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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어빙 고프먼 『수용소』, 문학과지성사 2018

‘감금된 자들’의 사회를 들여다보다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jykim@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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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의 『수용소: 정신병 환자와 그 외 재소자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에세이』(Asylums, 초판 1961, 심보선 옮김)가 가진 지성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는 같은 해에 출간된, 학문적으로 운이 더 좋았던 저서와 대조해보는 일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미셸 푸꼬(Michel Foucault)의 『광기의 역사』가 그것이다. 사실 두 저서는 연구대상이 거의 겹치며, 그것이 수행한 사회적 기능 면에서도 별 차이가 없다. 『광기의 역사』가 정신병의 담론적 구성과정을 해명한다면, 『수용소』는 기관으로서의 정신병원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둘 다 사회현상으로서 정신병에 초점을 두었으며, 1960년대에 시작된 반정신의학 운동 및 탈시설화(de-institutionalization) 운동을 배경에 깔고 있다. 두 저서는 모두 이런 운동에 자극을 받은 동시에 그것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논의수준에서도 『수용소』는 『광기의 역사』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몇가지 면에서 더 뛰어난 저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저서는 서로를 상당 정도 보완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동일선상에 놓고 함께 논의되는 일이 드물었다.

그 이유는 두 학자가 각기 속한 철학과 사회학 사이의 학문적 거리 때문만은 아니고, 방법론이나 문체의 확연한 차이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푸꼬가 근대 이성의 출현이 광기가 지식의 대상이 되고 그에 따라 정신병원이 설립되는 과정과 동근원적임을 위로부터(top down) 그려낸다면, 고프먼은 그렇게 설립된 하나의 시설로서의 정신병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1장), 환자는 어떻게 재소자가 되고(2장), 직원(staff)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본질은 무엇인지(4장), 병동 안에서 이뤄지는 “이차적 적응”과 “지하 생활”(underlife)은 어떠한지(3장)를 밑으로부터(bottom up) 분석한다. 둘은 모두 뒤따르기 어려운 길을 갔지만, 그 방향은 이렇게 사뭇 달랐다.

문체와 관련해서는 ‘산문의 말라르메’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 푸꼬의 경우는 널리 알려진 바이니 고프먼의 경우만 잠깐 들여다보자. 그는 가장 핵심적인 주장을 책 앞머리에 다음과 같이 심드렁하게 던진다.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사회적 질서는 다음과 같다. 개인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공통의 참여자들과, 서로 다른 권위 아래, 전반적인 합리적 계획 없이 자고, 놀고, 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생활의 세 영역을 분리시키는 경계의 붕괴, 이것이 총체적 기관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18면) 얼핏 보기에 표준적이고 건조한 사회학적 문장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근대사회의 기본 질서를 단언하고 그 핵심을 요약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문장을 곱씹어보면, 자고 놀고 일하는 것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 자아가 이런 영역을 횡단한다는 것, 그 영역과 영역의 틈새와 횡단이야말로 인간 자유의 미묘한 존립근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점은 분리가 붕괴될 때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해보면 금세 알아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단일한 권위에 기초한 기관이 한 개인의 삶을 남김없이 쓸어 담을 수 있게 되거니와,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정신병원, 감옥, 수용소의 본질적 양태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총체적(total)이라고 묘사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성비판이라는 철학적 과제를 역사적 문헌들을 통해 수행하고자 한 푸꼬의 매력에 이끌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확실히 광기라는 소재를 폭넓은 철학적 문제의식 전반으로 확산해가는 푸꼬의 시도에는 놀라운 바가 있다. 하지만 고프먼의 작업에도 그 못지않은 확산력이 있다. 푸꼬는 『광기의 역사』의 문제의식을 점차 병원(『임상의학의 탄생』)과 감옥(『감시와 처벌』)에 대한 연구로 확장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감벤(G. Agamben)은 푸꼬가 “사람들이 의당 그렇게 해야 했으리라고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진정 근대의 생명정치의 전형적인 장소라고 생각되는 20세기의 대규모 전체주의 국가들의 정치학으로 연구영역을 옮겨가지는 않았”고, “병원과 감옥에서의 ‘대감금’의 재구성에서 시작된 그의 연구는 수용소에 대한 분석으로 귀결되지 않았다”(『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236면)고 지적한다. 이에 비해 고프먼은 『수용소』를 통해서 정신병원, 감옥, 그리고 수용소를 아우를 수 있는 분석틀을 단번에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다분히 민속지적으로 보이는 『수용소』는 실상 근대사회의 새로운 경향에 대한 일반적 분석으로 곧장 상승해간다고 하겠다. 철학적 함의는 푸꼬보다 절제되어 있지만, 일반화를 향한 모색의 발걸음은 푸꼬보다 한결 가볍고 날렵한 셈인데, 그것을 보여주는 핵심 개념이 앞서 인용한 문장에 등장하는 총체적 기관이다.

관련해서 이 책에 제시된 “total institution”을 어떻게 옮기는 것이 좋을지 생각을 보태볼까 한다. 사실 역자가 그랬듯 그것을 ‘총체적 기관’으로 옮기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저서가 집필되던 시대 분위기나 고프먼이 인용하는 문헌들에 비추어볼 때(고프먼은 나치 수용소를 연구한 여러 문헌들이나 『맨추리언 캔디데이트』〔1959〕 같은 소설로 유명해진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에 의한 미군포로 세뇌작업에 대한 사회적 신화 등을 여러번 인용한다), ‘전체주의적 기관’으로 옮기는 것이 그 의미를 더 잘 전달하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옮길 경우 total과 totalitarian의 구별이 흐려지는 면이 있다. “전체주의를 연구해온 학자”(364면)로 체스와프 미워시(Czesław Miłosz)를 인용할 만큼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표현에 익숙했던 고프먼이 굳이 total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던 의도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수용소』는 연구비 제공자 및 연구대상 편에서 행사하는 일정한 ‘검열’ 아래서 쓰인 저술이다. 그의 연구를 지원한 메릴랜드주 국립정신건강연구소는 연구물 출판에 대한 허가권한을 가졌고, 조사가 이뤄진 워싱턴D.C. 소재 성 엘리자베스병원은 출판물에 대한 논평권한을 가졌다(서문 참조). 이런 검열의 그림자는 정신병원의 ‘지하 생활’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느껴진다. “일부 젊은 여성들(환자들—인용자 보충)은 1달러 미만의 가격에 성매매 행위를 하는 것 같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또한 병원 내에 마약 시장이 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307면, 강조는 인용자). 이런 세세한 부분이 그러하니 하물며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쓰인 이 저술이 미국 내 정신병원이나 교도소를 ‘전체주의’ 기관이라고 서술하는 것이 아무 부담 없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역어를 ‘총체적 기관’으로 하더라도 고프먼의 문제의식을 전체주의와의 상관성 아래 조명하면, 최신의 전체주의론이라 할 만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의 대조점도 형성된다. 아감벤은 근대 생명정치가 시민적인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함으로써 작동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환원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분석하고 있지 않다. 생명정치적 권력이 수용소 안에서 범례적으로 작동할 때에도, 수용소 담장을 넘어서 사회적 상례로 확산될 때에도 일상적인 삶의 형식들은 존속한다. 그러므로 벌거벗은 생명은 그 일상적 삶의 형식을 ‘벌거벗기는’ 과정, 굴욕적인 박탈 과정 없이 등장할 수 없다. 아감벤에게 결핍된 바로 그 박탈 과정과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을 고프먼은 『수용소』 제1장에서 선명하게 제시한다.

쁘리모 레비(Primo Levi)는 『이것이 인간인가』의 한 장인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에서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성화”한 존재로 ‘무젤만’(Muselmann)이라 명명된 수감자들에 대해 말한다. 그(무젤만)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뼈만 앙상한 한 남자의 이미지이다. 그의 얼굴과 눈에서는 생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136면)고 묘사된다. 그리고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에서 그를 벌거벗은 생명의 전형적 형상으로 부각했다. 하지만 아감벤식 접근으로는 레비가 그 앞의 장 ‘선과 악의 차안에서’에서 주제로 삼은 수용소 내부의 교환경제를 다룰 수 없다. 어떤 생명정치적 환원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재창출되는 삶의 형식들을 다룰 수 있는 것은 고프먼의 “2차 적응”이나 “지하 생활”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다. 그래서 아감벤에 따르면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음울한 공모 속에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고프먼의 다음과 같은 말을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강압적인 총체적 기관의 지하 생활에 대한 연구는 특별한 연구 관심을 유발한다. 우리는 존재가 뼈만 남은 것처럼 위축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찌우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34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