상에만 날을 세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사이 지역문학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문학 자체에 대한 관심에 비해 더욱 빠르게 어두워졌다. 이는 지역문학계의 다양한 노력이 정작 지역 시민들에게는 큰 설득력으로 다가오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정치적 구호를 바라보는 삶의 입장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문학의 중앙집중화에 맞서 지역문학을 되살리자는 취지는 분명 많은 시민들의 심리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작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면 지지기반은 어느새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문학 자체의 기반이 힘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대구 문학의 우수성만을 호소하는 형태 또한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리 효율적인 방식이 아니다. 여기에 ‘문학이 예술의 정수’라며 시민들에게 지역문학에 대한 관심을 부탁하는 모습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지금 대구의 문학계에 우려를 가지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이어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양적 기반이나 일방적인 형태의 우수성만이 강조되면 그에 비례해 지역문학은 시민들의 관심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묵직하게 움직이는 실생활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대구에만 해당되는 현상은 아닌데, 이는 지역문학과 더불어 지역문화 전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지역문화계에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례를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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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럴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자긍심이다. 자긍심의 고취는 오늘날 지역문학을 비롯한 지역문화계 전반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대표적인 매개로 여겨지는 측면이 강하다. 현재 대구 문학에 대한 지나치게 밝은 묘사 역시 이로부터 연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갈수록 시민들로부터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지역문학이 어떻게 그들의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느냐다. 대구의 문학계가 현재의 지역문학을 이야기하면서도 반드시 역사와 전통을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해 지역문학계의 주요 이슈였던 국립한국문학관 유치 운동에서 대구의 문학계가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이곳이 한국 근현대문학의 중요한 거점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지자체 간의 과열된 경쟁으로 인해 문학관 유치의 본래 취지가 왜곡된 측면도 있지만,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데는 별문제가 없다고 본다. 실제로 근대 주요 작가들을 비롯해 6·25전쟁 당시 상당수의 문인이 대구를 찾았다는 사실이나 이후 국내 문학계의 주요 인물들이 이곳에서 꾸준히 배출되었다는 점은 대구 문학계가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에만 치중한다면 자긍심을 오래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예컨대 현재 대구 시내 곳곳에서는 이상화, 이육사, 현진건, 이장희 같은 근대 작가들의 흔적이나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데, 그뿐 아니라 지역 내 문학 관련 사업 콘텐츠의 대다수도 역시 이들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 자체를 폄하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같은 자긍심은 과해도 좋다는 게 솔직한 입장이다. 문제는 이들로부터의 자긍심이 과거의 범주를 넘어선다는 점이다. 현재 대구 문학의 화려함이나 우수성을 언급할 때도 이들은 아직까지 동시대적인 인물, 대표적인 작가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대구 문학계의 역량이 과거에서 기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현재 작가들의 우수성까지 밝게 보장하지는 않는다. 촛불에 비유하자면 이제는 촛농으로 흘러 촛대를 단단하게 감싸야 할 과거가 여전히 심지 주변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밝혀주는 건 결국 과거도 현재도 아니다. 오히려 과장된 밝음이 현재의 위약한 진실을 어둡게 가릴 뿐이다. 삶이 묵직한 현재임을 감안한다면 빛나는 시절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대한 자긍심 또한 마찬가지다.

촛불 이후로 이어지고 있는 밝은 분위기가 우려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는 늘 도취라는 유혹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무엇보다 현재를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믿고 싶지 않더라도 마주해야 할 지금이 있고, 어쩌면 그것이 믿음보다 더 믿음직한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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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내 문단에 이름을 알린 대구의 시인은 그 수가 적지 않다. 그러나 정작 지역의 시민들은 그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또한 지역문학계를 구성하는 대다수는 중년을 훌쩍 넘긴 이들이며, 젊은 작가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은 예상하다시피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소설가나 평론가에 비하면 처지가 훨씬 나은 편인데, 그들에게 있어 현재 대구의 문학은 ‘저녁’보다는 ‘밤’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 때문에 상투적이기는 해도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지금 상황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속담일 것 같다.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는 지역의 문학이,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가장 먼저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불가피함에 대해서만큼은 크게 부정하지 않는 입장이지만 어쩐지 이것만은 불가피함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듯하다. 문학계 전반이 저녁을 맞고 있음에도 유독 지역문학에 드리운 저녁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확히는 현재의 대구 문학, 더 정확히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작가들에 관한 걱정이라고 해야겠다. 시민들의 관심으로부터 어두워지는 동시에 지역문학계의 주목에 있어서도 근대 작가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중고가 못내 마음에 걸린다.

현재를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말은 결국 이들에게도 해당된다. 지역문학계가 양적 기반 혹은 근대문학에 대한 자긍심을 알리는 데만 힘을 쏟는 동안 공교롭게도 이들 자신이 일구어낸 현재의 문학은 냉정한 평가라도 받기는커녕 그것을 알릴 기회조차 쉽게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인이 1천여명이 넘는다고 자부하지만, 대구에서 정작 그들의 작품이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곳에는 지금 자그마치 1천여명이 넘는 ‘저녁의 작가들’이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날 지역문학의 양상에 관계된 면면이 비단 작가들이나 문학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모든 문제는 결국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수많은 촛불이 타오르는 광경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이다. 다행인 점은 촛불의 경험이 문학적 경험을 넘어 크든 작든 모두의 삶과 공유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같은 사실이 ‘저녁의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동안 원론적으로 여겨지던 삶과 문학의 관계를 묵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냉정하게 바라봐야 할 것은 대구 문학계의 현재만이 아니다. 지금 지역문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현재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문학을 통해 들여다봐야 할 지역의 현재라는 문제도 있다. 즉 다른 작가들의 눈으로는 들여다볼 수 없는 지금 이곳의 삶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어떤 정치적 꼬리표와도 무관한 촛불의 모습이자, 그로부터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갖은 변화의 욕망일 수도 있으며, 혹은 우리의 삶이 그토록 부동적인 이유를 밝혀낼 중요한 표본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것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풀어낼 것인가라는 문제는 오로지 지역 작가들만이 짊어질 수 있는 책무이기도 하다. 나아가 지역의 삶을 고민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역문학이 지역문학에만 국한되지 않는 문학임을 자연스럽게 말해준다. 대구를 배경으로 한, 그래서인지 대구 시내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작품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시대와 지역을 넘어 생명력을 유지한 것도 결국 이러한 고민들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지역문학계에 드리운 저녁으로부터 이곳의 삶을 밝히는 촛불이 하나둘 켜지는 모습을 상상해볼 따름이다. 이미 그렇게 대구의 현재를 바라보는 작가들도 적지는 않다. 사투리를 통해 지역의 내밀한 정서를 시로 풀어내고 있는 상희구 시인이나, 지역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돌이켜보고자 하는 이중기 시인과 엄창석, 조두진 등의 소설가들, 오늘날 대구의 풍경을 섬세한 시각으로 관찰하고 있는 엄원태 시인, 지역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동시로도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김준현, 권기덕 시인 등이 그 예다. 이들을 포함한 다수의 작가에게서 짙은 외골수 기질도 엿볼 수 있는데, 다름 아닌 이러한 태도로부터 이곳의 삶이 지니는 어떤 특성 또한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들의 불빛 역시 여전히 과거라는 커다란 그늘 뒤에 가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저녁의 시인들’과 ‘저녁의 작가들’이 지금의 어두운 대구 문학을 밝히는 촛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러한 불빛들이 지역문학의 저녁을 홀연히 대낮으로 변화시킬 여지는 크지 않은데, 이들이 밝혀야 하는 것은 문학 그 자체의 저녁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지금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금의 밝아진 사회적 분위기를 분위기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데 적게나마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문학이 아니라 삶이라는 매개 때문이다.

그런데 이같이 문학이 지금의 삶을 밝히는 데 집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교롭게도 이러한 문학의 역할은 도무지 낯설지가 않다. 우리가 늘 보아왔고 배워왔고 가르쳐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무심코 잊어버린 문학의 본질 중 하나일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문학이 다름 아닌 저녁을 맞음으로써 이러한 역할들을 다시 불러오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문학의 위기’가 ‘문학의 역할’을 일깨운 셈인데, 전자의 불가피함이 여타의 부연들을 걷어내고 문학 본연의 역할을 되돌아보게 했는지도 모른다. 캄캄한 저녁이 가져다주곤 하는 사유의 시간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가장 어두운 저녁을 맞은 지역문학이야말로 그러한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문학임을 뜻하는 것일까. 마냥 수긍하기에는 어딘가 서글퍼지는 면도 없지 않은데, 그렇기에 지금의 저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는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