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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허연 許然
1966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가 있음. kebir@naver.com
서교동 황혼
비둘기 한마리가 으깨어져 있는 차도를 걸으며, 오늘 또 몇명의 이름들과 몇소절의 노래가 내 머리에서 사라졌다. 이방인들이 성채를 지은 땅에 비둘기를 묻으며 유랑하는 아이들이 비닐봉지처럼 펄럭이는 걸 본다.
나는 늘 그렇듯 눈을 반쯤 뜨고서 호쾌한 소식은 이제 없음을, 변명도 없음을, 피 묻은 나이가 됐음을 알아차린다. 단지 아주 천천히 빙하가 이 모든 걸 쓸어가버리기를.
소식에는 독이 묻어오기 시작했다. 아무도 구름무늬 표범의 안부나 개기일식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한심해지고 싶었다든가, 문득 생각났다거나. 이런 소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피아의 식별이 소식의 전부였다. 아니면 분노가 어색해서 누군가를 미화했거나.
그날, 사람들이 그리고 노래가, 나를 잊기 시작한 것이다. 식탐과 왕년이 남아 비틀대며 택시를 잡는다. 시속 팔십킬로쯤의 속도로 그날밤 황혼은 저물었다. 멀리서 온 소식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나는 내일 태어나지 않는다
과거,
그 자유롭던 일몰.
교활한 미래를 내던지며
우주의 가호가 있기를.
신은 떠났고
신은 또 울었다.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과거를 적어놓은 자
그 자를 경배한다.
내일 부를 노래는 태양력의 한마디에 남아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거의 지쳤고
난 내일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세상이 사라진다.
말더듬이로 살아갈 날조차 남지 않는다.
나는 과거로,
아름다운 사막으로 가고 있다.
실패한 내 호르몬은 과거를 향한다.
과거만이 죽지 않았다.
익숙한 심장소리를 내며
과거 몇개가 행진해온다.
과거는 가장 자유로운 것들을 운반하고
그때 만나는
씨앗 하나 뿌리지 못하고
과거를 맞이하는 자의 환희.
사막 같은 환희.
나의 호르몬은 늘 과거를 향한다.
내일은 죽었고 과거는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