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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가사, 소통 그리고 여론
보데왼 왈라번 Boudewijn Walraven
한국학자, 네덜란드 레이던대학 명예교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석좌교수. 저서 Songs of the Shaman, Korean Popular Beliefs 등이 있음.
* 이 글의 원제는 “Kasa, Communication, and Public Opinion”이며 동명으로 『한국학 저널』(Journal of Korean Studies) 제20권 1호(2015)에 실린 글을 저자가 손질한 것이다. ⓒ Boudewijn Walraven 2015, 2018/한국어판 ⓒ 창비 2018
들어가는 말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은 그의 저서 『시와 경찰』(Poetry and the Police)에서 18세기 프랑스 시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터넷이 생기기 훨씬 이전, 정보가 구전되던 시기, 시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척 효율적인 매체였던 시기에 정보사회가 작동하던 방식을 잘 알 수 있다”1고 말했다. 그의 책을 통해 우리는 소통의 중요성과 복잡성에 새삼 주목하게 되는데, 사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소통, 특히 광범위한 소통은 글쓰기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너무 쉽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단턴은 글을 통하지 않은 소통의 형식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소통의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누락된 요소, 즉 구전성을 재구성할 때까지 절대로 제대로 된 소통의 역사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단턴이 탐구한 소통매체와 유사한, 활자와 구전의 중간 장르인 가사(歌辭)에 초점을 맞춰 조선 후기에 생각과 견해가 전파되던 방식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1700년 이후 생산된 몇몇 가사 작품들을 고찰한다면 한국에서 여론, 혹은 공적 영역의 등장에 대한 논의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쓰는 “공적 영역”이라는 어구의 의미는 하버마스(J. Habermas)가 사용한 동일한 용어와 정확히 같은 뜻은 아니다. 하버마스의 어구에는 명백히 유럽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에 특수하게 관련이 있어서, 조선시대의 한국이나 동아시아에는 적용될 수 없는 함축된 의미가 상당히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사회에도 (동아시아적이고 유교적인 특수한 형태의) 공공이익, 공동선의 개념은 존재했기 때문에 어떤 여론의 형식 혹은 조선시대 한국 특유의 공적 영역 형식이 발견된다. 물론 당대의 한국에, 예컨대 하버마스가 말하듯 공적 영역의 등장과 연계해서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초가 형성되었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공적 영역에 대해 논할 때 굳이 그것이 하버마스가 유럽에서 부르주아 공적 영역을 창조하는 데 중요했다고 본 일련의 요소들과 일치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한국적 발전 형태의 특수한 역동성과 특성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조선의 여론 개념
조선사회에는 대체로 유교적인 공론(公論) 개념에 입각해,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개인들의 견해를 표현하고 순환시키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런 방법들은 통치자가 백성의 견해에 기꺼이 귀 기울일 것을 요구했다. 많은 경우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이지, 정치적인 과정에 공적으로 참여하는 형식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 이 상황이 변모한다. 조정에서는 ‘조보(朝報)’를 통해 지방관리와 지방의 식자층 양쪽에게 정보를 전달했고, 이를 통해 관리들뿐 아니라 훨씬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거나 정치적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런 표현과 참여는 차(箚)와 상소(上疏)를 지방관리에게 보내는 형태를 취했고, 만일 그런 경로를 통해서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할 시에는 조정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청원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이 제출하기도 했다. 상소를 자주 하는 축에는 성균관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많은 경우 서원과 연결된, 지방의 재야 지식인들도 그러한 과정에 참여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이런 청원 중의 일부는 수천명 지식인들의 서명을 모아 이루어졌고, 따라서 만인소(萬人疏)라고 불렸다. 그같은 집단 청원들은 통문(通文)을 통해 이룩된 합의의 결과였는데, 통문을 돌리는 것은 여론을 표현하는 전보다 더 수평적인 방법이었고, 수많은 서원과 350군데가 넘는 지방 향교 학생들이 종종 사용했다.
사적인 목적을 위한 청원과는 다르게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는 청원은 주로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그들이 유교 이데올로기에 따라 어떤 정책이 바람직한 통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왕에게 항의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전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교 이데올로기의 바탕에 있던 국가의 성격에 대한 개념이 양반 엘리트 계층을 넘어 다른 계층에까지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풍부한 증거에 따르면 당시에는 어느 정도의 문해력을 소유한 서민, 유교 교육을 통해 공론의 개념과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포함한 국가관을 갖게 된 서민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기초적 수준의 유교적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유교적인 모형에 따른 국가 공동체의 관념에 친숙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전하는 조선 후기의 인구 기록에 따르면 양반의 지위를 추구하던 계층인 유학(幼學)으로 규정된 사람들의 숫자가 극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어떤 곳에서는 관리와 유학을 합친 인구의 비율이 60~70%를 차지했다.
그 결과, 자신을 유교적인 의미에서 국가의 일부라고 생각한 사람의 숫자는 양반 엘리트 계층의 숫자보다 훨씬 많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증가했다. 19세기 말경에는 인구의 넓은 층이 유교적인 인정(仁政) 개념을 상당 정도로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들의 권리로 느꼈고, 그 논리를 자신들의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가 가사의 잠재적인 공공성과 정치적인 잠재력을 고려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다.
현실비판가사
조선 후기가 조선 전기와 얼마나 크게 달라졌는지는 가사에 드러나는 극적인 변화들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가사는 단순히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형식을 취하기도 했다. 새로운 형식의 가사는 변화의 일부, 새로운 소통방식의 일부, 점차 증대하고 있던 사회계층들이 점차 다양화하던 메시지를 사람들 사이에 퍼뜨리는 방식의 일부였다. 1600년 이후에는 가사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이 장르를 통해 소통되던 내용에 훨씬 더 많은 다양성이 허용됐다. 상반되거나 논쟁적인 견해를 표현하는 방법이 개척된 것이다. 이런 면은 당시 사회현실의 특정 측면을 비판하는 하위 장르의 가사, 즉 현실비판가사에서 가장 분명히 보인다. 현실비판가사는 때때로 왕에게 청원하는 형식이지만, 청원의 내용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반 백성의 곤경에 관한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왕에게 바치는 청원이라 할지라도, 왕에게 올리는 상소가 그렇듯이 현실비판가사도 공론에 기여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더욱이 그 작품들 중 일부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공공연히 반역을 선동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서 현실비판가사의 두 사례, 즉 「임계탄(壬癸嘆)」과 「거창가(居昌歌)」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임계탄」(1732 임자년과 1733 계축년의 탄식)은 사회현실을 비판한 최초의 가사 중 한편으로 여겨진다. 이 작품은 흉작과 충해, 전염병과 악정으로 인해 전라남도 장흥 사람들에게 닥친 끔찍한 재난을 묘사하고 있다.2 아마도 작품에서 묘사하는 일들이 일어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 즉 1730년대 어간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작자는 미상이지만 임형택은 저자가 양반인 위문덕(魏文德, 1704~84, 존재 위백규의 부친으로 『영이재집』이란 문집을 남김)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농촌의 고난에 대한 극적인 묘사라는 면뿐 아니라 그것이 정치적 견해의 소통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암시적으로 드러난다는 면에서도 흥미롭다.
시의 첫 몇행에서 시인은 1732년과 1733년의 유례없던 기근을 회상하며 백성들에게 말을 건다. 또한 자신이 이 작품을 한양에 보낼 것이라고 알리기도 한다. 이 점은 왕을 그 가사의 수신인으로 특정하는 마지막 행과 일치한다. 이것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같은 유배가사의 기저에 있는 패턴이지만, 동시에 이 가사를 왕에게 보내는 일종의 청원으로 만들어주는 구실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왕이 이 가사의 유일한 수신인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반 사람들도 직접 부르고 있고, 시인 자신이 그들과 밀접한 연대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왕 앞에서는 모두 “백성”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시절 만난 백성 네오 내오 다를쏘냐.”
이같은 서두는 역사적·지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기근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시인은 이번 기근을 통해 자신이 역사적인 자료에서 본 식인 이야기의 현실성에 대해 품고 있던 회의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실상 이미 신해년(1731)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던 현재의 상황은 “우리 조선”이 다행히도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으며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사이에 더 악화되었다. 장흥이 위치한 남쪽 지역은 특히 농산물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런 진술을 통해 시인은 이 파국적 상황이 인간의 개입 탓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어지는 행들에서 땅을 등록하라는 정부의 명령으로 인해 농촌 공동체에 엄청난 동요가 초래되었고 그 바람에 흉작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일단 흉작이 현실로 나타나자 궁핍하여 기아에 허덕이던 농부들은 정부가 그들에게서 기대하던 것, 즉 봄에 선지급되었던 곡식(〓환곡)을 반환할 수 없게 되었고 다양한 부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미 1731년부터 많은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유민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1731~32년의 겨울 이후 사람들은 정부가 곡물창고를 열어 구휼해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사이 “쥐들” 때문에 창고 속의 곡물 양이 대폭 줄어들어 있었다. 작품은 인간의 형태를 한 그 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정부의 압제와 착취를 은유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해석되는 작품인, 『시경(詩經)』의 「석서(碩鼠)」라는 노래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어 작품은 지방관리의 위장은 음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에게는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관리들을 직접 호명해, 그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의 요구에 언제 눈뜨게 될 것인지 묻는다.
어떻게든 농산물을 건져보려는 농민들의 노력은 충해가 닥치면서 추수를 완전히 망쳐 다시 한번 좌절된다. 작품의 저자는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수사적 질문을 던지고, 직접적으로 대답을 하지는 않지만 곧이어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을 위해 적절한 조처를 하는 대신 공식 보고서에서 상황의 중요성을 축소시킨 장흥 부사를 꾸짖는다. 그리고 관리들이 세금을 걷고 부역을 강제하는 일만 부지런히 했다고 덧붙인다. 백성들에게는 집을 떠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으며, 길에서 그들 다수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며, 길옆에 쌓인 시체를 개와 새가 뜯어 먹고 있다는 것이다.
조정에서 감진어사를 내려보내 지방민들에게도 희망의 불이 약간 지펴졌지만 결국은 별 도움이 안 되었으니,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등록을 맡은 지방관리들이 자기 이익만을 챙겼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같은 권력남용의 현실에 대해 눈감고 있던 도감에게 눈을 뜨라고 호소하기도 하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는 또한 심각한 기근은 항상 도적의 무리를 낳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동시에, 도적 무리의 탐욕과 부유한 계층의 탐욕을 비교함으로써 전자를 상대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은 기근 후에 막바로 들이닥친 전염병으로 인해 마지막 생존자의 목숨까지 위협당하는 현실을 묘사한다.
이어서 유교적인 국가 개념을 요약하는 4행이 뒤따른다.
百姓이 업슨 後에 國家를 어이하리
나라히 나라안여 百姓이 나라히요
百姓이 百姓안여 衣食이 百姓이다
衣食百姓 다 업스니 이 時節 어이될고?
시인은 이 대목에서 ‘나라’라는 단어가 가진 두가지 의미를 활용하고 있다. 나라는 ‘국가’와 같은 뜻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동시에 ‘왕’을 지칭하기도 한다(후자의 경우 접미사 ‘-님’을 붙여서 ‘나라님’이라고 하기도 한다). 두번째 행의 전반부에서는 나라라는 말로 먼저 왕을 지칭했다가 그것을 바로 부인함으로써 얼핏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역설적인 진술을 하지만, 그 수수께끼는 같은 행의 후반부에서 풀린다. 나라의 의미를 백성의 공동체라는 뜻에서의 국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계탄」의 작가는 이어 백성의 신체적 안녕이 한 국가의 필수 요소라고 주장한다. 백성 없이는 나라가 없고, 옷과 음식 없이는 백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행들은 이 가사 시인이 자신을 백성의 대변자로, 자신들의 처벌을 염려해 상황의 심각성을 은폐하는 관리들을 공격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고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가 “고변호소 뉘 있으리?”라고 외칠 때 자신을 바로 그 임무를 짊어진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사의 끝부분에서 그는 자신이 왕에게 청원(이 가사)을 올릴 작정이라고 말한다. 그가 가사를 상소문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그 둘의 기능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가사는 사람들이 상소에 대해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론에 기여하고 있다.
두번째로 살펴볼 가사는 「거창가」이다. 이 작품은 시기가 다른 판본이 여럿 전해오기 때문에 단순하지는 않지만,3 이 글의 목적에 국한해서 본다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1837년과 1841년 사이 거창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룬 대목이다. 이 가사의 거창에 관한 내용은 당시 상황을 바로잡아달라고 감사에게 보낸 폐장(弊狀)의 내용과 겹치며, 실제로 명시적으로 그 폐장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이 가사는 무엇보다도 그 폐장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거창가」의 몇몇 행을 보면 작품에서 묘사되는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840년대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현전하는 수고(手稿)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필사되었다. 짐작건대 당시 이 가사가 누렸던 인기와 1862년에 임오민란(壬戌民亂)으로 폭발된 민중봉기 사이에는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가사의 핵심이 거창 주민들이 정부를 향해 자신들이 당한 학정을 시정해달라고 했던 청원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작품은 불공평하고 지나치게 부담이 큰 조세 부과에 대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불만에 목소리를 부여했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인기를 누릴 수 있었으며, 그럼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반란을 조장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거창가」의 모습을 더 분명히 제시하기 위해 조규익의 연구에 기초해 가장 핵심적인 일부 대목을 논해보자. 이 가사의 첫 부분은 조선의 수도와 이씨 왕조의 수립에 바쳐져 있다. 시는 그 일들을 경축하는 가벼운 분위기다. 독자 혹은 청자에게는 훌륭한 통치 덕분에 가능한 태평성대를 잘 즐기라는 훈계가 주어진다. 그러나 331행에 가면 갑자기 시의 분위기가 바뀐다. “조선 삼백육십일주 간 곳마다 태평이되/엇지타 우리 거창 읍운이 불행하야?” 책임은 대체로 현감인 이재가(李在稼)의 어깨에 놓이지만, 향리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이 가사는 왕이라면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행실에 대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왕에게 올리는 상소를 자처한다. 이 상소가 특수한 지역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세금 부담이 이곳만큼 억압적이지 않은 다른 지역과의 비교를 통해서 강조된다. 이 작품은 향리 등의 매개자에 의한 조세 횡령과 부정확한 등록으로 신생아 및 사망자에게서까지 세금을 걷는 일 등, 권력남용의 여러 형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미 죽은 남편 몫의 세금을 내야 하는 젊은 과부에 대한 극화된 이야기에 이어 실제 사건에 대한 분노에 찬 보고가 나온다. 현감의 졸개들은 젊은 과부의 집에 기숙하고 있던 양반 김일광(金日光)에게서 세금을 걷으려고 들이닥쳤다. 김일광은 마침 집에 없었지만 그들은 규방까지 침입해 과부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나왔다. 가사의 저자는 이 행동에 분개한다. 양반에게는 내외를 하는 것이 신성한 규율이기 때문이다. 이 계급주의적인 태도를 보면 그가 급진적인 평등사회의 주창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부는 이 모욕에 대해 자결로 응대했다. 작품은 이어서, 민간 신앙에 따라, 거창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때아닌 우박이 죽은 여인의 원한 때문이라고 암시한다. 작품은 십중팔구 서민이었을 또다른 저항자인 이우석(李禹錫)의 사형과, 아들의 처형을 보기보다는 스스로 목매는 것을 택한 그의 홀어머니의 자살도 언급한다.
작품에는 실정과 비리의 예들이 몇가지 더 나열되어 있다. 학자의 도포와 갓이 일종의 징수금으로 징발되어, 거창 현감의 아들이 한양에서 과거를 볼 때 관노를 지식인으로 위장하는 데 사용된 적도 있다. 「거창가」의 저자는 공자가 입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도포를 노비에게 입혔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그는 자신이 만인평등주의자는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모든 사람을 대변함으로써 자신만이 아닌 더 큰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 가사의 결말 부분은 조정에 의송(議送)을 써보냈던 윤치광(尹致光)을 위해 하늘에 바치는 기도로 되어 있다. “거창일경 모든 백성/상하남녀로소 없이/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늘님께 비는이다/의송 쓴 저 사람을/무사 방송 뇌여주쇼/살리소셔 살리소셔/일월 성신 살리소셔/만백성 위한 사람/무슨 죄 잇단말가?” 이 기원을 들어주기를 기대하는 대상은 물론 왕이다.
요컨대 「거창가」가 조규익 저서의 부제가 시사하는 것처럼 원래부터 “봉건시대 민중의 저항”을 대변한다고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이 가사의 저자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유리한 차별적 계급구조에 너무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대가 아닌, 거창의 특수한 곤경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던 시기에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게 한 요소가 이 작품에 포함된 것은 사실이다. 「거창가」가 권력남용, 특히 향리에 의해 대개 조세징수와 관련돼 조선 후기에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던 권력남용을 공격했고, 모든 백성의 안녕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런 요소들로 인해 이 작품은 19세기 후반 불공정한 조세와 아전의 갈취에 대한 대중의 저항이 일련의 민란으로 발전되었을 때 제2의 생명을 얻었고, 그 성격이 여러 의미에서 처음보다 더 공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의미가 지방에 국한된 특수한 것이라기보다 공공의 이익에 관련되었다는 뜻에서 공적이었으며, 또한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는 의미에서도 더 공적이었다.
「임계탄」과 「거창가」는 둘 다 어떤 면에서는 왕에게 올리는 상소의 성격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두 작품이 대상으로 하는 청중은 상소보다 더 광범위했으며, 이 점은 「거창가」가 더 두드러진다. 그런 면에서 특히 이 가사가 여론의 표현에 기여한 작품이자 대중이 정치적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촉진한 매체로 여겨질 만하다. 하지만 아래에서 살펴볼 것처럼 이미 18세기 무렵에 가사가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고 유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역사적인 문헌 속의 저항가사
가사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띤 매체였다는 사실은 실록 같은 역사적 자료에서 확인된다. 조선 전기 실록에서 가사(歌詞/歌辭)라는 단어가 등장한 예를 보면 궁정 예식 중에 불렸던 노랫말이라는 의미로만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례는 1700년 이후 변화하게 된다. 가령 1722년에 목호룡(睦虎龍)이라는 인물이 왕을 해치려는 모략에 대해 알고 있다고 나선 기록이 있다. 그런데 왕을 시해하려는 계획들과는 별도로, 모반자들 중의 한 사람이 왕을 중상하고 비판하는 한글 가사를 지었다는 사실도 거론되었다. 이 가사는 모반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혐의를 강화하기 위해 궁궐로 유입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목호룡의 고발이 사실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가사에 정치적 기능이 있다고 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사는 1739년에 다시 한번 반역죄와 관련해 언급된다. 반역의 주모자가 조정에 대한 무척 사악한 공격을 담은 가사를 한편 지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관련된 또다른 기록에는 모반자들의 출신 지역 사람들이 원래 성격이 못된 불평분자들이라서, 사소한 불만거리에도 가사를 지어 정부를 비판하곤 했다는 언급이 있다.
1744년에는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작자미상의 가사 한편이 남문(지금의 숭례문)에 붙어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 불운하게도 이 가사의 텍스트나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그리고 아마도 반역을 공공연하게 선동하는 내용이 담긴 다른 몇편의 가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그 이유는 물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에 대한 역사적 언급을 처음으로 발굴했던 고순희는 실록에서, 그리고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같은 사법적인 문서에서 몇몇 참조할 만한 것들을 찾아냈다.4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 때문에 후세에 전해지지 않은 가사가 공적인 정치적 담론에서 가사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고순희가 정치적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언급한 가사 중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사례 하나는 1799년에 씌어졌는데, 1804년 황해도 지역에서 있었던, 실현되기 전에 좌절된 반역 사건과 관련해 등장한다. 저자는 이달우(李達宇)라는 인물로 한학을 공부한 서민인데, 무과를 통해 벼슬을 얻으려다 실패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쓴 가사에 대해 심문당하자 향리와 지주의 착취를 견디다 못해 집과 논밭을 떠나 걸인이 되거나, 심지어는 도적이 되는 백성들의 곤경을 보다 못해 나섰다고 말했다. 심문 기록을 보면 이달우는 처음에는 좀더 정상적인 청원 방법을 통해 왕에게 자신의 제안을 전달할 것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문 조서의 내용에서 드러나는 가사의 유포 방식도 흥미롭다. 그 내용에 따르면 이달우와 모반자들은 먼저 서당의 학생들에게 작품을 필사시킨 뒤 그 필사본을 평양과 북부 지방의 여러곳에 가지고 가서 지지자를 모았다고 한다.
이달우가 쓴 가사는 많은 면에서 「임계탄」과 「거창가」처럼 시골의 궁핍한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해달라는 열정적인 호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단 가사의 형태로 자신의 견해를 공표한 뒤에 그는 더 과격해져서 반역을 획책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단계로 가면 가사는 더이상 청원의 대안이 아니라, 봉기를 조직하게 된 동기가 된 견해를 유포하는 수단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가사 자체가 반역을 주장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랬다면 오히려 그 과격성 때문에 사람들을 봉기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거창가」의 기능 변화와 유사한 형태의 기능의 변모를 겪은 것이리라. 원래는 중앙정부에 지방정부의 권력남용을 알리기 위해 청원 대신 썼던 작품이 몇십년 후 지방의 상황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진 1860년대에 반란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가사가 언급된 또다른 사례는 1823년, 풍덕이 송도에 병합되었을 때 지방 향교의 학생들이 일으킨 소요가 다른 공동체로 번진 사건과 관련해서이다. 흥미롭게도 여기서는 가사의 창작이 성균관에 보내는 통문과 조정에 보내는 청원과 더불어 그들이 사용했던 저항매체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
고순희는 또한 1862년 진주에서 발생한 민란과 관련되어 창작된 가사도 언급한다. 반란 가담자 중 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 작품은 시위자를 동원하려는 명시적인 목적하에 씌어진 것이었다. 그 가사를 지은 유계춘(柳繼春)은 평민이지만 한학을 공부했고 문맹자들을 대신해 관에 청원문 쓰는 것을 업으로 했던 사람으로, 실정에 대한 항의문을 제출하기 위해 한양에 갔다가 처벌을 받았다. 유계춘처럼 한학을 공부했지만 양반이 아니면서 사회적으로 활발했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저항을 전달하는 매체로서 가사의 잠재력이 성장했으니, 이런 집단의 존재야말로 소통의 관점에서 볼 때 조선 후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발전 가운데 하나다.
20세기 가사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발행된 신문들은 전통적인 매체인 가사를 놀라울 정도로 많이 포용했다. 신문에 실린 메시지들이 구전을 통해 강화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구전에는 산문보다 기억하기 더 쉬운 가사가 이상적이므로, 종종 그날그날의 사건들에 대한 반응으로 가사를 싣는 것이 견해를 유포하는 신문의 기능을 확대시킬 공산이 컸던 것이다.
20세기 초에도 가사의 이러한 역할이 얼마나 큰지는 정치적 견해가 담긴 가사를 다수 수록한 『대한매일신보』와 『대한자강회월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중 국민 스스로 담배를 끊어 국채보상을 하자고 호소하는 내용의 「단연동맹가」에 대해 임형택은 “재래의 가사 형식 속에 국민국가적인 애국의식을 담고 있”다고 평했다. 그리고 1907년 12월 말경부터는 『대한매일신보』의 시사만평란에 정치적 의견을 표현한 가사체의 율문이 매일 게재되었다. 화답도 있어서 이 만평란은 진정한 의미에서 공적 영역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대한매일신보』는 구체적으로 가사의 기능에 대해 보도하기도 했다. 안창호가 연설한 대한협회 총회 자리에서 「심단가(心丹歌)」라는 가사가 불렸고, 의병들 역시 창의가(昌義歌)와 같은 가사를 많이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5
20세기의 전반기 내내 (그리고 때로는 이후에도) 신문과는 별도로 발표된 가사의 창작도 계속되었다. 그 가사들의 내용은 상당히 다양했지만 정치적이거나 사상적인 성격을 띤 경우도 많았다. 흔히 전통적인 장르인 가사를 보수주의와 결부시키고 그것이 근대성과는 상반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장르의 실상을 보면 그런 이분법은 무의미하다. 계몽가사라는 장르명이 알려주듯, 가사는 근대적인 교육과 개혁을 위한 매체로 변신하기도 했다.
결론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전반기에 가사가 여러가지—정치적, 종교적, 혹은 기타의—견해들을 대중 속에 전파하는 장치의 일부였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항과 보통 근대라 불리는 것의 도래 때문에 생긴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이 ‘근대적인 국제관계’를 수립한 1876년보다도 훨씬 이전인 조선 후기에 비롯된 소통방식의 연장이었다. 이 소통방식에는 20세기 초에도 계속 유효했던 몇가지 이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사람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둘째로, 다른 소통방식보다 덜 직접적이었고, 따라서 탄압이나 검열을 더 쉽게 피할 수 있었다. 가사 유통의 다양한—인쇄된 텍스트나 필사본, 암송, 혹은 노래 등을 포함한—방식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유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셋째로, 가사의 미학적 호소력은 그 안에 담긴 주장의 설득력에 도움이 되었고, 그 메시지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까지 유인하는 힘을 가질 수도 있었다.
20세기에 행해진, 정치적 목적을 위한 가사의 활용은 이른바 개항기를 훨씬 앞선 이전 시기 소통의 관행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사가 공적 영역 창조에 기여한 것은 ‘현대’의 도래에 따른 혁신이라기보다 전통의 계승이었다. 나는 한국의 근대가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보다 더 일찍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라는 개념이 역사적 연속성을 간과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면에서 아마도 근대의 개념은 재고되거나 심지어는 폐기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번역: 전승희(全丞姬)보스턴 칼리지 강사, 비교문학 asianl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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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bert Darnton, Poetry and the Police: Communication Networks in Eighteenth-Century Paris (Belknap Press 2010), 145면. 더 자세한 참고문헌은 이 글보다 더 길고 상세하게 이 문제를 논한 졸고 “Kasa, Communication, and Public Opinion,”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20, no. 1 (2015) 참조.↩
- 임형택 『옛노래, 옛사람의 내명풍경』, 소명출판 2005, 45~80면.↩
- 이 가사의 다양한 판본들 사이의 관계는 조규익 『거창가: 봉건시대 민중의 저항과 고발문학』(월인 2000) 참조. 이 글에서 논한 원전도 이 책을 참조한 것이다.↩
- 고순희 「19세기 현실비판사사연구」(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90) 및 「민란과 실전 현실비판사사」, 『한국고전연구』 5권(1999), 236~67면.↩
- 임형택 『한국문학사의 시각』(창작과비평사 1984), 257~5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