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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해줘 고마워요

필립 로스를 기리며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소설의 고독』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상상이라는 일, 일꾼의 상상력

 

2012년 필립 로스(Philip Roth)1는 소설을 그만 쓰겠다고 말한다. 1933년생이니 79세 때이다. 첫 소설집 『굿바이, 콜럼버스』를 낸 게 1959년(첫 단편 발표는 1954년)으로 반세기가 넘는 작가생활인데, 마지막 소설로 남게 된 『네메시스』(2010)까지 모두 스물아홉권의 소설을 써낸 터였다. 당시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소회가 인상적이다. “나는 내 평생을 소설에 바쳤고, 소설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읽고, 쓰기까지 했어요. 글쓰기를 위한 몸부림은 이제 더이상 견디기가 힘들군요. 글을 쓴다는 것은 매일매일의 절망과 굴욕을 의미합니다.” 작가의 만년 대표작 『에브리맨』의 유명한 대목이 생각난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86면) 『에브리맨』이 ‘보통 사람’(everyman)의 죽음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이라면, 『아버지의 유산』은 작가가 실제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가는 시간을 지켜보며 쓴 에세이이자 기록인데, 여기에도 ‘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죽는 것은 일이었고 아버지는 일꾼이었다. 죽는 것은 무시무시했고 아버지는 죽고 있었다.”(278면)

『아버지의 유산』에 따르면 필립 로스의 할아버지 쎈더 로스(Sender Roth)는 1897년 폴란드령 갈리치아에서 랍비 공부를 하다 홀로 미국으로 건너왔고, 아내와 세 아들을 데려오려고 모자공장에 취직한 뒤 그곳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냈다. 아버지 허먼 로스(Herman Roth)는 1901년 그렇게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8학년의 최종 학력으로 온갖 장애물과 싸우며 미국 땅에 뿌리를 내렸다. 그는 하급 보험설계사에서 시작해 유대인 차별을 뚫고 지점의 관리 책임자로 은퇴했다. 작가의 출세작으로 알려진 『포트노이의 불평』에는 매일 아침 변비에 시달리며 보험을 팔러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거리로 나서는 불굴의 아버지 캐릭터가 나온다. 그 외에도 미국 동부 뉴어크의 유대인 동네를 무대로 한 이민자 가족들의 강인한 생존의 이야기는 로스 소설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일터가 모자공장이든 보험을 팔기 위해 두드리는 거리의 열리지 않는 문이든 핵심은 일이고 노동인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가는 삶. 어머니들은 어땠을까. 로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미국의 가사를 위대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그 헌신적인 유대인 이민자의 딸들 가운데 하나”라고 적으면서 특유의 유머를 입혀 부연하는 걸 잊지 않는다.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집안 청소 이야기는 하지도 마라—우리는 집안 청소의 최전성기를 본 사람들이다.”(39면) 여기서 일과 가족은 유대인 이민자들의 세계를 떠받치고 지탱하는 상호 결속된 강력한 두 축이라 할 만한데, 살아가는 이유와 살아야 할 이유가 모두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목가』에서 뉴어크의 유대인 레보브 가문이 2대에 걸쳐 꾸려가는 장갑공장의 역사, 장갑 한켤레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낱낱의 공정에 대한 철저한 묘사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지만, 『울분』의 정육점, 『에브리맨』의 보석상 등이 그렇게 생생하고 정확한 기억과 언어의 창조적 재현을 통해 로스 소설의 중요한 밑그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세계가 곧 소설의 인물들뿐 아니라 작가 자신의 인간 이해가 형성된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 세계에 이르면 인물들은 물론이고 거리와 집까지 펄펄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그렇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일과 노동, 가족에 부여하는 가치 이상의 무언가가 이들의 세계에 있다는 말이며, 이는 좁게 잡아도 동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이민자들의 특별한 역사, 정체성과 분리되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차갑기 그지없는 로스의 세계에서 이들 인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만은 각별히 예외적이다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마냥 긍정적으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차별과 배제, 험한 이산의 역사 속에서 더 공고해졌을 수도 있는 유대인 세계 내부의 억압의 내면화, 금기와 배타성의 강화, 강박적 가족주의 등을 예리하게 해부하기도 한다. 신경증자의 과장되고 뒤틀린 자기항변을 통해 유대인 사회의 온갖 성적·관습적 억압을 기발하게 폭로하고 풍자하는 『포트노이의 불평』은 그 대표적인 예일 테다. 유대인 사회 내의 계층적 차이, 내부에서 희생자를 찾는 배제와 추방의 공포, 유대인의 자기기만과 종교적 맹목의 양상 등이 미묘하게 포착되어 있는 첫 소설집 『굿바이, 콜럼버스』는 미국의 유대인 사회 일각으로부터 ‘자기혐오’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 모양이다. 이민 3세대라 할 수 있는 로스 세대의 경우, 미국으로의 동화, 미국인의 정체성 구축이 더 긴요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다가오기도 했으리라. 로스가 깊은 환멸 속에서 그려내게 될 ‘미국의 꿈’은 그 자신의 것일 수 있었다. 그의 성장기이기도 한 전후의 미국이 일종의 ‘황금시대’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로스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 자손으로 자라나는 가운데 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세상에 대한 특정한 태도와 관점이 소설의 목소리에 강하게 섞여 들려온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태도와 관점을 단순하게 실체화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거기에 완강한 현실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현실주의에도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말 그대로 환상 없는 실질의 세계에 대한 공고한 믿음 같은 것 말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다가갈 수 있고, 인간의 사고와 언어로 파악될 수 있는 세계와 상대하기. 세속주의와 현세주의의 단호한 결합. “딱 한 번만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서 알게 되는 삶”(『아버지의 유산』 277면)에 대한 철저하고 강박적인 집착. 당연히 소설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하나의 일일 수밖에 없다. 죽음에 맞선 숨 한번도 일이다. 그러니 언제든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가는 세상.

『에브리맨』의 주인공이 이혼한 부인과 화해하기를 바라는 딸에게 먼저 해주고, 나중에 장례식에서 딸이 죽음 저편의 아버지에게 되돌려주는 말이 있다.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13면) 여기서 ‘현실’은 일단 이미 일어나버린 것으로 아주 좁게 제한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 다음 『유령 퇴장』에 나오는 조셉 콘래드의 트리플렛(triplet)처럼 ‘세개 한 세트’로 되어 있는 율동하듯 이어지는 문장에서 받아들이라는 요청은 두번 반복된다. 그 반복을 통해 ‘그냥 오는 대로’와 ‘버티고 서서’의 숨은 대립이 이 트리플렛의 핵심으로 드러난다. 흡사 권투에서 가드를 내리고 일방적으로 퍼부어지는 상대의 공격 앞에 서 있는 모습이지만, ‘버티고 서서’는 이것이 전투의 포기가 아님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어떤 식으로든 ‘부정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치러지는 전투가 있는 한,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되, 적어도 일어난 현실은 겪어내는 자의 자리에서 좀더 선명하게 파악될 수 있다. 아마도 이 어름에 로스에게 문학이 하나의 현실적인 ‘일’로 성립하는 또다른 계기가 있는 것도 같다. 그 경험을 최대한 앎의 성찰적 대상으로 삼는 것. 조금 단순화하자면 로스의 소설은 ‘인간 경험’이라는 개별적 혼돈의 무지를 앎의 상태로 전환시키려는 안간힘처럼 보이는데, 소설 쓰기는 그 과정의 노동이자 일인 셈이다. 그리고 로스는 그것이 세상의 다른 일처럼 적절한 공정과 시간이 투여된 인간 노동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소설 안에서 끊임없이 환기한다.

가령 네이선 주커먼(Nathan Zuckerman)이라는 소설가 화자를 등장시킨 일련의 작품들2에서는 소설의 단초가 될 인물을 만나고 그 인물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소설로 재구성하며 써나가는 과정을 좀더 분명하게 노출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소설이 전지적 시점이나 외부의 보이지 않는 관찰자의 자리에서 제시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야기의 발생과 전달 과정은 대개 소설 내부의 청자-화자의 자리를 통해 환기되고 드러난다. 이야기가 제한된 시점의 인물에 의해 ‘만남-듣기-상상하기’ 등 오랜 시간의 공정을 거쳐 구성된 것으로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진실이 최종적인 지위를 주장하지 않는 것도 그 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네메시스』를 예로 들어보자. 이 소설은 “그해 여름 첫 폴리오는 6월 초, 메모리얼 데이 직후, 우리가 살던 곳에서 시내를 가로지르면 나오는 가난한 이탈리아인 동네에서 발병했다”로 시작되는데, 그 뒤로도 소설 도입부에 몇차례 나오는 ‘우리’라는 화자를 의식하며 읽기는 쉽지 않다. ‘우리’에 따라 나와야 할 일인칭 화자가 바로 등장하지 않고 소설은 버키 캔터라는 놀이터 선생의 이야기로 빠르게 넘어가 그를 초점인물로 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소설의 3분의 1쯤에 와서야 폴리오에 감염된 놀이터 남자아이 세명 중에서 ‘아니 메스니코프’라는 이름의 ‘나’가 등장하는데, ‘우리’라는 화자의 괄호가 풀리는 순간이다. ‘나’는 캔터 선생의 감독을 받던 그 놀이터의 아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많은 아이들이 희생되었던 1944년 그해 여름으로부터 27년 뒤 두 사제 간의 우연한 만남에서 소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자신 당시로는 원인과 감염 경로를 알 수 없었던 폴리오의 희생자이면서도 아이들에게 병을 감염시켰다는 과도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인생을 자기처벌의 시간 속에 유폐해버린 캔터 선생의 비극은, 같은 비극의 무대에 있었으나 인생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낸 ‘나’라는 인물을 청자-화자로 하는 형식 속에서 전체적으로 다시 조망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더불어 캔터 선생의 고백, ‘나’를 화자로 하는 전달 과정이 투명해지면서 소설의 이야기에 스며 있는 ‘나’라는 화자의 시선을 음미해볼 기회가 생겨난다. 이야기의 발생적 구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소설의 질문, 작가의 시선 또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중립적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은 『네메시스』를 비롯해서 로스의 많은 소설들에 복합적 울림을 가져오는 듯하다.

사실, 이야기와 소설이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과정을 자기지시적으로 드러내려는 생각은 흔히 알려져 있듯이 모더니즘의 독점적 문제의식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화자의 설정을 포함하는 독자와의 계약을 어느 선에서 유지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라 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은 소설의 주제, 이야기를 드러내고 형성하는 방식, 스타일에 대한 고민 등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일 테다. 필립 로스의 경우는 소설 내부의 화자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형성되는 지점을 가시화해주면서 무엇보다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의 지위가 특권화되는 걸 경계하는 듯하다. 이는 결국 그 화자조차 작가의 몫이라는 점에서 진리 담론으로서 소설의 특권화를 경계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아이러니한 것은 로스의 소설을 읽다보면 문장 하나하나에 일관되게 구현된 단호함이나 전개되는 사태의 철저한 장악에서 작가의 존재, 작가의 목소리를 좀더 강렬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처럼 제한적인 화자의 자리가 전경화되는 지점에서 어떤 완충의 안도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소설은 결국 일인칭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삶에서는 좀처럼 좁혀지거나 극복되지 않는 타자와의 간격을 소설이 허구와 상상력의 이름으로 전유하는 것은 작가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일종의 윤리적 책임을 걸머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시점이나 화자는 그 일인칭의 시선을 객관화하면서 타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장치이기도 할 텐데, 최종적으로는 일인칭이라는 허구까지 포함해서 소설의 물리적 한계를 의식하는 일이 된다. 상상력이 말 그대로 제약 없는 정신활동일 수 없는 이유일 테다. 로스의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그 상상력의 제약과 활동 과정을 좀더 분명히 의식하게 하면서 상상력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의 소설에서 상상력은 타자의 이해라는(그 오작동 가능성에서 언제든 ‘오해’일 수 있는) 인간 노동으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과정을 서사 안에 포함한다. 『휴먼 스테인』에서 주커먼이 콜먼 실크와 포니아 팔리라는 알 수 없는 인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보려 할 때,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능력에 기댄다. “난 상상한다. 난 상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내가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내 일이 된 것이다. 이제 그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전부가 되었다.”(2권 26면)

 

 

2. 단독성의 우주에서

 

로스의 세계에서 상상력이 일이라는 것은 그 말의 낭만주의적 함의를 멀리하면서 지성의 힘을 상상력의 무게중심에 둔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지성의 대두는 상상력의 측면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필립 로스 소설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는 서정적 기억의 압력이 클 수밖에 없는 지점에서도 냉철한 지성으로 통제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맞춤하고 적확한 비유다 싶은 대목도 찬찬히 다시 보면 대개 아이러니한 간극을 두면서 대상의 다른 측면에 대한 지적인 검토를 요청한다. 번역가 정영목은 로스의 문장을 “길게 비비 꼬이면서 사슬처럼 이어지며 전진과 후퇴를 거듭”(『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문학동네 2018, 32면)한다고 표현하는데, 그 전체의 모양새는 집요하고 철저한 사유의 흔적일 수도 있다. 소설 중간중간 진행되는 상황을 정리하고 요약하는 에세이적 진술에서 작가의 지성은 유려하고 거침없이 드러난다. 사실 그 깊이있는 인간 통찰의 진술은 로스 소설을 읽는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유령 퇴장』에서 주커먼이 E. I. 로노프라는 가상의 작가3에 대해 언급할 때, 작품 속 맥락과는 별개로 여기에는 얼마간 로스 소설의 자기언급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묘사하는 게 아니었어요. 이야기 형식 안에서 사색하는 것이었어요. 그는 생각한 거예요. 이걸 내 현실로 만들겠어,라고요.(264면)

 

그런데 작가에게 지성이 단순히 지식의 총체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대한 작가의 태도, 관점과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앞서 로스 소설에서 감지되는 하나의 태도로서 좁은 의미의 ‘현실주의’를 언급한 바 있는데, 비슷한 열도로 다가오는 ‘개인주의’랄까 인간 조건으로서의 ‘단독성’에 대한 강조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볼 만한 것 같다. 가령 흑인에서 유대인으로 인종적 신원을 바꾼 『휴먼 스테인』의 주인공 콜먼 실크의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선택과 그 비밀을 사후적으로 추적하고 재구성하는 소설의 시선에서 내가 느낀 당혹감은 단지 미국사회의 인종적 ‘패싱’(passing)4에 대한 나의 전반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5

『휴먼 스테인』에서 콜먼은 인종을 바꾸면서 가족과 의절하고 유대인 여성과 결혼한다. 그가 그 결혼에서 부인 아이리스의 “덤불숲 같은 꾸불꾸불한 머리칼”(1권 238면)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뒤늦은 자각이 서늘하게 드러내듯 그의 “백합처럼 새하얀 낯바닥”(1권 155면, 266면)도 유전자를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네 아이를 낳는다. 다행히 그 아이들은 흑인의 표지를 드러내지 않고, 두 아들이 낳은 손자들에게서도 격세유전은 없었다. 비밀은 가족 내에서 끝내 봉인되고, 흑인으로 태어난 콜먼은 히브리어 기도문이 낭송되는 가운데 유대인으로 죽어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평생 그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미국 대학의 고전학과에서 강의를 맡은 최초의 ‘유대인’ 교수로 유능한 학장이기도 했던 그는 말년에 닥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인종주의자, 여성혐오자의 오명을 쓴 채 추락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인종적 제약을 벗고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만든 인생의 서사 안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거나 그의 인생은 장례식에서 만난 동생 어니스틴이 주커먼에게 오빠의 비밀을 알려주며 말했듯 “끔찍한 거짓”(2권 213면)에 기반한 삶이었고, 이 거짓은 (실제로는) 흑인인 그가 소위 ‘대학 내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의 제물이 되어 같은 흑인을 멸시한 인종주의자로 내몰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발설될 수 없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비밀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는 그가 대학에서 사직한 뒤 ‘검둥이들’이라는 제목으로 집필에 들어간 장문의 반박 보고서가 끝내 완성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며, 결국 이웃에 살고 있던 작가 주커먼에게 의뢰된 과제는 그의 사후에야 소설로 탄생한다. 그것이 『휴먼 스테인』이다. 소설의 전체 틀은 콜먼 사후에 알게 된 충격적인 비밀로부터 구상될 수밖에 없었겠으나, 『휴먼 스테인』은 그 비밀을 모른 채 시작되었던 질문과 상상의 과정도 함께 보여줌으로써 인간 이해에 얽힌 이야기는 훨씬 밀도를 더한다(쓰고[상상하고], 다시 쓰고, 고쳐 쓰는 전체적인 서사의 리듬 또한 그 이해와 오해의 과정에 대응한다). 그리고 콜먼의 만년에 새로운 생의 기쁨으로 찾아왔지만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포니아 팔리가 가혹한 성적 학대와 남성 폭력의 피해자 자리에서 스스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온 ‘문맹’이라는 또다른 ‘가면/비밀’은 콜먼의 비밀과 거짓, 인생의 오점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전체적으로 좀더 크고 보편적인 인생의 이야기 안으로 소설의 인물들을 옮겨서 생각하게 해준다(낙농장에서 일하는 포니아의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 외톨이 까마귀와 대화하는 포니아를 상상하는 대목6은 특히 큰 울림을 준다). 그런 인물들 속에는 베트남전 참전 뒤 심각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리며 전처 포니아를 스토킹하고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가는’(화자는 거의 확신한다) 레스터 팔리도 포함된다. 해서는 이 소설이 얼어붙은 아르카디아 산정 호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레스터와의 조우, 그 마지막 비밀의 조각 앞에서, 그리고 자연의 질서에서만 가능한 어떤 정화(淨化)의 풍경을 지켜보며 끝날 때 우리는 아주 멀고 긴 시간의 지평 위에서 오래도록 반복되어온 인간의 이야기를 들은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묻게 된다. 콜먼은 어떻게 해서 그 오랜 거짓과 죄의식을 견딜 수 있었는가. 어머니에게 저지른 끔찍한 절연의 가해, 아내와 자식들에게 가한 영구적 기만은 어떻게 대학교수로서의 사회적 존재와 양립할 수 있었는가. 인종차별이라는 불합리한 현실이 전적인 면죄부일 수는 없다. 결정의 시기가 흑인민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이라는 사실도 사태를 부분적으로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매순간 위조하고 거짓 위에 써나가는 일이다. 아마도 이 질문을 가장 치열하게 던진 사람은 주커먼, 아니 로스 자신일 것이다(소설에서 그 질문은 다섯면에 걸쳐 이어진다. 2권 235~39면). 장례식에서 만난 동생 어니스틴의 도움을 받아 구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콜먼의 성장기 삽화들은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이다. 흑인으로서는 유달리 흰 피부를 타고난 콜먼의 그 삽화들은 넘치는 자기애, 놀라운 집중력, 명석한 두뇌, 비밀에 대한 탐닉, 육체적 강인성 등의 개인적 자질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가운데 한 인간의 결정적 선택에 끼어들 수 있는 우연의 가능성까지 섬세하게 상상하게 한다. 가히 대가의 솜씨라 할 만하다. 그러나 결국은 콜먼의 내면을 타고 흐르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야말로 핵심이 아닐까. 대학에 입학한 뒤 얼마 안 되어 그 자신을 하등 인종의 ‘검둥이’로 재발견한 충격 속에서 스스로에게 던졌을 수도 있는 질문과 답들.

 

나를 빨아들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우리라는 것의 폭정, 음흉하게도 ‘다수로 이루어진 하나’라는, 강압적이고, 모든 것을 포함하며, 역사적이고, 피할 수 없는 도덕률 따위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먹히지 않을 소리다. (…) 자아의 발견, 그것이야말로 라본즈에 정통으로 꽂히는 투쟁이다. 단독성. 단독성을 지닌 개체로 존재하기 위한 열정적 투쟁. 독립적 개체로서 존재하는 동물.(1권 202면)

 

여기서 방점은 ‘단독성’의 거의 절대적인 우위와 함께 ‘자아’와 ‘우리’(공동체)의 연결이 자의적인 상태에 놓이기 쉽다는 데 있을 것이다. 콜먼의 형 월터는 일찍부터 흑인민권운동에 관심을 갖고 실제 자신의 문제를 그 사회적 연대의 운동 안에서 풀어간 인물인데, 그가 콜먼을 두고 “자기 자신 이외에는 그 어떤 것을 위해서도 투쟁하지 않는 사람”(2권 218면)이라고 한 것은 정곡을 찌른 느낌이 있다. 물론 동생 어니스틴처럼 두 사람 모두 투쟁했으며, 그 투쟁의 여건과 방식이 달랐을 뿐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소설이 저 ‘단독성’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치명적 오점에도 불구하고(어쩌면 바로 그 오점 때문에) 콜먼의 자아 투쟁은 최종적으로 옹호되고 있는 것 같다.

비밀을 알게 된 뒤 생겨난 더 큰 혼돈 속에서(“이제 나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2권 235면) 주커먼이 콜먼의 묘지를 다시 찾아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는 순간이 있다. 이때 적어도 콜먼이 포니아에게는 비밀을 털어놓았으리라는 것이 소설의 첫번째 가정이 된다. 이는 콜먼이 포니아가 겪은 인생 최악의 바닥(‘매춘’일 수 있다)에 대해 알고 싶어했으리라는 주커먼의 추정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이 가정은 둘 사이의 비밀의 거래 혹은 연대를 전제한다. 그는 어두워져가는 무덤가에서 비밀에 관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오는 순간을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2권 243면) 그 ‘상상’의 장면에서 포니아는 엽총 자살한 사내의 피와 뼛조각, 살점으로 뒤범벅된 오두막을 시급 100달러를 받고 다섯시간 동안 걸레질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 일은, 그러니까 단지 기괴하기만 한 게 아니었어요. 한편으로는 매력적이기도 했어요. 난 그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2권 247면) 매력적이었다니! 그녀에게는 ‘최악의 것’이야말로 인간 진실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게 그녀의 인생으로부터 나온 대답이었다. 이어지는 상상에서 콜먼이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았을 때, 포니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답한다(“나 남부에서 살았잖아요. 난 온갖 혈통의 사람들을 다 만나봤거든요.” 2권 248면). 그리고 그게 바로 콜먼을 좋아한 이유였다. 여기서 우리는 주커먼, 결국 작가의 해석, 관점에 이른다.

 

그가 그녀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에도, 그녀는 빠짐없이 그걸 듣고 있었지만, 그게 거짓말 같다거나, 믿을 수 없다거나, 심지어 기괴하다고 여겨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난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그저 인생처럼 여겨졌던 것이다.(2권 249면)

 

소설이 이 장면의 해결 없이는 쓰일 수 없었던 이유가 좀더 선명해진다. 콜먼은 최소한 단 한 사람에게서는 옹호되고 받아들여져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 『휴먼 스테인』이 콜먼을 그 단독성의 투쟁 안에서 최종적으로 옹호하는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작가 로스가 주커먼의 이름으로 보여주는 이같은 인간 옹호와 이해는 세상의 소설들이 어떤 식으로든 수행하고 있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아의 창조와 투쟁에 얽힌 많은 이야기는 사회적·역사적 차원을 포함하면서도 결국은 단독성의 자리로 돌아와서 끝이 난다. ‘최상’이나 ‘무결’의 이야기가 아니라 ‘최악’과 ‘오점’의 인간 경험이 더 많이 포착되고 그려지는 것도 거기에 모순과 불완전성에서 유래하는 인간의 생생한 현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마다 강세의 차이는 분명히 있고, 우리는 그것을 작가의 ‘세계관’과 관련해서 논의하기도 한다. 그럴 때 로스 소설의 이야기와 인물들이 뿜어내는 완강한 단독성의 기운이 비단 『휴먼 스테인』의 경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은 생각해볼 만한 일인 것 같다. 『네메시스』의 버키 캔터는 미국적 남성 영웅의 범례 안에서 자아상을 형성해낸 인물인데 전락 과정에서 그가 스스로를 공동체의 바깥, 고립과 단절의 영역으로 밀어내는 것은 한순간이다. 비극을 운명화하면서 그는 영웅주의의 공허한 중심에 끝까지 혼자 남는 쪽을 택한다. 『네메시스』는 캔터 선생을 고대 서사시의 무적의 전사로 상상하고 기억하는 가운데 끝난다. 단독성에 대한 경사는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의 질문과 사유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 이상주의나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로스 소설의 차가운 시선, 근본적 불신과도 궤를 같이하는 듯하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의 주인공 아이라 린골드는 하층 노동계급 출신으로 군복무 중 공산주의 이념에 빠지고, 진보적인 정치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다 방송계의 스타가 된 뒤 유명 여배우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소설 화자 주커먼의 어린 시절 우상이기도 한 아이라가 불행한 결혼생활과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파멸하는 이야기는 전후 미국의 사회상에 대한 작가 특유의 생생한 탐사와 보고를 겸하고 있다. 아이라는 철저히 한 시대 미국의 공기 안에서 포착되고 있다. 아이라의 형 ‘머리’는 주커먼의 고등학교 은사로 동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이기도 한데, 훌륭한 교사이자 합리적 시민의식을 가진 이 인물 역시 자신의 동생처럼 혼란스런 시대, 역사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서 미국사회의 모순은 한층 깊은 어둠을 드러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작가의 시선은 사회적 혼란과 모순을 하나의 상수로 두는 가운데 삶에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오점과 오류, 그와 관련된 비밀의 이야기7에 기운다는 느낌을 준다. 머리가 말하고 있는 하나의 핵심: “난공불락의 고독. 아이라의 인생은 그렇게 끝났지. 녀석이 숨을 거두기 오래전에.”(526면) 머리는 흑인 아이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교사의 책임감 때문에 폭력이 만연한 도시에서 아내를 잃은 바 있는데, 그의 회의는 인간 존재의 조건이나 가능성과 관련된 오래된 집단적 생각의 방식들을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내가 살아오면서 노력했듯 종교,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같은 명백한 망상에서 자신을 해방시켜도, 여전히 자신의 선량함이라는 신화는 족쇄처럼 남는다네. 그게 최후의 망상이지. 또 내가 도리스를 희생시키게 만든 망상이고.”(529면) 결국 아테나 산간마을 자신의 작업실에서 엿새 동안 이어진 대화를 요약하며 주커먼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이 모든 게 오류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게 이거 아닌가요? 삶 자체가 오류다. 여기에 세계의 본질이 있다.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찾지 못한다. 그게 인생이다.(533면)

 

사실 주어진 상황과 그것을 겪어내는 인간 감정에 대한 잔인할 정도의 정직한 서술과 함께 펼쳐지는 고통의 서사, 몰락의 이야기는 로스 소설의 강렬한 매혹의 원천을 이루는 것이지만, 끝 모를 전투가 결국 의지할 데 없는 단독자의 고독과 비애 속에 남겨질 때 소설적 울림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어떤 환상도, 이상주의도 끼어들 틈이 없다. 『미국의 목가』에서도 유대인 이민자 레보브 가문이 2대째 지켜온 ‘미국의 꿈’은 환상의 마지막 조각까지 남김없이 파괴된다. “그것은 턱도 없는 일이었다. 가족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 자신도 보호할 수 없으니까. 자신의 과제에서 한눈팔지 않았던 사람, 무질서에 대항한, 인간의 오류와 결함이라는 지속적인 문제에 대한 성전(聖戰)에서 누구 하나 소홀히 한 적 없던 사람에게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2권 285면) 이쯤 되면 로스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시선 하나를 인간의 오류와 결부된 ‘개인’ 혹은 ‘단독성’의 문제와 연결 짓는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지 싶다.

그런데 로스 소설에서 이처럼 감지되는 단독성의 강조, 철저한 ‘개인’의 이야기는 자아의 형성과 투쟁에 관한 근대 개인주의의 보편적인 맥락 안에서도 좀더 특별한 어떤 태도와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그의 소설에서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는 유대나 조화보다 침해와 적대, 단절로 더 많이 파악되는데, 그것이 작가 나름의 냉철한 인간 이해, 현실 진단이라는 점과는 별개로 더 나은 인간 사회의 지평이나 전망은 좀처럼 상정되지 않는다. 어쩌면 필립 로스가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으로 겪어낸 미국의 현대 역사가 그래서일 수도 있다. 어쨌든 로스 소설의 개인주의에는 사회적·공동체적 차원과 (조화롭게든 그렇지 않든) 연결되지 않은 채로도 이야기될 수 있는(혹은 그렇게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공간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작가적 기질의 몫도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로스와 동세대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가 제안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라는 개념8을 떠올려본다. 그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를 지식인을 재정의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일차적으로 철학자나 비평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작가’가 논의의 대상이 되지만, 결국은 ‘시인’ ‘소설가’의 영역에서 그 전형을 구한다. 로티에 따르면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자아 창조의 우연성과 자율성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들에게서 공적 정의(正義), 사회적 덕목은 유일하고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가 자아 창조의 끝에서 자신을 묘사할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종족의 언어만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각자 자신의 낱말들을 찾아내기 위해 고투한다. 물론 로티는 공적이며 공유된 가치와 어휘로부터 자아의 창조를 설명하는 작가, 그 확신에 견주어 제도와 실행의 부족을 상기시켜주는 작가들도 있으며 이들 역시 옳다고 본다. 하지만 양측이 똑같은 언어를 말하게 할 길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결합시킬 방도는 없으며, 꼭 그렇게 해야 할 어떠한 형이상학적 혹은 심리적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 스스로 “‘사적 심미주의’, ‘사회적 무책임성’, ‘엘리트주의적 교만’” 등의 혐의를 받은 바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13면),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를 정의하는 로티의 논의 방식은 ‘메타-어휘’, ‘대문자 이론’을 반대하고, ‘잔인성의 재서술’이라는 ‘내러티브’의 역할에서 ‘자유주의 유토피아’로의 점진적인 길을 찾으려는 수긍할 만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은 개인성과 자율성의 신화와 관련된 20세기 모더니즘의 변형된 판본일지도 모른다. 그걸 따져볼 계제도 아니고, 능력도 없다. 다만 거칠고 단순하게, 로스 소설의 저 완강한 단독성의 경사, 로티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가 만나는 지점에 온갖 부정적 그늘을 거느리고 있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결속이라는 차원에서는 잠정적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실체와 환상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만은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다원성의 인정과 수용에 기반하는 전후 미국식 민주주의의 이상은 냉전시대를 주도한 미국의 세계 패권 확대 과정에서 내부적으로도 흉하게 일그러졌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로스 소설의 경우 현대 미국정치와 현실의 어둠은 나름대로 깊게 그려지고 진술되면서도 그 조망과 검토가 끝내 『네메시스』의 ‘폴리오’와 같은 불운과 재앙, 오류와 징벌의 차원을 넘어서지는 않는 것 같다. 이것은 또한 발 딛고 겪어낸 세계에 철저히 집중하는 로스식의 냉정한 현실주의일 수 있을 테지만, 여기서 단독성의 우주는 ‘미국’이라는 땅에 제한된다.9 그 자체로 외부 없는 세계의 환상. 이것이 숱한 진실의 울림과 매혹에도 불구하고(그리고 로스식으로 인간 존재의 단독성, 인간사의 우연성을 세상과의 아이러니한 간극 안에서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중요한 몫이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내가 로스 소설의 어떤 지점에서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치고, 결국은 그의 소설을 온전히 껴안을 수 없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3. 묘지의 인부

 

『에브리맨』은 묘지에서 시작해 묘지에서 끝난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묘지에 묻혀 애도의 대상이 되는 주인공은 소설의 마지막, 죽기 며칠 전에 부모님이 묻혀 있는 황량한 유대인 묘지를 찾는다. 곳곳에 흙이 꺼져 있고, 대석도 쓰러져 있다. 죽음이라는 필립 로스 소설의 가장 강렬한 테마가 펼쳐지는 무대. ‘그’는 부모님이 “그저 뼈, 상자 속의 뼈일 뿐”(176면)이라는 사실에서 이상한 위안을 얻는다. 그 순간 현실은 오직 뼈들과의 강렬한 연결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는 묘지에서 우연히 오십대 후반의 흑인 인부를 만나 묫자리를 찾고, 흙을 파내고, 뗏장을 덮기까지의 일에 대한 소상한 설명을 듣고 그의 작업 과정을 한참 지켜본다. 인부는 34년째 이 일을 해오고 있으며 알고 보니 ‘그’의 부모 묘도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고마움을 표한다.

 

“아, 그럼 고맙다는 얘길 하고 싶군요. 나한테 해준 말도 다 고맙고, 또 정말 분명하게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 이상으로 구체적으로 얘기해줄 수는 없을 겁니다. 나이 든 사람한테는 좋은 공붓거리였어요.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해주어 고마워요.”(186면)

 

그러면서 조심스레 건네는 50달러짜리 두장. “우리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186면) 생각해보면 ‘정말 분명하게, 더이상 그럴 수 없게 구체적으로’ 말해준 또 한 사람은 필립 로스였다. 그 역시 편견덩어리의 제한적인 화자였을 테지만, 편견과 맹목과 싸우며 알기 위해 썼고 아는 만큼 썼고 인간 이해를 확장시켰다. 그가 그 상상의 과정에서 붙잡아 보여준 인간 경험의 놀라운 생생함, 정확함, 구체성은 아이러니하고 지적인 스타일과 함께 문학의 오래고 위대한 성취로 기억되리라. 그는 온갖 불합리한 바람으로 점철된 필사적인 이야기의 대지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그가 바로 묘지의 인부였다. 필립 로스는 올해 5월 22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먼 나라10의 어설픈 독자지만 고마움과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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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필립 로스의 한국어 번역서는 현재 13종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어 있다. 『굿바이, 콜럼버스』(Goodbye, Columbus, 1959; 정영목 옮김, 2014), 『포트노이의 불평』(Portnoy’s Complaint, 1969; 정영목 옮김, 2014), 『사실들: 한 소설가의 자서전』(The Facts: A Novelist’s Autobiography, 1991; 민승남 옮김, 2018), 『아버지의 유산』(Patrimony, 1991; 정영목 옮김, 2017), 『미국의 목가』(American Pastoral, 1997; 정영목 옮김, 전2권, 2014),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I Married a Communist, 1998; 김한영 옮김, 2013), 『휴먼 스테인』(The Human Stain, 2000; 박범수 옮김, 전2권, 2009), 『죽어가는 짐승』(The Dying Animal, 2001; 정영목 옮김, 2015), 『에브리맨』(Everyman, 2006; 정영목 옮김, 2009), 『유령 퇴장』(Exit Ghost, 2007; 박범수 옮김, 2014), 『울분』(Indignation, 2008; 정영목 옮김, 2011), 『전락』(The Humbling, 2009; 박범수 옮김, 2014), 『네메시스』(Nemesis, 2010; 정영목 옮김, 2015).
  2. 주커먼은 작가의 분신으로 『유령 작가』(The Ghost Writer, 1974)에 처음 등장한 이래 미국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목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휴먼 스테인』 등을 거쳐 『유령 퇴장』에서 ‘퇴장’하기까지 모두 아홉편의 작품에 나온다. 묶어서 ‘주커먼 시리즈’로 불린다. 작가의 자서전 『사실들』은 ‘자전’을 가운데 둔 주커먼과의 서신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3. 주커먼이 신인작가 시절 찾아가 만나는 이 단편소설의 대가는 ‘주커먼 시리즈’에 자주 등장하지만, 『유령 퇴장』에서는 저물어가는 문학의 시대를 웅변하는 유령 같은 존재로 좀더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로노프의 미발표 유작 장편을 그의 개인사의 비밀로 환원하려는 ‘폭력적’인 시도에 맞서, 주커먼은 작가의 상상력이 지닌 공간을 적극 옹호한다. 그는 근친상간이라는 로노프의 비밀을 너새니얼 호손의 그것(이 역시 학계의 “교활하고 증명할 수 없는 추측”이지만)이 로노프의 자기 현실로 재발명되고 상상되었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옹호가 주커먼이 자신의 소설(혹은 상상력)에 대한 믿음을 수행적으로 보증하고 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4. 미국문학에는 ‘패싱 소설’이라는 범주도 있다고 한다. 흑인 여성 메지는 콜먼에게 그런 방법을 찾아낸 게 ‘너’가 처음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한 블록 건너 저런 사람들이 하나씩 있다고 보면 돼.”(248면) 이때가 1950년대 초, 흑인민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다.
  5. 로스의 소설은 대체로 서사가 극적이고 경험의 양상이 지나치게 격렬하다는 느낌도 준다. 함께 미국 3부작으로 묶이는 『미국의 목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도 현대판 미국 영웅의 추락 서사가 읽는 이의 얼을 빼놓을 정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특징으로 이야기한 ‘페리페테이아’(peripeteia, 뒤바뀜)나 ‘하마르티아’(hamartia, 착오)가 너무 맞춤하게 쓰인다는 인상도 있다. 『유령 퇴장』에서 주커먼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런 측면을 작가가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현실의 상상적(소설적) 파악에서 작가가 견지하는 입장이기도 한 것 같다. “하지만 한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양은 허구를 보태지 않아도 인생에서 덧없고 때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격렬함을 보태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충격적인 것 아니냐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아주 아주 드물긴 하지만 어떤 사람은 무(無)에서부터 불확실하게 진화시키며 그런 식으로 보태야만 자신감을 얻는다. 그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삶은 종이 위에 활자로 완벽하게 구현된, 살아보지 않은 삶, 추측된 삶이다.”(194면)
  6. 제목 ‘휴먼 스테인’(human stain)과 관련된 핵심적인 진술도 낙인찍힌 까마귀 ‘프린스’를 찾아간 포니아의 내면을 상상하는 가운데 나온다. “우리는 오점을 남기고, 우리는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자국을 남긴다. 불순함, 잔인함, 능욕, 실수, 똥, 정액, 이런 것 말고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라곤 없다.”(2권 77면)
  7. 아이라는 열여섯살 때 살인을 저질렀고, 머리는 동생의 살인을 은폐한다. 이 비밀의 구도는 『휴먼 스테인』과 유사하다.
  8. 로티는 ‘아이러니스트’라는 명명을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신념과 욕구들의 우연성을 직시하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쓴다. 또한 ‘자유주의’를 “잔인성의 감소,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에 굴욕당하는 일이 줄어드는 과정”, 즉 “자유의 실현이 증식되는 과정”에 대한 소망으로 파악한다.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김동식·이유선 옮김, 민음사 1996, 22~25면.
  9. 『사실들』에서 주커먼은 ‘자전’을 (자기)비판하면서 (소설 속) 부인인 마리아 주커먼의 견해도 일곱 항목으로 첨부한다. 그 여섯번째는 로스가 이 문제를 어떻게든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리아는 영국인이다. “6. 이상해요. 그(로스—인용자)의 해석에 따르자면, 모든 게 그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힘들에 대항한 분투예요. 자신의 자유를 갖고, 그걸 주어버리고, 그걸 되찾고—미국인만이 자기 자유의 그런 운명을 삶의 반복되는 주제로 볼 수 있을 거예요.”(276면)
  10. 『울분』의 주인공 마커스 메스너는 대학을 마치지 못한 채 징집되어 한국전쟁에서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