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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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윤 李昭潤

고려대 철학과 4학년. 1995년생.

claraoswin@naver.com

 

 

 

경희 그리고 김지영

 

1. ‘그리고’

 

“공부를 하면 많이 해야겠어요. 그래야 남에게 존대를 받을 뿐 아니라 저도 사람 노릇을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경희는 190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을 살아가는 ‘신여성’이다. 이후 몇십년의 시간이 흘러서 1982년에 태어난 김지영은 더이상 ‘신여성’이라는 말이 새롭지 않지만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어딘가 해방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다. 나혜석의 「경희」(1918)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은 각각 다른 듯 닮은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경희는 자아실현을 위한 삶을 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여성상에 부합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아버지의 말을 거스르는 데 두려움을 보인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 앞에서 내적갈등에 휩싸인다. 김지영은 경희에 비해 제도적인 평등과 문화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삶을 살았으나 여전히 여성으로서 가지는 삶의 선택지는 획기적으로 증가했다고 보기 어렵다. 어딘가 위축되고 혼자서 말하지 못하는 김지영의 모습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경희에 비해 훨씬 소극적이고 무기력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2017년 지금,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대통령 후보가 당선된 지금, 강남역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여성 대상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는 지금, 두 소설이 보여주는 두 여성의 ‘다르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같지만도 않은 삶’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 걸까? 누군가는 “그동안 여성인권이 발전한 게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아무리 해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은 잘 안 바뀐다”라며 자조적인 한탄이 섞인 회의적인 고백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경희와 김지영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 ‘저주’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남자가 태어나서 사랑을 하고 좌절을 하고 이별을 하고 배신하고 배신당하다가 마침내 큰일을 앞두고 쓸쓸히 죽는 결말을 읽으며 사람들은 “왜 역사는 반복될까?”라고 묻지, “왜 저주(혹은 비참한 운명)는 반복될까?”라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가 반복되는 ‘법칙’이나 ‘인과론’을 발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미 죽은 지 500년 된 선비들이 세상 걱정하는 이야기가 현재에도 유효할 때 사람들은 “아이고, 500년 동안 세상 바뀐 거 없다”라며 한숨 쉬는 게 아니라 “역시 이것이야말로 고전이며 인간 보편의 진리다”라고 말한다.

두 여성의 이야기를 읽고 좌절하거나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연결감’1)이다. 시간이 흘러도 반복되는 ‘다른 듯 닮은 삶’이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연결감으로 새로운 이야기들을 써내려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경희와 김지영의 삶은 개별적인 반복도, 개인적인 운명도 아니다. 경희 ‘그리고’ 김지영의 삶을 넘나들고 연결하기 시작할 때 이들의 이야기는 ‘비운의 여성들이 피하지 못한 저주’가 아니라 역사가 되고 문학이 될 수 있다.

 

 

2. 그렇게, 흐른다

 

82년생 김지영』은 1982년부터 2016년까지 김지영이 살아낸 34년간의 시간을 순서대로 펼쳐 보인다. 김지영의 어릴 적부터 초··고 시절, 대학생활, 직장과 결혼까지 생애주기별로 일어나는 인물 외부의 사건들과 인물의 ‘나이 듦’을 연관 지어 보여준다. 반면 「경희」는 경희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선택하게 되는 어떤 하루에 일어나는 인물 내면의 심리적 사건에 집중한다. 즉 『82년생 김지영』이 연쇄적인 사건들과 그 사건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행동과 태도에 집중(관찰자 시점에 해당)한다면 상대적으로 「경희」는 인물들 내면의 심리적 변화와 갈등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경희의 어떤 하루와 김지영의 34년은 서술상 구조와 묘사의 특징의 차이에도 불과하고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흐른다는 것이다. 경희의 의식과 김지영의 시간은 멈추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의 흐름이란 서사의 전개를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 되기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여성이 서사구조 속에서 멈추어 변하지도 않고 고정적이고 이동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사에 다양한 변주를 일으키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희의 자의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따라 이야기의 결말이 달라지고, 김지영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따라 김지영이라는 인물이 만들어진다.

늘 나(남성)만 기다려주는 ‘지고지순한’ 여자친구라든가, 변함없는 아름다움과 젊음을 가진 뮤즈라든가, 언제든지 집에 돌아가면 자식들을 반겨주는 어머니는 이야기 속에서 변하지 않는 고정된 대상으로서 여성이 등장하는 아주 흔한 경우이다. 그래서 적어도 “이 이야기는 여성들의 삶을 보여주려고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든 여성들의 삶이 흐르는 과정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김지영은 늙는다. 나이가 든다. 김지영의 몸도 마음도 변한다. 경희는 생각하고 고민한다. 그 생각은 경희를 움직이게 한다. 경희는 멈춰 있지 않는다. 이동한다. 일본으로 떠나기도 한다. 정희진은 남성이 ‘씨(씨앗)’에 비유하는 담론은 “행위자로서 남성의 이동성, 자유,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여성(어머니-대지-땅)의 본질을 ‘정박성과 불변성’으로 비유하는 이분법을 비판한다.2)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경희와 지영의 흐름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경희와 지영의 세계를 관통함과 동시에 소설 속 개별 사건 이면에서 계속 흐르고 있는 거시적 흐름으로서 남성중심주의와 성차별주의다.

남성중심주의와 성차별주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 젠더권력관계에 근거한 차별과 억압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예를 들어, 경희에게 공부를 관두고 혼인을 치를 것을 요구하는 아버지와 김지영에게 “너는 결혼이나 해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모두 가부장이다. 다만 경희의 아버지가 계급사회의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가부장이었다면 김지영의 아버지는 계급이 해체되고 고용이 불안정한 시대에 태어나서 아내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가부장3)이라고 할 수 있다.

 

 

3. 경계가 흐려지고 원본이 사라질 때

 

한편 김복순은 「경희」의 배경이 되는 남성중심적 시대상을 분석하며 “당시 신여성들을 흠모하고 선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을 천박한 사이비 신여성으로 몰아붙일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던 이러한 남성들의 언술에는 남성에 의해 타자화된 여성 이미지와, 구여성 이미지에 의해 중층적으로 타자화된 신여성 이미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라고 주장한다. 즉, 김복순의 논의에서 구여성이기를 거부한 조선의 여성들은 ‘진정한 신여성/천박한 사이비 신여성’의 대립을 경험한다는 점이 핵심이다.4) ‘구여성/신여성’의 대립구도뿐 아니라 ‘허락받은 신여성과 그렇지 못한 신여성’의 대립구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희가 ‘진정한(허락받은) 신여성’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근대적 가부장제가 도전받고 있는 오늘날 여성들에게서도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지영의 아버지는 ‘계급이 해체되고 고용이 불안정한 시대에 태어나서 아내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가부장’이다. 그러나 김치녀, 맘충, 민폐녀 따위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개념녀 혹은 수퍼우먼이 되고 싶어했던 김은실 팀장의 모습5)은 ‘진정한 신여성’이 되려는 경희와 닮아 있다.

그렇다면 경희와 김지영의 세계를 관통하는 ‘어떤 흐름’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김복순은 식민지남성성과 근대적 가부장제도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6)하지만, 좀더 정교한 접근을 위해 우에노 치즈꼬(上野千鶴子)의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에노 치즈꼬는 “분할하여 통치하라(devide and rule)”라는 언명은 “지배의 철칙”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성혐오의 핵심은 “분단해놓고 서로 대립”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성 입장에서 말하자면 남성에 의한 ‘성녀’와 ‘창녀’의 분단지배”에 해당한다.7) 여성을 ‘성녀 아니면 창녀’로 규정하는 순간 남성 입장에서 통제 불가능한, ‘손에 잡히지 않는’ 여성은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괴물’로 지목하면 사람들은 괴물을 공격하면서 자신은 괴물과 ‘다른’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괴물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못하고 괴물만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남성중심주의와 성차별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타자의 주체성을 억압해온 방식은 여성들 간의 경계를 만들어서 여성들의 연대 가능성을 차단하고 여성 스스로가 자기검열과 자기혐오를 반복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경희가 일본까지 유학을 가서 열심히 배우고 깨달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솔선수범하여 집안일을 하는 등 전통적인 성역할 수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경희의 무의식 속 불안과 두려움을 반영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천박한 사이비 신여성’으로 멸시받지 않으려면 구여성과 남성들 모두로부터 박수를 받는 숭배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여성’은 원본이 따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권력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결국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생물학적 성별로서 섹스’와 ‘사회문화적 성별로서 젠더’의 이분법적 경계조차 해체의 대상으로 놓음으로써 섹스가 원인으로 먼저 존재하고 젠더 개념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섹스라는 개념조차도 이미 사회적 구성물임을 주장하며 ‘섹스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버틀러의 관점을 따르면, 결국 여성성 혹은 남성성의 실체이자 원인으로서 섹스는 없고 다만 젠더를 수행(perform)함으로써 ‘기원 없는 모방’을 통해 정체성이 형성8)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경희가 여전히 전통적인 성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이지 진정한 신여성의 원본이 따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즉 ‘나는 성녀다. 그런 여자들(성녀가 아닌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나는 성녀도 아니고, 창녀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렇다면 애초에 그런 경계와 ‘가짜’ 원본은 누가 만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경계가 흐려지고 원본이 사라질 때, 경희는 더이상 ‘진정한 신여성’이 되기 위해 애쓸 이유가 없어질 것이다.

 

 

4. 빼앗긴 말들을 되찾아오자

 

이처럼 두 소설을 관통하고 연결하는 거시적 흐름으로서 남성중심주의와 성차별주의는 여성혐오의 작동방식을 통해 「경희」와 『82년생 김지영』 곳곳에서 폭로된다. 김지영은 유모차에 아이를 재우고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누렸다는 이유로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라는 소리를 듣거나, 식당에서 강된장을 주문했다는 이유로 “젊은 사람이 강된장을 먹을 줄 아네? 미스 김도 된장녀였어? 허허허허허” 따위의 농담을 들어야 했다.

‘맘충’과 ‘된장녀’ 또한, 여성들에게 ‘기원 없는 모방’을 강요하며 경계를 나누어 여성들 간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자기검열과 자기혐오를 반복하게 하는 ‘상처 주는 말’이다. 상처 주는 말을 들으면 ‘된장녀, 맘충, 김치녀가 되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쓰게 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사실은 실재하지도 않는) 원본에 닿을 수 없는 자신을 탓하고 스스로를 혐오하게 될 수 있다.

김지영은 맘충이라는 말을 듣고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라는 질문을 던진다. 실제로 상처 주는 말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너 왜 나한테 상처 줘?”라고 되받아치는 것9)이다. 상대방이 했던 말을 객관화해서 되묻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다른 국면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김지영의 남편이 그 말을 듣고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마”라는 말만 반복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뒤로 김지영은 “한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김지영은 ‘병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태인 걸까? 김지영의 증상은 분명 당혹스럽고 충격적이긴 하다. 하지만 김지영을 ‘미친 여자’로 규정하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로 받아들이는 순간 ‘정상/비정상’의 경계만 공고해질 뿐이다. 동시에 비정상적인 범주에 대한 혐오와 공포라는 감정만 강화되고 무엇이 그러한 증상을 만들어낸 원인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내가 만일 김지영을 담당하는 주치의였다면 김지영의 상태를 내사적 우울증으로 진단했을 것이다. 권김현영은 내사적 우울증의 기저 원인을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이라고 설명한다.

 

씹지 않고 그냥 삼켜서 계속 목 안에 걸려 있는 느낌을 심리학 용어로 내사(introjection)라고 하는데, 이는 외부의 대상을 내면의 자아체계에 비판 없이 수용하는 심리적 행위이다. 이렇게 경험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정의하고 정립하는 과정이 생략되면 궁극적으로는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수용을 통해 상황에 적응은 하지만 소화되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는 이 ‘내사’ 상태는 사실상 심리적 뇌사 상태이자 소위 여성적 우울증이라고 불리는 증상의 기저 원인이기도 하다.10)

 

김지영은 스스로 질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프다. 김지영의 상처는 말해지지 못하는 상처이기 때문에 아프다. 따라서 김지영에게 필요한 처방은 빼앗긴 언어를 되찾는 것이다. 김고연주는 김지영의 증상이 “목소리를 잃어버린 김지영을 위한 여성들의 연대행위”이며 “김지영의 회복은 곧 김지영을 위해 대신 말해주는 방식의 여성연대의 중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까지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임을 밝히고 있다.11) 나는 빼앗긴 언어를 되찾기 위한 출발은 상처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에게 주고 있는 상처에 이름 붙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무엇이 하면 안 되는 말인지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생기면 부를 수 있다는 것 말고도 실질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낱낱이 흩어진 경험을 한데 모음으로써 보이지 않았던 현상이 가시화되므로,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해결할 단초가 된다는 점입니다. 이제 이름이 없어서 사건마저 지워졌던 과거를 반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름이 생기더라도 그 이름을 붙이는 기준은 계속 논란이 될 것이고 이름이 붙는 것만으로 만사가 단번에 해결되지도 않겠지만, 적어도 혐오범죄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사건이 없다며 개별 사례를 부정하는 상황은 막을 수 있습니다.12)

 

하지만 ‘이름 부르기’는 혼자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함께 말하는 사람들과 그만큼의 듣는 사람이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김지영과 함께 상처에 이름을 붙이고 말하고 설치고 나대야 한다. 그리고 어떤 누군가는 더이상 말하기를 멈추고 듣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예컨대 강남역살인사건을 ‘묻지 마 살인사건’이 아니라 ‘여성혐오범죄’라고 이름붙인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이 사건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의 대상이 된 젠더사이드 범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름 붙이기라는 행위는 ‘잠정적’이다. ‘이것이 혐오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가리키는 상처의 경험뿐만 아니라 그 말 자체도 잠정적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이 변하고 새로운 관점이 개입하면 이름도 바뀔 수 있고, 상처 또한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한편 김지영이 질문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대신 말하기”를 통해 자기를 지키고 있다면, 경희는 스스로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경희가 아버지와의 갈등을 돌파하는 힘은 결국 ‘나의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빼앗긴 언어를 되찾는 과정의 출발이 나의 상처에 이름 붙이기였다면, 그 과정은 나의 이름을 찾아가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상처는 뭐지?’에서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으로 전환될 때, 누구도 대신 말하거나 답해줄 수 없는 질문을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자기혐오와 자기검열에서 벗어나서 나를 둘러싼 타자들과 나(자아)의 경계마저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저것! 저것은 개다. 저것은 꽃이고 저것은 닭이다. 저것은 배나무다. 그리고 저기 매달린 것은 배다. 저 하늘에 뜬 것은 까치다. 저것은 항아리고 저것은 절구다. 이렇게 경희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 명칭을 불러본다. 옆에 놓인 머릿장도 만져본다. 그 위에 개어서 얹은 명주 이불도 쓰다듬어 본다. “그러면 내 명칭은 무엇인가? 사람이지! 꼭 사람이다.”(『경희』, 도디드 2016, 전자책)

 

 

5. 그리고 2017년

 

82년생 김지영』의 마지막 장은 ‘2016년’에서 끝난다. 20세기 초반의 경희가 살던 시간에서 출발해서 약 100년이 흐른 뒤,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는 그해에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2016517일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 ‘여성혐오범죄’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사건이 발생한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포스트잇을 통해 추모와 연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무엇보다 여성들은 슬픔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분노와 용기로 바꾸어 저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었던 경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터져나온 목소리들 중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구호는 여성들이 무기력하고 불쌍한 피해자가 아닌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피해)생존자로서 말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생존자로서 말하기를 하는 이유는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 상처로부터 해방되기 위함이다. 따라서 상처를 바라보고 말하고 들을 때 주의할 점은 생존자의 삶을 상처로 환원하거나 생존자들이 겪은 고통의 크기를 경쟁하고 비교하려 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처와 고통의 경험이 곧 나 자신은 아니듯, 경희와 김지영의 이야기도 차별과 억압, 피해와 고통만으로 환원해서 읽지 않을 때 회의와 좌절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도 요구할 수 있는 태도이다. 대체로 고통받고 억압받은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면 고통의 크기를 강조하거나 상처를 전시하는 방식으로는 미래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으며 그것은 피해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못한 태도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경희와 김지영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들의 이야기를 일반화하거나 보편화하려는 태도 역시 지양해야 한다. ‘보편적인’ 여성의 경험은 곧 여성들 내부의 차이와 이질성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가 김지영이다”라거나, “내가 김지영이다”라는 말은 ‘보편적인 여성의 경험’을 전제하고 있다. 즉 보편적인 여성성과 실체로서 여성의 단일한 ‘우리(=나)’의 경험이 이미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김지영이 비장애인 이성애자 여성으로 경험하는 세상은 보편적인 여성의 경험이 아니다. 김지영이 결혼해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경험은 모든 여성이 공통적으로, 일반적으로 겪게 되는 일이 아니다. 김지영이 동성애자였다면 결혼생활로 인한 상처 이전에 한국사회에서 결혼할 권리가 제도적으로 배제되었을 때 발생하는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지영이 장애여성이었다면 장애여성의 몸이 비장애인여성의 몸과는 어떻게 같으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대상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경희와 김지영의 이야기가 모든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거나 대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이 현실의 모든 측면을 정교하게 이해하고 반영해야만 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다만 문학작품은 더 풍부한 표현으로 더 다양한 이야기들과 삶의 가능성들을 재현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약자를 위한 정치학”임을 인정한다면, 나는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될 수 있으며, ‘다양성’은 우리의 가장 큰 무기가 될 것13)이라는 말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김지영이다”라거나 “내가 김지영이다”라고 말하기보단 더 다양한 버전의 ‘나’들의 이야기가 들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나’들의 이야기가 “같지만도 않고 다르지 만도 않다”14)는 걸 ‘연결’해낼 때 그것은 저주의 반복이 아닌 역사가 되고 여성들의 어떤 순간들은 멈추지 않은 채 그렇게 계속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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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홍미리에 따르면 ‘페미니스트 연결감’이란 세라 아메드의 글(Feminist Attachments,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4)에 등장하는 “attachment”라는 개념에 여성학자 마정윤의 해석이 덧붙여진 말이다. 김홍미리는 “페미니즘에 대한 ‘애착’이 ‘집착’이 되어가고, 더이상 타자들과 연루되려 하지 않을 때 ‘고착’이 일어나며, 이럴수록 우리가 살려내야 할 정동은 ‘연결감’”이라고 주장한다. 즉 ‘연결감’은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기꺼이 넘나들고, 나와 너의 만남을 통해 함께 성장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정동이라 할 수 있다. 김홍미리 「‘페미니즘 고딕체’ 권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법」, 권김현영 외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린비 2017 참조.

2) 정희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남성이 씨라는 주장은 남성만이 인간 형성의 기원(origin)이며 인류의 본질(‘man’kind)이며 생산의 주체라는 것을 은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을 통해 가부장제 사회가 진정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행위자로서 남성의 이동성, 자유, 초월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씨는 싹이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변화를 거듭한다. 씨는 변태(變態)한다. 씨의 기원성, 유동과 변화·발전성에 비해 밭 혹은 땅, ‘어머니의 대지’의 본질은 정박성과 불변성이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13, 59~60면.

3) 김지영의 어머니는 김지영의 아버지에게 “죽집도 내가 하자고 했고, 아파트도 내가 샀어. 애들은 지들이 알아서 잘 큰 거고. 당신 인생 이 정도면 성공한 건 맞는데, 그거 다 당신 공 아니니까 나랑 애들한테 잘하셔”라고 말한다. “그럼, 그럼! 절반은 당신 공이지!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오미숙 여사님!”이라는 아버지의 답변에 대해 어머니는 “절반 좋아하네. 못해도 7대 3이거든? 내가 7, 당신이 3”이라고 되받아친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89면, 이하 강조는 인용자. 작품 인용은 면수만 표기.

4) “이 소설에는 남성/신여성의 기본 대립틀은 물론이요, 구여성/신여성의 이항대립, 그리고 그릇된 신여성/참 신여성의 이항대립도 존재한다.” 김복순 「‘딸의 서사’에 나타난 타자의 이중성: 나혜석의 「경희」를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논총제23호(2001), 22면.

5) “김은실 팀장은 여자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회식 자리에 끝까지 남았고, 야근과 출장도 늘 자원했고, 아이를 낳고도 한 달 만에 출근했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웠는데, 여자 동료와 후배들이 회사를 나갈 때마다 혼란스러웠고, 요즘은 미안하다고 했다. 회식은 사실 대부분 불필요한 자리였고,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 출장은 인원을 보강해야 하는 문제였다. 출산, 육아로 인한 휴가와 휴직도 당연한 것인데 후배들의 권리까지 빼앗은 꼴이 됐다.” 112~13면.

6) “결국 「경희」를 통해 드러나는 근대적 신여성은 조선의 유교적 가부장제가 식민지하 근대적 지식의 힘을 이용하여 새로운 근대적 가부장제를 성립해 가는 가운데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복순, 앞의 글 37면.

7) 우에노 지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2, 53.

8)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2008) 1장에서 “젠더가 성별화된(sexed) 몸이 갖고 있다고 가정되는 문화적 의미라면, 어쨌든 젠더가 섹스에서 따라 나온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분법적 젠더 체계의 전제는 은연중에 젠더가 섹스를 모방하는 관계라는 생각, 그에 따라 젠더는 섹스를 반영하거나, 혹은 섹스의 규제를 받는다는 생각을 안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섹스’라 불리는 이 문화적인 구성물은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될 것이다. 어쩌면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섹스와 젠더는 전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9) 권김현영은 “페미니즘은 약자를 ‘위한’ 정치학이지, 약자가 ‘되자’는 정치학은 아”님을 밝히고, “‘상처받았다’며 발화자의 위치를 피해자로 지정하는 말하기에서 ‘상처 주네?’라고 상대에게 되묻는 말하기로 전환하는 페미니즘 정치학을 제안”한다. 권김현영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다’」,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해제, 문학동네 2017.

10) 권김현영 「질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페미니스트 모먼트』 32~33.

11) 김고연주는 『82년생 김지영』에 실린 작품해설 「우리 모두의 김지영」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김지영의 증상은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하지만 ‘여성혐오 사회’에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김지영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바로 목소리를 잃어버린 김지영을 위한 여성들의 연대행위다. 이 여성들은 김지영을 대신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지영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며 “김지영은 어떻게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김고연주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김지영 혼자만의 몫이 아님을 밝히며 “우리 모두는 김지영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함께 고민할 것”을 촉구한다.

12)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봄알람 2016, 105면.

13) 권김현영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다’」.

14) 고미송은 페미니즘이 “처음에는 ‘차이’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되면서 동일성에 기반한 정체성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을 차이에 대한 강조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동일성을 강조하든 차이를 강조하든 이미 주어진 실체로서 정체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동일성과 차이는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고미송에 따르면,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나온 것이 바로 여성들은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관점이다. 여기서 <동일성 and 차이>, 즉 and의 패러다임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불교의 nor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것이다. 불교의 공사상은 실체성이 허구임을 표현하기 위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즉 <不一不二>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미송 『그대가 보는 적은 그대 자신에 불과하다』, 푸른사상 2010, 56면. 즉, ‘같으면서도 다르다’라고 말할 때는 이미 고정불변한 정체성이 ‘있다’고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여성들 간의 이질성이 고정불변한 정체성에 기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구성되고 구성하는 관계의 산물이라면, 이때 발생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과 차이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심사평

 

평론은 작품에 대한 안목과 해석의 독창성, 비평적 문제의식 등을 필요로 하는 글쓰기 장르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자습(自習)이 가능한 시나 소설 쓰기에 비해 출발 시기가 늦고, 얼마쯤 지적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하기에 대학생들이 접근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감이 있다. 평론을 쓸 때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요즘 유행하는 것’과 ‘대단한 것’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지적 패기와 현학적 객기를 혼동한 끝에 외화내빈(外華內貧) 격의 글로 치닫게 되는 자의식의 과잉 혹은 균형감각의 부족이 아닌가 싶다. 시류와 이론을 덜어낸 비평 자체의 중량이 얼마나 될 것인가를 냉철히 따져보아야 하겠는데, 이는 물론 대학생만이 아닌 모든 비평가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문제다.

 

이런 아쉬움과 기대 속에 총 17편의 응모작 중 본심에서 다룬 작품은 6편이었다. 모두 저마다의 장점과 단점을 가진 평문들이었다. 「테러 시대의 문학: 정지돈 소설론」은 자신감 넘치는 발언과, 정지돈 소설의 이질성을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확대하려는 시도가 눈길을 끌었다. ‘유빙적 타자’라는 개념도 주목할 만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비평적 거리가 부족해 작가에 대한 일방적 옹호로 귀결되어버린 한계가 분명했다. 「오르토스에 대항하여: 백민석 장편 『목화밭 엽기전』」은 논지를 이끌어가는 힘은 있으나 결론 부분의 설득력이 약했다. 백민석 소설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벗어나는 미덕도 찾기 어려웠다.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에게: 최승자 시인과 신영배 시인을 통해 본 여성적 언어의 소통 가능성」은 두 시인의 시적 지향성을 읽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들의 시가 지닌 자기완결성이 진정한 타자와의 관계를 어렵게 하는 지점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부족했다. 많은 여성시인 가운데 두 시인을 비교해야 하는 필연성도 명쾌히 설명하지 못했다. 「“몸속에서 울창해지는” 시옷, 들: 이혜미론」은 꼼꼼한 해설 위주의 글로, 시를 읽어내는 역량은 비교적 탄탄하나 그것이 현재의 문학과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따지는 비평적 작업이 미흡했다.

 

마지막까지 저울질한 두 작품은 모두 조남주의 장편 『82년생 김지영』을 다룬 것이었다. 두 글 모두 우리 사회의 오래고도 예민한 현안인 페미니즘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비평적 결기에 비해 현재 우리 문학의 페미니즘 텍스트와 논의에 대한 시야는 넓지 않은 편이었다. 「김지영의 팩트체크: 2017년, ‘우리’만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버지니아 울프를 경유해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 형식에서 현재 한국 여성에게 강요되는 삶의 형식을 읽어낸다. 내용과 별개로 소설의 형식 자체에서 여성에게 억압적으로 체화되어 있는 삶의 방식과 글쓰기 방식을 읽어내는 시선이 예리하다. 그러나 울프의 『자기만의 방』(1929)이 소설이 아닌 자전적 에세이라는 점, 현재의 페미니즘문학 논의에서 울프의 에세이는 비평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점, 문학작품은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현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경희 그리고 김지영」은 페미니즘 이론을 적용해 작품을 해석하는 강점과 한계를 보여준다. 작품이 이론에 끌려가는 측면이 있지만, 1세기의 시차가 있는 나혜석과 조남주를 맞세워 “경희의 어떤 하루와 김지영의 34년”을 ‘말하기 방식’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장면들은 독창적이고도 인상적이다.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 기대어 성녀도 창녀도 아니고 섹스도 젠더도 아니며 타자도 자아도 아닌, 즉 “같지만도 다르지만도 않은” 경계성의 주체와 정치를 피력하는 논리의 흐름도 안정적이다. 앞으로 좋은 평론가로 성장하기를 빌며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미래의 가능성을 계속 열어두고 있는 모든 응모자들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김수이 한기욱

 

 

 

당선소감

 

사실 공모전 준비하는 동안 한가지 가장 후회되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할머니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할머니는 늘 저를 위해 기도를 열심히 해주셨는데 아마 하늘에서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할머니한테 너무 미안하고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저의 그 후회 때문에 글을 다 쓸 수 있을지 쓸 자격이 있는 건지 의심하고 고민할 때마다 저를 응원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글쓰기와 삶의 실천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걸 알려준 나의 작가 나의 엄마 홍준희에게 감사합니다. 저에게 『경희』라는 책을 처음 알려주고 제가 힘들 때마다 기댈 수 있게 해준 기훈이에게도 너무 감사합니다. 또한 계속 글을 쓰라고 응원해주고 아낌없이 격려를 보내고 서로가 약속했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오늘도 애쓰고 있는 윤리와 남선에게 매일매일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쓰는 글들을 언제나 정말 정확하게 읽어주고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알려준 가연이에게 너무 고마워요.

 

인식론이자 학문으로서 페미니즘 지식과 개념으로서 젠더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제가 2학년 때 들었던 교양수업에서 버틀러를 배우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수업 이후로 늘 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들어주시고 먼저 말을 걸어주신 강경덕 교수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힘들고 속상한 얘기나 고민이 아니라 기쁜 소식을 들려드리게 되어서 저도 기뻐요.

그리고 심사평에는 제가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 기대어 글을 쓰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 저는 그 책의 본문보다 해제를 더 많이 참고하고 인용했습니다. 그 글을 쓰신 분은 권김현영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어떻게 여성 내부의 차이를 견디며 토론의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일지, “상처받았다”라는 말하기를 “상처 주네”로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제 글이 아무리 독창적이라고 평가받았더라도 결코 독자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적일 수 없다는 말은 제가 이 글을 쓰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실 제 글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는 참고문헌입니다. 참고문헌에 나와 있는 모든 분들에게 저는 영향을 받았고 빚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의 글은 결코 독자적인 목소리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제 일상 속에서 저의 ‘참조그룹’이 되어준 친구들도 넓은 의미에서 제 삶의 참고문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이 상은 저의 참고문헌이 되어주신 모든 이름에게 바치는 상이기도 합니다.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밤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오래 기다릴게. 반드시 너를 찾을게. 보이지 않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라는 아이유의 노래 「이름에게」의 가사처럼 조용히 잊혀진 모든 이름에게 말을 걸어 말하게 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소윤

이소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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