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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대학은 왜 바뀌지 않는가

분단체제적 인식과 대학개혁

 

 

윤지관 尹志寬

덕성여대 교수. 한국대학학회 초대 회장 역임. 저서 『세계문학을 향하여』 『사학문제의 해법을 모색한다』(공저) 등이 있음. jkyoon@duksung.ac.kr

 

 

1. 대학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올해 들어 급진전된 남북관계는 한반도에서 적대관계의 종식과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전망을 열었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이같은 기본원칙이 확인되고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보장 과정이 실질적으로 진행되면서, 한반도의 남북한 사회를 규정하고 있던 분단체제의 요동이 본격화되었다. 분단체제가 남북의 대결상황에 기반하면서도 각 사회의 지배구조를 고착·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체제의 해체 과정에 따라 우리 사회도 여러 부문에서 변화가 촉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핵폐기와 북한의 체제보장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힘겨루기’와 주변 강대국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 과정이 순탄치 않을 소지도 있거니와, 국내적으로도 분단체제 해체의 전망이 어떤 방식으로 한국사회의 변화에 작용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중장기적으로 그 체제에 기생하던 세력들에게 타격이 될 것은 분명하나, 사회 각 부문에 구조화된 기성질서가 쉽사리 해체되리라고 낙관하기는 이르다.

물론 기득권구조를 해체하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문재인정부의 출범선언이었고 적폐청산이 시대의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국정농단 사태로 드러난 지난 정부의 비정상적 국가운영방식을 시정하고 비리당사자들을 징벌하는 것만으로 사회 속에 뿌리내린 기성 권력구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이 말해주듯 국민의 경제기본권을 확립하겠다는 대표 공약의 이행조차 경제사회 내부의 이해관계들이 충돌하면서 결국 속도조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듯이, ‘적폐’는 마땅히 ‘청산’되어야겠지만 그것이 이해관계를 통해 우리의 일상 속에 얽혀 있고 심지어 우리의 심리영역조차 잠식하고 있다면, 그만큼 지난한 작업일 수 있다.

적폐청산의 이같은 어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분야 가운데 하나가 교육, 그 가운데서도 대학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대학 문제에서 교육부의 대응은 여타 부문에 비해 현저하게 미진하거나 지지부진하다는 비판이 높다. 교육부의 소극성을 의심할 수도 있겠고 오랜 관료주의의 폐습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교육부만이 아니라 새로운 정권이 과연 대학의 기득권질서를 ‘변혁’할 의지나 역량이 있는지와도 연관된다. 교육 부문이야말로 가령 권력기구나 경제제도와도 달리 국민의 시민의식 수준까지 포함하는 문화와 직결되어 있으며 그만큼 기성질서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의 가장 큰 병폐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서열화체제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고, 대선 당시 문재인캠프도 이를 중요한 개혁과제로 삼아 국공립대 통합을 비롯한 대학평준화 기획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현 정부는 서열화체제에 정면도전하여 근본적인 혁신을 수행할 수 있을까? 현단계로 보자면 이념적 지향은 그럴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매우 의심스럽다.

이 문제에 대한 교육부의 딜레마는 대학입시제도 개편 문제를 둘러싼 최근의 사태에서도 드러난다. 교육부는 수능 전과목 절대평가 도입을 입시제도 개선방침으로 정했다가 반발에 부딪히자 이를 철회하고 지난 4월 입시제도 개편방향 결정을 신설된 국가교육회의에 위임하였다. 선발 방법, 시기, 수능평가방법 등 쟁점 사안에 대해 ‘숙의 공론화’를 거쳐 결정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국가교육회의는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포함된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여론수렴과 숙의 과정을 거쳐 지난 8월 초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국가예산 수십억원을 쓰면서 국민대표 수백명을 모집하고 전국을 돌며 여론수렴을 거친 후 내놓은 결과는 그야말로 ‘태산명동에 서일필’ 격으로 빈약하거니와 그것조차 정책에 반영할 정도로 유의미한 내용이 아니었다.1 숙의 과정을 둔 점이 단순한 여론조사와 다르기는 해도 입시제도 관련 논의는 이미 나올 대로 나와 있어서 새삼 ‘공론’할 사안도 아니거니와, 아무리 ‘집단지성’이 발휘된다지만 불과 몇개월의 시한을 둔 시민집단의 토의로 뚜렷한 결론이 나오기는 애초부터 무망한 일이었다. 물론 대학입시 개편이 늘 학부모들의 관심사이고 입장도 엇갈리는 만큼 여론에 입각해서 최종결정을 하자는 것이 교육부의 방침이겠으나, 구체적인 정책방안까지 여론에 맡기자는 발상 자체가 무책임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육부가 대학입학의 ‘공정성’에 몰두하는 사이, 정작 대입제도 문제를 이처럼 국민적 관심사로 만든 연원을 놓칠 수 있다는 점이다. 교육부 스스로 국가교육회의에 쟁점을 이송하면서 분석하다시피 “지속적 교육혁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입시위주 교육이 여전”하고, “학력경쟁으로 인한 사교육이 심각한 사회문제”라면 그것이 어떻게 입시제도만의 탓이겠는가? ‘망국적’이라는 판에 박힌 형용어가 붙을 정도로 세칭 일류대를 향한 학벌경쟁이 한국교육 전반을 병들게 하고 대학입시제도 개편을 극도로 민감한 정치적 의제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서열화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 방안 없이 입시제도 개편에 매달리는 것은 본말을 전도한 격이다. 결국 입시제도 개편을 둘러싼 이 해프닝은 서열화체제의 개혁과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교육부의 무능함을 감추는 방편이 아닌가 하는 혐의조차 엿보이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여론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고 정책을 결정하는 데 시민사회의 공론과 숙의를 활성화하는 것이 나쁠 리 없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여론이 시대의 흐름이나 심층적인 국민의 여망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대학입시에 대한 과도한 관심의 이면에 서열상 좋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자식을 보내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고 학력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우리 현실에서 그러한 욕망 자체를 나무랄 수만도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대학이라는 기관 자체가 사회불평등 구조의 반영이자 그것을 재생산하는 기제라는 비판이 높아져가고 그 핵심에 악화일로에 있는 서열체제가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다. 이 불평등구조를 변혁하자는 것이 촛불민심인 이상 일류대를 향한 욕망 한편에 서열화된 대학구조를 개편해달라는 요구가 여론의 깊이에서 흐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폐청산과 새 질서 건설이 시대정신이 되고 있는 시기에 대학개혁의 지지부진은 한국 대학의 현실을 보는 좀더 복합적인 시각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대학 현안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큰 변화가 없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대학의 서열화구조는 한국사회의 기성질서와 맺어진 한편으로 세계적인 추세와도 맺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실상 경쟁 위주의 신자유주의는 비단 우리 대학만이 아니라 지난 수십년간 세계자본주의의 중심 이념이기도 했다. 한국 대학의 구조적 문제가 전지구적인 변화와 연계되어 있고 우리 내부의 욕망과도 결합되어 있다면, 과연 현상을 극복해낼 단초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대학 문제를 남한의 일국적 관점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와 관련하여, 그리고 그것의 한반도적 구현이라고 할 분단체제와 관련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이런 물음들에서 비롯한다.

 

 

2. 분단체제론적 인식과 한국 대학의 현실

 

한국 대학의 현실을 남북관계와 관련하여 그리고 분단체제적인 인식과 관련지어 말하는 것은 다소 생소하게 여겨질 수 있다. 남북관계는 어디까지나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여겨지기 십상이거니와 분단을 하나의 체제로 인식하는 관점도 일반에게 그리 익숙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남북관계의 변화는 비단 한국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문화 등 여러 부문에 영항을 미치고, 교육현실도 체제화된 분단구조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가령 반공교육이 일반화되고 학생자치조직 대신 학도호국단이 존재했던 독재정권시대는 차치하고라도, 앞에서 언급한 대학입시 개편 문제만 해도 그렇다.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권과 대학입시의 공정성 문제는 어느 사회에서나 제기되지만, 그것이 남한사회처럼 ‘전쟁’이라고 칭할 정도의 과도한 경쟁을 유발한다면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대학입시 과열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높은 대학 진학률 탓일 수도 있다. 현재는 70% 이하로 내려갔지만 한때 80%를 상회했을 정도로 한국의 고등교육 진학률은 대중화를 넘어서 보편화 단계에 들어선 지 오래다. 유럽 국가들이 지식중심시대를 맞아서 고등교육 진학률을 높이는 정책을 쓰고 있지만 그 목표가 50% 수준인 것과 비교된다. 그러나 높은 진학률 자체가 사회문제일 수는 없고 오히려 국민의 총체적인 의식수준을 높이는 바탕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높은 진학률 및 입시위주 교육과 사교육 번성의 배경에는 한국사회의 극심한 학력주의와 일류대 진학을 최상의 교육목표로 삼는 풍토가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한국 학부모의 교육열과 유교적인 전통에서 찾는 시각도 있으나 그것은 일면적이다. 한 경제학자는 한국의 높은 대학진학률은 경제적으로 대학진학에 따른 투자대비수익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데,2 사실 좋은 학벌이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획득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상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유별나게 심각한 학벌경쟁이 우리 사회의 특성이 된 데는 이같은 현상을 낳은 구조적 요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분단상황이 초래한 한국사회 특유의 분단체제적인 계기들이 작용했을 소지가 없지 않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국사회를 분단체제론의 관점에서 읽어온 사회학자 김종엽의 관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한국사회의 과도한 경쟁적 교육열은 분단체제가 탄생시킨 우리 사회의 ‘지위경쟁적 평등주의’에 기인한다고 본다. 한국사회는 식민지에서 벗어나자 분단과 전쟁으로 뿌리 뽑힌 사회가 되었고 사회를 지탱하는 연대감이 상실되면서 모든 것이 평준화된 상태에서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한반도에 분단이 고착되면서 남한사회는 우경화되었으며 여기에 ‘연대 없는 평등주의’가 결합하여 나타난 개인적인 지위향상의 추구가 “우리 사회에서 뿜어져 나온 놀라운 수준의 교육경쟁의 근원”이라는 것이다.3 김종엽의 분석은 어떤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출세지향적 삶의 지향에 남한사회가 과도하게 사로잡혀 있는 현상을 분단체제라는 한반도 특유의 구조적 원인과 연관지어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분단체제론은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을 토대로 세계 자본주의체제와의 관련 속에서 우리 사회의 국지적인 특수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담론이다.4 즉 동서냉전의 소산인 한반도의 분단이 남북한 사회 모두를 규제하는 체제로 자리 잡았고, 이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기득권구조가 남북 각각에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분단체제는 그것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서 일정한 독자성을 지니지만, 그 상위체제라고 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반도적 구현이기도 하다. 분단체제는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특수여건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전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벗어난 것은 아니며 다만 세계체제가 좀더 직접적이고 국지적으로 한반도에서 작용하는 하위체제인 셈이다. 남한사회에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운동이 궁극적으로 세계체제의 균열과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에 대한 지향을 내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분단체제론은 우리 사회 변혁운동을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동시적 과정’이라고 보는 ‘이중과제론’과도 맺어져 있다. 가령 분단체제 극복운동은 한반도의 분단을 철폐하고 새로운 형태의 정부—복합국가든 남북연합이든—를 수립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근대성의 추구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선 사회상을 모색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탈근대적’ 지향을 동반한다. 남한사회에서 이는 분단체제와 결합되어 있는 기득권구조를 해체하고자 하는 근대사회 내부의 싸움인 동시에 월러스틴적인 의미에서 반체제활동에 해당하는 근대극복의 동력이기도 한 것이다. 분단체제론을 통해 대학을 보는 관점은 드물지만, 대학이 한국사회의 내부적 조건과 더불어 세계체제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학 문제의 복합성을 사고하기에 유용한 시각일 수 있다.

분단체제적인 인식을 통해 한국 대학의 현실을 바라보면 대학개혁의 과제에 대한 좀더 총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입시제도 개선에서부터 등록금 문제, 대학 구조조정이나 사학비리 척결 같은 당장의 현안에서부터 대학의 세계적인 경쟁력 제고와 4차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기술혁신시대의 지식생산에 이르기까지 대학 문제는 단순히 교육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여러 부문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것은 교육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문제이기도 하고 복지 문제이기도 하다. 대학 문제는 경제든 정치든 문화든 어느 한 분야의 과제만이 아닌 ‘융복합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분단체제론은 거대담론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사회를 그 구체적 현실에 즉하여 보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형태로 현현하는 대학의 제 문제를 총체적이고 구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현재 당면한 적폐청산의 과제부터가 그렇다. 대학에서 ‘청산’해야 할 가장 큰 적폐가 무엇인가는 보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국 대학의 적폐라면 일차적으로는 고질화된 사학비리나 대학의 자율성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간섭이 떠오를 수 있다. 실제로 보수정권 내내 사학비리가 빈발하고 분규가 끊이지 않았고 국립대의 총장선거에 정부가 직접 개입해서 결국 한 국립대 교수의 투신자살까지 야기하는 등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과거 정부의 드러난 ‘적폐’임은 분명하고 마땅히 ‘청산’되어야 할 것인바, 실상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사학비리 척결이 거듭 강조되고 대학의 자율적인 총장 선출과정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교육부장관이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리당사자를 징벌하고 총장선출을 대학의 자율에 맡긴다고 해서 대학의 누적된 폐습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학비리는 겉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이고 더 깊은 병폐는 사학의 전근대적 지배체제를 가능케 하는 법적·문화적·사회적 관행에 있다. 학교법인인 사학에 ‘오너’(소유주)가 따로 있을 수 없음에도 사학 소유권에 대한 오랜 관습은 사학분쟁조정위원회 같은 국가기구의 판단 속에도, ‘사학에는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대다수 정치권과 일반 시민의 의식 속에도 자리 잡고 있다. ‘적폐’는 정치사회뿐 아니라 시민사회 내부에까지 잠식한 관습과도 이어져 있어서 ‘청산’은 시민의식의 함양 과정이기도 하다. 대학의 자율성에 대한 부당한 간섭도 마찬가지다. 국립대에 자율적인 총장선출권을 되돌려준다 하더라도 과거 시행되던 교수들만의 총장직선제를 복원하는 것으로 과연 대학의 진정한 자율성 회복이 가능해질까? 교수들의 총장직선제는 1987년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독재정권의 일방적 총장임명 관행을 혁파한 쇄신이었지만, 한편으로 정규직 교수에게 모든 권한과 재원이 집중되는 교수중심주의의 한 반영이기도 하다. 사실 대학민주화는 직선제냐 간선제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규직 교수가 독점해온 대학의 기득권을 분산시키고 지금까지 과소대변되어온 학생 및 비정규 교수 등 여타 구성원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며, 이는 대학현장에서 오랫동안 독점적 권한을 누려온 교수 기득권과의 힘겨운 싸움을 예기하는 것이다.

적폐란 결국 한국사회의 기득권 질서가 만들어낸 불공정한 제도와 폐습이라고 할 때, 그 질서와 공생하면서 이를 재생산해온 분단체제가 시야에 들어온다. 한국 대학의 가장 뿌리 깊은 병폐로 여겨지는 사학 문제의 ‘고질성’의 기원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비리를 저질러 법의 심판을 받은 사학경영자라 해도 마치 불사조처럼 되돌아와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사학재단의 이익이 분단체제 속에서 형성된 남한사회 기득권세력의 이해관계와 철저하게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학비리는 최근 일본 총리가 연루됐다는 보도에서도 보듯 한국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 버금가게 고등교육에서 비중이 높은 일본의 사립대학들은 한국과 같은 족벌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거니와, 당연히 한국에서와 같은 고질적인 사학분규도 없다. 유럽의 대학은 대부분 국립이어서 사립 문제 자체가 없고, 사립이 30% 정도의 고등교육을 맡고 있는 미국만 하더라도 고액등록금으로 악명 높기는 하지만 사학 설립자 및 그 가문과는 무관하게 공영적인 거버넌스를 갖추고 있다. 고질적 사학 문제는 사실 한국 특유의 현상이라고 봐도 좋은데 그만큼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사학권력이 교육계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분단체제를 등에 업은 남한사회의 기득권세력과 결합하고 수구세력의 가장 중요한 뒷배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은 다음 두가지 사례에서 뚜렷해진다. 하나는 사립학교법 개정을 둘러싼 갈등이 우리 사회의 보혁대결을 극단으로 몰아간 사태다. 2005년 당시 노무현정부의 4대 개혁입법 가운데 하나인 사립학교법 개정은 사립대학에 대학 평의원회 설치를 의무화하고, 이 대의기구에 대학의 주요사항을 의결하고 예산을 심의할 권한과 전체 이사진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개방이사 추천권을 부여하며, 친족의 대학운영 참여를 크게 제한하는 등 사학의 민주적 운영을 위한 초석을 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개혁법안은 통과된 지 2년 만에 개혁성이 현저하게 약화된 현행 사립학교법으로 재개정된다. 이를 둘러싼 갈등에서 그야말로 보수총궐기라고 할 만한 저항이 일어났는데, 당시 야당대표였던 박근혜가 사립학교법 개정 목표가 “사학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친북·반미의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무려 6개월에 걸친 장외투쟁을 주도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민주정부 집권 시기에 사학비리나 분규로 쫓겨났던 전국 20여개 대학의 구재단을 이명박정부가 ‘대학 정상화’의 이름으로 모두 복귀시킨 사건이다. 대학이 엄연히 공익성을 가진 비영리 학교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인의 재산인 양 주인에게 돌려주는 식의 시대착오적 정책시행을 대법원이나 사학 분쟁조정위원회 같은 국가기구가 법적으로 뒷받침한 것이다.

보수권력의 이같은 작태는 사학과 권력이 결탁하게 된 역사적 연원을 돌이켜보게 한다. 애초 사립학교법을 제정한 것은 사학비리 척결을 내세운 박정희 군사정부였다. 문제는 개별적인 비리사학에 대한 징벌이 오히려 사학의 전근대적 지배형태를 용인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해왔다는 것이다. 사립학교법을 통해 독재정권은 해방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고등교육기관들을 공적인 관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통제하는 한편 사학재단에 인사·재정 등 모든 권한을 집중시켜줌으로써 대학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보장한바, 이것이 향후 사학과 정치권력이 결탁하는 밑바탕을 이루게 된다. 사학재단의 권력화 과정이 한반도에 분단체제가 형성·고착되던 시기와 때를 같이해왔다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해방 이후 새로 생겨난 많은 사립대학이 정부의 토지수용에 대응하기 위한 지주계급의 재산도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거니와5 20년 가까이 지속된 박정희정권에서 이들 친일지주세력과 그 후손들이 족벌지배체제를 구축하면서 국가의 비호와 고등교육 보편화의 추세를 타고 분단체제의 수혜자이자 수호자로 자리 잡은 것이다.

분단체제가 지배적인 기득권구조를 만들어낸 것은 비단 사학만이 아니다. 국립과 사립 가릴 것 없이 한국 대학의 대미 종속성은 뿌리 깊다. 한국의 교수들은 국내적으로는 엘리트층이면서 국제적으로는 글로벌 지식체계의 하위에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는 주변부 지식인의 전형으로, 한 사회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배받는 지배자’로 군림해왔다.6 이같은 대미 종속성은 해방공간에서 미군정이 주도한 미국식 교육제도의 도입 과정에서 주로 미국 대학 유학생 출신의 친미적이고 보수적인 지식인들이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냉전시대 한반도에 분단체제가 굳어지면서 소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첨병 구실을 해온 남한의 정치환경이 학계 기득권구조를 더 공고하게 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반체제적인 지식인들이 대학을 통해 배출되고 활동하기도 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권한을 교수가 독점하다시피 하는 학내 권력구조가 대학에 자리 잡은 배경에도 이같은 분단체제의 작동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학에 형성된 기득권은 주로 교수 충원을 통해서 재생산되는데, 김종영은 한국 대학의 교수임용 사례조사를 통해 파벌정치와 학벌우선주의가 어떻게 작용하여 일종의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를 낳는지 분석한 바 있다.7 그에 따르면 한국 대학의 교수임용 과정은 “학위의 글로컬 위계와 학벌 정치, 인맥과 학과 내부 정치, 그리고 가부장적 유교문화와 조직문화의 영향” 등 세가지 요소가 작동하며, 한국 대학의 이 문화적·조직적 특성이 학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비합리성과 비루함’을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상위 서열에 속하는 대학일수록 모교 학부 출신 및 미국, 특히 연구대학 학위자의 비율이 높아지는 결과를 빚는 것도 이와 유관하다. 이같은 지적은 주변부나 반주변부의 상황에서 서구적인 의미의 보편주의가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 등 각종 차별주의와 결탁하는 양상을 말한 월러스틴의 관찰과 통한다. 다만 여기서도 역사적으로 분단체제가 한국 교수사회의 파벌주의와 가부장적 의식을 번성하게 한 점을 동시에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서구적인 보편주의의 득세는 학문에서의 ‘주체적’ 연구를 빈약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꼭 ‘주체적’이 아니더라도 한국사회를 연구함에 있어 한반도의 현실을 규정하는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이 필수적이나, 이같은 실사구시적인 학문 지향은 학계의 기득권구조 속에서 ‘반체제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8

사학 문제든 학문의 종속성이든 한국 대학의 주변부 혹은 반주변부적 성격이 우리 사회에서 쉽사리 극복되기 어려운 것은 한국 대학의 이 두 고질적 문제가 세계체제의 한반도적 구현이라고 할 수 있는 분단체제의 뿌리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전근대적 관행이 남아 있는 사학운영을 근대화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고 또 현재 국면에서는 핵심과제이지만 그것으로 자본지배의 환경까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또 학문의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도 서구적 근대성의 성취에 깃든 ‘탈근대적’ 문제의식을 배제하고서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근대에 적응하되 그러한 적응을 통해, 혹은 그것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비인간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근대극복 지향이라는 ‘이중과제’는 대학의 경우에도 적실성을 띠고, 특히 분단체제의 해소 전망이 열리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더욱 그렇다.

 

 

3. 대학 서열화와 사회적 불평등 문제

 

분단체제 극복의 전망이 열린 근저에는 북한과 미국 및 중국의 이해관계를 포함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깔려 있지만, 문재인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의지가 주효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같은 진전이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변화는 우리 사회의 시민적 요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촛불항쟁은 단순히 국정농단 종식과 정권교체의 요구만이 아니라 분단체제에 기생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적폐를 누적해온 기존 지배구조에 대한 해체의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촛불항쟁이 지닌 이같은 ‘혁명성’은 정권의 수평적 교체 이상의 과제를 현 정부와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최저임금 논란에서 엿보이듯 우리 사회의 심화된 불평등구조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개혁작업에는 민중의 일상과 의식 속에도 존재하는 기성질서 요소들과의 싸움이라는, 그람시(A. Gramsci)적인 의미에서의 진지전이 요청된다.

입시과열이 말해주는 것처럼 한국 대학의 경우 서열체제는 사회불평등의 한 바로미터가 될 정도로 구조화되어 교육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열망을 왜곡하는 기제가 되어 있다. 대학기관 자체가 사회불평등과 양극화를 반영하는 수준을 넘어서 확대재생산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대학에 일정한 서열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체제화되어 사회 내부의 양극화를 심화한다면 이 서열화체제를 어떻게 바꾸어내느냐가 대학개혁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토마 삐께띠(Thomas Piketty)가 『21세기 자본』에서 분석하다시피 지구화와 더불어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는 것이 미국의 추세인데,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9 물론 상위서열의 대학에 반드시 상위계급 출신만이 진학하는 것은 아니고, 일정한 평가기준을 통해서 ‘능력주의’가 작동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기회의 문은 극도로 좁아져 있다. 능력 자체가 부와 결합하여 형성되는 현실에서 상위대학 입학의 여건은 이같은 문화자본을 향유하는 계층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삐께띠는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을 더 심화시키는 추세를 인정하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해 고등교육에 대한 공공적 투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10 그렇다면 결국 고등교육을 위한 공공적 자원의 배분이 과연 불평등을 완화하는 방향인가 아닌가가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대학의 경우 지구화를 계기로 대학의 기업화 현상이 더 굳어지고 대학 간의 서열화가 더 심해지는데 이는 사회적 불평등이 악화되는 추세와 맥을 같이한다. 국제적 대학랭킹에 따라 미국 대학의 서열경쟁은 더 치열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서열상 최고의 대학들은 고소득가계 출신 학생들로 채워지고 있다. 원래 미국은 주립대학을 중심으로 한 공교육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고 특히 4년제 대학 외에 지역마다 대부분 국고 지원으로 운영되는 커뮤니티 칼리지가 있어서, 일정한 수준의 교육기회를 저소득층에게 제공하는 통로를 열어두고 있다.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캘리포니아주로, 1960년대부터 확립된 캘리포니아 주립대 체제는 4년제 대학을 연구중심대학(UC)과 교육중심대학(CSU)으로 특성화하여 각각 일정한 학력 수준의 학생들을 입학시키는 한편, 고등교육 수요의 절반 정도는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는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CCC)가 담당하게 하고 상위대학으로의 편입 폭을 넓혀서 대학진학의 두번째 기회를 열어두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추세와 연방정부의 예산삭감 등으로 인한 재정압박이 심해지면서 한 교육학자가 ‘캘리포니아의 꿈’이 끝났음을 선언할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다.11

미국화는 결국 대학의 서열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악순환을 초래할 공산이 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령 EU(유럽연합) 국가들이 볼로냐협약을 통해 미국식 학제를 도입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그러나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의 대학체제는 주로 국립으로 운영되어 소득격차에 따른 기회불평등이 완화되어 있고 인격형성(Bildung)의 전통이 강할뿐더러 특히 독일어권이나 노르딕 국가들의 경우 대학기관들이 거의 ‘평준화’되어 있어서 서열이 큰 의미가 없다. 미국화가 세계적인 추세인 면은 있으나 그것을 단순히 추종하는 데 머문다면 우리 대학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며, 따라서 개혁의 방향은 마땅히 대안적인 대학체제를 모색하는 쪽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은 기대 이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입시제도 개편에서 보여준 교육부의 무능이 과도한 대입경쟁의 근원인 대학 서열화체제 문제에 대한 정책적 접근의 부재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듯이 대학 재정을 배분하는 문제에서도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 대학은 학령인구의 감소로 인해 대규모의 조정국면에 들어서 있으나 이 구조조정은 대학서열화와 사학 중심의 왜곡된 고등교육체제를 재편할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 정부의 대학 구조조정정책은 과거 박근혜정부가 수립한, 대학 간 ‘경쟁’을 통한 조정방식의 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상위대학 몰아주기와 하위대학 퇴출이라는 구조조정 방식으로는 서열의 상위일수록 더 많은 지원과 혜택을 받는 반면, 주로 중하위층 출신 학생들이 재학하는 중하위 4년제 및 전문대의 교육환경은 더 악화될 것이다. 즉 상위층 출신 학생들은 유리한 경제적·문화적 자본 덕에 더 수월하게 상위대학에 진학해서 더 많은 재정지원을 누리고 더 좋은 직장을 얻게 되는 반면, 하위층 출신 학생들은 그만큼 더 큰 불이익에 노출되는 악순환이 구축되는 것이다. 정부가 아무리 서열화를 완화하겠다고 공언해도 실질적인 예산배정이나 재정정책에서 불평등구조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을 취하는 이상 과연 구조화된 서열화의 폐단을 어느 정도 개혁해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현재의 구조조정정책은 한국 대학이 사회불평등 심화와 교육을 통한 유동성 저하라는 악순환구조, 즉 미국 모델을 따르고 있다는 위험신호를 던진다.12

사실 한국 대학의 체제개편과 관련하여 정부가 서열화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기획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하나는 진보학계의 오랜 대학 평준화 기획이라고 할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 구축이고 다른 하나는 공영형 사립대학 육성이다. 전자는 전국의 국공립대학을 통합하여 공동선발 및 공동학위 수여를 원칙으로 네트워크화함으로써 서열을 없애고 평준화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사립대학에 공익이사 중심의 지배거버넌스를 수립하는 조건으로 운영비를 일부 지원하여 공영화한다는 것이다. 이 두 기획은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제고한다는 새 정부의 국정기조에 부합하는 정책으로, 만약 실제로 구현된다면 현재의 대학서열체제를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는 대학개혁의 한 축이 될 만하다.

그러나 두 기획 모두 새 정부 출범 후 애초의 의도가 무색할 정도로 후퇴하는 징후가 뚜렷하다. 우선 국공립대통합네트워크의 발상 자체는 획기적이나 국공립이 전체 대학의 15% 정도에 불과한 한국의 현실에서 대학 전체에 형성된 서열체계 개편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임에도 그 실현을 위해 지역 거점 국립대에 서울대 수준의 예산지원을 전제하고 있다. 이는 국가 고등교육 예산의 많은 부분을 국공립대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빚는다. 결국 올해 예산에서는 ‘대학의 공공성 제고’ 명목으로 거점국립대에 대한 재정지원을 일부 증액하는 데 그쳤다. 더 큰 문제는 공영형 사립대에 대한 정책의지 약화와 방향 왜곡이다. 공영형 사립대 설립의 원래 취지는 전근대적 지배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학들을 공익이사가 중심이 되어 운영하는 ‘공영형’으로 바꾸고 그 대신 대학운영비의 일부를 정부재정으로 지원한다는 것이다. 이 기획은 현재 진행 중인 대학 구조조정 과정에서 조정대상이 될 대학들이 해당 지역에서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이 제도의 도입 방침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내용은 많이 달라졌다.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정책공약에서부터 “장기적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사립대학”을 대상으로 한다고 명시했거니와, 현재는 전국적으로 서너개 정도의 대학을 선발하여 시범사업으로 시행하는 방식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물론 시범사업을 발전시켜 장기적으로 이 모델을 확장 발전시켜나갈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문제는 현재의 대학 구조조정 방향이 공영형 사립 설립의 취지와 상반된다는 점이다. 공영형 사립대는 족벌지배 등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부실하게 운영되는 사립대에 재정을 투입하여 공공적인 기관으로 만들자는 것인데, 대학 구조조정정책은 일률평가를 통해 이같은 대학들을 정리하자는 쪽이기 때문이다.13 한국 고등교육의 미래가 미국형이냐 북구형이냐의 갈림길에 있다면, 현재 교육부의 대응은 이념적으로는 후자를 지향한다고 주장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전자의 길을 밟고 있는 이중성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물어볼 시점이다.

 

 

4. 결: 다시 대학이란 무엇인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인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촛불민심의 요구라면, 과연 대학개혁은 이 민주화의 과정과 어떻게 맺어지는가?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지만, 오늘날 대학을 ‘민주화’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리 단순치가 않다. 대학은 이미 국가와 시장의 요소가 속속들이 틈입해서 상호작용하는 공간이며, 일국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지구적 질서 속에 편입되어 움직이고 있다. 이러할 때 과연 대학의 자율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이것이 사회의 민주화와 가지는 관계는 무엇인지, 한마디로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질문하게 된다. 대학이 철저하게 서열화되어 있고 국가정책이나 심지어 ‘여론’조차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다면, 아무리 자율성을 보장하고 민주적 절차를 갖추더라도 결국 현 상태의 권력관계를 용인하는 형식 이상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국내적인 현실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 또한 문제를 어렵게 만든다.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 기구 역할을 해왔던 근대대학의 이념은 이미 종식되었고, 대학도 자본의 노예가 되었다는 비관적 판단이 대세를 이루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세계적으로 대학의 근대적 역할은 종언을 고한 것일까? 그리고 한국의 대학도 그같은 소멸의 국면에 봉착해 있는 것일까? 칸트 이래 민족문화의 형성과 보전, 그리고 교양 있는 민주시민의 양성을 통해 근대국가의 형성과 발전을 뒷받침하던 대학의 역할은 지구화된 현실에서 의미를 잃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두가지 사항을 고려할 수 있다. 하나는 지구화된 현실에서 대학이라는 기관 자체의 용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같은 반주변부적인 여건에서 서구 대학과는 다른 대학의 사회적 역할이 세워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부정적인 관점도 있겠지만, 오늘날 대학이라는 기관이 비록 상시적 위기국면에 있다 할지라도 그 비중과 영향력을 고려하면 사회변화를 위해서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제도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자의 물음에 대해서 대학의 죽음과 폐허, 그리고 자본화에 대한 언설들이 넘치지만 다른 한편 기술공학적 공리주의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인간다움과 사회상을 지향하는 사유의 원천에 늘 대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F. R. 리비스가 20세기 중엽 영국 대학을 두고 한 말처럼 “전문지식 훈련을 일반지성, 인간문화, 사회양심, 정치의지와 효과적으로 맺어주”고 인간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고 갱신해내는 지적활동이 가능한 곳이 대학을 제외하고 찾기 어려운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14 칸트는 『학부들의 논쟁』에서 대학은 제도 속에 있으면서 제도에서 독립된 ‘이성’의 관리자라는 모순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했는데, 이 근대대학의 이념은 대학이 지구화 이후 자본주의체제에 종속·지배되는 가운데서도 끊임없는 질문과 비판의 거소로 남으려는 활동 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칸트의 당대적 의미를 재검토한 데리다가 “대학이 닫히고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대학은 이 모순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던지는 그 물음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일 것이다.15

한국의 대학이 처한 세계체제에서의 반주변부적인 조건에 대해서도 비관보다는 더 적극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사학의 전근대성이나 학문의 종속성 같은 부정적 효과들이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한국 대학의 항시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대학은 독재정권 시절 저항운동의 산실이기도 했고 자유주의적인 저항에서부터 민중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변혁운동의 동력이 되어왔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반주변부는 한편으로는 세계체제를 운영할 중간관리자를 양성함으로써 체제의 안정에 기여하지만 내부적으로 다른 어떤 곳보다 사회운동의 토양이 풍성한 곳이기도 하다. 이같은 이중적 조건에서 반주변부는 근대를 달성하고 활용하면서도 체제 자체에 대한 질문과 비판이 활성화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에 더욱 열려 있는 조건을 이루고, 이것은 한국 대학의 가능성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 대학은 지구화시대의 세계적 추세인 ‘미국화’에 동참하여 대학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게 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공공성을 강화함으로써 평등하고 정의로운 새 시대의 창출에 복무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남북관계의 변화와 아울러 남한 기득권 구조의 바탕을 이루던 분단체제가 허물어질 전망이 생겨나는 지금의 시점은 좀더 근본적인 차원의 대학개혁 방향을 설정해나가야 할 적기이기도 하다. 비록 현재의 여론이 이같은 대학의 공공성 진작에 우호적이지 않다 해도, 그리고 그것이 대학개혁에 대한 교육부의 미온적 태도를 불러왔다고 해도, 촛불에 내장된 시민적 요구의 심층에는 사회불평등의 반영이라고 할 서열구조를 혁파하고 대학체제를 개편해야 한다는 열망이 살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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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체적으로 수능 위주 전형비율을 지금보다 높이고 중장기적으로 수능 절대평가 과목을 늘리는 것이 다수안이라고 했지만 김영란 위원장 스스로 유의미한 통계결과가 아니라고 밝힌 바도 있거니와, 실제로 곧이어 발표된 국가교육회의의 최종안은 결국 현행 제도를 유지하면서 수능 반영비율을 높이라는 권고 정도에 그쳤다.
  2. 홍장표 「교육열이 높으면 경제가 발전하는가」, 김상곤 외 『경제학자, 교육혁신을 말하다』, 창비 2011, 33~35면.
  3. 김종엽 「분단체제와 사립대학」,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106~107면.
  4. 이하 분단체제론 및 이중과제론은 백낙청의 선구적인 제기(가령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 이래 여러 논자들에 의해 발전해온 담론으로, 최근 상황과 관련된 논의로는 백낙청 외 『변화의 시대를 공부하다: 분단체제론과 변혁적 중도주의』(창비 2018)가 있다.
  5. 김정인 『대학과 권력: 한국 대학 100년의 역사』, 휴머니스트 2018, 144~48면.
  6. 김종영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돌베개 2015.
  7. 같은 책 134~69면.
  8. 한국 학계와 분단체제의 관계에 대한 간명한 정리는 임형택 「분단체제하의 한국에서 학문하기」,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창비 2014, 436~59면.
  9. 채창균·조희경 「한국의 사회정책 주요지표 분석: OECD 사회지표를 중심으로」(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17.5)를 보면, 한국은 사회적 평등 정도를 알려주는 형평성지표에서 35개국 중 30위로 최하위권이다.
  10.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장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 2014, 366~68면.
  11. Simon Marginson, The Dream Is Over: The Crisis of Clark Kerr’s California Idea of Higher Education, Univ. of California Press 2016.
  12. 이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도 있다. 호주 출신의 교육학자 마긴슨은 한국의 경우 “고등교육이 서열화되고 사유화되어 있지만 사회적 평등 혹은 유동성을 유럽이나 미국만큼 막지는 않고 있다”고 하면서 가족의 교육열이나 불평등 경쟁에 대한 국가의 보상제도 등을 이유로 든다. Simon Marginson, “Higher Education, Economic Inequality and Social Mobility: Implications for Emerging East Asia,” International Educational Development. xxx. (2016), 6면. 그러나 이는 한국사회가 고도성장 국면을 지나 저성장 및 출산율 저하 등 새 국면을 맞고 있음을 간과한다.
  13. 더 자세한 논의는 졸고 「현정부 대학정책, 제대로 가고 있는가: 고등교육의 공공성과 경쟁력 사이에서」 『안과밖: 영미문학연구』 2018년 상반기 129~35면.
  14. F. R. Leavis, “The Idea of a University,” Education and the University, Cambridge UP 1943, 24면.
  15. Jacques Derrida, “Mochlos, or The Conflict of Faculties,” Eyes of the University, tr. Jan Plug & others, Stanford UP 2004, 108~10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