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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2018

‘오줌권’의 휴머니즘

 

 

황지성 黃志成

여성학, 장애학 연구자 livetdan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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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실격당한 자들’이 인권과 사회정의를 요구할 때, 많은 경우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외침을 함께 듣게 된다. 그러나 이때 등장하는 ‘인간’이 무엇인지 늘 의구심이 든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주장할 때 우리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농성장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하고, 자식이 다닐 수 있는 특수학교를 설립해달라고 울며 무릎 꿇은 장애아 부모들에게 “쇼하지 마”(47면)라는 폭력적인 말로 응수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사고와 행동이라면,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말이 실현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골형성부전증을 평생 안고 살아온 장애인 김원영 변호사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근대의 대표적 비정상이자 비인간으로 위치 지어진 장애인‘도’ ‘인간’이라고 변론하는 탁월한 저술이다. 굳이 변호사의 전문적 변론이 아니더라도 현재 국내외 법과 사회 담론은 이미 장애인이 당연하게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받아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장애에 대한 사회제도와 인식이 이만큼 변화한 것은 죽음을 불사한 장애인들의 투쟁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은 강고한 권력관계와 경계들이 존재한다. 단시간에 법과 제도가 아무리 변화한들 수십년 수백년 쌓여온 경계와 규범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반복 수행되고 퇴적되어왔으며, 우리 중 누구도(장애인 당사자들조차) 그 규범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책의 미덕이자 저자의 ‘우아함’이 돋보이는 점은 무엇보다 그의 변론이 이 규범 안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법적 논리의 테두리를 넘어 법 자체를 포위하는 규범과 경계에 대한 질문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이를 위해 수치심, 성찰성, 자기수용 등 인간의 심리적·정서적 문제에 대한 세심한 고찰에서부터 문학과 예술 비평, 그리고 저자가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들의 해학적인 삽화까지 더해진다. 저자는 헌법의 기본가치인 ‘이동과 신체의 자유’라는 추상적 개념을 ‘오줌 쌀 권리’(오줌권)로 구체화하면서 장애인들의 신체적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는 현실의 단면을 절묘하게 드러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신체의 자유에 관한 권리가 어찌하여 “오줌권”으로 번역되었을까. 7장 ‘권리를 발명하다’에서는 이 ‘오줌권’을 설명하기 위해 한국 장애인운동 역사를 조망하는 것은 물론 헌법 법리 해석, 그리고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까지 종횡무진 넘나든다.

80년대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운동에 목숨을 바친 많은 열사의 이름은 아직까지 추모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70년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노동자 전태일이 있다. 그러나 머리핀, 액세서리 등을 만들어 팔면서 살아보려 애썼지만,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고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서울의 거리를 끝내 견디지 못해 “서울 거리 턱을 없애주시오”(210면)라는 말을 남긴 채 1984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휠체어 사용 지체장애인 김순석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람들의 차별적 시선 등은 견딜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 화장실 가서 용변도 볼 수 없는 모멸감과 좌절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던 그와 대부분 장애인들의 현실은 재현될 수 없고 그래서 비장애인들의 상식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김순석의 죽음은 이후 한국 장애인이동권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그의 절규대로 오늘날 거리의 턱은 비교적 낮아졌다. 그러나 장애인들의 ‘오줌권’에 대해 여전히 이 사회는 제대로 된 인식과 이를 개선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지적대로 애도되지도 못하는 죽음, 특정 인간들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무감각이야말로 해당 주체들을 비인간화한다.

오늘도 장애인들은 지치지 않고 이동과 신체의 자유를 권리로서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이 권리가 권리로 인식되도록 투쟁해야 하는 집단은 비단 장애인만이 아니다. 저자가 이동과 신체의 자유를 권리로 넓혀나가는 과정의 투쟁주체로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인간에서 ‘실격당한’ 다른 주체들을 우리는 무수히 떠올릴 수 있다. 여성들은 예전부터 안전하게 밤길을 이동할 권리를 주장해왔다. 트랜스젠더 등 젠더 비순응자들은 젠더에 대한 강고한 사회적 관리와 규제로 인해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오줌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한다. 최근 제주 난민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미개’하다고 여겨지는 인종·민족 집단들에게 살기 위한 최후 수단인 국경 간의 이동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너무나 당연시되고 자연화된 ‘인간’이라는 개념이 실은 굉장히 정치적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인간에서 실격당한다는 것은 몸으로 사는 실존을 부정당함을 의미한다. 이동과 접근성의 역사는 다양한 몸들을 제한하고 규제해온 역사다. 이와 연관해 저자는 성차별, 인종차별, 장애인차별을 비교해 각각이 서로 다른 층위라고 변론하지만(236~37면), 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흑인의 공공장소 접근에 대한 명시적 차별이 사라졌다고 해도, 흑인성 자체로 그들은 여전히 신체와 이동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당하는 경우가 무수하다. 최근 벌어졌던 ‘흑인 삶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또한 그런 배경이 깔려 있다.

누군가의 몸이 이동과 접근을 제약받는다는 것은 반대급부로 어떤 특정한 몸들은 무제한의 자유와 안전, 권리를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식으로 서구/백인/자유인(중산층)/비장애/이성애자/남성의 몸만을 ‘자연적’인 몸, 보편적 ’인간’으로 성립해온 유구한 역사, 그 강고한 ‘보편성’의 물질성에 우리는 온통 둘러싸여 있다. 그렇기에 몸으로 사는 대부분의 우리는 몸의 취약성에 매일 매순간 노출되어야 한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이 백혈병 산재 피해로 목숨을 잃었고, 살인적 정리해고에 허다한 비정규 노동자들이 투쟁하다 죽어갔으며, 직장과 가정에서 만연한 젠더 기반 폭력(혹은 폭력의 가능성)으로 수많은 여성이 희생당하거나 잠재적 위험에 두려워하고 있고, 성적 지향 및 성별정체성 때문에 학교와 집으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청소년들이 많은 경우 자살을 선택하고, ‘제3세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신변 자체의 위협과 갖은 폭력으로 죽거나 신체적 고통을 당하곤 한다.

저자는 이러한 몸의 취약성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고자 하는 저항의 실천으로, 그러한 취약성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드러낼 것을, 곧 취약성을 안고 사는 삶 고유의 서사를 작성할 것을 제안한다. 완전히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와 타자의 취약성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정치화되고 서로 연결되며 타자의 고통 앞에서 (비록 그것을 완전히 알 수는 없을지라도) 겸손해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저항의 실천은 취약한 우리가 ‘인간’임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지평을 넓히는 동시에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인간화의 폭력성을 폭로하면서 ‘인간’ 되기를 거부하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