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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일상의 생활정치, 마을민주주의
김영배 金永培
서울시 성북구청장, 전국자치분권개헌 추진본부 상임대표, 대통령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위원. 저서 『동네 안에 국가 있다』 『작은 민주주의 사람의 마을』 등이 있음.
삶의 문제, 새로운 해결방식이 필요하다
모의시민의회를 열다
지난해 12월 16일 추운 겨울날, 성북구 평생학습관에서는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지방자치의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 ‘아파트 경비원 고용안정 방안 마련을 위한 성북 모의시민의회’가 열린 것이다. 참여한 주민 80명은 어떻게 최저임금 인상의 충격을 해소해 경비원의 고용을 보장할지를 두고 토론했고 합의에 이르렀다. 지난겨울, 광화문광장 촛불의 열망과 열기가 시간과 공간을 이동해 일상의 공간인 마을에서 시민의 삶 속에 파고들어 생활민주주의를 일궈내고 직접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날 성북 모의시민의회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회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아파트 경비원 고용안정이 의안이었고, 아파트 경비원과 동대표, 관리소장 등의 증인 진술과 참고인 진술이 이어졌다. 1일 의회시민들은 정부 측 고용업무 담당자, 민주노총 조직국장, 성북구 동행(同幸) 아파트 설계자 등과 함께 토론을 거쳐 그동안 제시된 방안을 검토하고 바람직한 해법을 직접 결정하였다.
하루 동안 수십개의 다양한 의견을 조율한 결과 경비원 업무조정 및 임금피크제, 아파트 관리 효율성 제고, 경비원 고용형태 변경, 관리비 인상 주민부담, 관련 고용법규 정비 및 한시적·차등적 정부지원, 감원 후 택배 및 재활용 등 단기적 고용, 무인시스템 도입 등 6가지 대안으로 집약되었다.
결국 최종권고안은 “경비직 노동자들의 고용안정 보장을 위해 경비원 근무형태(다양한 방식) 조정을 도모하도록 하고, 경비직 노동자 고용안정 위협의 보완대책에 대한 이해당사자인 아파트 주민의 인식과 공감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소통을 지원해야 한다”1는 내용으로 정리되었다. “주민회의가 없었더라면 귀도 기울이지 않았을 의견을 경청했고 그 배경에 놓인 애로를 이해했다. 최종권고안이 최선의 방책이 아니더라도 주민들은 일장 박수로 권고안을 채택했다. 사회적 합의는 이렇게 도출된다. (…) 공익과 사익의 균형을 찾고 갈등을 해결하는 민주적 기제다.”2 하루 종일 의견내용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토론하는 숙의(熟議)였고, 작지만 주민 스스로 직접 결정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경험의 장이었다.
서울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서 경비원들이 전원 해고된 실태와 비교해볼 때 경비원들과의 공존을 위해 주민 스스로 시작한 동행(同幸)3의 가치가 운명공동체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주민자치를 마을민주주의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내 가슴 깊은 곳에 작은 울림이 있었다.
도시문제의 해결, 민주주의가 답이다
우리 사회는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영향과 소득양극화로 주민이 행정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개인화된 주민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무관심하다. 결과적으로 지방정부와 주민 사이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고 주민참여는 형식화되었다.
시민단체 가입률을 보면 민주주의의 미시적 기초가 얼마나 허약한지 알 수 있다. 2016년 한국사회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시민단체 가입률은 6.4%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 성인의 80%, 스웨덴은 90%가 시민활동을 한다는 1990년대 통계에 비추면 한국사회 민주주의 저변은 초라하다. 광장에서 연출된 화려한 민주주의는 직장·가정·마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얘기다.4
모의시민의회는 이렇게 원자화되어 있는 주민들의 형식적 참여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 전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성북구의 남다른 중요한 관심사이기도 한 이 주제를 두고 펼쳐진 “모의시민의회는 숙의형 직접민주주의의 실천이며, 아파트 관리비 인상과 경비원 고용안정 문제와 같은 생활상의 문제를 공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바람직한 해결방법을 모색해보는 민주주의 학습과 집단지성 형성의 과정”5이었다.
이제 다양한 도시문제를 해결하려면 시민의회와 같은 사례를 더욱 발전시키고 관련 법·제도를 개선하여 지역주민에게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일상적 삶의 현장인 마을을 설계할 자기계획권·자기결정권을 부여하여 마을공동체가 회복되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요즘 분권개헌이 핫이슈다. 분권의 진정한 의미는 일상의 문제를 주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성북구의 마을민주주의와 추첨제 민주주의, 주민이 만드는 공공시설 등의 사례를 소개하려는바, 이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민간협치를 통한 집단지성 등을 극대화하여 주민과 함께 혁신을 이뤄낸 성과를 모든 지방정부,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함에서다. 촛불 광장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구현되기를 소망하는 마음도 함께다.
마을민주주의와 생활정치
마을민주주의는 공동체가 자기완결적인 구조를 갖기 위해 가장 기초적이며 중요한 요소인 시민이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나설 수 있도록 자치역량을 길러 일상의 문제를 마을 중심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민주적 질서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출발하였다. 무엇보다도 재개발·재건축이 많은 성북구에서는 뉴타운 추진 과정 등에서 상호부조와 연대의식이 붕괴하고, 취약해진 사회적 복원력이 생활의 양극화를 더 악화시키고 있어 이를 극복할 방안을 공동체에서 찾아보겠다는 문제의식이 컸다.
‘마을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정치’라고 할 수 있는 성북구 마을민주주의의 작동 축은 5대 핵심전략으로 요약해볼 수 있는데, ① 구정 업무의 의사결정을 다양화하는 공공분야 혁신, ② 교육·문화, 건강·복지, 안전 등 마을의 현안을 계획하는 마을계획, ③ 주민 스스로 배우고 나누는, 공동체 네크워크공간인 마을교육을 통해 깨어 있는 시민 양성, ④ 주민소통의 공간인 마을미디어를 통한 마을정보 공유, ⑤ 민간협력 네트워크를 행정의 주체로 역할을 강화하는 민관(민민)협력 플랫폼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마을은 지역의 중요한 공공의제를 공개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공유하고 합의하는 공론장으로 재편되고 있다. 동네에서 아이들을 함께 돌보는 ‘작은’ 문제에서부터 쓰레기봉투값 인상 등 지역 전체의 이슈가 되는 큼직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지역사회의 협력적 네트워크를 통해 논의된다.
성북구의 마을민주주의는 이렇게 마을의 공공성을 중시하며 주민과의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를 통해 추진되었다. 그중에서도 2011년부터 시작된 주민참여예산제는 2015년에 주민의 폭넓은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의사결정 방법을 도입해 전면 개편 운영한 결과, 2017년 전국기초단체장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또한 주민이 직접 지역의 문제를 찾아 지역 내의 자원 활용 등을 통해 문제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마을계획단은 시범동인 2개동을 시작으로 현재 8개동 282명으로 구성·운영 중이다. 이와 함께 주민이 자유롭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이를 공유함으로써 공동체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 설치된 마을미디어지원센터에서는 주민들이 자신의 일상을 미디어로 담아내고 다양한 정보를 상호전달하면서 문제에 대해 터놓고 협의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활발히 열리고 있다.
또한 마을민주주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시민의 의지와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 민주시민교육, 주민주체 발굴, 마을활동가 양성 등을 목적으로 하는 마을시민교육센터를 2016년에 설치하여 6개 분야 16개 과정에서 339명이 수료한 상황이다. 시민력은 공급자 중심의 정부와 하나의 인격체인 개인 사이의 공간을 메울 자발적 결사체의 토대로서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처음 도서관 중심으로 공론의 장을 확대한 ‘마을 in(人)수다’와 ‘함께 행복하자〔同幸〕’ 같은 사례도 주민참여 거버넌스 조기 구축과 각종 아카데미, 토론회 등을 통한 민주시민 양성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방의 정치는 일상에서의 생활정치라 할 수 있다. 지방정부에서 주민참여가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해 다수 주민이 직접적으로 의사를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선5·6기 지방정부의 수장으로 국가의 축소판인 마을과 동네, 주민과 맞닿은 곳에서 경험하고 얻게 된 결론은 앞에서 살펴본 시민의회 방식처럼 시민이 주체가 되는 자치와 협치를 통해 좀더 나은 지역사회를 구축해나가도록 마을민주주의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추첨민주주의, 마을민주주의를 이끌다
성북구 주민참여예산제는 2015년부터 마을민주주의라는 성북구 주민참여 거버넌스 체계 내에서 중대한 변화를 시도했다. 기존 주민참여예산 제도 운영과정(2011~14년) 이후 진정한 주민참여예산 운영을 위해서는 주민의 실질적 참여기회를 보장하고 참여통로를 다양화할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반영한 결과다. 즉 ‘주민제안’ ‘주민심사’ ‘주민결정’으로 이어지는 주민참여예산제의 전 과정에 많은 주민의 참여를 보장하고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결정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먼저 마을의 문제를 주민 스스로 찾고 제안하는 ‘동네회의’와 해당지역의 여건을 가장 잘 아는 지역주민에게 예산편성권 일부를 위임하는 ‘동단위 주민참여예산제’를 운영하여 생활밀착형 사업을 유도하고 주민참여가 활성화되도록 했다. 또한 주민총회에 추첨민주주의 방식을 도입하고 토론을 타운 미팅(town meeting) 방식으로 진행하여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숙의민주주의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결과 2015년 성북구 주민의 3.4%인 1만 3700여명이 투표에 참여하는 양적인 확대도 이루었다.
추첨민주주의를 통한 타운 미팅식 운영
구의 참여예산 사업을 결정할 때 도입한 타운 미팅 방식은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민 전체가 한자리에 모여 토론한 후 투표를 통해 예산안, 공무원 선출, 조례 제정 등 지역의 법과 정책, 행정절차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방식이다. 이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인 참여민주주의 모델로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
성북구에서는 이러한 취지를 살려 46만명의 성북구 주민을 대표하는 100명의 참가자를 모집해 제안자의 사업설명, 토론절차 보장 같은 민주적인 요소를 통해 주민참여예산사업을 결정하도록 함으로써 제도의 공정성과 참여성을 높였다. 총 100명의 타운 미팅 참가자는 무작위추출로 선정된 주민 50명, 주민참여예산위원 30명, 동별 마을심사단 위원 20명으로 구성했다. 지역별 인구비례 기준을 가장 우선으로 고려했으며, 성별, 연령 등의 요소도 반영해 성북주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참석자 중 50%를 무작위추출을 통한 추첨민주주의 방식으로 선정했다는 점이다. 추첨민주주의6는 보통 주민 중에서 공적 영역에서 역할할 사람을 추첨으로 선출하는 방식을 말한다. 2008년 1월부터 시행된 국민참여재판제도에서 만 20세 이상 국민 중 무작위로 배심원을 선발해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누구든지 배심원이 될 수 있도록 한 사례를 참고한 것이다.
공직의 배분을 위해 추첨제를 도입하자는 발상은 1970년,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서너면의 짧은 글이고 자문위원회 수준의 제안이었지만, 그의 주장은 추첨민주주의를 현대 민주주의이론의 무대로 다시 불러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는 ‘인민에 의한 지배’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시장, 주지사, 상하원의원, 대통령을 보조하는 수백명 규모의 자문위원회를 무작위 추첨으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다.7
성북구에서도 이러한 추첨민주주의의 공공성과 대표성을 담보하기 위해 모집단인 46만 성북주민과 동일한 변이를 갖는 확률표집 방식을 이용하여, 50명이라는 적은 수의 표본으로도 전체 모집단의 의사를 정확히 추정하고 그에 따라 주민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지닌 구성원들을 차별 없이 포함해 실질적 대표성을 담보하고, 어느 누구든 대표자가 될 수 있으므로 자연스레 지역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높아질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도 담겨 있다.
주민에게 결정권한 부여
공적인 의사결정에 참여한 주민에게 결정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참여민주주의의 핵심이며, 단순한 참여를 넘어서는 주민자치로의 발전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동 단위 사업은 마을심사단8에서 심사한 결과를 토대로 득표순으로 결정하고, 구 단위 사업은 온라인투표 결과 60%, 타운 미팅 투표결과 40% 비율로 결정한다(2017년 기준. 타운 미팅 참여자는 1인당 3개 사업까지 투표할 수 있다). 각 단계별 투표에 참여자수를 누적 비율화한 후 반영비율을 곱해 점수화하고 다득점 순으로 현장에서 즉시 공개하여 투명성을 더욱 높이는 방식이다.
그런가 하면 주민참여예산사업 선정에 현실적으로 참여가 어려운 대다수의 자영업자, 직장인들을 위해 지하철역 등에서 바로 투표할 수 있도록 태블릿PC를 지원하고, 서울시 엠보팅(mVoting)9 등 첨단 IT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더 많은 주민이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개선하였다. ‘참여하면 내가 사는 동네가 변한다’라는 모토 아래 참여의 보람과 재미를 주고자 한 것이다.
지난해 5월 광주에서는 성북의 마을민주주의와 같은 ‘시민총회’가 열렸다. 시민들의 상상력과 시민력이 모인 축제였다. 마을, 회사, 단체를 불문하고 10명 이상의 시민이 모여 100개의 ‘민회’를 결성하여 100대 의제(정책과 조례)를 제안하는 자리였다. 이 시민총회는 시장과 시의회 의장, 구청장들이 단상에 올라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중요한 것은 민회였다. 이는 “지역의 중요 사안에 대해 주민이 직접 토론하고 협의하는 회의체다. 주권자가 참여하는 공론장을 통해 집단의사를 결집하는 직접-숙의 민주주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성숙한 대의민주주의 기초 위에 직접-숙의제가 융합된 시민민주주의를 이뤄가는 모색이다.”10 또다른 형태의 마을민주주의가 광주의 골목과 마을에서 새로운 세상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것이다.
바라건대 성북구의 마을민주주의와 광주의 시민총회가 앞으로 좀더 발전하고 확장됐으면 한다. 이를 위해 마을총회와 시민총회에서 제시되는 각종 제안과 계획들을 지역현실에 맞게 조정하는 숙의과정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스페인 ‘디사이드 마드리드’(Decide Madrid), 뉴질랜드의 ‘루미오’( Loomio) 등과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시간으로 제안하고 토론하며 시민 스스로 우선순위 등을 정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주민이 주인인 도서관이 생기다
민선 6기 10번째 구립도서관인 ‘월곡 꿈그림도서관’ 조성에 앞서 마을 안에서 특별한 시도를 했다. 개관 8개월 전인 2016년 11월부터 도서관 건립 지역을 중심으로 ‘도서관 동행인터뷰’와 ‘도서관 길 주민조사’를 실시했다. 이는 단순히 건물을 지어주는 방식을 넘어, 주민이 공공시설의 주인이 되게 하려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도서관 조성 및 운영 방향을 정하기 위해 복지협의회, 마을계획단, 사회적경제센터, 독서동아리, 보건소, 종교기관, 초·중학교와 인근 대학까지 37개 기관·단체 구성원 148명을 인터뷰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아파트단지, 지하철역사 등 도서관 인근에서 만난 주민을 대상으로 무작위 조사를 실시하여 1130명의 의견을 들었다. 이 중 주민투표 참가자 788명(70%)이 청소년 특화 도서관을 요청했다. 방과 후에 거리에서 방황하는 청소년이 편안하게 쉬고 놀 수 있는 문화공간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저 책을 읽는 장소로 생각됐던 도서관이 건립 계획부터 운영까지 주민의 생각과 의견을 모아 담은 마을·골목민주주의 공간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마을의 청소년, 인근 대학의 청년, 지역주민 그룹이 도서관과 함께 동행하며 개관을 맞은 일련의 과정은 민·관·학 협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도서관 개관이 마을민주주의 근거지이자 활력소로 기능할 수 있는 사례가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구청의 모든 공공시설은 설계 단계부터 주민참여를 이끌고 운영 단계에서도 주민과 함께 고민하도록 했다. 이제 마을민주주의가 생활의 현장, 일상의 공간에서 민주주의를 삶의 원리로, 행정의 기본원리로 삼아 확장되어가는 모습이다.
마을민주주의, 주민자치의 토대가 되다
“누가 국회의사당을 여의도에 짓자고 결정했는지 몰라도 대의민주주의의 꽃이 한강의 모래섬 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여의도에는 저잣거리나 골목, 유흥가가 없다. 사람들이 자연스레 몰려들어 의견을 밝히고 토론을 하고 여론을 형성할 만한 공간이 부재한 것이다. (…) 시민이 정치적 의견을 전하기 위해 국회 정문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방법밖에 없다면 그 나라의 민주주의는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11 소설가 김영하의 말이다. 여의도 정치가 시민의 삶과는 유리된 채 대의기구라기보다는 통치기구처럼 보인다는 말과 함께 곱씹어볼 만하다. 사회경제적 위기상황에서도 문제를 거의 해결하지 못하는 소수 엘리트 중심의 민주주의로 전락한 현재의 정치구조와 정당구조를 비판하면서, 마을과 동네에 뿌리를 두고 사람들의 요구로부터 출발하는 정치, 그야말로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정치가 필요함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촛불’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성찰과 변화가 있었다. 촛불민주주의를 한줄로 요약하면 시민정부, 주권재민의 원리를 따르는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지방정부와 연결하면 마을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에 해당한다.
이제 동네, 마을로 돌아가보자. 그곳에는 자신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갈망하는 시민이 있다. 이제 이들이 시민성과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시대의 흐름과 정신을 바꾸고 있다. 국가의 시대와 시장(市場)의 시대를 지나 시민의 시대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지난 민선5·6기 동안 동행의 가치를 바탕으로 마을민주주의와 주민참여예산제 등을 통해 더욱 많은 주민이 참여하고, 시민성을 가진 주민들이 공공의제를 주제로 토론하고 설득하고 타협하면서, 공공성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하도록 다양한 공론의 장을 연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큰 의미가 있었다. 집단적 참여의 기회가 많아질수록 통합되고 진보하는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보일 것이다. 이는 향후 마을의 공공성 회복이라는 중요한 목표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민도 있다. 지역에서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가는 마을민주주의를 이끌어나갈 권리와 의무 주체로서의 ‘시민’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각종 권한을 공동체에 위임하고 시민을 권리의 주체로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제도와 법규가 가로막고 있는 부분도 많다. 정치권과 중앙·지방정부에서 연구하고 시민단체 등과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실질적 주민자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하지만 마을민주주의 시대, 생활정치의 시대는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부와 공공의 역할을 줄여 주민자치의 힘인 시민력을 키우고, 주민의 생활영역에서 공적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생활공공성, 주민자치 거버넌스, 다양한 의사결정 구조 등이 마을에서 일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면,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민주주의, 진정한 주민자치가 한층 더 강화되고 주민 삶 속에서 꽃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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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영 「성북구, 아파트 경비원 고용안정 방안 마련 모의시민의회 열어」, 아파트관리신문 2018.1.3, 인용 및 재구성.↩
- 송호근 「개헌, 시민이 나설 때다」, 중앙일보 2018.1.11.↩
- 성북구의 ‘동행(同幸)’은 2014년 11월 언론에서 경비원 대량해고 사태를 계기로 공동주택 입주민이 스스로 공용공간의 전기료를 절감하여 경비원의 고용을 보장하고, 나아가 갑(甲)과 을(乙)로 표기되던 계약서를 동(同)과 행(幸)으로 표기한, ‘함께 행복하자’는 의미의 ‘동행계약서’를 사용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 상생 방안에 변화를 일으킨 사례이다.↩
- 송호근, 앞의 글, 인용 및 재구성.↩
- 서지영, 앞의 글.↩
- 미국 하원을 추첨으로 구성하자는 내용의 A Citizen Legislature (Michael Phillips·Ernest Callenbach, Bookpeople 1985)라는 책을 공동번역한 이지문과 손우정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 ‘시민입법부’ 정도로 번역될 원제의 한국어판(이매진 2011) 제목을 ‘추첨민주주의’로 삼았다. 이지문 『추첨민주주의 강의』, 삶창 2015, 19~20면 참조.↩
- 이지문, 같은 책 98면.↩
- 마을심사단은 주민들이 제안한 사업에 대하여 사업부서 검토의견과 현장심사보고서 등을 토대로 사업내용을 다시 살피고 제안자 설명, 찬반토론 등을 거쳐 동 단위 마을총회에 상정할 사업을 정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한다. 마을심사단은 동별 20명 이상으로 구성하고 기존 직능단체에 속하지 않은 단원이 70% 이상 되도록 하며, 추천 및 공개모집을 통해 선발하되 희망하는 주민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공개운영을 원칙으로 한다. 요컨대 마을심사단은 주민제안, 주민심사의 원칙을 가지고 주민 주도로 주민참여예산을 구현하는 동 단위 심의제도이다.↩
- 모바일(mobile)과 투표(voting)의 합성어. 서울시에서 개발·운영 중인 모바일 기반 투표앱을 통해 주민 누구나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2015년부터 활용되고 있다.↩
- 강위원 「촛불시민이 여는 주민자치의 현장」, 전국자치분권민주지도자회의 주관 세미나 ‘연방제에 버금가는 지방분권시대 지역문화가 열쇠다’(2017.7.25) 자료집 25면.↩
- 이진순 외 『듣도 보도 못한 정치』 추천사, 문학동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