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 문학이라는 커먼즈
공-동적 사건의 비평을 위하여
문학이라는 커먼즈와 비평의 문제
최진석 崔眞碩
문학평론가. 저서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역서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등이 있음. vizario@gmail.com
1. ‘커먼즈’라는 문제설정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문학이 소수 엘리트의 손에 독점된 대상이 아니라 대중 전체를 향해 열려 있는 공적 자원이라는 주장에, 곧 문학은 공공의 것(the public)이자 공통의 것(the commons)이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이 진술은 선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으며 의제화된 당위로서 우리의 동의를 요청할 뿐이다. 긴 역사를 통해 문학이 온전히 대중의 것으로서, 대중의 말과 의식을 경유하여, 대중을 위해 창작되고 읽혔던 시대는 드물다. 문학이 소수 지배층의 유흥거리였던 고대·중세 사회는 물론이고, 대중의 등장으로 표지되는 근대사회에서도 문학은 대개 ‘고급문학’이자 ‘엘리트문학’의 범주로써 정의되어왔던 까닭이다.1 19세기 무렵에는 광범위한 독자층의 대두와 인쇄매체의 확대 및 출판시장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상상의 공동체’라는 개념이 나타내듯 근대문학은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국민문학’으로서 규정되어왔으며, 이는 문학이 대중적 향유보다는 근대성의 특정한 지향을 통해 조형되어왔음을 보여준다.2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대중을 향해 열려 있는 공적 자원’이라는 명제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추상적 구호에 그치고 말 듯하다. 그것은 마땅히 쟁취되고 지켜져야 할 언명이지만, 언제나 불이행되고 지연되기만 하는 의심스러운 약속이었다.
왜 지금 새삼스레 이 구태의연한 명제를 들추어내는가? 사회적 지식이자 상징적 서사형식으로서 문학은 항상 사회적 조건과 의제설정에 민감하게 조응해왔다. 이 점에서 우리 시대에 생겨난 문학장의 변화 역시 이 시대의 사회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있음은 물론이다. 가령 최근 십여년 동안 ‘헬조선’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소외와 빈곤, 계급적 대립이 심화되었고, 세월호참사나 문화계 블랙리스트, 여성 및 소수자를 향한 혐오의 정념 등이 벌어지면서 ‘배제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공론장에 육박해 들어오는 사태가 일어났다. 우리 시대의 대중은 전통적 매체에 기대지 않은 채 직접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자 욕망한다. 마침 문단 내에서도 이러한 변동과 짝을 이루는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표절과 권력논쟁은 문단체제를 격렬히 진동시켜놓았고, 음성적으로 만연했던 성폭력의 가시화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소수자의 목소리가 문학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3 이 모든 과정은 아직 진행형이어서 힘겨운 토론과 협의, 투쟁의 시간들을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같은 사회적 급변에 문학장이 무감각하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식으로든 현재 문학은 사회와 함께 급진적인 변전을 겪고 있다.
이런 조류 속에서 문학과 대중의 접속과 상호 촉발에 관한 사유 및 공적인 것으로서 문학에 관한 발화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이유는 충분하다. 곧이어 살펴보겠지만, 이는 문학과 대중, 공적인 것의 오래된 관계가 최근의 시대적 변곡에 힘입어 급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무엇보다도, ‘커먼즈’로서 문학의 위상이 새로이 정립되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응답의 요구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 글은 우리 시대 문학장의 변전을 공공성과 공통성의 의제를 통해 살펴보고, 비평의 과제를 ‘공-동성의 사건화’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는 시론적 성격을 갖는다.
2. 근대성과 문학규범: 공공성이라는 ‘탁자’의 발명
공적인 것, 공공의 자원으로서의 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앞서 문학의 공공성이라는 주제가 19세기 이래 대중사회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중적’이라는 요소를 가변항으로 둘 때, 실상 문학과 공공성은 근대문학의 초기부터 지식담론의 주요 상수로 다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양에서 근대문학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17세기 고전주의의 경우,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고대적 전범을 모방하는 것은 작품의 예술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작가의 개성이 부각되지 않던 시기였기에, 유일무이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목표였다. ‘미메시스’의 의미 그대로, 작품은 선행하는 모범에 대한 ‘다시 쓰기’를 가리켰던 것이다. 예컨대 장 라신(Jean Racine)이 희곡 『페드르』(Phèdre, 1677)를 썼을 때, 그는 무로부터 유를 만들어내는, 말 그대로 ‘창조’를 행한 게 아니었다. 동시대의 관객들은 페드르가 남편의 의붓아들인 이폴리트에 대한 금지된 정념에 휩싸일 것이란 줄거리를 미리 알고 있었고, 이를 극화한 다른 작가들의 작품 또한 모르지 않았다. 라신은 이 공통의 주제를 자신의 스타일로 각색하여 선보인 것이고, 그의 작품이 현대의 고전으로 남게 된 것은 다시 쓰기의 스타일이 후대의 미적 감각을 사로잡는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4 하지만 라신 시대의 문학적 규범이 미메시스였던 한, 그의 창작은 원본적 진리의 충실한 재현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고전주의는 사적 개인의 창조성보다 공적 규범의 준수를 통한 재현의 충실성에 더 값어치를 두었던 까닭이다. 당연하게도 그 규범은 공공적(公共的)인 성격을 지녔으며, 창작과 비평의 주요한 척도로 기능했다. 고전주의적 공공성은 예술을 향유하는 소수 지배층에 국한된 당대 문화의 산물이었다.
‘창조적 예술가’라는 작가 신화의 진원지인 낭만주의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반적으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적 미메시스를 거부하고 창의적 개성을 미학의 근거로 제시해왔다. 독창성(originality)은 작가가 갖추어야 할 재능이자 능력의 최고 심급을 표시했다. 이는 공유되지 않는 예술작품의 특이성이며, 그래서 흔히 사회와 불화하는 고독한 작가의 이미지를 조성하는 데 기여해왔다. 하지만 낭만주의는 무엇보다도 세계관이자 세계에 대한 태도로서 폭넓게 공유되는 사회적 감정과 다름없다. 여기에는 실증 불가능한 예술의 신비에 대한 작가와 독자, 비평가의 공감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이 낭만주의 이후 세계에 대한 근대인의 공통감각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낭만주의는 사회적·문화적 공론장이라는 지성사적 문맥에서 거론되었고, 사상사의 반열에도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5 소수 지배층으로부터 대중 일반으로, 심미적 안목으로부터 생활감정으로 기준이 이전됨에 따라 낭만주의적 감수성이 공공성의 비평적 도마 위에 오른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렇다면 근대 문학장에서 공공성이란 무엇을 가리켰고, 어떤 역할을 맡았는가?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커피하우스나 쌀롱을 통해 나타난 공론장의 특색은 문해력(literacy)에 기반한 공동체라는 점에서 문학예술과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개명된 귀족뿐 아니라 지식인과 수공업자, 노동자가 거기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전통적 의미의 ‘시민’에 속하지 않는 ‘시민적’ 집단”이었고 “독서 공중”으로서 자신을 규정지었다.6 이들은 국가가 담당하던 공론의 폭을 일반 대중에게로 확대시켰고,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의 상상적 일치를 실현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 과정이 흥미롭다. 개성적 작가와 독자 개인이 만나는 문학경험은 근대 개인주의의 형성에 지대한 몫을 담당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기엔 보이지 않는 제3의 요소로서 시장이 존재하며, 그것이 ‘공론으로서의 문학’ 개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근대문학은 작가와 독자라는 개인뿐 아니라 비평과 문단, 출판산업과 시장 등의 외부적 요소들로 구성되어왔다.7 특히 문학시스템과 관련하여 공공성이란 문학상품을 생산해 시장에 공급했을 때 ‘공정한 계약’이 발생하는 조건을 감독하는 역할이었다.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사회 내부를 자율적으로 규율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적인 것(Res publica)이라는 개념이 요구되었고, 문학장 또한 거기에 의존했던 것이다.8 이것이 문학적 근대성의 제도적 기반이며, 개인주의의 신화로 포장된 문학은 그렇게 근대성의 공적 평면에 연결된다.
동시에 시민사회를 관할하는 규범으로서 공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국가적인 것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문해력과 교양은 근대성의 대중적 기반으로서 국가적 공공성의 형성에도 긴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개인은 공교육을 통해 공무원으로서 복무할 자질을 갖추어야 했으며, ‘정상적’ 시민으로 생활하기 위한 최소한의 교양을 익혀야 했다. 18세기까지 무관심하게 방치되었던 사회화 교육은, 19세기부터 읽고 쓰는 방법,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법의 전반에 이르기까지 공공의 목표로서 가족 단위에 부과되기 시작한다. 근대문학의 정감적 원천으로서 ‘어머니의 신화’를 상기해보자. 자애로운 모성의 이미지는 모국어(mother tongue)를 통해 상징적 지위를 얻게 되고, 모국(motherland)과 개인의 일체감을 조성하는 데 동원되었다.9 국가의 공식 영역으로부터는 배제되었으나, 문학적 상상 속에서 여성은 항상 국가의 상상적 대리자였다. 이는 사적인 삶을 공적 차원으로 통째로 이관하려는 조치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개인이 사회와 동일한 평면에서 만나고 결합된다는 믿음, 그것이 근대적 공공성의 (무)의식적 밑바탕을 이룬다. “‘공적’(public)이라는 용어는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공동의 것(common to all)이고, 우리의 사적인 소유지와 구별되는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제한된 공간이자 유기체 삶의 일반조건으로서의 지구 또는 자연과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차라리 인간이 손으로 만든 인공품과 연관되며, 인위적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에 관계한다.”10 문학적 공공성은 인위적인 사회계약적 이념의 상징적 표현형식으로서 제출된 것이고, 창작과 비평의 준거로서 작동해왔다.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교양소설의 이념이 이를 잘 표명하는바, 개인이 사회와 조화롭게 어울리는 상상적 형태를 창안함으로써 양자 사이에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통일을 만드는 과제가 근대문학에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양소설의 허위성 혹은 불가능성에 대한 폭로가 시사하듯,11 공공성이라는 ‘탁자’(준거)가 다만 허구적인 요청이자 당위에 불과하다면 그 창안의 동력이 퇴색하는 현상은 불가피한 일이다.
3. 탈근대와 만인의 예술: 공통적인 것의 잠재성
‘공통성’ 또는 ‘공통적인 것’의 문제설정은 공공성에 대한 근대적 사변을 기각하고 공공성을 발본적 차원에서 재정식화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12 플라톤적 이데아나 칸트적 요청주의의 한계를 함축하는 ‘세계의 탁자’를 떠나, 자연과 역사 속에 영구히 실존해온 구체적 현실로서 공통적인 것의 실체를 (재)구성하려는 기획이 그것이다.
맑스주의 전통에서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불가결하게 통과해야 하는 단계로 설정된다. 대공업과 세계시장이라는 자본주의적 조건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물질적 토대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렇게 부풀려진 ‘빵’은 양적 최대화를 달성하고, 공평한 분배를 통해 차별 없이 배분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덫이 있으니, 착취로 인해 발생하는 노동의 죽음이 그것이다. M-C-M’의 가치증식법칙에 따라 산출되는 상품의 세계는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나누고, 이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자와 후자 사이의 어느 한편에 귀속되어버린다. 상품이 되지 못하는 것은 예외 없이 죽은 사물, 가치화되지 않는 비-존재일 따름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이전까지 가치화의 범주를 벗어나 있던 모든 것을 가치의 영역으로 몰아넣어 상품화하고, 시장에 유통시켰다. 공통성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공통적인 것은 지구, 그리고 지구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자원들, 즉 토지, 삼림, 물, 공기, 광물 등을 가리킨다. 이는 17세기 영어에서 ‘common’에 ‘-s’를 붙인 ‘the commons’라는 말로 공유지를 지칭했던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공통적인 것은 아이디어, 언어, 정동 같은 인간 노동과 창조성의 결과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자를 ‘자연적인’ 공통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후자를 ‘인공적인’ 공통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구분은 사실상 곧 허물어진다.”13
공통적인 것은 자본주의적 가치화 이전의 자연적인 것이지만 순수한 자연물 자체라기보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착취되지 않는 관계의 본래성을 뜻한다. 근대적 공공성과 달리 공통성은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관계이다. 여기서 노동은 살아 있는 행위로서 또다른 공통적 관계를 창출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통성을 회복하는 과제는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고 강탈당한 공동의 터전을 되찾아 재구성함으로써 산노동의 코뮤니즘 사회로 이행하리란 전망 속에 긍정된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언어가 공통성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물이나 공기, 자연자원처럼 언어는 무상으로 주어져 있기에 사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언어는 자연 자체는 아니지만 자연에 실존하는 ‘생성하는 힘’은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고,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관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공통적이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도구는 완전히 변형되었다. (…) 우리는 언어만을 필요로 한다. 언어가 바로 도구다. (…) 언어는 공통적인 것에서만 그리고 공통적인 것으로부터만 탄생하고 발전한다.”14 언어의 공통성이라는 근본 조건으로 인해 예술, 특히 문학은 본질적으로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는 산노동의 산물로 표명된다. 공통적 언어에 입각한 문학예술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전통적 구분을 폐지해버렸다. “예술은 천사가 만들어낸 게 아니다. 예술은 만인이 천사라고 하는 단언이며, 또 이는 매 순간 재발견되어야 하는 사실이다.”15 이로써 공통적 언어의 주체는 누구라도 공공성이라는 ‘탁자’를 벗어나 창작과 비평의 주체로서 활동할 근거를 얻게 된다. 분명 문학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common to all)이라 단언할 수 있으리라.
언어를 공통적인 것으로, 문학을 그 산물로 간주하는 것은 예술과 삶의 오랜 분열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오랫동안 문학의 수동적 소비자에 머물러 있던 대중은 창작과 비평의 무대 위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직접 행위할 수 있는 근거를 획득하게 되었다. 문학의 공공성이 공정한 계약의 근대적 이념으로부터 공통성의 창조라는 현행적 활동으로 전화한 셈이다. 그러나 언어가 ‘공통적으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또다른 긍정적 공통성, 곧 문학의 생산에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은 다소 순박하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언어를 추상적 중립물처럼 다루는 탓이다.16 문법적 규약과 달리 실제 발화는 늘 가치평가적이고 상황종속적이며,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정향되어 있다. 일상어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언어 역시 특정한 가치와 의미에 침윤되어 있으며, 사회적 규정성을 이탈할 수 없다.17 언어가 공통적인 것으로서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할지라도,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문맥에서 그것이 사용될 때는 특정하게 변용된 상태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작품에서 쓰이는 언어는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창작활동은 언어에 대한 의식적이면서도 동시에 무의식적인 굴절의 과정이며, 이로부터 작품에 대한 해석의 문제도 생길 수 있다. 가령 발자끄(H. Balzac)가 의식적으로는 왕정주의자였어도 무의식적으로는 반왕정주의적 세계감각을 갖고서 창작에 임했던 사례를 떠올려보라. 작가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무의식이 문제가 되는 현대의 관점에서, 언어의 공통성이라는 전제는 실제 작품을 창조하고 독해하는 데에 그다지 유효한 실마리를 마련해줄 것 같지 않다. 언어를 순수하게 선험적인 도구로서, 토지, 삼림, 물, 공기 같은 자연적인 실체로 간주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언어에 함유된 가치와 의미는 (무)의식적인 과정을 거쳐 표현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것은 공통적으로 존재하지만, 모두에게 공동적(共同的)인 방식으로, 동일하게 현존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개인과 집단에게 상이한 방식으로, 그/녀와 그들이 실존하는 역사와 정치적 지형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르게 조건 지어져 있다. 언어의 공통성과 대중을 향한 문학의 개방이라는 주제는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주의깊게 성찰되어야 한다.
4. 대중적 정동의 시대와 비평의 상황
정동(情動, affect)은 공통성과 공공성의 차이를 절합해주는(articulate) 개념이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설명하자면, 우리의 일상적 ‘느낌’이나 ‘감정’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감각이 아니다. 감각은 늘 하나의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이동하는 연속적 힘이며, 우리는 그 과정에서 예각화된 특정한 지점들에 ‘기쁨’이나 ‘슬픔’ ‘분노’ 등의 정서적 명칭을 붙인다. 그렇게 특정화된 감정들을 서로 잇는 연속적인 이행의 감각을 정동이라 부른다.18 가령 2018년 4월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언론이 ‘민족의 기쁨’이라는 제목을 내건다 해도, 각 개인이 체감하는 실제 감각은 그보다 훨씬 넓은 진폭을 보일 수 있다. 이산가족이라면 회한과 슬픔을 동반한 기쁨을 느낄 것이요, 이념적 대립의 시대를 겪은 세대는 평화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막연한 불안감도 가질 만하다. ‘기쁨’이라는 단어로 동일하게 표현되었을지라도, 경제교류를 반기는 기업인의 기대와 그런 이해관계 없이 고양된 사회 분위기에 호응하는 일반인의 기분이 같을 리 없다. 요컨대 느낌이나 감정은 언어적으로 포착된 정동의 일단면이기에, 그 흐름의 복잡다단한 양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이러한 정동은 대중의 (무)의식적 감각에 직접 촉수를 맞대는 공통적인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는 서로 반목하거나 무관심할 수 있어도, 무의식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에 따라 각자의 삶이 시장의 상품처럼 가치화된 신자유주의 시대에조차 대중은 정동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만나고 교류하며 새로운 관계를 직조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의제에 관해 대중이 직접 발화하고 반응하는 이 시대에 문학은 더이상 소수의 향유집단이나 전문가들에게 위임된 사유지가 아니다. 예술작품의 감동이 (무)의식적인 충격을 통해 감수성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면, 대중은 자신들이 느끼는 정동의 충격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자 욕망한다. 예를 들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을 둘러싼 비평가들의 논쟁은 단지 전문가들 사이의 감식안적 차이를 반영하는 것만은 아니다. 몇가지 이유에서 예술적 완성도의 미비를 지적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지지하는 평론가들은 작품이 독자대중과 내밀하게 정동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19 허구적 주인공의 서사에서 (여성)독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정동되는 지점들을 찾아내고 그에 감응했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감각의 운동으로서 정동은 그렇게 작가와 독자를 연결시키고, 그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기입한다. ‘정동의 쓰기’로 명명되는 이 운동은 “가장 내밀한 신체적 레벨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서로 정동하고 정동되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로서 제시되는 형편이다.20
이렇게 한국문학은 대중의 정동, 나아가 공통성에 직접 접속함으로써 문학 ‘바깥’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쓰기의 범람을 경험하는 중이다. 즉 기존의 문학장르, 문단제도, 정형화된 글쓰기의 형태들을 타기하면서, 일상의 다양한 풍경들로부터 직접 정동을 길어내 문자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근대적인 “공통의 합의된 이미지로서의 문학을 재생산하는 것을 넘어서, 새롭게 문학을 재구축하”는 현상이며, 그 명시적 사례들이 “4·16 이후의 쓰기, 강남역과 구의역의 쓰기, 광장의 쓰기”로 나타났고 궁극적으로는 “지금 문학장 안팎의 변동”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다.21 이런 광경들은 자연히 문학이 ‘모두에게 공통적인’ 표현적 자원으로 활용되리라는 기대를 낳는다. “실제 독자들이 문예공론장에 대거 유입되고 발화하기 시작”했으며, “전방위적으로 대의되지 않고 스스로 말하겠다고 주장하는 주체들이 비로소 가시화했다. (…) 문학을 둘러싼 대화의 테이블에 이들 신참자들의 자리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22 이는 전통적 문학담론이 가정했듯이 작가와 비평가의 창작 및 해석을 존중하고 뒤따르던 독자 대신, 현재를 살아가는 현실적 독자에게 “매우 적극적으로 ‘영합하는’” 방식으로 문학장이 변전해버렸음을 인정하라는 주장이기도 하다.23 대중이 자신의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 우리의 시대, 삶과 예술의 근대적 분열은 이제 극복되려는가?
이같은 질문은, 비평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답변을 필연코 요구한다. 창조적 정동의 주체로서 대중 전체가 호출되고 기존의 장르형식이나 글쓰기 형태의 외연이 확장되고 있는 우리 시대에 비평가의 전통적 위상은 더할 나위 없이 좁아져버렸다. 문학이 시민사회의 시장논리에 맞춰 상품으로서의 작품을 독자에게 공급하던 시절에 비평은 수준 높은 감식안을 자랑할 수 있었다. 허다한 문학작품 중에서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과, 무의미하고 내버려도 좋은 것을 골라내고 품평하여 시장에 내놓는 공정거래의 감독관이었던 것이다. 사정은 이념비평에서도 다르지 않은데, 비평가는 대중의 정신과 육체에 올바른 영향을 끼치는 작품을 찾아내 그 의의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어느 쪽이든 문학의 공공성이라는 명제는 비평가적 지위의 선도성과 우월성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동의 공통성으로 문학장의 기반이 변형된 오늘날, 비평가는 더이상 대중의 취향이나 미적 관점을 지도하거나 주도할 수 없게 된 듯하다. 비평의 종언일까? 역설적이게도, 현재를 ‘비평의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한 근거가 주변에 널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직업적 비평가의 지위가 무너진 대신, 문화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대중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콘텐츠를 개발하고 플랫폼을 제작함으로써 일종의 비평가적 역할을 자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4 문학이 커먼즈로서 창작의 공통성을 보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평 역시 커먼즈처럼 ‘모두에게 공통적인’ 작업이 되었다는 뜻일까? 일견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분석이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지점들이 눈에 띈다.
맑스(K. Marx)는 근대를 예술에 적대적인 시대로 규정한 바 있다. 자본주의가 만개하는 시대는 모든 노동의 가치가 오직 잉여가치의 생산에만 한정됨으로써, 이 회로를 벗어나는 어떤 활동도 무가치한 것으로 무화되어버리는 까닭이다. 존 밀턴(John Milton)이 『실낙원』(Paradise Lost, 1667)을 종교적 열정이나 창조적 상상력에 이끌려 썼을 때, 그는 아무런 가치도 생산하지 않은 셈이다. 밀턴의 원고가 출판업자의 손에 넘어갔을 때만, 오직 그 경우에만 그의 창작은 ‘생산적 노동’으로 인정받는다.25 밀턴의 17세기보다도 자본주의가 더욱 촘촘하게 지배의 그물을 드리운 오늘날은 쓰려는 욕망조차 화폐단위로 가치화된다. 문학청년이 창작이나 비평의 꿈을 안고 글쓰기를 구상할 때 그의 욕망은 ‘순수’해 보이지만, 실상 그가 문학을 삶의 업으로 선택했을 때 이미 그는 문학이라는 제도, 문학장의 시장적 순환에 포획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창조의 열정이 화폐로 교환될 수 없는 순수성을 갖는다고 믿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창조를 위한 상품화의 논리를 (무)의식적으로 마음과 신체에 새겨놓은 게 아닌가? 그렇다면 창작과 비평의 영역에서 대중이 직접 활약하게 된 오늘날의 상황이 진정 새롭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은 자본에 의해 전방위적인 가치화의 경주를 강요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언어든 정동이든 그 무엇이든 공통적인 것마저 자본에 의해 식민화되고 있는 현재의 지형에서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5. 공-동성, 혹은 사건적 의제화로서의 비평
제도와 규범, 시장의 논리로 촘촘하게 포위된 (탈)근대사회에서는 대중의 사고와 행동, 심지어 무의식과 욕망조차도 온전히 통제되고 조율된다. 우리는 세계와 타자를 ‘날것’ 그대로 만날 수 없으며, 삶이 전달하는 직접적 감각은 봉쇄당해버렸다. 대중의 무의식과 신체를 관류하는 공통의 정동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우리 시대의 이론적 상상력을 수놓고 있으나, 그것을 직접 감지하거나 조정하고 기획하는 작업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정동은 개인을 넘어서는 힘이며 의식과 의지에 따라 규정되지 않는 집합적인 무의식적 욕망이다. 불의한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주최 측이 내건 대의명분에 하나부터 열까지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그곳의 전반적 분위기에 감염되어 함께 구호를 외치고 노래하며 싸울 수 있다. 이러한 감염적 양상의 분위기가 정동의 공-동성(共-動性)을 만들어낸다. 정동은 실체라기보다 다양한 인접 요소들의 배치가 창출하는 분위기, 그 효과와 다름없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현재의 지형이 돌봄과 배려, 자발성 및 창의적 아이디어 같은 정동적 요소들에 화폐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정동조차 자본주의적 관계에서는 ‘생산적 노동’으로 분류되어 소비될 수 있다. 감정노동이나 열정노동이 제대로 된 보상도 없는 정동적 노동으로 연구된 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이며, SNS나 블로그, 인터넷 매체에 재미 삼아 올리는 정보나 지식마저도 해당 미디어의 자산가치를 높여주는 노동으로서 가치평가받게 된다.26 문학장의 변동으로 인해 나타난 새로운 문학적 표현의 형태로 팬픽이나 웹소설, 웹툰 등이 거론되곤 하는데, 그 창조적 열정과 효과는 주목받기에 충분하지만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플랫폼 위에서 그것들이 구축되는 한 ‘생산적 노동’의 함정을 피하기는 어렵다. 대중적 정동 시대의 자유는 곧 착취당하고 강탈당할 자유와 다르지 않다. 이것이 더욱 위험한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를 창출한다고 믿는 가운데 우리에 대한 착취와 강탈을 허락할 수도 있는 탓이다. 비평의 문제제기는 바로 여기서 비롯되어야 하지 않을까?
푸꼬(M. Foucault)는 자본주의와 국가권력에서 벗어나려는 비판적 태도를 “어떻게 하면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라는 물음 속에 정식화한 바 있다. 비판/비평(criticism)이란 그 어원대로, 주어진 시대의 지평을 ‘분리’하고 ‘선택’하며 ‘판단’하면서 ‘결정’함으로써 맞서 ‘싸운다’는 뜻이다. 비판/비평의 파생적 의미로서 ‘위기’(crisis)를 항상 마주하는 비평가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우리 시대 진리의 정치를 새롭게 사유”하는 기능과 임무를 맡아야 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본주의적 가치 및 국가주의적 기율에 통치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비평가는 “통치하려는 권력이 내세우는 진리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혀 그것으로 통치에 저항하는 거점을 마련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27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착취당하고 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자율적인 가치를 담지하는 듯한 이 시대의 대세에 대해 항상 질문을 던지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자본과 국가에 대한 이같은 저항적 자세는 종래의 비판이론, 즉 시민사회의 공공성이 노정하던 대항투쟁의 양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할 성싶다. 권력과 화폐가 제공하는 이데올로기의 달콤한 위장을 벗겨내 이면의 함정을 폭로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허위의식을 규명함으로써 해방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전략들 말이다. 물론, 그러한 노력의 유효성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다만 부정적인 방법이 갖는 방어적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투쟁방식 또한 비평적인 것으로서 제시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엽, 사진이 회화를 대체하여 일상의 풍경을 낱낱이 기록하고 시장을 점령해가던 상황에서 벤야민(W. Benjamin)은 사진이 어떻게 고유한 예술성을 발견하고, 예술적 특이성과 함께 정치성마저 획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카메라 렌즈가 포착한 낯선 광경들은 인간의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감각을 연출했고, 그것은 상품의 형태로 타성화되고 자동화되기 전에 사진 이미지를 구출해내야 할 절박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생경한 날것의 정동에 특정한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모험이 될 수 있다. 아우라의 정동적 효과를 부각시키는 명명행위는 관습화된 취향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사진의 상품적 가치를 떨어뜨리고, 시장을 교란시키는 예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상에 이질적인 제목을 붙임으로써 그것이 지배적 가치와 기율에 복종하지 못하도록 중지시키는 활동을 벤야민은 ‘표제화’(Beschriftung)라 불렀다.28 이는 정동을 안일하게 소모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행위이기에 정치적 사건화이고, 상품화를 가로막기에 예술적 사건화라 할 수 있다. 비평은 이렇게 생성하고 있는 정동의 현장이 자본과 국가에 의해 박제되지 않도록 비판적으로 명명하는 작업, 의제화의 기예(art)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비평이 발생시키는 예술적 사건화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비평은 작품을 정치적 언설 속에 용해시켜버리는 작업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갖는 고유한 정동과 속도를 보존시키는 가운데 자본과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탈구시키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가가 사진 이미지에 붙인 해석적 표제는 통념에 반하거나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만큼 대중의 이완된 감수성에 충격과 성찰의 계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이는 작가가 작품을 만들면서 붙이는 제목과는 또다른 의미화의 파장을 낳을 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조언대로, 예술은 그것이 느리고 완만하게 지각될수록, 그리하여 의미화에 최대한 늦게 도달할수록 역설적으로 그것만의 특이적인(singular) 가치를 지니게 된다. 형식주의자들이 ‘낯설게 하기’(ostranenie)라 불렀던 이 방법을 벤야민 식으로 말해본다면 ‘예술의 정치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듯 공-동성은 예술작품을 타협적인 해석으로부터 구출하여 생경하고도 신선한 지각의 장에 던져 넣는 비평적 사건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비평적 사건, 공-동성의 경험을 맞이하고 있는가? 어느 순간 이성애중심적인 가부장사회에 균열이 발생했고, 남성적 척도에 맞춰서 쓰였던 문학사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한 요즈음이다. ‘여성혐오’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감정인지에 대한 논란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통념적 거부반응을 넘어서 진행되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문학에 대한 비평적 실험은 어느덧 문학장의 큰 줄기조차 바꾸어놓은 듯하다. 고전으로 추앙받던 작품들이 새롭게 읽히고, 낯선 해석적 지표들이 하나둘씩 새로 가동되고 있다. 진보와 반동, 반응과 역반응을 왕복하던 대중적 정념의 유동을 창작과 비평의 주파수로 수신하여 표제화하기까지 적지 않은 굴곡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이어질 것이다. 유난히도 동성사회적(homosocial) 문화가 강력한 한국에서 페미니즘과 소수자 문학비평의 길이 적극적으로 열린 것은, 사회적·정치적 반동을 감내하면서까지 ‘혐오’라는 정동을 포착하고 이를 문화영역 전체에 표제화시킨 힘겨운 노고에 힘입은 바 크다. 이 시대 전체의 분위기를 단정짓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추세가 낳고 있는 공-동적 사건화의 효과는 결코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친다면 페미니즘과 소수자 문학 및 비평에 대한 남성 비평가의 상찬에 그치고 말 것이다. 한걸음 더 나가보고 싶다. 사건은 정의상 사건 자체가 아닌 지형으로부터 나타난다. 뒤집어 말하면 어떤 사건도 언젠가는 비사건의 상태에 고착될 수 있다. 이같은 사건의 역(逆)생성은 사건화가 한창인 와중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비평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과제는 사건이 중단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표제화하는 데, 즉 새로운 의제를 공급하는 데 있다. 대중의 정동을 포착하여 사건을 사건으로 남겨두는 것, 현재의 사건이 또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도록 관찰하고 촉발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수가 눈감고 부정해도 “여기에 차별과 혐오가, 폭력이 있다”고 굽힘 없이 주장한 최근의 목소리들이 그렇지 않았는가. 정확히 동일한 의미에서 새로운 사건화의 실마리는 언제나 현재의 사건 속에 있음을 기억해두자. 어떤 사건도 규범화의 덫에 빠질 수 있으며, 사건을 정체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예컨대 요즘 논쟁 중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의제는 보수적으로 편향된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일정한 유효성을 갖지만 그 자체로 규범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의견에 충분히 귀 기울여야 할 듯하다.29 사건의 매혹에 갇히지 않은 채 항상 새로운 사건화의 첨점(尖點)을 탐색하는 노력이야말로 공-동성, 혹은 사건적 비평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키워드』, 김성기 외 옮김, 민음사 2010, 280~82면.↩
-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Verso 2006, 9~38면;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6, 43~86면. 서구의 상황을 보편화할 수는 없으나 한국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을 통해 근대문학을 처음으로 경험했고, 이후의 역사에서 그것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밟았다는 점에서 일반성을 가정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문학제도론이 이를 잘 보여주는바, 1970~80년대의 민중·민족문학이 남긴 깊은 족적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이 제도권력과 엘리트주의의 문제설정을 늘 껴안은 채 성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정통’ 문예지의 쇠퇴와 쇄신, ‘비평 없는 문학잡지’의 창간, 비등단작가로 구성된 매체들의 탄생 등이 전자의 경우라면(장은정 「설계-비평」, 『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 활발하게 발표되고 있는 페미니즘 문학비평들이 후자의 사례이다(『문학과사회 하이픈』 2016년 겨울호 ‘페미니즘-비평적’, 『문학동네』 2016년 겨울호 특집 ‘페미니즘, 새로운 시작’, 『문예중앙』 2016년 겨울호 특집 ‘#여성혐오_창작’,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특집 ‘페미니즘으로 문학을 읽는다는 것’ 등등).↩
- 장 루이 아케트 『유럽 문학을 읽다』, 정장진 옮김, 고려대학교출판부 2010, 84~85면.↩
-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강유원 외 옮김, 이제이북스 2005, 19~23면; 버트런드 러셀 『러셀 서양철학사』,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2009, 제18~19장.↩
- Jürgen Habermas,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Luchterhand 1971, 37면.↩
- Pierre Bourdieu, The Rules of Art: Genesis and Structure of the Literary Fiel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122~24면.↩
- 제라르 델포 외 『비평의 역사와 역사적 비평』, 심민화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3, 24면.↩
- 프리드리히 키틀러 『기록시스템 1800·1900』, 윤원화 옮김, 문학동네 2015, 47~119면.↩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외 옮김, 한길사 1996, 105면.↩
- 프랑코 모레티 『세상의 이치』, 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 422~23면.↩
- 한국의 자율주의 그룹은 ‘the commons’를 ‘공통적인 것’ ‘공통성’ ‘공통재’ ‘커먼즈’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번역의 사정에 대해서는 피터 라인보우 『마그나카르타 선언』,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12, 10~11면을 보라. ‘common’이라는 단어는 근대 자본주의 이전에 공유지를 통해 인류가 ‘공유’를 경험해보았다는 증거로서 제시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즉 공통적인 것은 추상적 관념 구성물이 아니라 자연사와 역사를 관통하여 산노동의 터전이 실재했음을 입증하는 (준)선험적 어휘이다. 돌봄노동 등 이를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풀어낸 사례에 대해서는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4~27면을 참조.↩
- 마이클 하트 「공통적인 것과 코뮤니즘」, 연구공간L 엮음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난장 2012, 34~35면. 자연재와 인공재를 공통적인 것으로 명명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들이 다양한 구성의 잠재성을 갖기 때문이다. 즉 공통적인 것들은 서로 합성하여 새롭게 관계 맺음으로써 다른 실존 형태로 발명될 수 있기에 공통재라 불린다. 그것들은 “공유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마우리찌오 랏짜라또 「자본-노동에서 자본-삶으로」, 자율평론 기획 『비물질노동과 다중』, 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 2005, 267면.↩
- 안토니오 네그리 『혁명의 시간』,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04, 119면.↩
- 안토니오 네그리 『예술과 다중』, 심세광 옮김, 갈무리 2010, 110면.↩
- 이종호 「공통되기를 통한 예술의 확장과 변용」,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286~87면.↩
- 미하일 바흐찐·발렌찐 볼로쉬노프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 송기한 옮김, 한겨레 1988, 1장. 후기 알뛰세르와 유사하게, 바흐찐은 이데올로기를 의식적 측면과 더불어 무의식적 측면을 포괄하는 힘으로 간주했다. 졸저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그린비 2017, 196~202면.↩
-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What is Philosophy?,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66~67면.↩
-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 2017년 한국소설 안팎」, 『문학들』 2017년 겨울호 34~37면.↩
- 김미정 「‘나-우리’라는 주어와 만들어갈 공통성들: 2017년, 다시 문학의 공공성을 생각하며」, 『문학3』 2017년 1호 18면.↩
- 같은 글 23면.↩
-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 46면, 48~49면. 대중의 가시화는 촛불로 표명되는 최근의 사회적·정치적 변동과 궤를 같이하는 현상으로 언급되고 있다.↩
-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문화/과학』 2016년 봄호 103면. 나아가 전통적 문학형식을 대체하는 새로운 표현매체로서 웹소설이나 팬픽, 웹툰 등이 다양하게 거론되고 있다.↩
- 같은 글 94~95면.↩
- 칼 마르크스 『잉여가치학설사 1』, 편집부 옮김, 아침 1989, 448~49면.↩
- 앨리 러셀 혹실드 『감정노동』, 이가람 옮김, 이매진 2009, 189~99면; 앙드레 고르스 『에콜로지카』, 임희근 외 옮김, 갈라파고스 2015, 37~39면.↩
- Michel Foucault, “ What is Critique?,” The Politics of Truth, Semiotext(e) 1997, 26~29면; 문강형준 「어떻게 하면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비평의 의미와 문화비평의 임무」, 『문학동네』 2016년 봄호 407면, 405면.↩
-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d. II/1, Suhrkamp 1991, 385면.↩
- 다양한 방식으로 논전이 거듭되고 있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문학 및 비평의 사안들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결정적인 동시에 문제적이다. 기존의 이성애적이고 가부장적인 규범을 타파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것은 중요한 초석적 가치를 지니며, 수단으로서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또한 정치적 올바름은 ‘정체성 정치’의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기에 자기규범화의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늘 스스로를 경계하고 방어하도록 애써야 한다. 규범화된 정치적 올바름은 자칫 광장의 차이들을 권력 간의 알력으로 바꿈으로써 정치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지이 다케시 「정치적 올바름, 광장을 다스리다?」, 『문학3』 2017년 2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