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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문학이라는 커먼즈

 

페미니즘과 공공의 삶, 그리고 문학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1. 페미니즘과 문학의 공공성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은 페미니즘 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오래된 표어이면서 현재적으로 많은 함의를 머금은 말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온 페미니즘의 실천적 논의들은 강남역 살인사건,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건, 그리고 촛불혁명을 거치며 여러가지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세계적으로 확산된 미투운동을 배경으로 사회 각계에서 성폭력과 차별에 대한 적극적인 공론화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역시 주목할 지점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구조적인 차별과 혐오 및 폭력의 문제를 공론장에서 제기하는 적극적인 행동 속에서 그동안 개인의 사생활 문제로 치부되었던 여러 종류의 불평등한 관계들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처럼 페미니즘의 주제는 개인의 일상적 관계들이 궁극적으로는 정당한 권리와 자유를 위한 공공적인 질문들에 열려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페미니즘의 문화적인 확산은 출판과 강연, 학술과 교육의 공론장에서도 뚜렷하게 감지된다. 현재 이들 분야에서 페미니즘은 뜨거운 관심을 모으는 대중적 주제이다.1 최근 제기된 초·중·고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 역시 교육현실에서 일상화된 성적 비하와 약자 혐오의 문제에 대응하려는 시민들의 적극적 의지를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이라는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두루 공유되었다는 점은 새삼 반갑게 다가온다. 국민청원에 대한 정부의 답변 역시 페미니즘 교육이 근본적으로는 인권교육의 맥락에 서 있음을 살피며 “여성뿐 아니라 종교, 장애, 나이, 인종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적 표현은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 차이를 인정하는 인권문제를 바탕으로 접근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2

캐롤 페이트먼(Carole Pateman)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의 문제야말로 거의 두세기에 걸쳐 여성주의적 글쓰기와 정치투쟁에서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3 근대적 가부장제의 이분법적 인식틀은 정치적 공공성의 영역에 계급, 성별, 인종과 관련된 무수한 차별과 배제를 기입해왔다. 김영희(金英姬)는 이성적 존재로서 보편적 개인을 정의하는 자본주의 근대 특유의 논리가 특정한 주체를 이성적 존재로 호명하는 차이 내지 차별의 논리를 필수적으로 요청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4 젠더 문제가 작동하는 가족, 개인의 일상적 삶은 흔히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는데 이러한 논리 자체가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가부장적·제국주의적 근대체제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백영경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공적인 것, 공공성의 논의가 젠더 문제를 주요하게 다루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공(), 공(), 사() 영역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커먼즈(commons) 논의를 통해 국가나 특정한 조직과 공동체의 과제로만 제한되어 있던 젠더 문제 및 돌봄의 위기 현상을 돌파하기를 모색한다.5 공유지, 공유재, 공동자원으로 번역될 수 있는 커먼즈에 대한 적극적 해석은 여성 문제의 일부가 가족이나 사적인 차원으로 귀속되어 설명될 수 없다는 의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각한 시민들이 스스로의 삶과 위협에 놓인 자신들의 자원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책임지겠다는 비전”6을 실천하는 과정을 강조한다.

문학예술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소통의 형식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공공성(publicness)을 추구한다. 예술과 정치는 공공성, 혹은 공공 영역에서 근본적으로 만나며, 문학은 작품이라는 언어예술을 통해 삶의 문제를 포착함으로써 공공성의 가치를 묻고 구현한다. 물론 문학예술의 공공성을 논의할 때 다른 분야의 그것과 차별되는 지점 역시 짚어둘 필요가 있다. 예술 영역에서 공공성을 사유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공의 이익이나 공공의 가치, 공공 영역, 공공재 등과 같이 다른 용어나 개념에 내재하는 속성”7으로 제한되어 사용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국가나 제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적 지원 영역의 문제, 공적 지원을 받은 대상들이 그 활동에서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논의, 제도적 검열의 문제, 매체의 혁신성 등의 문제로만 공공성의 개념과 범위를 제한한다면, 예술작품의 가치평가와 구체적인 실현 문제는 추상적인 당위의 확인에 머무르기 쉽다.8 문학작품이 공공성에 기여하는 방식은 사회적 담론의 형식과 다른 층위에서 작동한다. 작품에 들어오는 사회적인 기록 역시 사물과 세계를 인식하는 특정한 문학의 형식과 관점을 통해 조직된다. 페미니즘을 다룬 문학작품의 예만 들더라도 폭력과 차별의 현실을 고발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여성과 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폭력의 문제는 별도의 주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의 삶 속에서 탐구될 때 깊은 감동을 주게 된다. 뛰어난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은 계급과 젠더와 인종을 가로지르는 복잡다단한 삶의 양상 속에서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게 함으로써 공공성의 주제와 연결된다.

더불어 문학과 연관된 공공성과 커먼즈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개방성을 지향하면서도 특정한 배제와 주변화의 힘 역시 갖고 있음을 거듭 환기할 필요가 있다. 커먼즈론에서도 지적되듯이 문화적·지적 자원들은 다른 자연자원처럼 희소성과 전용의 원리에 제한받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진부하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남용될 우려도 있다.9 사회 제반 문제뿐 아니라 문학의 영역에서도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공동의 것을 새로 만들어나가는 노력”10이 절실히 필요한 셈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공공성과 커먼즈의 논의가 열어 보이는 비평적 시야를 참조하면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여성의 삶과 시민의 삶, 문학작품에 존재하는 젠더의 신호를 해석하는 문제, 최근의 페미니즘 서사가 직면한 고민과 과제를 차례로 탐색하고자 한다.

 

 

2. 여성의 삶과 시민의 삶

 

근대 가부장제 가족구조 속에서 여성이 자신의 주변부적 위치를 자각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방식으로 ‘시민’의 권리와 책임을 깨닫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은 문학에서 중요한 주제다. 박완서의 단편 「조그만 체험기」(1976)는 이와 연관하여 평범한 주부로서의 여성의 자리가 시민으로서의 삶과 연동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알려주는 텍스트이다. 1970년대 개발독재 시대를 배경으로 공권력의 부정부패 현실과 물신주의를 날카롭게 풍자한 이 작품은 사소한 일상에서 출발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번져가는 박완서 소설 특유의 스토리텔링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금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주인공 ‘나’는 남편이 느닷없이 검찰청 수사과에서 나온 형사하고 같이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검찰청으로 허겁지겁 찾아간다. 전기용품상을 운영하는 남편은 주위로부터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평을 듣던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검찰청 앞에 도착한 ‘나’는 자신처럼 “피의자 대기실 주변의 맨땅에 뙤약볕을 무릅쓰고 파김치처럼 늘어져”11 식구를 기다리는 무수한 여인들을 만나게 된다. 교도관 및 감시꾼은 피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밖에서 기다리는 여성들에게 혹독한 구박과 욕설을 퍼붓는다.

소설은 특혜와 부정을 통해서라도 남편을 감옥에서 구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하고 현실을 자각하기에 이르는 주인공의 심리적 요동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나’는 한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주부이기도 하지만 작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개별성을 지닌 인물이다. “작가랍시고 언론의 자유니 표현의 자유니 하는 문제로 제법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진” 적이 있던 그였지만 “서방은 저녁에 계집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계집은 서방을 맞아 바가지 긁을 자유만 있으면 됐지 그 이상의 자유가 무슨 소용이라 싶”은 체념과 원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106면) 불안한 마음에 “이럴 때 돌봐줄 유력한 빽줄”(94면)을 동원해 남편을 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녀가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억울함’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면서이다. 피의자 옥바라지로 모여든 “맨 억울한 사람들”(110면)을 만나면서 주인공이 새삼 깨달은 것은 “어떤 세도가나 권력자에게도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내 나름의 오만”(109면)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여러가지 갈등 끝에 ‘나’는 불법적 방식을 포기하고 변호사 위임도 취소한 채 다른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재판을 치른다.

일상적 현실과 촘촘히 얽혀 있는 공적 평등과 윤리의 문제를 실감나게 다룬 이 소설은 한 가정의 주부이자, 소시민이자 지식인으로서 체험한 ‘억울한 일’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비교되는가를 깊이있게 파헤친다. 주인공이 뼈저리게 느끼는 공정한 법에 대한 갈망과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자각은 지식인이면서 작가라는 입장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한 가정의 주부로서 절실하게 매개되고 공감하게 되는 ‘체험기’는 ‘여편네’로 업신여겨지던 사람들이 정당하게 느끼고 항의하는, 법과 평등의 문제를 생생하게 담아낸다. 그런 점에서 ‘조그만 체험기’라는 제목은 전혀 조그만 것이 아닌, 일상현실 속에 새겨진 공공적인 문제들의 엄숙한 무게를 역설적으로 전달한다.

더불어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모든 개인이 예외없이 똑같은 조건을 보장받는 것은 평등의 진정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입장을 ‘억울한 사람’으로만 단순화하지 않는다. 그녀는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체감하는 억울함과 자신의 감정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직시한다. “자기나 자기 가족에 대한 편애나 근시안에서 우러나는 엄살로서의 억울함에는 그래도 소리가 있지만,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숙명처럼 보장된 진짜 억울함에는 더군다나 소리가 없다. 다만 안으로 안으로 삼킨 비명과 탄식이 고운 피부에 검버섯이 되어 피어나기도 하고, 독한 한숨으로 피어나기도 하고, 마지막엔 원한이 되어 공기 중에 떠 있을지도 모른”(116면)다는 냉엄한 관찰을 잊지 않는 것이다. 지식인이자 소시민으로서 자기가 느끼는 억울함과 이기심을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한편으로 거기서 더 나아가 법 앞에서 다같이 평등해진다는 의미를 되묻는 이 소설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각하는 책임과 권리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한다. 소설은 부패와 비리로 가득한 재판 현실을 보면서도 다시금 평등한 주체로서 법 앞에 서고자 하는 시민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상과 정치,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연동되는가를 예민하게 형상화한 이 작품은 문학에서 요청되는 페미니즘의 시선이 얼마나 세심하고 깊어져야 하는가를 암시적으로 일러준다. 개별 존재들의 존엄성이 인정받는 평등한 삶을 위한 노력은 단순히 제도를 철폐하거나 초월하는 방식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현실의 적응과 극복은 불가피하게 당면한 현실의 압력을 견뎌내는 제도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이중적으로 수행된다. 그런 점에서 김영희가 지적한 대로 근대체제 속의 “여성은 단순히 노동하는 자로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가정주부’ ‘어머니’로서도 이미 근대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김영희의 강조대로 지배적인 근대인 개념에 비추면 여성은 근대적 주체라는 특정한 근대성에 미달하지만, 적응을 하든 못하든 이미 근대인으로 살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 주체이다. 근대에 쉽게 안착할 길도 없고, 그렇다고 근대를 쉽게 건너뛰거나 초월할 길도 열려 있지 않은 여성에게 근대는 “그 모순적 ‘본질’을 한결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12

 

 

3. ‘젠더’의 신호를 읽는다는 것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가 면밀히 얽힌 여성의 삶에 대한 박완서 소설의 통찰은 최근 소설들이 다루는 젠더의 테마를 들여다보는 실마리가 되어준다. 일상에서 시민의 공정한 삶을 살려는 노력들은 젠더 문제의식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최근 몇년간의 페미니즘 서사는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의 목소리를 전면적으로 부각함으로써 뚜렷한 주제의식을 드러내왔다. 사회적 약자들이 당면한 (성)폭력과 차별, 배제의 경험은 격렬한 증언과 고발의 형식으로 작품에 스며들어 독자들에게 강한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권김현영이 지적한 대로 최근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다루는 페미니즘 인식론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 이후 피해자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하는 교착상태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법 담론 중심의 피해자 권리 담론이 문제를 다시 개인적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현실, ‘피해자중심주의’라는 새로운 도덕주의의 부상, 소수자와 약자 혐오현상 심화의 문제점으로 드러나고 있다.13 심진경 역시 최근 페미니즘 서사에서 드러나는 ‘피해자중심주의’와 ‘페미니스트 신원조회’로 집중되는 관습적인 재현의 방식이 서술 주체를 재현 대상과 동일시하는 한계를 보여주며 “여성혐오 논리의 전도된 거울상이 돼버릴 위험”성을 지적한다.14

가까운 사례로 대중적으로 화제가 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만 하더라도, 작품의 성취 평가와 더불어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맥락에 대해 다양한 관점의 토론과 비평적 논의가 행해진 바 있다.15 주인공 김지영이 ‘여성’으로서 살아온 과정에서 겪은 불평등과 차별, 혐오의 문제에 공감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이 다루는 육아와 돌봄의 문제, 사회적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느끼는 심리적 박탈의 문제는 2000년대 이후의 여성서사들이 결여해온 중요한 소재적 공백을 짚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신문기사나 통계자료, 단평에 제한되는 내적 독백에 의존하여 구성되는 단조로운 인물의 형상화는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삶에 대한 심화된 성찰을 전달하기에는 아쉬움을 준다. 정신과 의사의 관찰기로 구성된 소설의 액자 구조도 인물의 시점과 발언을 감싸기에는 헐거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라면 으레 공감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그려지는 ‘평균적’이고 ‘일반적’인 삶이나 인물 모형은 서사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다양한 세부의 결을 지닌 여성적 삶을 ‘보통 여성의 삶’이라고 짐작되는 특정한 모형으로 단순화하는 과정은 창작과 독서에서 모두 상상력을 제한한다.16

페미니즘 비평에서 작품이 보내는 젠더의 신호를 읽는다는 것은 고정된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체성으로 간주되는 관습적 형상화들을 깨나가며 살아 있는 현실을 발견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것은 사회적 주제들의 발화 형식에 대한 비평적인 가치평가와 더불어 서사 관습 속에 잠겨 있는 젠더적 신호들의 다양한 양태를 파악하는 작업과 맞물린다. 한 예로 황정은의 「양의 미래」(『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는 한 인물의 내면적 갈등을 통해 공동체의 윤리 문제를 내밀하게 묻는 작품인 동시에 젠더적 관점에서 읽어낼 부분이 적지 않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수수께끼 같은 이 소설의 제목부터 살펴보면 ‘양’은 여성을 향한 지칭으로, ‘아랫사람을 조금 높여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다. 소설에서 ‘양’은 끊임없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아가씨’라는 명명과도 연관된다. 다른 맥락으로 등장하는 ‘양’의 의미도 무심하게 지나치기는 어렵다. “매일 엄청난 양의 물건을 계산대 위에서 끌어당기거나 밀쳤고 엄청난 양의 사람들을 계산대 바깥으로 서둘러 내보”(42면)내는 노동에 지쳐 온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주인공의 상태를 ‘양’이라는 단어가 반영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쉬지 않고 일해온 ‘나’는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무기력한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가장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묵묵히 어머니를 돌보는 아버지. 남성성이 완전히 사라진 듯한 모습으로, 아버지라기보다는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집안 살림을 하는 왜소한 체구의 아버지”(45면)는 나에게 깊은 부담이 된다. 새로 구한 서점 일자리에서 ‘나’는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는데, 사랑과 위무로 시작된 관계는 지친 일상 속에서 어느덧 무감각한 관계가 되어간다. 섹스 역시 어느 순간, 감각이 마비된 상태에서 습관처럼 이루어진다.

 

나는 밤이 깊어서야 가방에 두꺼운 영수증 묶음을 넣은 채로 호재를 만나러 갔다. 호재는 모텔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을 새우다시피 일한 뒤라서 나는 호재가 내 위에 있는 동안 깜박깜박 졸았다. 어느 순간 호재가 멈췄고 호재의 턱인가 어딘가에 맺혔던 땀방울이 내 입으로 떨어졌다. 나는 놀라서 눈을 떴다. 뱃속에 퍼지는 한줌 온기를 느꼈는데 그 느낌이 몹시 섬뜩했다. 나는 호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하지 마.

하지 마, 라고 하면서 호재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는 동안 호재는 멍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46~47면)

 

‘나’를 둘러싼 가족환경의 폭력적 현실은 바깥세계에서 겪는 노동의 고단함, 무시와 경멸과 얽혀 있다. 아픈 어머니와 그를 간호하는 아버지는 어떤 변명도 없이 “숨을 죽이고”(43면) 주인공의 생계노동 위에 얹혀 있음으로써 나의 삶을 황막하게 만든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에서 온전한 사랑과 소통 역시 꿈꿀 형편이 못 된다. ‘나’가 호재와 섹스하는 도중에 소스라치듯 느낀 “한줌 온기”는 무감각해진 일상의 그 어떤 국면을 일깨운다. 피곤하여 졸면서도 섹스를 거절하지 못했던 그 순간 내뱉은 “하지 마”라는 대사는 폭력적 일상에 어느새 길들여져 있는 무심한 삶을 뒤흔드는 날카로운 외침을 담고 있다.

「양의 미래」에서 “멍한 눈길”(48면)이 되어 끔찍한 존재로 사물화되는 인물들의 모습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서점에서 함께 일하던 재오는 “소중하거나 두려운 것이 없다는 듯 피복된 전선에 아무렇게나 손을 대는 둔감함, 어떤 마비 상태”(49면)를 보여준다. 서점에 딸린 지하실 창고에서 습관처럼 매일 점심을 먹어야 하는 서점 직원들의 피폐한 일상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젠더의 층위는 주인공의 가족적 현실과 일터의 만남, 그리고 우연히 한 소녀의 실종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증언자가 되어버린 상황까지 깊게 스며들어 있다. 실종된 딸 진주 때문에 땡볕에 엎드려 “묵은 곡식 같은 살냄새”(59면)가 나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진주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의 삶과 더이상 무관할 수 없는 소녀의 실종사건을 깊게 체감하게 된다.

“비정한 목격자”이자,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그때 무얼 하고 있었느냐”라는 냉엄한 질문 앞에 마주 서게 된다. 별생각 없이 매일 내려가 밥을 먹던 서점의 지하실 창고에서 하나의 “터널”(56~57면)을 상상하게 된 것도 그 이후부터이다. 창고 안에서 불어오는 알 수 없는 바람은 그녀에게 생생한 감각을 환기한다. 소녀 진주는 실종된 채로 돌아오지 않고 주인공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을 나와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사람들 틈에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61면) 삶은 변함없이 지속되는 듯 보이지만 진주의 실종은 그녀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다. 소설은 가족적·사회적 폭력과 억압에 노출된 여성 개인의 일상을 서늘한 풍경으로 포착하여 보여준다. 주인공이 평소에 여성이자 사회적 약자로서 겪는 차별과 폭력은 소녀의 실종을 목격하는 사건을 통해 주인공의 내면에 변화를 남긴다. 뼈아픈 현실은 “아무도 없고 가난하다면 아이 같은 건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아무도 없고 가난한 채로 죽어”(61면)라는, 여성으로서 겪은 고통이 고스란히 주인공의 내면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잊지 않으면서, 누구나 바라보고 함께 고민하는 세계의 가능성을 찬찬히 응시한다. 이렇듯 각자의 차이를 기반으로 한 공동의 삶에 대한 탐색이야말로 문학적인 공공성의 의미와 맞닿는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에게 그 어떤 목소리보다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고 해본 적이 없다.”(62면)

한강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에서도 타자와의 소통 문제는 젠더의 층위를 통과하며 세밀하게 다루어진다. 기억과 애도, 고통과 구원이라는 근원적 주제를 투시하는 이 작품은 성차별적인 고용현실에서 빚어지는 인간관계의 갈등을 포착함으로써 서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남성과 여성,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서 각자의 정체성에 매인 인물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어떤 방식으로 타자와 소통하는가의 문제가 깊이있게 다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이 배경으로 다루는 여성차별의 고용현실은 소재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청탁받은 희곡 각색 작업을 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주인공 ‘나’에게 깊은 밤 임선배의 유령이 찾아온다. 오래전 그와 경주 언니, ‘나’는 한 직장에서 만난 사이인데 ‘나’가 입사할 무렵 결혼한 여성을 무조건 퇴사시키는 사내 규율에 반대하는 사원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부당한 현실에 적극적인 저항을 보인 경주 언니는 다소 방관적이었던 임선배와 격하게 충돌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입장이 된다. 임선배와 경주 언니의 서먹한 사이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세명 모두 직장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주 언니의 사고사와 임선배의 병사 소식이 전해져온 후 ‘나’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죄의식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이다.

경주 언니를 매일 생각하던 ‘나’에게 임선배의 유령이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임선배의 유령은 어쩌면 주인공이 안간힘을 다해 불러낸 기억과 환영일 수도 있다. 이 작품에 은밀히 작동하는 로맨스 플롯은 진부한 클리셰에 그치지 않는 흥미로운 서사적 긴장을 준다. 소설은 직장에 다닐 때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임선배와 ‘나’ 사이에 존재했을 우정과 호감을 섬세하게 그려간다. 유령과의 대화를 통해 차츰 풀려가는 기억의 실꾸러미는 유령으로 찾아온 자, 살아남은 자, 죽은 자 세명이 각각 안고 있는 마음의 빚을 서로 다른 결로 그려나간다. 경주 언니와 ‘나’, 임선배가 함께 경험했던, 정의와 평등을 둘러싼 개인들의 갈등과 고통은 각자의 내면에서 ‘재미없는 이야기’로 간직된다. 그러나 남들에게는 사소하고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재미없는 이야기’는 임선배와 ‘나’, 경주 언니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고민하는 현실의 자리와 연관된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현재의 ‘나’는 자신만이 ‘고통의 바깥’에 남겨졌다는 죄의식을 느낀다. 주인공의 자의식은 타자의 고통을 얼마나 체감할 수 있는가에 대한 힘겨운 고민을 담아낸다. 결국 임선배의 유령이 깊은 밤 나를 찾아와 선사한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의 짧은 시간이 주는 평화는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는 고통의 공유와 극복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황정은의 「양의 미래」와 한강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서 공동체와 개인의 문제는 젠더의 층위를 통과하며 섬세하게 주조된다. 친족성폭력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자음과모음』 2016년 봄호) 역시 자칫하면 소재주의로 함몰될 수 있는 극적 사건을 고유한 서사장치로 포착한 작품으로 기억할 만하다. 우애령의 「정혜」(『정혜』, 하늘재 2005)가 친족성폭력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고립되어 있는 내향적 여성의 모습을 찬찬히 그려나갔다면 최은미의 소설은 폭력의 기억을 계속 마주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여성현실을 더욱 냉엄한 방식으로 부각한다.

어린 시절 삼촌 강중식에게 성추행을 당한 강윤희는 몸과 마음에 새겨진 폭력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소설은 폭력이 한 개인에게 남긴 깊은 상처가 일상과 가족현실 구석구석 스며들어 축적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강중식은 사업이 기울고 아들이 암에 걸린 현재의 불행 앞에서 지난날 강윤희에게 저질렀던 폭력을 돌이켜본다. 그러나 “……다 내 잘못이다”라는 그의 고백은 “손가락밖에는 안 넣었다”라는 하소연으로 강윤희를 어이없게 한다.(135면) 가해자의 무심한 폭력과 뻔뻔스러움, 그것이 은폐되는 국면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강윤희를 둘러싼 일상적 가족관계 역시 녹록지 않음을 실감하게 한다. 그녀는 딸을 키우면서 자신이 겪은 폭력의 트라우마를 끊임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고, 섹스와 피임 문제에서도 남성주도적인 현실의 폭력성을 견뎌야 한다. 소설은 이 삼엄한 폭력적 현실의 순환을 포착하면서도 병에 걸린 민서가 건네는 소통의 몸짓을 외면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아이들과 함께 흑미를 부어 ‘눈으로 만든 사람’은 이 고통스러운 현실의 무게 속에서도 눌리지 않는 삶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어떤 낭만이나 환상 없이 폭력적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이 소설은 죄와 벌, 피해와 가해의 순환을 깨고 ‘살아 있는’ 여성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성취 역시 단순히 성폭력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자’로서 버텨온 주인공이 현재 견디고 넘어서려는 가족적인 현실의 문제를 서늘하게 포착하는 과정에서 확인된다.

 

4. ‘다시 읽는’ 페미니즘 서사

 

초창기 페미니즘 문화실천을 주도했던 글쓰기 작업 중의 하나는 ‘동화 재해석’과 ‘다시 쓰기’의 실험이었다. 한 예로 이링 페처(Iring Fetscher)의 『누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깨웠는가』(이진우 옮김, 철학과현실사 1991)는 90년대 동화 다시 쓰기의 붐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저작이다.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 속에 당대 민중을 억압하는 어떤 금기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가를 신랄하게 파헤친 이 책은 당시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동화를 재구성하는 좋은 교본이 되기도 했다. 이링 페처가 각색한 동화들 속에서 백설공주는 반란군에 가세하여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신데렐라는 부엌데기들의 연대를 도모하여 조직된 노동 공동체를 만든다. 이들은 왕자의 청혼을 당당하게 거절하고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존중받는 미지의 땅으로 떠난다. 이처럼 대안문화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 독서실천이 시도한 정전 해체는 관습적인 독서에 잠겨 있는 성차별과 왜곡된 체험을 돌아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저항적인 독서’와 다시 쓰기가 매달렸던 ‘정치적 올바름’이 가져온 도식성의 문제는 페미니즘 서사가 극복해야 할 새로운 과제가 되고 있다. 오늘의 페미니즘 서사는 결말을 바꾸거나 스토리를 바꾸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 젠더갈등의 복잡한 지점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미셸 오슬로(Michel Ocelot)의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Princes Et Princesses, 1999)가 시도하는 정전 해체는 좀더 섬세한 방식으로 성차의 문제에 접근한 현대적 해석을 보여준다. 마법에 걸린 동화 속 왕자와 공주는 키스를 하면서 수많은 동물로 변신한다. 인간의 모습을 되찾고 싶어 여러번의 키스를 거듭한 왕자와 공주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것은 성별이 바뀐 모습이다. 인간으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성별이 바뀐 현실에서 왕자는 공주보다 훨씬 더 슬퍼한다. 여러 동물의 모습을 거쳐 각자가 마주 보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로 돌아온다는 발상도 흥미롭지만, 익숙하지 않은 각자의 신체에 대해 불평하면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 속에서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결말 자체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오늘날의 페미니즘 서사는 이 스토리에 훨씬 더 발랄한 상상력을 개입시킬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아닌 그 무엇,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든 사물이든, 어떤 성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다채로운 버전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페미니즘 서사에서 여성으로서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의 과정은 바람직한 인물과 긍정적인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다양한 시도들을 거쳐왔다. 80년대 사회현실과 여성문학의 긴밀한 관계를 논할 때 다가왔던 주문 중의 하나는 ‘여성해방문학’이 보여주어야 할 ‘여성 노동자계급의 관점’이었다. ‘여성’과 ‘계급’의 문제가 어떻게 긴밀하게 연관되는가를 탐구하려는 노력들은 90년대의 다양한 해체주의 담론 및 여성문학의 활황기 속에서 개인을 압박하는 코드처럼 오해되고 왜곡되기도 했다. 의도와는 달리 실제비평에서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재현되는가의 문제보다는 작품이 실현해 보여야 할 참다운 인간상, 혹은 올바른 여성해방의식에 대한 관념적 이상을 피력하는 데 치우친 경우들도 적지 않았다. 여성과 계급, 노동의 문제를 주시하는 이러한 관점들이 90년대 중산층 여성의 삶, 속물의 문제, 도시적 삶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점에서 변화한 현실에 대한 유연한 분석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것은 오늘날 쇄신해야 할 비평적 과제로 되돌아왔다. 9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 서사에서 여성문제를 사회문제와는 독립된 자율적 영역으로 진단하려는 과잉된 문화주의의 흐름이 필요 이상으로 강화되었던 것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민족, 계급, 성차의 관련성을 염두에 둔 80년대의 비평 논의, 그리고 여성성, 여성적 글쓰기의 미학성을 발견하는 90년대의 논의들을 거쳐 2000년대 이후 성차 허물기와 탈근대 이론들이 쉼없이 교차해오면서 페미니즘 서사와 비평담론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실천적 동력을 요구받고 있다. 지금은 여성문학이론의 과잉담론화와 텍스트주의에 경사된 현실을 쇄신하는 새로운 공공적 성찰의 계기가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각자의 삶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폭력의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공공의 것으로 가시화하고 형상화할지에 대한 근본적이고 치열한 고민을 필요로 하는 문학적 작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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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투’ 확산에 페미니즘 출판·전시 꽃 피우다」, 노컷뉴스 2018.2.8 참고.
  2. 「靑, ‘초중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 답변 살펴보니…」, 뉴스웨이 2018.2.27.
  3. 캐롤 페이트먼 『여자들의 무질서』, 이평화·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18, 189면.
  4. 김영희 「페미니즘과 근대성」,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 창비 2009, 122~23면.
  5.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3면. 이 글에서 공공성과 공동체, 커먼즈의 개념적 논의에 대해 참고할 수 있다.
  6. Thomas Allan, “Beyond Efficiency: Care and the Commons," 같은 글 30면에서 재인용.
  7. 김세훈 외 『공공성』, 미메시스 2008, 9면.
  8. 2015~17년 문학 영역에서 부각된 공공성의 주제 역시 문학권력과 출판사 상업주의 비판, 예술인 지원 문제, 매체 혁신 논의에 제한되어 다루어진 측면이 크다.
  9. 데이비드 하비 「커먼즈의 미래: 사유재산권을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58~59면.
  10. 백영경, 앞의 글 27면.
  11. 『조그만 체험기: 박완서 단편소설전집 2』, 문학동네 1999, 93면.
  12. 김영희, 앞의 글 136~37면.
  13. 권김현영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28~29면.
  14. 심진경 「새로운 페미니즘서사의 정치학을 위하여」, 『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 56면.
  15. 이 소설을 둘러싼 일부 비평적 논의는 정치적 올바름과 예술의 자율성을 대립시키는 구도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학성과 정치성, 메시지와 형식을 대립시키는 논의 구도는 작품의 의미를 충분히 토론하기 어렵게 한다.(졸고 「문학과 삶, 그리고 비평의 자리」, 『포지션』 2017년 가을호 126면) 관련 평문으로는 조강석 「메시지의 전경화와 소설의 ‘실효성’: 정치적·윤리적 올바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단상」, 『문장웹진』 2017.4.1; 조연정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 『문장웹진』 2017.8.10; 박숙자 「‘세월호 이후’, 증언으로서의 문학」, 『문학의오늘』 2017년 가을호; 김영찬 「비평은 없다」, 『쓺』 2017년 하권 참고.
  16. 리타 펠스키는 “여성이라면 한결같이 공통된 심리와 공통된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너무 쉽게, 너무 편리하게 가정”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 비평의 역사가 도전해온 중요한 장벽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여성독자가 자명한 개념으로 간주되기 힘들어진 시점에서 독자의 세분화된 정체성을 규명해보려는 페미니즘 비평의 다양한 시도들을 존중하면서도, 독자 모형에 따라 독서경험을 제한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독서의 다양한 기능과 측면을 자기인정이라는 단일한 요소로 축소시킬 수 있음 역시 경계한다. 리타 펠스키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이은경 옮김, 여이연 2010, 74~7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